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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오락가락 정책’ ‘기업 투자부진’ ‘소비침체’ 경제전문가 30人 ‘재신임’경제 긴급진단

글 이재광 전문위원 (imi@joongang.co.kr)



벼랑끝에 선 경제.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작금의 한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거나 ‘위기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코노미스트가 긴급 인터뷰한 경제전문가 30명 중 17명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60%에 이르는 수치다. 나머지 대부분도 “지금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달 뿐 “이대로 가다가는 위기”라고 본다. “괜찮다”거나 “곧 좋아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은 고작 2~3명에 불과하다.

몇몇 전문가들은 “위기 중에서도 아주 심각한 위기”로 규정한다.

홍승기 동국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재정·금융·조세 등 온갖 정책을 써도 먹히지가 않고 오히려 부작용만 생긴다”고 평가했다. “경제 부문에서 경제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 어떤 정책도 먹히지 않는 상황, 그것이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현 상황을 “아주 심각한 위기”로 규정한 김용렬 산업연구원 기업정책실장은 “정책이 불투명하고 소비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환율이 급변하고 있다”며 총체적 어려움에 휩싸여 있다고 진단했다.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현 상황을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위기”라고 규정한다. 경쟁력·신뢰·미래가 모두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것을 위기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이니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중증 위기다. 박상용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본식 장기불황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비관론을 내놓기도 했다.

몇몇 전문가들은 굳이 ‘위기’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한다. “개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아직 위기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매우 어렵고 탈출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장기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은 “위기에 가깝다”는 표현을 썼다. “자본이 빠져나가고 근로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봤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으로 규정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민간 소비를 지나치게 부추겼다”는 것이다. “미래의 경제성장률을 너무 앞당겨 썼다”는 진단이다.

지금이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는 분석도 나왔다. 지금이라도 잘하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겠지만 자칫 헤어나오기 어려운 상황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이 대표적이다. 유위원은 현 시점을 “장기침체로 가느냐 안 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평가했다. “세계 경제가 회복되는 이때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분석한 뒤 “반면 한국은 나라 전체가 갈등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김효성 대한상의 상근 부회장 역시 현 시점의 경제를 우려하고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이 상태로 4~5년 가면 위기에 빠질 것”으로 내다봤다.

소수이기는 해도 현 시점을 그다지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경제동향실장은 “경제 기반 전체를 위협받을 만한 상황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일단 외환위기 가능성은 없고 카드사 문제도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광선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도 마찬가지다. 현 상황을 “소비가 잘 안 되고 투자가 부진하기는 하지만 취약국면은 지났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보는 한국 경제 전망도 그다지 밝지가 않다. 30명의 전문가 중 19명이 앞으로의 경제를 비관적으로 내다봤다. “이대로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중 일부는 “세계 경제 회복에 따라 단기 반등은 가능해도 장기적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성장동력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중 일부는 “지금보다도 더 나빠질 것”이라는 심각한 전망을 내놓았다.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아주 비관적이다. “경제 성장을 위한 투자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투자-소비-신용불량자 양산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악순환 상황이어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데다 위기를 빠져나가게 할 만한 리더십이 없다”며 비관론을 폈다. 강교수의 말대로라면 한국 경제는 침몰의 길을 벗어나기가 어려워 보인다.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성장을 장기적으로 끌어갈 만한 동력이 없다”고 말했으며, 김영용 전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아예 “희망이 없다”는 표현을 썼다. 유장희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조성하 전경련 상무 등은 “더 나아질 이유가 없다”며 한국 경제의 미래에 부정적이었다.
도대체 한국 경제를 왜 이렇게 어둡게 보고 있는 걸까.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사실 현 한국 경제를 긍정적으로 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자가 줄고 구직 포기자는 늘고 청년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실의에 빠져 있다. 거기에 중하류층은 어마어마한 가계부채에 시달리고 있으며, 강남 아파트값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 다른 지역 거주자들의 근로의욕을 앗아가고 있다. 경기를 살리겠다며 실시하고 있는 저금리 역시 문젯거리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이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문제의 증후로 나오는 것이야 십여 가지 되겠지만 궁극적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정부정책·투자부진, 그리고 소비부진이 경제를 가로막는 ‘3대 악재’다. 오락가락 정부, 갈 곳 없는 돈, 쓸 돈 없는 서민 계층. 벼랑끝에 선 한국 경제의 모습이다.

이 악재들은 서로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지난 정부 때 위기극복·경기회복을 위해 추진했던 정책이 비정규직 확대·저금리·카드규제 완화였다.이들이 결국 현재의 가계부채와 신용불량을 불러왔고, 결국 생활이 어려워진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비가 없는데 투자가 있을 리 없고, 투자를 않는 기업은 결국 구조조정을 실시함으로써 서민생활이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이다.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는 역할을 해야 할 주체가 당연히 정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의 역할이 긍정적이지 않다고 본다.

친노동인 듯하다 반노동으로 왔다 갔다 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분배를 강조하다 느닷없이 2만 달러 시대를 외치는 성장주의 정부이기도 하다. 부동산을 잡겠다며 내놓은 10여 차례의 정책은 오히려 아파트값 상승을 부추겼을 뿐이다. 기업은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치는 정부에 신뢰를 주지 않는다. 투자는커녕 있는 시설도 외국으로 빠져나갈 참이다.최근의 ‘재신임 정국’도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국론을 모아 머리를 맞대도 풀어나갈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고 불필요한 곳에 국력을 쓰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이번 재신임 발표에 대해 “대통령이 분열을 조장하는 진원지”라고 쓴소리를 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 평가는 “불확실성을 높이는 등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윤건영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나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하는데 거꾸로 갔다”고 평가했다. 이재웅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신임 정국은 경제 시계를 멈추게 한다”며 “후진국에서나 쓰는 방식”으로 폄하했다.홍승기 동국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정치 혼란이 가중돼 경제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으로,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기업활동이 위축될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