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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미국과 한국의 경기 사이클이 뒤바뀐 이유(강추)

(이미 회복 국면으로 들어가는 미국과 달리 여전히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적은 글입니다. 추천 드립니다^^)


3년째 슬럼프에 빠져 있는 미국경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미국경제를 수렁에 빠트린 원흉인 제조업 부문에 주문이 늘어나고, 투자 마인드가 회복되고 있다. 자산시장의 거품이 완전히 꺼졌는지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지만, 연방정부와 중앙은행(FRB)이 취한 대대적인 경기부양조치의 효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경제는 지난 2/4분기에 3.1% 성장을 기록, 1/4분기의 1.4%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 증권시장은 이라크전쟁이 시작된 직후부터 폭등, 이른바 ‘황소장세(Bull Market)’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유럽경기도 자신감을 회복하고, 15년 가까이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도 경기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과거의 패턴을 보면 선진국 경기가 좋아지면, 정보기술(IT) 분야가 밀집한 한국경제가 먼저 신호를 받아 회복했다. 선진국 기업들이 수요확대에 대비, 국제경쟁력이 높은 한국에 원자재 주문을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경제가 세계경제의 선행지수 역할을 했다. 그만큼 선진국 경제의 흐름이 한국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한국경제가 97~98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며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회복한 것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미국경제가 활황을 지속했기 때문에 원화약세로 활용해 수출을 늘릴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런데 선진국 경제가 회복의 조짐을 보이는 지금, 한국경제는 세계경제의 선행지수 역할은커녕 경기침체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현장 목소리를 들어보면, 지금 경기가 외환위기때보다 더 나쁘다고 울상이다. 그동안 정부는 선진국 경제가 좋지 않기 때문에 한국경제도 동반 하락했다며 불황의 탓을 외부로 돌렸다. 하지만 세계경기가 전환하는 시점에 한국 정부가 이번 글로벌 불황을 잘못 진단하고 소극적인 처방책을 내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경제가 회복의 신호를 보내는 시기에 뉴욕 금융가에선 한국경제에 위기를 예고하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8월초 뉴욕 소재 경기분석기관인 경기사이클연구소(ECRI)는 한국경제가 연초부터 경기침체에 진입했다고 선언하고, 이번 침체는 오일쇼크와 10?6 사태 직후인 79~80년, 외환위기때인 97~98년의 침체만큼 심각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연구소는 이번 경기침체에 세계경제 둔화, 이라크전쟁 등의 외부적 요인보다 개인파산 증가 등 국내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ECRI는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 경제가 하반기에 회복될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의 경기침체는 가계부채, 투자위축, 금융시장의 왜곡이 해소되지 않는 한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 사람들이 피부적으로 이번 경기가 IMF때보다 더 악화됐다고 말하는 것을 미국 연구소가 입증한 셈이다.

미국 3위 시중은행인 웰스파고 은행의 한국계 부행장 손성원 씨도 8월초 뉴욕에서 열린 주미 한국상공회의소(KOCHAM) 간담회에 참석,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올해 북한 핵 위협과 내수위축으로 2.5%에 그치며, 교역조건이 악화되면서 내년에 수입요인이 많아 경상수지적자를 낼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손 부행장은 노조문제와 북한 등 두 가지 요인이 한국경제의 복병으로, 외국인들의 직접투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경제가 호전되면 한국의 수출이 증가하겠지만, 한국은 수출이 아닌 내수에서 성장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글로벌 불황을 겪으면서 선진국과 한국의 경기 사이클이 다르게 나타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공식 경기진단기관인 전미경제조사국(NBER)에 따르면 미국경제는 2001년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간 침체를 겪은 후 느리지만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이에 비해 한국은 미국이 경기침체를 겪는 기간에 6%의 성장률을 유지했지만, 미국이 회복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침체를 맞았다. 한국은 선진국 경제의 선행지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미국의 침체 사이클이 지나간 2년 후에 침체를 맞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사이클이 다른 이유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맞아 처방이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은 2001년에 과감하게 금리를 인하했고, 2002년에는 재정에 의한 대규모 경기부양 정책을 취했다. 올 들어선 달러 강세정책을 포기하고 시장에 맡김으로써 달러 약세를 유도,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높였다. 미국은 연방정부와 중앙은행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경기부양 정책을 채택했고, 그 효력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개인소비 확대라는 소모적인 정책을 선택했다. 김대중 정부 막바지에 크레딧 카드 시장에 대한 규제를 풀어 소비를 진작시킴으로써 한국경제는 2002년에 무려 6%의 성장을 기록했다. 크레딧 시장은 1~2년 후에 벌 소득을 미리 까먹으며 소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젊은이들이 10여 장의 카드를 들고 흥청망청 쓰도록 방치한 덕분에 2001~2002년 세계적인 경기침체기에도 한국경제는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며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그 역효과는 올해 나타났다. 크레딧 카드 부실이 커지고, 은행들이 신용대출 한도를 줄이면서 소비가 급감했고,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내수부진에 의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경기둔화의 원인을 미국경제 부진의 탓으로 돌리고 선진국 경기가 살아나면 동반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경기부양에 소극적이었다. 정부는 경제구조를 왜곡시킨다며 세제지원에 소극적이었고, 한국은행은 부동산 시장을 이유로 적극적인 금융완화 정책을 꺼렸다. 선제적 부양조치가 적은 재원으로 큰 효과를 보는 것이 경제법칙인데, 실물경제가 꺾어진 다음에 미온적인 부양정책을 사용한 결과로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다. 그로 인해 한국은 세계경제가 선순환으로 돌아서는 시점에 도약의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경제 회복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시장금리가 올라간다는 점이다. FRB가 지난 6월말 단기금리를 1%로 떨어뜨린 다음날부터 뉴욕 금융시장에서 채권금리가 급등했다. 한때 3.07%까지 하락했던 10년 만기 국채(TB) 수익률은 4.6%까지 치솟아 한 달 반 사이에 무려 1.5% 포인트 가량 급상승했다. 이에 따라 국채 수익률과 연동해서 움직이는 주택금융(모기지) 금리도 동반상승하고 있다.
둘째, 미국 자산시장의 거품과 전세계 제조업 부문의 과잉설비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뉴욕 증시의 주가가 지난 3년 사이에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주가수익률(PER) 개념으로 보면 아직 2000년 초의 거품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기업수익이 떨어진 점을 감안하면 주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채권시장에 새로운 거품이 형성됐다가 꺼지고 있고, 부동산 시장의 과열도 조정이 필요하다.
또 이라크 전쟁이 끝났지만 국제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한반도를 비롯해 세계 도처에서 지정학적 문제가 언제 돌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최근 몇 달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선진국 거시지표의 회복세는 일시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기 회복국면에 나타나는 원자재 가격 상승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종수요’ 확대에 따른 회복을 예측하기엔 아직 이르다.
선진국 경제가 회복의 신호를 보인다고 해서 한국경제가 개선될 것이라는 성급한 낙관론은 금물이다. 선진국 경제가 아직도 단단한 기반 위에 서 있지 않고, 한국경제는 수출보다 내수기반이 크기 때문에 정부차원의 추가적인 경기진작책이 필요하고, 민간경제 주체차원에서는 소비와 투자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김인영 서울경제신문 뉴욕특파원]
(inkim@korea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