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 및 농업 연구 / 시어도어 슐츠, 아서 루이스
슐츠와 루이스 그리고 한국경제
루이스교수의 이론이 한국경제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전에 뉴욕타임즈의 논설위원 레오나르 실크의 197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에 관한 논평을 소개한다.
"금년도 노벨경제학상이 아서 루이스교수와 시어도 슐츠교수에게 수여된 것은 이 두 사람이 동료경제학자들의 주의의 중점을 인류로 가져가게 한 오력을 치하한 것이며, 또한 인류의 대부분을 아직도 괴롭히고 있는 빈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경제학자들의 기술을 동원하게 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은 경제학을 겉치레의 과학주의로부터 인간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복귀시켰음을 뜻한다. 경제학의 기원은 존로크,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토머스 맬서스와 같은 사회철학가들의 저서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인간복지를 위한 것이다.
그런 저명한 선구자들처럼 금년도 노벨경제학 수상자는 둘 모두 다른 경제학자들의 추상적 모델을 재편성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자기의 모델을 자연과 사회로부터 직접 이끌어 왔다.
슐츠박사는 농업경제학자로 출발해서 2차대전 후 미군의 서독점령군에 봉사했을 때 서독경제의 유래 없는 급속한 재건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공장, 기계, 설비 등 물질적 자본을 구성하는 것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던 때이다. 그러나 유령처럼 남아있는 것은 현대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의 지식과 이것을 재건하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기술이었다. 서독은 재건사업이 끝나지 전전에 이룩했던 생산수준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훨씬 초과하는 수준을 달성하였다. 왜냐하면 인간과 그들의 도서관 및 기술 속에 들어있는 지식이 전시살해가 진행 중인데도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슐츠박사는 인간자본의 개념에 도달했다. 그 자신이 이것을 재발견하였다고 강조하면서 제일 먼저 애덤 스미스가 국가의 모든 주민이 습득한 유용한 능력들을 부국증대에 긴요한 자본의 일부로 대담하게 가산시켰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후에 점차 자본의 개념이 재생산가능한 물질로만 여기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경제학은 물질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자본이란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부분적인 관념에 너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슐츠는 말한다. 그는 자기의 인간자본 및 신지식의 투자관을 전세계 모든 국가에 적용시켰다.
이와 비슷하게 루이스교수도 독창적인 학자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카리비아, 기타 제3세계 국가들의 전진을 위해서 일하는 데 헌신해왔다. 그러나 이른바 '신국제경제질서'의 여러 주창자들과는 달라 그는 빈국의 희망은 부국과의 대립이나 이용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부국들과의 좀더 융화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얼마전 IMF·세계은행 모임에서의 연설에서 "빈국들의 안정에 대한 진정한 위험은 부국들의 불완정이며 이것이 빈국들의 시장과 소득을 망친다"고 그는 말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여러 나라들이 상호융화적인 교역으로 발달을 한다는 희망이 피력된 부분을 루이스교수가 재론하는 것 같다.
일부 회원적인 인사들은 그런 이론이 경제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경제학이란 질서정연하고, 확정적이고, 한정되어 있고, 객관적인 학문이지 인간의 가치관과 감정이 많이 혼합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건조하고 기계적인 경제학은 현상태에 대한 불만을 널리 자아내고 있다.
인간은 노동이며 하나의 상품이라는 단순화된 옛 가상에서 벗어나 경제학자들은 모든 만족과 국가의 남녀노소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좀더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새롭고도 오래된 경제학이며 루이스경과 슐츠박사는 이것으로 다함께 복귀하고자 동료경제학자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와 슐츠는 여러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이 두 사람은 모두 경제성장이 아니라 경제발전의 개념에서 출발하였고, 개발 도상국에서 공업만이 아니라 농업도 중요하며, 농업을 효율화함이 경제발전의 중요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또 현실과 실증적 연구를 중시하였으며 실제로 겪은 경험을 이론구성에 또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을 개선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경제발전의 역사와 경제정책의 실제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저개발과 빈곤의 원인규명에 언제나 앞장섰다. 그들이 제시한 경제정책대안은 정치경제학적이었으며 성실하고 실용적이었다.
한 마디로 한국경제학의 정립에 이 두 사람의 생각보다 더 적합한 이론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틴베르헨이나 뮈르달과 같은 학자들의 이론도 물론 우리경제에 적합한 면이 허다하지만, 루이스와 슐츠의 개발이론과 정책은 더욱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쉽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경제성장을 논할 때 루이스만큼 많이 인용되는 경제학자도 그리 많지 않다. 강단에서 개발경제학을 강의할 때는 루이스모델은 꼭 등장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의 여러 책과 논문은 이미 고전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백인이 지배하는 경제학에서 흑인으로서 백인에게서까지 존경을 받는 흑인은 아마 루이스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루이스모델들은 페이의 작업으로 더욱 정교히 다듬어졌고 개발경제학강의의 몇 시간을 꼭 할애받고 있다.
한국경제의 성장과 발전에루이스모델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초의 구인난에 이르기까지 루이스의 노동무제한공급모델은 꼭 들어맞는 이론이고, 사실 이 모델에 따라 성장·발전되었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물론 원래의 루이스모델은 폐쇄적인 것이고 국내시장에서의 균형성장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우리 경제의 경우에 그만큼 덜 적합한 모델이 되고 있긴 하지만, 공업지역과 농촌간의 노동이동과 이로 인한 공업지역의 성장과정은 이미 여러 학자에 의해 실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개방경제하에서 자본을 외국에서 빌려오고 기술도 외국에서 빌려온 한국의 실례도 기실 루이스모델과 그리 상반된는 것이 아니다. 단 루이스는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자기 모국인 서인도나 자마이카 같은 나라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스의 무역개발가능성에 관한 비판론은 한국의 경우 틀린 생각이었으며, 이 점에서 루이스를 초청하여 우리의 실정을 보여주어 그의 생각이 어떻게 투영되는가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루이스도 사람인데 항상 옳을 수만은 없으리라. 그러나 좀 더 자세히 한국의 수출을 살펴보면 또 그의 생각이 어떤 경제발전도 궁극적으로는 경제내부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인 한, 루이스의 견해에 우리는 오히려 경청하는 바 있어야 하리라 여겨진다.
루이스의 해박한 지식과 투명한 비전은 요즘 계량모델에 얽매여 현실과 동떨어진 작희(作戱)에 여념이 없는 아류경제학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리라 생각된다. 특히 현실을 분석하되 이론은 버리지 않고 역사를 분석하되 통계를 버리지 않는 루이스접근법의 삼위일체적 특징은 우리 경제의 분석과 정책대안의 제시에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경제는 루이스모델을 넘어서 개발단계에 들어섰고(그간 농·공지역 사이의 노동력이전은 러이사혁명 후 강제노동에 의한 것보다 훨씬 높은 4% 이상이었음), 그래서 루이스의 첫째 모델의 적용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루이스의 경제학적 접근방법과 정신은 깊이 우리 경제의 분석과 정책수립에 하나의 큰 빛이 되리라 생각된다.
슐츠와 루이스 그리고 한국경제
루이스교수의 이론이 한국경제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전에 뉴욕타임즈의 논설위원 레오나르 실크의 197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에 관한 논평을 소개한다.
"금년도 노벨경제학상이 아서 루이스교수와 시어도 슐츠교수에게 수여된 것은 이 두 사람이 동료경제학자들의 주의의 중점을 인류로 가져가게 한 오력을 치하한 것이며, 또한 인류의 대부분을 아직도 괴롭히고 있는 빈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경제학자들의 기술을 동원하게 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은 경제학을 겉치레의 과학주의로부터 인간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복귀시켰음을 뜻한다. 경제학의 기원은 존로크,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토머스 맬서스와 같은 사회철학가들의 저서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인간복지를 위한 것이다.
그런 저명한 선구자들처럼 금년도 노벨경제학 수상자는 둘 모두 다른 경제학자들의 추상적 모델을 재편성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자기의 모델을 자연과 사회로부터 직접 이끌어 왔다.
슐츠박사는 농업경제학자로 출발해서 2차대전 후 미군의 서독점령군에 봉사했을 때 서독경제의 유래 없는 급속한 재건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공장, 기계, 설비 등 물질적 자본을 구성하는 것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던 때이다. 그러나 유령처럼 남아있는 것은 현대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의 지식과 이것을 재건하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기술이었다. 서독은 재건사업이 끝나지 전전에 이룩했던 생산수준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훨씬 초과하는 수준을 달성하였다. 왜냐하면 인간과 그들의 도서관 및 기술 속에 들어있는 지식이 전시살해가 진행 중인데도 성장을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슐츠박사는 인간자본의 개념에 도달했다. 그 자신이 이것을 재발견하였다고 강조하면서 제일 먼저 애덤 스미스가 국가의 모든 주민이 습득한 유용한 능력들을 부국증대에 긴요한 자본의 일부로 대담하게 가산시켰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후에 점차 자본의 개념이 재생산가능한 물질로만 여기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경제학은 물질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경제학자들이 자본이란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부분적인 관념에 너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슐츠는 말한다. 그는 자기의 인간자본 및 신지식의 투자관을 전세계 모든 국가에 적용시켰다.
이와 비슷하게 루이스교수도 독창적인 학자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카리비아, 기타 제3세계 국가들의 전진을 위해서 일하는 데 헌신해왔다. 그러나 이른바 '신국제경제질서'의 여러 주창자들과는 달라 그는 빈국의 희망은 부국과의 대립이나 이용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부국들과의 좀더 융화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얼마전 IMF·세계은행 모임에서의 연설에서 "빈국들의 안정에 대한 진정한 위험은 부국들의 불완정이며 이것이 빈국들의 시장과 소득을 망친다"고 그는 말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여러 나라들이 상호융화적인 교역으로 발달을 한다는 희망이 피력된 부분을 루이스교수가 재론하는 것 같다.
일부 회원적인 인사들은 그런 이론이 경제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경제학이란 질서정연하고, 확정적이고, 한정되어 있고, 객관적인 학문이지 인간의 가치관과 감정이 많이 혼합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건조하고 기계적인 경제학은 현상태에 대한 불만을 널리 자아내고 있다.
인간은 노동이며 하나의 상품이라는 단순화된 옛 가상에서 벗어나 경제학자들은 모든 만족과 국가의 남녀노소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좀더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새롭고도 오래된 경제학이며 루이스경과 슐츠박사는 이것으로 다함께 복귀하고자 동료경제학자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와 슐츠는 여러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이 두 사람은 모두 경제성장이 아니라 경제발전의 개념에서 출발하였고, 개발 도상국에서 공업만이 아니라 농업도 중요하며, 농업을 효율화함이 경제발전의 중요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또 현실과 실증적 연구를 중시하였으며 실제로 겪은 경험을 이론구성에 또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을 개선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경제발전의 역사와 경제정책의 실제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저개발과 빈곤의 원인규명에 언제나 앞장섰다. 그들이 제시한 경제정책대안은 정치경제학적이었으며 성실하고 실용적이었다.
한 마디로 한국경제학의 정립에 이 두 사람의 생각보다 더 적합한 이론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틴베르헨이나 뮈르달과 같은 학자들의 이론도 물론 우리경제에 적합한 면이 허다하지만, 루이스와 슐츠의 개발이론과 정책은 더욱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쉽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경제성장을 논할 때 루이스만큼 많이 인용되는 경제학자도 그리 많지 않다. 강단에서 개발경제학을 강의할 때는 루이스모델은 꼭 등장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의 여러 책과 논문은 이미 고전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백인이 지배하는 경제학에서 흑인으로서 백인에게서까지 존경을 받는 흑인은 아마 루이스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루이스모델들은 페이의 작업으로 더욱 정교히 다듬어졌고 개발경제학강의의 몇 시간을 꼭 할애받고 있다.
한국경제의 성장과 발전에루이스모델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초의 구인난에 이르기까지 루이스의 노동무제한공급모델은 꼭 들어맞는 이론이고, 사실 이 모델에 따라 성장·발전되었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물론 원래의 루이스모델은 폐쇄적인 것이고 국내시장에서의 균형성장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우리 경제의 경우에 그만큼 덜 적합한 모델이 되고 있긴 하지만, 공업지역과 농촌간의 노동이동과 이로 인한 공업지역의 성장과정은 이미 여러 학자에 의해 실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개방경제하에서 자본을 외국에서 빌려오고 기술도 외국에서 빌려온 한국의 실례도 기실 루이스모델과 그리 상반된는 것이 아니다. 단 루이스는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자기 모국인 서인도나 자마이카 같은 나라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스의 무역개발가능성에 관한 비판론은 한국의 경우 틀린 생각이었으며, 이 점에서 루이스를 초청하여 우리의 실정을 보여주어 그의 생각이 어떻게 투영되는가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루이스도 사람인데 항상 옳을 수만은 없으리라. 그러나 좀 더 자세히 한국의 수출을 살펴보면 또 그의 생각이 어떤 경제발전도 궁극적으로는 경제내부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인 한, 루이스의 견해에 우리는 오히려 경청하는 바 있어야 하리라 여겨진다.
루이스의 해박한 지식과 투명한 비전은 요즘 계량모델에 얽매여 현실과 동떨어진 작희(作戱)에 여념이 없는 아류경제학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리라 생각된다. 특히 현실을 분석하되 이론은 버리지 않고 역사를 분석하되 통계를 버리지 않는 루이스접근법의 삼위일체적 특징은 우리 경제의 분석과 정책대안의 제시에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경제는 루이스모델을 넘어서 개발단계에 들어섰고(그간 농·공지역 사이의 노동력이전은 러이사혁명 후 강제노동에 의한 것보다 훨씬 높은 4% 이상이었음), 그래서 루이스의 첫째 모델의 적용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루이스의 경제학적 접근방법과 정신은 깊이 우리 경제의 분석과 정책수립에 하나의 큰 빛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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