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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싱가포르가 프라이빗 뱅킹 부문에서 스위스와 경쟁할 수 있을까. 싱가포르는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EU 관료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스위스는 세계 최대 프라이빗 뱅킹 중심지로 1조2,000억 달러의 역외자산(스위스 국민이 아닌 다른 나라 고객이 예치한 자산)을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스위스는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준 기둥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조세피난처라는 지위가 바로 그것이다. 스위스는 지난 6월 자국 은행에 예치한 유럽연합(EU) 회원국 고객들의 이자 소득세를 2005년부터 고객들의 본국으로 송금하는 데 합의했다.

세율은 15%에서 시작해 2011년 35%까지 오르게 된다. EU에 가입하지 않은 유럽 내 다른 조세피난처들도 EU의 이른바 ‘저축세 지침(Savings Tax Directive)’을 따르고 있다. 한 마디로 EU 회원국 고객들이 보유하고 있는 역외자산 2조 달러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유럽의 부자들이 스위스 말고 다른 조세피난처를 물색하고 있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현재 EU 지침에 저촉되지 않는 싱가포르가 가장 유망한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 싱가포르 지점의 아시아 프라이빗 뱅킹 담당 대니얼 트뤼시(Daniel Truchi)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유럽 지역으로부터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결국 싱가포르로 자금이 유입될 것이다.”
싱가포르는 유입자금에 대해 비과세 복리를 지급할 수 있다. 대신 일자리?늘고 프라이빗 뱅킹 중심지로서 위상은 높아질 것이다.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역외금융센터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현재 싱가포르의 역외자산은 1,200억 달러로 추정된다. 스위스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동남아 화교들의 돈이다. EU 회원국 국민들이 예치한 자산은 5%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향후 성장가능성은 매우 크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 싱가포르 지사의 금융 컨설턴트 로먼 스콧(Roman Scott)은 “스위스에 예치된 역외자산 2조 달러 가운데 적어도 10%를 끌어올 수 있지만 30% 이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런 발언은 싱가포르 통화청(중앙은행)을 들뜨게 만들고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은 지난 5년 동안 자국을 금융 중심지로 열심히 홍보해왔다.

관리들을 유럽으로 파견해 현지 프라이빗 뱅킹 전문가들에게 싱가포르의 매력에 대해 널리 알리는 데 힘쓰기도 했다. 금융 서비스업체 크레디 스위스의 동남아 프라이빗 뱅킹 담당 디디에 폰 대니켄(Didier von Daeniken)은 싱가포르 정부가 “다른 역외센터들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 자국 역외센터 발전을 위한 대규모 청사진까지 만들었다”고 전했다.

경쟁도 제한돼 있다. 테러 감시활동이 강화되면서 중동 ·카리브해 ·남태평양 지역 소재 조세피난처가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다. 홍콩 ·싱가포르는 아직 무사하다. 하지만 홍콩의 경우 ‘주권 리스크’를 안고 있다. 본토 중국이 홍콩 내정에 점차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안정적인 독립 국가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깨끗한 환경과 효율성으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최근 사스와 다른 경제 문제들로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새 사업 출범에 별 지장은 없다.

대형 금융기관들도 사업을 확장해왔다. 크레디 스위스는 싱가포르를 스위스 역외에서 가장 큰 프라이빗 뱅킹 센터로 일궈냈다. 싱가포르 주재 직원만 250명에 이른다. 소시에테 제네랄은 크레디 스위스의 동남아 프라이빗 뱅킹 담당 출신 피에르 배르(Pierre Baer)를 최근 영입했다. 배르에게는 트뤼시 밑에서 유럽 자산을 아시아로 끌어오는 업무가 맡겨졌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지난 5년 동안 싱가포르 지점 프라이빗 뱅킹 전담 직원 수를 60명으로 늘렸다. 싱가포르도 결국 EU와 세금 협정을 맺으라는 압력 아래 놓이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싱가포르에 EU 회원국 자산은 별로 없다. 따라서 EU가 세금 협정을 당장 밀어붙일 명분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