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제도의 변화와 경제 성장
정 기화(전남대)
목차
1) 머리말
2) 금융 제도와 거래 비용
(1) 금융제도의 역할
(2) 산업화와 금융제도
3) 금융 제도의 변화
(1) 식민지 금융 제도의 유산
(2) 금융 제도의 구축
(3) 성장 금융 제도로의 개편
(4) 금리 현실화와 외자 도입
(5) 중화학 공업화와 국민투자 기금
4) 금융 제도의 변화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5) 맺는말
content
1) introduction
2) banking system and transaction cost
(1) role of banking system
(2) industrial banking system
3) development of banking institution
(1) colonial banking sysyem
(2) new setting of banking system
(3) banking system for develpoment
(4) rate reform and foreign capital borrowing
(5) finacing for heavy and chemical indutry
4) banking system and growth
5) conclusion
요 약
경제성장 과정에서 금융 제도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별 경제주체들의 거래에 필요한 신용을 공급하고, 자금의 중재를 통하여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한다. 이러한 기능은 독립된 중앙 은행과 민간은행의 자율적 운영을 통하여 효율적으로 달성된다.
그런데 한국 금융 제도는 금융 제도가 정부의 개입에 의하여 규제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부 규제의 결과 한국의 금융 산업이 실물 부문의 발전에 비하여 대단히 낙후되어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성장을 위해 적절한 통화 공급과 효율적 자금 중재가 중요한데 정부가 특정 산업 부문에 투자재원의 집중시키기 위하여 부문별 신용의 배분, 용도 및 이자율까지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 은행이 정부에
이러한 정부의 개입은 투자 재원이 부족하고, 금융 정보도 빈약한 상황에서 자금 조달을 위한 위하여 국내외에 적절한 신용을 공급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어 자금 조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부 개입에 의한 부패, 비생산 지대 추구 행위, 부실기업의 발생 등 비효율도 낭비도 있었다. 이러한 비효율은 자금 조달 방식이나 정책의 기조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금융의 개입에 의한 성장에 미친 왜곡 효과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것은 정부의 금융 통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정부 개입에 의한 비효율을 줄이도록 하는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자금의 많은 부문이 정부의 자의적 판단보다 국제 시장에서의 기업의 성과에 의하여 자동 대출되도록 하였다. 둘째, 산업화 초기부터 외자에 의존함으로써 정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었다. 외자의 도입은 경쟁적 국제 금융 시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고려에 의한 자금 배분을 줄이게 하였다. 세째, 정부 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기업의 도덕적 위험에 대하여 강력한 처벌을 하였다. 이것이 기업의 비효율적 자금 사용을 줄였다. 네째, 정부의 자금 배분이 기업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하여 비교적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의 금융 제도는 정부에 의하여 그 발전의 계기가 주어졌으며 산업화 초기에 부족하기 쉬운 신용을 제공함으로써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금융 시장의 형성에 필요한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정착시키는데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자금의 배분에 대한 비효율적 개입은 비효율적 낭비를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비효율적 낭비를 줄여 금융제도가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도록 한 것은 수출과 외국 자본이 가지고 있는 경쟁적 요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summary
The banking institution has developed to help reduce transaction cost and finace for investment. Anf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finacial funds are efficiently allocated by independent central bank and private banks in the fincial market. But in Korea it is common for government to intervene in financial sector. It is believed that financial sector is distoted and financial funds are inefficiently allocated in the period of industrialization. But government sector has contributed to rapid industialization by supplying long term industrial fund. At the same time it has resulted in inefficient allocation of funds. Overall effect of government intervention in financial sector is positively related with growth in Korea by several ways of reducing inefficiency of government intervention.
Fisrt, funds for export-promoting are generally speaking allocated by performace base, which means most of funds are allocated to competitive firms. Second the foreign capital is allocated to efficient projects. Pressure of default has made government allocate funds by economic base. And the lender is usually considering the efficiency of project in the course of borrowung negotiatio. Third, government has severly punished moral hazard of firms which gets government support in borrowing funds. Fourth, when funds are allocated by government, it keeps in touch with firms. It can reduce information problem and reduce inefficiency of intervention.
1) 머리말
경제성장 과정에서 금융 제도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별 경제주체들의 거래에 필요한 신용을 공급하고, 자금의 중재를 통하여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한다. 신용의 공급은 중앙은행의 본원 통화의 공급과 민간 은행의 신용 창조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또한 자금의 중재는 민간 은행과 각종 비은행 금융 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신용의 공급은 실물 경제의 거래에 들어가는 거래 비용을 줄여준다. 특히, 성장하는 경제에 적절한 통화의 부족은 신용의 부족으로 거래를 위축시키다. 실물 경제의 거래 비용은 공급된 통화가 신뢰성과 안정성을 가지고 가지고 있을 때 최소화된다. 신뢰성의 상실은 거래의 교환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통화 가치의 불안정은 경재 주체들로 하여금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활동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따라서 신용의 공급이 실물 경제의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독립된 중앙 은행과 민간은행의 자율적 운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민간이 거래에 필요한 신용의 가치 유지와 안정성이 유지된다.
자금 중재의 경우 자금의 차입자와 대부자 사이에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하여 역 선택(adverse selection)과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이 존재한다. 그것은 차입자와 대부자의 직접적인 금융 거래에는 많은 거래 비용이 필요함을 뜻한다. 이러한 차입자와 대부자간의 금융거래 비용을 줄여, 경제 주체간 자금 대차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금융 제도라 할 수 있다. 금융 산업은 각종 상품과 제도를 개발하여 자금 중재 비용을 줄인다.
한국의 금융 제도도 경제 성장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여 왔다. 그런데 한국 금융 제도는 금융 제도가 정부의 개입에 의하여 규제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부 규제의 결과 한국의 금융 산업이 실물 부문의 발전에 비하여 대단히 낙후되어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성장을 위해 적절한 통화 공급과 효율적 자금 중재가 중요한데 정부가 특정 산업 부문에 투자재원의 집중시키기 위하여 부문별 신용의 배분, 용도 및 이자율까지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정부에 의하여 규제되고 발전되어 온 금융 제도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용 공급이 산업 정책의 수단으로 이용됨에 따라 과다한 통화 공급으로 인플레가 심하게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실물 가격이 급상승하고 경제 주체들로 하여금 자본 이득을 얻기 위한 경제 활동에 지나친 투자를 하도록 하였다. 둘째, 정부의 직접적인 자금 배분으로 자금이 가장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되는 것이 어려웠다. 자금 배정을 받기 위한 비생산적 지대추구행위로 인해 비효율이 발생하였으며,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 자금이 배분되기도 하였다. 또한 낮은 이자율은 자금의 수요자인 기업의 리스크 즉, 차입의 증가에 따른 도산 위험을 줄여 기업의 부채를 증가시켰고, 이들 차입 기업의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으로 부실 기업이 증가하였다. 세째,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금융 기관에 의한 자율적 대출 심사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부실 채권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금융기관간 경쟁의 부족으로 자금 중계 비용이 높았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금융 제도의 발전없이 실물 부문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정책이 비록 경제의 일부에 왜곡을 초래하였지만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저 개발국의 경우 산업화 초기에는 투자 재원도 부족하고, 금융 정보도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금융시장의 조성을 위하여 적절한 신용을 공급하는 것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효율과 효율의 상대적 크기는 경제 발전의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금융 제도의 변화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금융 제도의 변화가 경제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거래 비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II절 에서는 금융 제도와 거래 비용과의 관계를 살펴 본다. 여기에서는 금융 제도의 발전이 거래 비용을 줄여 실물부문의 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III 절에서는 해방후 한국 금융 제도의 변화를 살펴 보았다. 신용 공급과 자금 중개라는 측면에서 금융 제도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살펴보았다. IV절에서는 금융 제도의 발전이 경제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V절에서 논의를 요약하였다.
2) 금융 제도와 거래 비용
(1) 금융제도의 역할
경제 제도란 인류의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꾸준히 발전하여 온 것으로 생산, 소비, 투자 등 경제 활동에 따른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거래는 빈 공간에서 행하여 지는 것이 아니며 교환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재산권 제도(property right), 계약(contract)에 관한 규칙 및 거래 당사자간 위험 부담 방법에 관한 규칙을 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또한 결제 방법, 결제 통화의 공급, 도량형 등이 정해져야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제 거래에 관련된 규칙이 꾸준히 진화하여 제도로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제도는 거래 비용을 줄여서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행한다. 제도가 비효율적이면 거래 과정에서 적용을 기피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도태된다. 많은 상거래 관습은 대부분 거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규칙이다. 즉, 정부가 강제하지 않았음에도 존재하는 상거래 관습은 대부분 거래에 따른 거래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금융 제도 역시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발전하였다. 이것은 교환 수단의 공급을 통한 거래비용의 감소와 자금의 중개에 따른 거래비용의 감소로 구분할 수 있다.
상품의 교환은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거래 당사자간의 적절한 결제 수단을 필요로 한다. 물물교환 경제의 경우 결제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거래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게 된다. 따라서 거래의 확대는 적절한 결제 수단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결제 수단으로서 화폐가 등장한다. 화폐는 신뢰성과 가치의 안정성이 주어져야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신용은 축적하기가 힘들며, 축적에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 이러한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신용의 공급이 금융 제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거래에 필요한 신용의 공급은 중앙 은행에 의한 본원 통화의 공급과 민간 은행에 의한 신용의 공급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신용의 공급은 거래 비용을 줄여 분업을 촉진시키고, 경제 활동이 잘 이루어지게 한다. 그런데 통화의 공급이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통화 가치의 안정과 적절한 통화량의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적절한 통화의 공급은 거래 비용을 줄이지만, 지나친 통화 공급으로 인플레가 나타나면 자원 배분의 비효율이 나타난다. 지나친 통화 공급은 물가 상승을 가져와 시장 거래에 따른 이익을 줄익 때문이다. 그 결과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한 통화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이로 인한 거래의 불확실성이 증대한다. 이로 인한 자금 시장의 혼란은 거래를 위축시키고, 기업의 도산 등을 가져다 준다. 이에 따라 시장 거래가 위축되고 생산 활동이 줄어든다. 또한 인플레로 인한 부의 재분배는 자본 이득(windfall)을 얻기 위한 비생산적 활동에 자원을 배분하게 한다.
자금의 중재 거래는 정보의 불확실성, 외부효과, 규모의 경제 등으로 시장 기구를 통한 자원 배분에 많은 거래 비용이 발생한다. 특히 자금 거래에 있어서 역선택(adverse selection) 문제와 도덕적 태만은 상대적으로 큰 비용을 발생시키며, 이에 따라 이러한 비용을 줄이기 위한 금융 제도와 관행이 발달하게 된다.
역선택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발생하며 거래 비용을 증가시킨다. 예를 들어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차입 기업의 투자 수익성이나 위험도를 파악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면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아 지게 되어, 금융 거래가 위축되거나 상대적으로 투자 수익이 낮은 부문에 자금이 배분되게 된다. 물론 시장에서 기업의 각종 정보를 유통하는 기업이 등장하면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의 유통은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하여 누구나 정보를 얻고자 무임승차하고자 하게 되어, 정보 판매 회사는 이윤을 남기기 어려워 특히 산업화 초기의 경제에서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정부가 정보를 알리거나, 기업 스스로 회계정보를 제공하도록 규제를 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금융 중계자로 은행이 등장하여 레몬을 가리고, 보증서를 붙여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은행의 경우 주로 사적인 대출을 통하여 자금을 운용함으로써 다른 자금 대여자의 무임 승차 문제를 줄이게 된다. 또한 차입자의 보증이나 담보를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금융거래가 이루어진 후에는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이 발생할 수 있다. 즉, 자금의 차입 후 채무 불이행을 유발시킬 수 있는 사업에 투자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대출후 차입자의 활동에 대한 각종 제한을 하게 된다. 그래서 모험(venture) 기업이 등장하여 대출을 한 은행은 투자 기업의 경영에 어느 정도 참여하게 된다. 또한 자금의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 금융 조건상에 각종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자금의 공급자는 자금의 유동성, 안정성, 수익성을 선호한다. 즉, 회수기간이 단기간이고, 위험 부담이 적으며 수익성 높은 상품 선호한다. 이에 비하여 자금의 수요자는 장기에 걸쳐 낮은 차입 금리를 선호한다. 이들의 선호에 알맞는 금융 수단을 마련해주는 것이 다양한 금융 기관의 역할이다. 이러한 자금의 차입자와 대부자간의 금융 중개에 따른 중개 비용은 경쟁적 시장에서 가장 낮은 비용으로 행하게 한다.
(2) 산업화와 금융제도
경제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의 축적이고, 이러한 자본 축적을 통하여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이 조달된다. 산업화 초기에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기업의 내부 자금 축적이 부족하여,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외부에서 조달하게 된다. 그러나 산업화 초기에는 국내 소득이 낮아 가용한 투자 재원도 부족할 뿐 아니라, 산업 자금은 장기 투자로 회수에 따른 위험도 높다. 그런데 금융 시장은 다른 상품 거래와 달리 신용과 정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정보와 신용의 축적은 장기를 요한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에 기업이 시장을 통한 직접 투자 재원을 조달하는 것은 어려운 편이다. 이때 국내 자금 시장을 통하여 장기 산업 자금이 조달되도록 하는데 금융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행한다. 역사적 경험을 보면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적은 비용으로 조달하기 위하여 각국의 금융 제도는 발전한다.
영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장기 투자를 위해 금융 제도를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산업화가 완만하게 잔행되었고, 국내 자본 축적이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산업화에 필요한 장기 자금이 대외 무역과 현대화된 농업의 수익에서 조달될 수 있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는 산업 그 자체에서 조달되었다. 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뒤진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자본이 희소하고 분산되어 있었다. 또한 산업 투자에 대한 위험도 컸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이 산업화를 시작할 단계에는 영국의 산업화 초기보다 더 큰 설비 자금을 필요로 하였다. 경제력을 갖춘 공장의 평균 규모도 상대적으로 커졌고, 산업 분야도 상대적으로 자본 집약도가 높은 분야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여건의 차이로 유럽 대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금융 제도가 등장한다. 이러한 금융 제도를 통하여 산업 자금의 중재가 이루어진다. 프랑스는 새로운 형태의 은행으로 Credit Mobilier 가 등장한다. 이 은행은 상업은행과 달리 장기 산업 자금을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상업 은행의 투자는 정부 발행 채권을 인수하거나 외환의 거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은행은 장기 투자인 철도 건설과 산업 자금 공급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모험적 사업으로 새롭게 나타난 금융 제도였다. 이것은 산업자금의 비중이 높아서 영업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주식시장의 활발한 거래에 의존해야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은행 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기존 은행의 경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산업화가 뒤진 독일에서는 산업 자금의 중개를 위하여 겸업 은행 제도(universal banking)가 등장한다. 이것은 영국의 상업은행뿐 아니라 프랑스의 Credit Mobilier 형태의 은행과도 차이가 있었다. 상업 은행은 단기 자금 조달을 하였고, Credit Mobilier 형태의 은행은 장기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러나 겸업 은행 제도는 상업 은행의 단기자금과 Credit Mobilier형태의 장기투자 자금 조달을 결합한 것이었다. 은행은 기업의 당좌 계정 대출(current account credit)를 통하여 형식적으로는 단기이지만 실제로는 장기인 산업 자금을 공급하였다. 은행은 산업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산업체의 설립부터 파산때까지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를 기업의 투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은행은 감독 위원회(supervisory board) 제도를 통하여 기업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배력은 금융의 영역을 넘어서 경영상의 그리고 기업가적인 의사 결정에 까지 미쳤다. 이러한 제도는 조달된 산업 자금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은 산업화 시기에 독일식의 겸업 은행 제도을 규제하였다. 그래서 영국식의 분업 은행 제도를 통하여 자금을 중개하였고, 따라서 높은 중개 비용으로 인하여 자금 조달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겸업 은행제도에서는 큰 은행이 많은 지점망을 갖추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주식과 부채 등 기업에 대한 각종 채권을 보유하게 된다. 또한 기업 발행 채권의 인수자(insurance underwriter)로서 또는 대출 은행으로서 기업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자금 중재에 따른 정보 비용이 적고 장기 자금의 조달 비용도 낮다 . 그러나 분업 은행 제도처럼 세분화된 금융 제도(financial fragmentation)에서는 상대적으로 산업자금을 조달하는데 드는 비용이 높다. 세분화된 금융 제도는 장기 자금의 조달에 따른 중개 비용이 높아서, 설비 투자에 따른 금융 비용이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업은 자금 조달이 어려운 고정 자본에 투자하기 보다 원자재나 노동에 의존하게 하여 생산 과정이 비효율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용 건물이나 장비는 유동성이 낮아서 금융 제약을 받고 있는 기업에게 바림직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 미국과 같은 세분화된(segmented and fragmentated) 금융 제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경제의 다른 활동보다 산업 자금의 조달을 우선시 하는 금융 제도를 창출하여 사업 자금의 조달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금융 제도는 영미 또는 유럽의 금융 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부의 정책 금융 기관이 기업의 산업 자금의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행하였다. 우편저축을 포함한 저축기관을 통하여 조달된 자금은 정책 금융기관만이 아니라 상업은행과 신용 은행을 통하여 장단기 그리고 위험(risky)한 대출로 기업에 공급되었다. 이자율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기업은 적정 수준 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것은 높은 저축율과 금융 자산의 축적 속에서 국내 자금의 조달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정부의 개입으로 자금의 조달과 배분 과정에 나타날 수 있는 비효율은 많은 지대 추구 행위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민간 부문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였고, 산업 정책을 민간 기업이나 민간이 경영하는 기업에 의존하여 달성함으로써 자금 배분의 비효율을 줄일 수 있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금융제도의 발전은 장기 산업 자금의 공급에 큰 기여를 한다. 이러한 금융제도는 다양한 금융 상품을 공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산업 자금 공급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한다. 이러한 금융 제도를 통하여 낮은 금융중개 비용으로 자금 조달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생산적 부문에 자금이 배분되는 것이다.
3) 금융 제도의 변화
(1) 식민지 금융 제도의 유산
해방과 함께 한국경제는 일본의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근대적 화폐 제도, 은행 조직을 물려 받게 된다. 발권 은행으로서의 조선 은행, 일반 상업 은행 및 저축 은행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적 금융 제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불하여야 하는 초기 설치 비용(installment cost)은 줄었다고 할 수 있다. 신용과 정보를 필요로 하는 금융 제도의 발전에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하에 마련된 금융 제도는 해방후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일제 말기의 전쟁 수행을 위하여 금융 제도가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기간동안 전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통화가 증가하고, 강제 저축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쟁후 통제경제가 풀리면서 강제 저축이 구매력으로 나타나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통화 가치가 폭락하게 된다. 따라서 일제하에 마련된 금융 제도를 통한 신용의 공급과 산업 자금의 공급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다.
식민지 금융 제도는 해방후 급격한 인플레를 유발하여 큰 경제적 비용을 유발하였다. 1936년부터 1944년까지 화폐 발행고는 22배 증가하였고 도매 물가는 2.4 배증가하였다.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과다한 통화를 발행하였지만, 강제 저축 또는 배급 경제로 인하여 증가된 통화가 구매력화되지 못하였다.
<표 6-1> 은행권 발행고, 물가 및 임금지수의 변화(36-47년)
년 도
조선은행권 발행고
소매물가지수1)
임금 지수2)
1936
210,654 (100)
100
100
1937
279,502 (132)
109
120
1938
321,978 (152)
131
131
1939
443,987 (210)
153
140
1940
580,534 (275)
169
146
1941
741,607 (352)
174
168
1942
908,646 (431)
183
183
1943
1,466,777 (696)
202
200
1944
3,135,692 (1,488)
226
224
1945
8,763,341 (3,791)
9,606
2,560
1946
17,710,623 (8,407)
21,619
10,837
1947
33,388,164 (15,849)
76,998
15,801
자료: 조선 경제 통계 요람 (1949년)
주 1) 서울 생필품의 소매물가지수
2) 서울 근로자 평균 임금지수
그러나 해방으로 전후 통제 경제로 억압된 구매력이 실현되면서 물가 및 임금 앙등하였다. <표 6-1참조> 45년 한해 동안 소매 물가는 20배 이상 앙등하였다. 이러한 물가 상승은 46년과 47년에도 계속되어 물가는 매년 2배 이상 증가하였다. 46-47년에 이르러서도 물가 상승이 계속된 것은 주로 양곡 수집을 위한 자금이 재정 적자의 주 요인이었다. 미군정은 해방전 통제 경제하에서 이루어진 식량 배급제도를 페지하고 시장 거래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양곡의 시장 거래로 쌀 값이 폭등하자 양곡 수매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양곡 수매 제도로 인하여 막대한 재정 적자가 발생하였고, 이를 조선은행의 차입으로 메꾸게 된 것이다. 48년 정부 수립후에도 거액의 재정 적자는 계속되었는데 정부는 이를 중앙 은행 차입금으로 충당하였다. < 표 6-2 참조> 조세 수입은 한정되어 있는데 비하여 국방비와 치안 유지비, 정부 관리 기업체의 적자 보전을 위한 보조금 지급, 비능률적인 정부 예산 집행 등으로 재정 수요는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표 6-2> 은행권 발행고, 예금 및 통화량(47-52)
년도
은행권
발행고
민간보유
은행권(1)
민간
당좌예금(2)
정부대행기관
당좌예금(3)
민간
기타예금(4)
정부대행기관
기타예금(5)
통화량
(1+2+3)
통화량
(1+2+3+4+5)
1947
33,388
31,183
6,375
1,268
11,855
2,966
38,826
53,647
1948
43,444
40,632
9,126
3,397
17,653
2,863
53,155
73,671
1949
75,105
70,674
15,139
8,064
28,149
8,591
93,877
130,617
1950
229,248
222,835
14,469
14,813
28,876
9,469
252,117
290,462
1951
557,927
539,258
82,975
27,525
109,821
25,227
649,758
784,806
1952
1,014,429
974,272
213,065
25,928
311,178
39,674
1,213,265
1,564,117
식민지 금융 제도로 인한 경제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금융제도의 변화는 신속히 일어나지 못하였다. 금융기관이 대부분 정부에 의하여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화 관리도 어려웠고, 효율적 경영도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일본인 소유 재산이 정부에 귀속됨으써 정부는 대부분 은행의 실질적 소유자가 되었다. 금융조합 및 금융조합 연합회를 제외한 모든 금융기관의 일본인 소유 주식은 미군정에 귀속되었으며, 정부 수립후에는 정부에 귀속되었다. <표 6-3 참조>
< 표 6-3 > 한국 금융기관의 소유 구조(1948년 12월말 현재)
은 행 명
귀 속 주
타 은행 소유
한인 소유
중국인 소유
조선 은행
식산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저축은행
상호은행
신탁은행
환금은행
26. 2
79. 2
29. 0
5.1
37.2
65.7
26.2
-
20.3
14.1
35.3
41.0
56.5
24.8
64.4
100.0
3.5
6.7
35.6
53.7
6.3
9.5
9.4
-
-
-
-
0.2
-
-
-
-
이로 인하여 조선 은행은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사실상 무제한 통화를 발행하여, 유동성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행은 타 금융기관과 경쟁적으로 일반 은행업무를 취급하여 은행 감독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와 함께 저축 은행이나 신탁회사 등과 같은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기관들도 일반 은행 업무의 취급이 허용되어 단기금융업무를 취급하는 일반 은행화되었다. 결국 해방후 식민지 시대의 금융 제도는 청산되지 못하고 경제 발전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47-53년간 실질적으로 국민소득은 거의 증가하지 아니하였다. <표 6-4 참조>
<표 6-4> 국민소득과 물가(47-53)
(단위: 백만원)
국 민 소 득
전국 소매
물가 지수
금 액
지 수
19471)
4,544
100
100
19481)
6,641
145
158
19492)
8,210
183
197
19503)
22,347
490
532
19514)
55,431
1,219
2,128
19525)
184,067
4,053
5,243
19535)
229,726
5,007
7,618
주: 1. 한은 2. 산은 3. 기획처 4. 재무부 5. 한은 기획처 공동 추계
자료: 한국 산업은행 조사부, 한국산업정책 10년사.
한국의 상공업 백년, 84쪽.
그 결과 첫째, 중앙 은행에 의한 통화의 공급과 화폐 가치의 안정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진행된 급격한 인플레가 금융 거래를 크게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생산의 감소는 남북 분단과 일본인 소유 기업의 경영난 등에 기여하지만 급격한 인플레에 의한 부분도 크다. 이 때 진행된 인플레는 일제가 전시 자원 동원을 위해 강제 저축된 통화가 구매력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뿐 만아니라 해방직후 조선 은행권의 팽창에 기여한다. 이 당시 조선 은행은 미군정의 점령지 정책 수행을 위해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거나 정부 수립후에는 재정 수요를 충당하는데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였던 것이다.
둘째, 금융 제도에 의한 자금의 중개도 정부 기관의 대행 업무나 단기 상업 자금의 공급에 그쳤고, 산업 자금의 공급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생산의 위축으로 인한 실업의 증가와 인구 증가는 소득 수준을 낮추고, 자금의 공급 여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금융 기관은 단기 상업 자금의 공급에 치중하여 산업자금의 공급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제 시대 장기 자금을 공급하던 식산은행도 거의 장기 설비 금융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못한채 일반 은행업무에 종사하였다. 금융 기관의 대출 재원은 저축을 통하여 조달되기 보다 조선은행의 차입에 의존하였다. 또한 이 당시 이자율은 그래서 기업의 투자 자금 조달은 어려웠고,
세째, 금융 기관의 경영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대부분 금융기관은 정부 소유하에 있었고, 자금 중개 비용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노력도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더우기 이들 은행은 융자 허가제에 의하여 대출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과잉 유동성을 보유하였으며 지급준비제도도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2) 금융 제도의 구축
정부 수립과 함께 새로운 금융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생산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플레의 수습과 통화 가치의 안정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이를 기초롤 장기 산업 자금의 공급을 위한 금융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중앙 은행의 엄격한 통화 관리에 의해 통화 가치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부수립직후 금융 개편 문제가 계속 논의되고 있었다. 이당시 중요한 것은 인플레의 수습이었다. 그래서 이를 통하여 경제의 안정을 높이는 것이었다.
재정의 안정과 중앙은행의 설립이 논의되어 1950년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한국 은행법은 중앙은행이 정부와 독립적으로 금융 정책을 수행할 권한이 있음을 규정하였다. 일반 은행법은 기존의 금융 기관들이 상업은행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한국은행이 중앙 은행으로서 통화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이를 시행하기도 전에 6. 25가 발발하여 통화 가치의 안정은 뒤로 미루어졌다.
6.25의 발발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막대한 재정 수요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지출은 한은 차입금을 통하여 조달되었다. 또한 전쟁기간중 UN 군에 대한 대여금도 한국은행이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통화공급은 50년 4/4분기에 90%나 증가하였고, 51년 1/4분기 중에는 46%가 늘었다. 그후 2년동안 통화량은 분기마다 거의 20%씩 늘어났으며 53년에는 30%로 높아졌다. 물가는 전쟁 개시후 첫 분기동안 100% 이상이나 급등하였고, 그후 두 분기동안은 추곡이 출하되면서 물가상승세가 다소 둔화되었다. 51년 2/4분기에 물가가 100 % 가까이 급등한 후 점차 통화 증가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은행 조직은 정부와 UN 군에 전시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 이상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 본격적인 제도의 틀이 갖추어 졌다. 중앙은행은 엄격한 통화 관리를 통하여 통화 가치의 안정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56년부터 60년사이에 통화 증가율은 평균 22% 수준을 유지하였다. 또한 정부 재정 적자가 원조 자금의 판매대금인 대충 자금에 의해 조달됨으로 해서 통화 증가 압력을 줄였다. 55년-58년간 외국 원조는 국민소득의 11%에 달하는 것으로 통화 가치의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다. 한편 정부는 통화가치의 안정을 위하여 엄격한 재정 안정개획을 수립하여 이를 집행하였다. 재정 안정 계획에는 통화, 은행 신용,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정부 차입 및 기타 주요 금융 변수의 분기별 상한선이 설정되었다. 특히, 57년 미국이 개발 차관 기금을 신설하여 무상 원조를 축소하고, 유상 차관으로 전환하자 이러한 재정 안정 계획은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 통화 가치가 점차 안정되어 57년 도매 물가상승율이 16%로 둔화되었고, 58년에는 물가가 하락하기도 하였다.
통화 가치의 안정과 더불어 장기산업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전담 은행이 설립되었다. 중장기 산업 자금의 대출을 위하여 한국산업 은행이 54년 설립하였다. 또한 56년에는 한국농업 은행을 설립하여 농민조합의 금융업무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56년에는 증권 거래소가 설립되어 기업이 주식 공개를 통하여 직접 금융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인플레와 이자율 제한으로 인하여 장기 채권을 통한 자금의 동원이 어려웠다. 따라서 정부 차입금에 주로 의존하였다. 1955년말까지 산업은행은 총 은행 대출의 4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 대출의 약 1/3은 대충자금으로 지원된 것이고, 나머지는 한국 은행으로 부터 조달된 것이다. 이렇게 조달된 자금은 신용 할당에 의하여 배분되었고, 이자율에 의한 자금 배분 기능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50년대에 이르기까지 은행 경영자들은 이자율을 통해 자금의 수요 공급을 조절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였던 같다. 일제로 부터 물려 받은 전통적 사고 방식, 즉 금리는 가능한 한 낮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탈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물가 상승으로 57년까지 실질 이자율은 부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은행의 대출을 얻기 위한 각종 지대 추구행위를 낳았고, 이에 따른 비효율을 가져다 주었다. 물가 상승율이 낮아진 58-59년에 이르러서 실질 이자율이 양으로 나타났다.
한편 정부는 일반 은행의 민영화를 통하여 금융 중개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1954년부터 시작하여 57년까지 일반 은행의 정부 보유주식을 민간에 처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은행의 소유권이 일반인에게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50년대 후반에 이르러 통화가치가 안정되고, 은행의 민영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성장을 위한 필요한 금융 제도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중앙 은행으로서 한국 은행이 설립되고, 산업 은행을 통한 사업 자금의 공급이라는 금융 제도가 마련되었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용의 공급과 산업 자금의 조달이라는 면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여전히 비효율은 크게 나타났다.
첫째, 50년대 후반에 이르서 통화 가치의 안정이 이루어졌다. 50년대 후반 강력한 재정 안정 계획에 의하여 한국은행 차입에 의한 재정 적자의 보전이 줄어들었지만, 국방, 사법, 경찰, 교육 등의 지출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여전히 한은 차입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59년에 이르러 정부의 세출이 세입과 대충 자금 전입액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투융자재원의 조달을 위한 산업 부흥 채권같은 국채의 발행을 중단하였다. 한은 인수를 통한 통화 증가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이 당시 금융 자금의 조달은 대부분 한은의 발권력과 원조물자의 판매 대금인 대충자금이 원천이었다. 이러한 자금 조달 방식은 자금 배분의 비효율을 높였다. 대충자금은 무상 원조라는 성격 때문에 정부의 실패 가능성이 크다. 원조 자금을 배분할 때 경우 정부는 상환 부담이 적기 때문에 기업의 상환 능력보다 정치적 고려가 우선될 수 있었다. 무상 원조를 제공한 국가는 원조 자금의 배분에 대하여 관여하기가 어렵다. 물론 대충자금의 사용에 대하여 상호 협의를 하지만 경제적 고려가 적을 수 밖에 없다. 피 원조국의 경우에도 상환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자의적 판단에 의한 자금 배분의 가능성이 크다. 우리 나라의 경우 50년대의 대충자금으로 조성된 자금의 대출에 있어서, 정치적 고려에 의한 자금 배분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상 차관은 비 효율적 금융 제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정부로 하여금 효율성에 따라 자금을 배분하도록 구속하는 것이다. 실제 정부는 50년대 말에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외자 도입을 위한 제도를 정비하게 된다.
1957-60년 금융기관의 개혁, 즉 은행의 민영화, 중앙은행 자주성 강화로 50년대 후반에는 인플레가 수속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 등이 이루어졌다. <표6-5> 참조. 59-60년 기간동안 GNP deflator가 낮아졌다.
<표 6-5> 통화량, 물가 및 경제 성장율(54-60)
년 도
통화 증가율
물가 상승율1)
경제 성장율
1954
93. 3
37. 3
5. 5
1955
62. 1
68. 0
5. 4
1956
28. 7
22. 5
0. 4
1957
19. 8
23. 1
7. 7
1958
33. 1
-3. 1
5. 2
1959
20. 7
4. 3
3. 9
1960
- 2. 6
8. 3
1. 9
주 1. 서울 소비자 물가 지수
자료: 재정 금융 30 년사, 342-343쪽.
(3) 성장 금융 제도로의 개편
60년 정치적 불안정으로 물가 불안과 성장율 둔화가 나타났다. 5. 16 이후 군사 정부의 등장으로 50년대 후반 다져졌던 금융 제도가 다시 재편되기에 이른다. 먼저, 농업 협동 조합과 농업 은행을 통합하여 농업 협동 조합 중앙회로 단일화하여 농업 부문의 금융과 판매기구로 재 조직하였다. 농협 중앙회는 농촌 고리대 정리 사업에 착수하여 농민들의 사채를 대출로 전환시켜 주었다.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목적으로 중소기업 은행을 설립하였다. 산업 은행법의 개정으로통하여 자본금을 증액하고, 외국으로부터의 자금 차입, 차관에 대한 지급 보증 등을 허용하였다. 62년 말에는 소규모 상호 금융 회사를 국민은행에 통합하여 기업과 가계의 소규모 금융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수산업에 대한 신용과 판매를 위하여 수산업 협동조합 중앙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특수 은행들은 특별법에 의하여 설립되어 중앙은행의 통제 밖에서 운영되었으며, 이들 사업에 대한 자금의 조달과 배분에 기여하였다.
또한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소유와 통제를 더욱 확대하였다. 일반 은행의 경우부정 축재 재산 환수 조치를 통하여 정부의 소유하에 있게 되었다. 이들 은행에 대한 민간 주식 보유자의 의결권도 10%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였다. 이를 통하여 금융 기관의 인사 및 경영권을 정부의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한국은행법의 개정을 통하여 중앙 은행 역시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한국은행법 제정당시에는 중앙 은행이 행정부로 부터 독립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으나 1962년 법 개정을 통하여 통화 정책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즉, 통화 정책에 대한 금융 통화 운영 위원회의 결정에 대하여 재무부 장관이 재심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신설되었으며, 한은 업무에 대한 재무부의 감사 기능이 주어졌다. 그 결과 금융 통화 정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정부에 귀속되었고, 산업화를 위한 자금의 공급을 중시여기는 정부의 영향력으로 부터 독립성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1961년과 62년사이에 군사 정부에 행하여진 금융 제도의 변화는 은행 대출의 현저한 증가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화 증가에 대하여 중앙 은행은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5 16 이후 1년 사이에 통화 공급은 거의 50% 이상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인플레 우려와 함께 시중 자금의 흡수를 위하여 통화 개혁을 단행하여 직접적이고 강력한 금융개입을 행하였다. 그러나 1962년 비생산적으로 퇴장한 자금을 산업자금으로 동원한다는 명분으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경제의 불안정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장 자금 사정의 압박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활동의 위축으로 7월 동결 자금을 전면 해제하였다. 결국 통화 개혁은 통화와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고, 화폐 자산보다 실물 자산의 보유를 선호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금융자금의 조달을 어렵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결과 60년대 중반 물가는 급둥하였다. <표 6-6 참조>
<표 6-6> GNP에 대한 통화의 비율 및 물가 상승율
통화/GNP
총통화/GNP
도매 물가 상승율
1960
9. 9
12. 5
10. 7
1961
12. 1
13. 9
13. 2
1962
11. 3
14. 8
9. 4
1963
8. 6
11. 3
20. 6
1964
7. 0
9. 1
34. 6
지료: 한국은행, 경제통계 년보.
60년대 초에 이루어진 금융 제도의 변화는 첫째, 통화 공급이 정부의 경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하부 정책 수단의 하나로 운용되었다. 정부의 성장 계획이 주어지면, 이러한 계획의 하부 계획인 재정 안정 계획에 의하여 총체적인 신용 공급량이 정하여지고 이 수준에서 통화가 관리되었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한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이로 인하여 거래를 불안정하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금융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은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경제활동을 증대시켜 낭비를 가져다 주었다.
둘째, 자금 조달을 위한 각종 특수 은행의 설립이 이루어져서 국내 자금 조달이 증가한다. 국내 저축율은 1960년의 0.82%에서 63-4년경에는 8% 수준까지 증가한다. < 표 6-7 참조> 이러한 저축율의 증대를 위하여 정부는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의 효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는 매년 재정 안정 계획을 수립하면서 특정 부문, 특정 산업 및 특정 용도에 대한 지시 금융 또는 정책 금융으로 국내 여신의 50- 70%를 배정하고 잔여분에 대해서도 통제권을 행사하였다.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투자 자금의 효율성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는 자금 시장보다 비효율적이다. 자금 배분에 정부가 개입할 경우 각종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정책 자금을 배분하는데 있어서 효율성의 고려는 적게 된다. 60년대 초 정부에 의하여 계획되었던 승용차 생산을 위한 투자, 텔레비젼 조립 공장 설립, 시계 생산 등 중요한 사업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실패하거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당시 외환 사정의 악화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의 경제적 비효율성에서 기인한 면이 있다.
<표 6-7> 투자 및 국민 저축의 GNP 비율
투 자
국민저축
해외 저축
1960
10. 86
0. 82
8. 57
1961
13. 16
2. 86
8. 60
1962
12. 80
3. 26
10. 69
1963
18. 11
8. 69
10. 42
1964
14. 04
8. 74
6. 85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국민소득.
세째, 금융 기관이 정부의 지배하에 있음으로 해서 금융 중개 비용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간 은행은 자금을 가장 싸게 조달하여 단위 위험당 가장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기업에 공급하여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이들 은행간 경쟁은 중개 비용을 가장 낮은 금융 조달 비용에서 결정되게 한다. 그러나 중앙 은행에 의해 자금이 공급되고, 자금의 배분마저 정부에 의하여 이루어지면 은행은 조달 비용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지 않게 된다. 이 때에는 자금의 조달과 공급에 따른 위험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정부에 의하여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금 조달과 배분에 있어서 금융 산업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경영의 비효율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4) 금리 현실화와 외자 도입
민족주의에 주도된 군사정부는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62-66년)중 국내자본을 동원하여 경제발전을 점화하고자 하였다. 자립경제 기반 구축이 그 목표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위한 국내자본의 조달은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특히, 장기 산업 금융의 조달이 어려웠다. 소득 수준이 낮아서 저축의 여력이 낮은데다 실질 예금 이자율은 50년대와 60년대 초에 걸처 2-3년을 제외하고 부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60년대 초 금융 제도의 개편을 통하여 산업 자금을 조달하였지만, 투자 계획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부 통제하에 있는 금융 제도를 이용한 통화 증가를 통하여 자금을 조달하였다. 이것이 63-64년에 물가 앙등을 가져왔고, 경제의 불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정부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 못이겨 국내 신용 창출을 적극 억제하는 동시에 자금 조달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금리 현실화를 통한 국내 저축의 증대와 외자 유치이다.
1965년 정부는 금융 시장의 시장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금리 현실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 시행된 금리 개혁 조치는 예금금리가 대출금리보다 높은 역금리 체계였다. 1년 만기 정기 예금금리를 15%에서 30%로 인상하고 일반 대출금리도 16%에서 26%로 인상하였다. 이러한 금리 현실화로 금융 재원이 대폭 늘어났다. 65-69년 사이에 저축율은 GNP의 10% 수준에서 18%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 표 6-8 참조>
<표 6-8>성장율, 저축률과 실질 이자율
실질GNP 성장율
실질예금 이자율1)
저축/GNP
1965
5. 8
20. 1
7. 37
1966
12. 7
18. 4
11. 84
1967
6. 6
19. 6
11. 38
1968
11. 3
15. 1
15. 08
1969
13. 8
11. 5
18. 83
1970
7. 6
8. 7
17. 33
1971
9. 4
8. 6
15. 36
1972
5. 8
2. 3
15. 71
주: 1) (1년 정기예금 이자율 - 소비자물가 상승율)로 계산. 단, 65년은
도매 물가 상승율임.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국민소득.
이에 따라 은행의 자금 조달과 배분도 달라졌다. 금융 기관의 자금 조달은 한국은행과 정부로부터의 차입에 주로 의존하였다. 그런데 이제 예금을 통한 자금 조달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은행 예금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5년의 10% 수준에서 72년 33%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 표 6-9 참조> 이 기간 동안 소득 증가율이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은행 예금의 증가은 비약적이고 할 수 있다. 비 금융기관의 외부자금 조달에서 예금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도 증가하였다.
<표 6-9> 예금의 GNP 비중
은행예금/GNP
일반은행 예금
특수 은행 예금
1965
9. 7
70. 5
29. 5
1966
11. 7
68. 2
31. 8
1967
16. 0
66. 8
33. 2
1968
22. 5
67. 0
33. 0
1969
28. 7
66. 0
34. 0
1970
29. 5
64. 1
35. 9
1971
29. 8
65. 1
34. 9
1972
33. 1
67. 4
32. 6
자료: 한국은행, 저축총람.
또한 기업의 자금 조달에 있어서 은행의 역할도 증가한다. 주로 제한된 신용공급을 배분하는데 주력하였던 1960년대 초와 비교하여 볼 때 그 이후의 은행 역할은 극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기업의 자금 조달에 있어서 내부 자금의 비중이 감소하고, 금융 기관을 통한 자금의 조달이 증가하였다. 64년 55%에 달하던 내부 자금의 비중이 69년에는 21% 대로 하락한다. 그리고 은행 대출에 의한 자금 조달이 68년에는 31%에 이르게 된다. < 표 6- 10 참조> 66-69년 기간중 은행 총대출과 차관 지급 보증 증가액은 법인 기업의 고정자본 형성의 3/4에 달하였다. 적어도 산업 자금의 조달에 있어서 1965년의 금리 현실화는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표 6- 10> 기업의 자금조달 구성의 변화
내 부 자 금
외 부 자 금
은행 대출
비은행대출
유가 증권
해외 대출
기 타
1963
40. 8
15. 5
12. 6
13. 7
14. 0
3. 4
1964
54. 5
11. 3
14. 3
10. 9
5. 4
3. 6
1965
47. 7
25. 7
9. 5
11. 1
5. 6
0. 1
1966
33. 0
11. 1
14. 0
8. 4
32. 9
0. 5
1967
26. 5
26. 4
13. 1
3. 8
26. 8
3. 4
1968
24. 1
31. 1
8. 9
6. 3
29. 2
0. 4
1969
21. 5
26. 1
13. 5
11. 9
24. 8
2. 2
1970
22. 5
25. 4
12. 3
12. 5
26. 1
1. 1
1971
24. 8
27. 9
10. 7
13. 1
21. 0
2. 6
1972
33. 6
20. 5
12. 3
20. 7
13. 5
-0. 5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자금 순환.
이러한 금융 산업의 발전과 함께 60년대 후반에 새로운 금융 기관과 제도가 도입되었다. 먼저, 1967년 한국 외환은행이 한국은행 외국부의 인력, 기구 및 금융재원을 이양 받아 설립되었다. 그리고 시중은행의 신탁부를 합병하여 한국 신탁은행이 설립되었다. 또한 주택 금융 조달을 위하여 주택 은행이 설립되어 주택 매입과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였다. 주택 건설 업체 및 자재 상산 기업에 대출도 행하였다. 그리고 지방 기업들의 자금 수요를 위하여 부산 은행을 비롯하여 10개의 지방은행이 설립되었다. 이들 지방 은행은 민간 소유로 정부 소유의 은행에 비하여 규제나 통제를 적게 받았다. 지방 은행은 본점을 도청 소재지에 두고서 지점을 동일한 도내에만 설치가능하도록 하는 지점 은행 제도를 택하였다.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외국은행의 한국내 지점 개설도 허가되었다.
또한 기업의 직접 금융 조달을 위하여 각종 채권 상품의 거래를 위한 금융 회사도 설립되었다. 1967년 한국개발 금융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주식과 사채의 보증 및 인수 업무를 시작하였다. 1968년에는 정부와 민간은행 공동투자로 한국투자 공사가 설립되어 사채발행 주선, 인수 및 보증을 하였다. 증권담보로 대출도 하였으며, 증권매매도 참여하였다. 이 회사는 77년 투자신탁회사로 발전하였다. 또한 자본 시장을 통한 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하여 68년 자본 시장 육성법을 제정하여 기업 공개 및 주식투자에 대한 세제상 우대 조치를 하였다. 또한 보험회사와 신탁은행의 출자로 증권회사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국내 자본 조달을 위한 금리 현실화와 각종 금융 제도를 마련하는 한편 외자를 조달하기 위한 각종 제도도 마련되었다. 외자 도입의 필요성은 50년대 말부터 제기되었다. 미국의 무상 원조 규모가 축소하면서 차관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후 외자 도입 촉진법을 제정하여 외국 자본에 대한 법적 보호를 명시하고, 61년에는 외자에 대한 조세상의 헤택을 부여하였다. 62년에 이르러 차관에 대한 지불 보증법 제정하여 민간의 상업 차관에 대해서도 정부의 지급 보증이 제공되었다. 또한 장기결제 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연불 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을 허용하였다. 65년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으로 부터 상업차관 도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66년에는 외자도입 및 지불 보증 등을 정비하여 단일 외자도입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외자를 통한 기업의 자금 조달은 66년 33%에 달하기도 하였다. <6-10 참조> 그런데 원활한 외자의 도입을 위하여 정부가 마련한 제도가 외채 상환을 위한 지급보증제도였다. 외자를 차입하고자 하는 기업은 경제기획원의 승인을 받고, 경제기획원은 외채 상환을 보장하는 지급보증서를 발급하기 위하여 국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외국 차관선에 대해서는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이 보증서를 발행하였다. 외자 차입 기업이 차관 상환 의무와 환 위험을 부담하지만, 채무 불이행이 발생하더라도 차관은 상환될 수 있었다. 미국과 일본 정부도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거나 투자를 하는 자국인에 대하여 투자 보증을 행하였다. 이러한 지급보증 절차는 다른 시중 은행과 특수 은행으로 확대되어 외자도입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66-71년까지 이러한 외자 도입은 한국기업에게 주요한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외자 도입은 산업 자금의 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외자의 조달에 정부 보증의 제공은 외국의 차관선과 국내 차입자간에 금융 거래 비용을 크게 줄여 차입이 쉽게 이루어지게 하였다. 국제 금융 거래는 국내 금융거래보다 신용과 정보에 따른 거래 비용이 훨씬 크다. 그 당시의 국내 경제 여건으로 보아 정부의 신용이 있다해도 외국 자금을 도입하기는 어려웠다.
국내 자금과 외자를 통한 산업 자금의 조달에 정부가 기여하였다고 하지만, 조달된 자금이 모두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자본의 생산성은 높다. 이 때 자본 투입의 증가는 높은 생산의 증가를 가져다 준다. 자금 배분에 따른 효율은 자금이 생산적인 부문에 배분되었을 때 얻어진다. 그러나 정부 개입은 이것을 어렵게 한다. 왜냐햐면 투자의 효율성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 개입에 의한 자금 배분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자본 투입으로 얻어지는 생산 증대를 상쇄하게 되어 금융 중개의 효율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금 배분과 관련된 부패와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대한 비난이 많았고, 부실 기업의 문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금 배분에 있어서 정부 개입의 비효율은 있었지만 이러한 비효율성이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첫째, 정부에 의해 조달된 자금의 많은 부문이 정부의 자의적 판단보다 기업의 성과에 의하여 자동 대출되는 것이 많았다. 국제 시장에서의 수출의 경우 대부분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에 직면하여 있었고, 따라서 수출관련 금융은 대체로 효율적인 기업에 배분되게 된다.
둘째, 외자에 의한 경우 투자 배분의 비효율이 적었다. 외자 도입이 이루어질 때 차관선과 도입 기업간 충분한 투자의 효율성에 관한 논의가 일어질 수 있었다. 차관 도입 협상은 차관선과 차입자간에 직접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나서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과정에 정부는 차관에 관한 의사 결정에 있어서 제한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차관 도입 협상은 경쟁적인 국제 금융 시장 원리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고, 경제적 요인이 중시된다. 특히, 차관제공측은 자금 배분에 있어서 국내 금융기관보다 나은 금융 기법을 이용할 수 있었고 한국 정부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둘째, 외자의 상환에 대한 압박감이 자금 배분에 있어서 정치적 영향을 덜 받게 하였다. 국내에서 조달된 자금의 경우 채무 불이행이 발생하면 중앙 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 자금의 경우 그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외자의 경우 정부는 투자의 경제성을 중시하게 되고, 정치적 영향력에 의한 배분을 줄이고자 한다. 또한 차관 보증 기업이 부실화할 경우 강력한 처벌을 하였다. 그래서 외자를 사용하는 기업도 자금의 사용의 효율성을 크게 고려하였다.
세째, 기업간 치열한 경쟁으로 자금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는 것을 막았다. 정부의 금융 배분이 전적으로 정부의 의사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주요 산업에 대한 사업자 선정시 실수요자 공모 방식에 의하여 경쟁적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비교적 초기부터 활발히 존재하고 있었던 경쟁은 사업의 독점적 성격에 의한 비효율을 상당히 제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부 개입에 의한 자금 배분의 비효율임에 불구하고 경쟁적 국제 금융 시장에서의 자금 차입은 이러한 비효율적 요소를 줄이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외자도입은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물론 국내 통화 공급은 여전히 정부의 산업 정책에 의하여 초과 공급되는 경향이 많아 경제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지만 사업 자금 조달을 통한 투자의 증가로 전반적인 경제 성장율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의 개입은 각종 비효율을 낳았고, 정책 자금은 통화 증가의 압력을 가져다 주었다. 이와 함께 정부 보증에 의한 외자 도입은 기업으로 하여금 투자에 따른 위험을 과소 평가하게 하여 자금에 대한 초과 투자 수요 상태가 나타나게 하였다. 그 결과 부실 기업이 등장하였고, 기업의 금융 부채가 급증하면서 70년대 정부가 직접 금융 시장에 개입하기도 한다. 먼저 정부는 자금의 여신과 관련된 도덕적 위험에 대하여 강력히 처벌을 하였다. 72년에는 8. 3조치로 정부가 금융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사금융을 흡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경제의 성장과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 명령에 의하여 기업의 모든 사채 부담을 대폭 줄여 주었다. 즉, 모든 기업의 사채를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된 사채는 3년 거치 후 월 1.35%의 이자와 함께 5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하거나 사채를 빌린 기업에 출자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은행의 대출금리도 인하하여 저금리 정책으로 복귀하였다. 이 때 신고된 사채는 당시 통화량(M1)의 8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5) 중화학 공업화와 국민투자 기금
70년대 들어서서 한국경제는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중화학 공업화는 60년대 까지 추진되었던 경공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경제적 필요성에서 출발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치적 요인이었다. 이 시기는 미군 철수가 논의되고, 월남이 패망하는 시기로서 안보 위기감이 높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중화학 공업화는 정부의 자주 국방 정책에 의하여 군수 산업의 육성과 함께 추진되었다. 그 결과 투자 배분에 있어서 경제적 고려만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자금의 조달과 배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훨씬 강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중화학 공업은 투자에 따른 회임기간이 길고, 위험이 크다. 60년대를 통하여 대기업이 등장하였다고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기업으로서는 대규모의 설비 자금을 내부적으로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대규모 투자를 위한 외국 자본의 투자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금의 조달이 상대적으로 차관보다 국내 자금의 동원에 의존하였다. 차관의 경우도 은행이 조달하여 기업에 배분하였다.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대규모 설비 자금을 국내에서 조달을 위하여 정부는 1973년 국민투자 기금을 설치하였다. 국민 투자기금은 재원을 정부 재정이나 외자, 중앙은행의 발권력이 아닌 금융 기관 및 공공기금에 의해 조성된 국내 저축에 의존하여 조달하고 이를 금융 기관에 대하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 표 6-11 참조> 이것은 사실상 강제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금융기관의 저축성 예금의 일정 비율을 국민투자 채권의 매입에 쓰도록 하였다. 74년부터 81년까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는 기간동안 금융기관에 의해 공급된 설비 자금의 절반 이상인 57%가 국민투자 기금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 표 6-11> 중화학 공업에 대한 국민투자 기금 대출금 비중(연말 잔액 기준)
( 단위: % )
국민투자기금 대출금/
전금융기관 대출금
국민투자 기금 설비자금/
전금융 기관 설비자금
1974- 81
1982- 91
1974- 91
18. 4
14. 4
16. 2
56. 8
37. 0
45. 8
주: 전금융기관은 예금 은행과 산업 은행 포함
자료: 김준경, 128쪽.
중화학 공업을 위한 재원 조달수단으로 외자도 적극적으로 운용되었다. 1977- 82년 기간동안 상업차관 도입액의 46% 이상이 중화학 관련 외산 기자재 도입에 쓰였다. 그러나 70년대에 이루어지는 외자 도입의 경우 금융 기관을 통한 외자 도입이 증가한다. 1960년대에는 정부의 지급 보증에 의한 민간 부문의 해외 차입이 상업 치관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 총 외채의 75%를 점하였다. 이는 대부분 기업이 해외 자본재 및 원자재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직접 해외 차관선으로부터 공급자 신용의 형태로 도입된 것이다. 1970년대에는 외국은행의 국내지점 개설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에 의한 외자조달이 민간 부문에 의한 외자 조달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금융 기관의 신용에 의한 외자 조달이 증가하여 1977- 81년기간에는 31. 8%에 이르게 된다. <표 6-12 참조> 이것은 외자 조달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서는 은행의 투자의 효율성 평가가 점차 중요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 표 6-12> 차입 주체별 외채 구성비 추이(잔액 기준)
(단위: % )
공공기관1)
금융기관2)
민간부문3)
계
1961- 69
21. 6
3. 5
74. 9(30. 1)
100. 0
1970- 76
31. 7
16. 5
51. 9(35. 6)
100. 0
1977 -81
26. 5
31. 8
41. 8(26. 9)
100. 0
주: 1) 공공차관
2) 뱅크론, IMF 자금, 외화채권, 외화채권, 외은 갑계정, 리파이넌스, 예수금 등
3) 상업차관, 무역신용, 민간의 외화 채권 등
( )안은 총외채 대비 상업차관의 구성비
자료: 한국은행
김준경(1993), 147쪽.
또한 자금 배분에 있어서 정부는 투자 기업을 직접 정하였다. 정부는 우선 사업에 투자할 기업을 지목하였다. 정부의 지원하에 이루어지는 투자는 실패할 우려가 없다는 판단하에 많은 기업들이 이러한 사업에 열의를 가지고 참여하였다. 이들 기업에게는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졌으며, 이중 하나가 저금리였다. 70년대 중반 1년만기 정기 예금의 금리가 16% 내외, 대출 금리가 18%내외인데 비하여 중화학 국민투자 기금에 의한 대출 금리는 9% 였다. 이러한 역마진은 정부가 보조하였다.
한편 정부는 비은행 금융기관과 자본 시장을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중화학 공업화에 필요한 국내 자금의 조달의 필요성은 증대하였지만, 실질 예금 금리의 하락으로 은행을 통한 자금의 동원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부는 단기 금융회사같은 비은행 금융기관과 기업의 직접 금융 조달을 위한 자본 시장의 육성에 힘쓰게 된다. 1972년에는 공개 촉진법을 제정하여 일정 금액 이상의 은행 대출을 받은 기업들을 공개하도록 하여 유통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증권 금융 제도를 통한 인수제도를 활성화시켜 주식 발행 시장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리고 1977년에는 자본 시장의 성장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증권관리 위원회와 그 집행기구로서 증권 감독원을 설립하였다. 그 밖에 효율적 자본 시장의 운영에 필요한 상장기업의 회계제도 및 회계정보의 공개에 대한 제도를 마련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의하여 자본 시장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상장 회사수는 1972년 66개 회사에서 1980년 352개 회사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주주수도 1972년 10만 3천명에서 80년 75만 3천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1972년 사채 시장의 자금을 제도 금융권에 끌어 들이기 위하여 상호신용금고법, 단기 금융업법 및 신용 협동조합법 등을 공표하였다. 이것은 8. 3조치로 정부가 금융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사금융을 흡수하는 조치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사설 무진업과 서민금고가 상호신용금고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단기 금융업법에 의하여 투자 금융회사가 설립되어 기업 어음의 할인을 통하여 기업의 단기 자금 조달에 기여하였다. 76년에는 기업에 대한 외자 지원과 중장기 자금의 공급을 목적으로 외국 금융기관과 합작투자로 설립되는 종합금융회사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비은행 금의 발달로 비은행 금융기관이 차지하는 여신의 비중도 1972년 18.3%에서 1980년 30.9%로 성장하였다. < 표 6- 12 참조>
< 표 6-12> 은행 및 비은행 금융 기관의 여수신 비중(1972-80)
(단위: %)
은 행
비 은행 금융
수 신
여 신
수 신
여 신
1972
81. 7
77. 4
18. 3
22. 6
1973
78. 6
73. 9
21. 4
26. 1
1974
77. 3
75. 5
22. 7
24. 5
1975
78. 5
74. 6
21. 5
25. 4
1976
76. 1
74. 4
23. 9
25. 6
1977
75. 3
68. 9
24. 7
31. 1
1978
74. 5
67. 8
25. 5
32. 2
1979
72. 2
66. 5
27. 8
33. 5
1980
69. 1
63. 8
30. 9
36. 2
자료: 한국은행, 조사월보.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강제적 국내 자금 조달과 자금 배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경제에 비효율을 증가시켰다. 첫째, 국내 신용 공급이 과다하게 이루어짐으로 해서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비경제적 활동에 많은 자원이 투입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1973년 유가 상승에 의한 물가 압력에 대하여 중앙 은행은 총 여신 규제를 엄격히 하였고, 정부는 아파트 분양 가격의 규제나 소비재에 대한 직접적인 가격 통제 등의 방법으로 인플레 압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앙 은행의 총 여신관리는 중화학 부분에 대한 투자로 인하여 잘 지켜질 수 없었고, 중동 건설붐에 의한 외화유입으로 인한 국내 신용의 증가에 대하여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소비재를 포함한 부동산 등의 자산 가격을 급등하였고, 정부의 직접적인 가격 통제는 암시장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생산적 자원이 부동산 투기같은 비 경제적 활동에 투입됨으로 해서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둘째, 국민투자 기금의 조성은 중화학 공업을 위한 자금 조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중화학 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은 다른 산업 부문에 대한 자금 공급을 줄이게 되었다. 이것은 효율적인 다른 부문에 투자되어야 할 자금이 강제적으로 국민투자 기금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세째, 조달된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의 개입은 비효율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중화학 부문에 대한 투자 계획은 국내 자본의 조달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따라서 자금의 배분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외자의 경우도 은행에 의하여 조달되는 부문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통제하에 있던 금융기관은 조달된 외자의 배분시 개별 프로젝트에 대한 효율적 분석을 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자금 배분에 따른 비효율은 증가하였다.
중화학 공업화를 계기로 나타난 금융 배분에 대한 정부 개입의 비효율성은 금융 기관의 자율적 경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80년대 이르러 정부는 금융의 자율화를 행하게 되었다. 첫째, 정부 개입이 줄어들고 금융제도의 자율 경영이 확대되었다. 1980년 12월 정부는 은행 자율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금융 기관의 자율 경영을 제한하던 각종 규정과 통첩이 대폭 정리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매각하여 민영화 조치를 시작하였다. 81년에는 한일 은행, 82년에는 제일 은행과 서울 은행, 83년에는 조흥은행의 정부보유 주식이 민간에 매각되었다. 이에 따라 한일은행, 서울 신탁은행, 제일 은행 및 조흥은행이 완전 민영화되었다. 그후 특수은행의 일반은행으로의 전환과 함께 89년 외환 은행이 민영화되었다. 82년 말 은행법이 개정되어 금융 기관의 경영에 관한 은행 감독원장의 지시 명령권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금융기관 임원의 임명 승인권을 부여하던 금융 기관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페지되었다.
둘째, 금리 자유화조치도 시행되었다. 그리고 통화 규제 방식도 88년 이후 간접 규제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82년 6월 무역금융과 같은 정책금융의 금리를 일반 대출금리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정책금융에 대한 금리 특헤가 없어졌다. 그리고 84년에는 차입자의 신용에 따라 대출금리를 차별화할 수 있는 대출금리 밴드제도를 도입하였고, 직접 금융시장에서의 무보증 회사채의 금리를 자유화하였다. 그리고 은행간 담합의 근거였던 금융단 협정을 페지하였다. 그리고 88년 전 금융기관의 여신 금리를 자유화하였다. 그러나 금리 인하 압력에 밀려 최고 금리제를 창구지도를 통하여 부할함으로써 금리 재규제로 돌아섰다.
세째, 금융산업 대한 진입 완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신한은행을 비롯하여 몇개의 시중 은행이 새로 설립되었으며 투자금융 및 상호 신용 금고 등 다수의 비은행 금융기관도 새로 인가되었다. 또한 외국 자본의 국내 시장 참여를 점차 개방화시켜 나갔다. 80년대 초부터 민간 은행의 설립을 적극족으로 허용하여 80년대 초 5개에 불과하던 시중은행이 80년대 말 11개로 늘어났고, 90년대 들어서서 15개 은행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비은행 금융기관의 설립도 자유화하여 82년부터 2년사이에 12개의 투자 금둁유회사, 58개의 상호신용금고 회사, 1개의 투자 신탁회사가 설립되었다. 88년부터는 지방 금융 회사의 설립을 개방하여 5개의 지방 투자신탁회사, 11개의 지방 리스회사 등이 설립되었다. 외국 은행의 국내 지점도 80년대 대폭 확대되어 72개점에 이르렀고, 87년부터 외국 보험회사, 증권 회사 등도 합작회사, 현지 법인, 지점 설치 등을 통하여 크게 진출하였다.
네째, 은행 업무도 겸업 은행 제도(universal banking)로 나아가 금융기관의 업무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금융 상품을 도입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금융기관들은 수익성과 유동성이 높은 금융 상품을 개발하여 금융 자산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금융기관이 다른 금융기관의 업무영역에 진출하여 업무 중복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은행도 신탁 상품을 취급하였고, 단기 채권인 양도성 예금증서(CD)도 판매하였다. 그리고 상업 어음의 할인 업무도 시작하였다. 비은행 금융 기관도 자체 어음 발행을 통해 자금 조달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금융시장의 개방은 정부 개입 범위를 줄였을 뿐 아니라 금융 제도의 비효율을 감소시켰다. 자금 배분이 보다 효율적인 부문에 배분됨으로써 비효율성이 감소하였다. 금융기관간 경쟁을 통하여 효율성이 제고되고 이에 따라 소비자의 후생이 증대하였다. 또한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투자재원의 조달이 가능하여 진다. 결국 80년대에 이르러 정부 개입에 의한 자금 배분의 비효율이 금융기관의 자율화를 통하여 감소하게 된다.
4) 금융제도의 변화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해방 이후 한국 금융 제도의 발전은 대부분 정부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졌다. 신용의 공급량을 결정하고, 산업 자금을 조달하고, 이자율을 정하였으며, 정부가 의도한 특정한 사업에 자금이 배분되도록 하였다. 또한 금융 기관의 설립과 상품의 종류도 허가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금융 기관을 직접 소유하거나 인사권을 행사하였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훨씬 강력한 정부의 개입을 경험하였다.
금융제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시장에 의한 자금 배분을 왜곡함으로써 많은 비효율을 발생시킨다. 첫째, 통화 공급이 산업 정책을 위해 동원됨으로써 통화 가치를 불안정하게 하였고, 그 결과 금융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비생산적 활동이 나타났다. 특히, 해방 직후 산업 생산의 감소와 상업의 증가는 이러한 인플레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70년대말과 80년대 말의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이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둘째, 정부의 장기 투자에 대한 정보 부족은 가장 효율적인 부문에 투자가 이루지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 자금이 비생산적인 부문에 배분되도록 하며, 낮은 이자율은 지대추구 행위를 낳아 비생산적 행위를 증대시킨다. 세째, 금융 기관의 설립 허가와 경영에 대한 간섭은 금융기관간 경쟁을 약화시켜 중개 비용을 줄이게 하지 못한다. 또한 이윤 추구의 제약은 기업 경영을 부실화한다.
이러한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금융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보다 효율적인 산업자금의 조달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초기에 금융 상품의 축적도 부족하고, 신용과 정보가 부족하다. 따라서 투자의 효율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직접 금융의 조달은 어려운 형편이다. 비록 정부에 의하여 산업 자금의 조달이 이루어지더라도 이것은 생산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정부 개입에 따른 금융제도의 변화가 성장에 미친 효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점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한국의 금융 산업은 정부의 개입에 의하여 뒤떨어져 있고, 따라서 실물 부문의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자. 한국의 금융 산업이 낙후되어 있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낙후성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금융연관 비율의 변화 추이로 살펴보면 금융산업이 낙후되었다는 주장은 인정되기 힘들다. 금융연관 비율은 금융산업이 얼마나 발전되었으며 금융 심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가를 나타내는 척도로 이용될 수 있다. GNP에 대한 금융 자산의 비율은 1963년 0.90에서 1967년 1.23, 1972년 2.11 그리고 1980년의 2.64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증가한다. 물론 이 비율은 금리 현실화와 외자 도입이 활발하던 1965- 1972년 기간동안 2배 이상 증가한다. 그리고 중화학 공업화로 금융 자원의 배분이 왜곡되었던 73-79년의 기간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80년 금융 자율화 이후 거의 10년만에 그 비율은 2배 가까이 증가한다. 따라서 정부의 금융 개입으로 60-70년대 금융산업의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주장은 적어도 60년대에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은행의 부실 채권과 수익성의 측면에서 보면 낙후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은행이란 대출 심사를 통하여 자금을 배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정부의 개입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부실 채권이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부실채권은 80년대 초 크게 증가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중화학 부문에 대한 비효율적 투자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 표 6-13> 부실 채권1) 및 은행의 수익성: 1971-89
(단위: %)
1971-75
1976-80
1981- 83
1984-86
1987
1988
1989
순이익/총자산
0. 44
0. 80
0. 34
0. 20
0. 19
0. 36
0. 66
부실채권 비율2)
1. 3
2. 4
7. 6
10. 5
8. 4
7. 4
5. 9
주: 1) 부실 채권은 구체적인 회수조치 또는 관리방안이 필요한 대출로서 고정(담보유), 회수의
문(담보무 또는 부족), 추정 손실(대손처리)로 구분됨.
2) 부실 채권/ 총여신. 1971-75년 기간은 (회수불능+ 추정 손실)/총대출로 계산.
자료: 한국은행
남상우(1993), 102쪽.
사실 금융자원의 배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비효율을 낳게 된다. 이것은 자금 시장의 수급에 의하지 않고 정부의 정책에 의한 자금 배분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정부는 자금 배분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이에 따라 선정된 방향으로 자금배정이 이루어지도록 금융기관에게 지시하고, 이것이 관철되도록 확실히 하기 위하여 정부가 금융기관의 인사, 예산 등 세부적 내부 경영에 깊이 개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보는 금융기관의 기능이란 가계부문으로부터 저금리로 많은 자금을 받아들여, 정책당국의 지시에 따라 특정한 부문 또는 기업에 대하여 융자가 곧 특혜일 정도로 값싼 자금를 대어주는 일종의 배급 창구였다. 그래서 수출 산업, 방위 산업, 주요 원자재 수입 등에 있어서는 금융지원을 위하여 낮은 금리를 적용하였고, 금리 조절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정책 금융은 자동 재할인을 통하여 통화량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다. 정부는 통화 증가를 막기 위하여 통화량의 총량 관리를 위주로 통화 증가율에 대한 목표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금리는 정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다. 정부는 직접 최고금리, 기준 금리 및 예금 기간별 실행금리를 정하여 주었다. 그리고 금리의 결정은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 정책의 보조 수단으로 운용되었다. 기업의 투자 촉진 및 금융 비용 부담 경감이라는 목적에 치중하여 대출 금리를 경직적으로 운용하였다. 저금리 정책은 기업으로 하여금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수익에 대한 기대와 금융비용을 감안한 투자가 결정되도록 작용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한여 항상 자금의 초과 수요가 빚어졌다. 그 결과 신용 할당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금의 대출을 얻기 위한 지대추구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비생산적 활동이 이루어졌다. 또한 지급 준비금을 통제하고, 통화채를 강제 배정하였으며, 가계 대출 및 서비스 분야의 대츨 등을 간접 규제하였다. 그리고 제도 금융과 다른 비제도권 사금융의 발달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게 되었다. 실물 경제의 성장 지원을 위하여 금리의 자원 배분 기능을 무시한 결과 도리어 투자의 효율이 저하된 것은 분명하다.
금리 체계의 왜곡으로 인하여 자금의 비효율적 배분으로 부실 기업과 은행의 부실 대출이 증가하였다. 자금의 효율적 사용을 위한 투자 결정은 일차적으로 기업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런데 기업은 이러한 투자 자금을 대부분 은행을 통하여 조달하기 때문에 이차적으로 은행에 의하여 투자의 타당성에 대한 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은 은행의 대출 심사 기능을 약화시켜 경영상의 효율성을 개선하지 못하게 된다. 금융 기관들의 심한 부실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정책당국은 이른바 효율성 제고를 뒷전에 물리고 구제작업의 손길을 내밀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한국은행의 특별 금융을 통하여 은행에 대한 지원에 나서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은행이 정부의 개입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은행의 수익성은 악화되었지만 은행의 금융 비용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증대시키지는 못하였다. 한국의 금융 시장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된 결과 그 만큼 금융거래 비용이 높아져 이자율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자금의 초과 수요나 인플레에 대한 예상 때문에 고금리가 유지되는 면도 있지만, 금융 산업의 경쟁력 부족으로 금융 거래 비용이 높아 이자율이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리 왜곡과 비효율적 자금의 배분은 경제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는가. 성장의 잠재력을 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금융산업은 꾸준히 발전하여 경제 성장을 투자 재원을 조달하였다. 금융 산업의 부실화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금융산업의 발전없이 실물 부문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산업화 초기의 제한된 가용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금융에 대한 정부의 강도 높은 개입은 불가피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금융은 저축의 부족으로 인한 산업 자금의 조달이 어려운데 비하여 정부가 의도하는 투자활동수준은 높았다. 그런데 장단기 금융시장은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은 대출을 통한 통화의 공급이 불가피하였고, 중앙은행은 각종 정책 금융제도를 마련 일반 은행의 취급 유인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그 때 그 때의 금융시장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제도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즉, 국민경제의 실물부문으로부터의 금융수요의 변화와 국민소득 향상에 따른 자금 잉여부문의 선호 변화에 따른 자금 잉여부문의 선호변화에 따라 정책 당국이 적절하게 새로운 금융기관을 신설하거나 기존 기관에 대하여 새로운 금융상품을 허용해주는 기민성을 보인 데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민영화된 은행과 독립된 통화당국으로 구성된 금융제도는 정부 통제하의 금융 제도보다 자금 배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국내 저축 동원과 바람직한 자원 배분에 있어서 시장 기능과 시장 유인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 저축이 부족하고 금융 기관의 신용이 부족한 상태에서 민영화된 은행과 독립된 통화 당국이 산업 자원의 조달을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한국의 일인당 소득이 너무 낮아 정책적인 유인이 있더라도 국내 금융 저축의 동원이 어려뚖을 상황이다. 또한 농업과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대부분의 차입자는 대부자와 마찬가지로 농민, 소기업 및 소상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자금 수요도 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단기이며 소액이다. 이러한 특징은 정부의 개입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다수의 소규모 전문 금융기관으로 이루어지는 지역에 기반을 둔 영세규모의 (atomistic) 자금 및 자본 시장의 발달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금융 제도가 정부 통제하의 금융 제도보다 저축 동원에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격상 주로 편의 제공 위주(accomodating)이었다. 이러한 금융 제도는 공업 부문의 발전을 선도하지도, 공업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산업화 초기에 정부의 신용에 의하여 국내 자금과 외자를 조달하여 산업 부문에 배분되도록 한 것은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외자 도입의 경우 기업 신용이 낮아 정부가 지불 보증을 안해주면 어떤 외
정 기화(전남대)
목차
1) 머리말
2) 금융 제도와 거래 비용
(1) 금융제도의 역할
(2) 산업화와 금융제도
3) 금융 제도의 변화
(1) 식민지 금융 제도의 유산
(2) 금융 제도의 구축
(3) 성장 금융 제도로의 개편
(4) 금리 현실화와 외자 도입
(5) 중화학 공업화와 국민투자 기금
4) 금융 제도의 변화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5) 맺는말
content
1) introduction
2) banking system and transaction cost
(1) role of banking system
(2) industrial banking system
3) development of banking institution
(1) colonial banking sysyem
(2) new setting of banking system
(3) banking system for develpoment
(4) rate reform and foreign capital borrowing
(5) finacing for heavy and chemical indutry
4) banking system and growth
5) conclusion
요 약
경제성장 과정에서 금융 제도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별 경제주체들의 거래에 필요한 신용을 공급하고, 자금의 중재를 통하여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한다. 이러한 기능은 독립된 중앙 은행과 민간은행의 자율적 운영을 통하여 효율적으로 달성된다.
그런데 한국 금융 제도는 금융 제도가 정부의 개입에 의하여 규제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부 규제의 결과 한국의 금융 산업이 실물 부문의 발전에 비하여 대단히 낙후되어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성장을 위해 적절한 통화 공급과 효율적 자금 중재가 중요한데 정부가 특정 산업 부문에 투자재원의 집중시키기 위하여 부문별 신용의 배분, 용도 및 이자율까지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 은행이 정부에
이러한 정부의 개입은 투자 재원이 부족하고, 금융 정보도 빈약한 상황에서 자금 조달을 위한 위하여 국내외에 적절한 신용을 공급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어 자금 조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정부 개입에 의한 부패, 비생산 지대 추구 행위, 부실기업의 발생 등 비효율도 낭비도 있었다. 이러한 비효율은 자금 조달 방식이나 정책의 기조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금융의 개입에 의한 성장에 미친 왜곡 효과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것은 정부의 금융 통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정부 개입에 의한 비효율을 줄이도록 하는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자금의 많은 부문이 정부의 자의적 판단보다 국제 시장에서의 기업의 성과에 의하여 자동 대출되도록 하였다. 둘째, 산업화 초기부터 외자에 의존함으로써 정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었다. 외자의 도입은 경쟁적 국제 금융 시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고려에 의한 자금 배분을 줄이게 하였다. 세째, 정부 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기업의 도덕적 위험에 대하여 강력한 처벌을 하였다. 이것이 기업의 비효율적 자금 사용을 줄였다. 네째, 정부의 자금 배분이 기업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하여 비교적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의 금융 제도는 정부에 의하여 그 발전의 계기가 주어졌으며 산업화 초기에 부족하기 쉬운 신용을 제공함으로써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금융 시장의 형성에 필요한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정착시키는데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자금의 배분에 대한 비효율적 개입은 비효율적 낭비를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비효율적 낭비를 줄여 금융제도가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도록 한 것은 수출과 외국 자본이 가지고 있는 경쟁적 요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summary
The banking institution has developed to help reduce transaction cost and finace for investment. Anf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finacial funds are efficiently allocated by independent central bank and private banks in the fincial market. But in Korea it is common for government to intervene in financial sector. It is believed that financial sector is distoted and financial funds are inefficiently allocated in the period of industrialization. But government sector has contributed to rapid industialization by supplying long term industrial fund. At the same time it has resulted in inefficient allocation of funds. Overall effect of government intervention in financial sector is positively related with growth in Korea by several ways of reducing inefficiency of government intervention.
Fisrt, funds for export-promoting are generally speaking allocated by performace base, which means most of funds are allocated to competitive firms. Second the foreign capital is allocated to efficient projects. Pressure of default has made government allocate funds by economic base. And the lender is usually considering the efficiency of project in the course of borrowung negotiatio. Third, government has severly punished moral hazard of firms which gets government support in borrowing funds. Fourth, when funds are allocated by government, it keeps in touch with firms. It can reduce information problem and reduce inefficiency of intervention.
1) 머리말
경제성장 과정에서 금융 제도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별 경제주체들의 거래에 필요한 신용을 공급하고, 자금의 중재를 통하여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한다. 신용의 공급은 중앙은행의 본원 통화의 공급과 민간 은행의 신용 창조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또한 자금의 중재는 민간 은행과 각종 비은행 금융 기관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신용의 공급은 실물 경제의 거래에 들어가는 거래 비용을 줄여준다. 특히, 성장하는 경제에 적절한 통화의 부족은 신용의 부족으로 거래를 위축시키다. 실물 경제의 거래 비용은 공급된 통화가 신뢰성과 안정성을 가지고 가지고 있을 때 최소화된다. 신뢰성의 상실은 거래의 교환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통화 가치의 불안정은 경재 주체들로 하여금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활동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따라서 신용의 공급이 실물 경제의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독립된 중앙 은행과 민간은행의 자율적 운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민간이 거래에 필요한 신용의 가치 유지와 안정성이 유지된다.
자금 중재의 경우 자금의 차입자와 대부자 사이에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하여 역 선택(adverse selection)과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이 존재한다. 그것은 차입자와 대부자의 직접적인 금융 거래에는 많은 거래 비용이 필요함을 뜻한다. 이러한 차입자와 대부자간의 금융거래 비용을 줄여, 경제 주체간 자금 대차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금융 제도라 할 수 있다. 금융 산업은 각종 상품과 제도를 개발하여 자금 중재 비용을 줄인다.
한국의 금융 제도도 경제 성장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여 왔다. 그런데 한국 금융 제도는 금융 제도가 정부의 개입에 의하여 규제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부 규제의 결과 한국의 금융 산업이 실물 부문의 발전에 비하여 대단히 낙후되어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성장을 위해 적절한 통화 공급과 효율적 자금 중재가 중요한데 정부가 특정 산업 부문에 투자재원의 집중시키기 위하여 부문별 신용의 배분, 용도 및 이자율까지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정부에 의하여 규제되고 발전되어 온 금융 제도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용 공급이 산업 정책의 수단으로 이용됨에 따라 과다한 통화 공급으로 인플레가 심하게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실물 가격이 급상승하고 경제 주체들로 하여금 자본 이득을 얻기 위한 경제 활동에 지나친 투자를 하도록 하였다. 둘째, 정부의 직접적인 자금 배분으로 자금이 가장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되는 것이 어려웠다. 자금 배정을 받기 위한 비생산적 지대추구행위로 인해 비효율이 발생하였으며,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 자금이 배분되기도 하였다. 또한 낮은 이자율은 자금의 수요자인 기업의 리스크 즉, 차입의 증가에 따른 도산 위험을 줄여 기업의 부채를 증가시켰고, 이들 차입 기업의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으로 부실 기업이 증가하였다. 세째,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금융 기관에 의한 자율적 대출 심사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부실 채권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금융기관간 경쟁의 부족으로 자금 중계 비용이 높았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금융 제도의 발전없이 실물 부문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정책이 비록 경제의 일부에 왜곡을 초래하였지만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저 개발국의 경우 산업화 초기에는 투자 재원도 부족하고, 금융 정보도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금융시장의 조성을 위하여 적절한 신용을 공급하는 것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효율과 효율의 상대적 크기는 경제 발전의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금융 제도의 변화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금융 제도의 변화가 경제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거래 비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II절 에서는 금융 제도와 거래 비용과의 관계를 살펴 본다. 여기에서는 금융 제도의 발전이 거래 비용을 줄여 실물부문의 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III 절에서는 해방후 한국 금융 제도의 변화를 살펴 보았다. 신용 공급과 자금 중개라는 측면에서 금융 제도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살펴보았다. IV절에서는 금융 제도의 발전이 경제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V절에서 논의를 요약하였다.
2) 금융 제도와 거래 비용
(1) 금융제도의 역할
경제 제도란 인류의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꾸준히 발전하여 온 것으로 생산, 소비, 투자 등 경제 활동에 따른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거래는 빈 공간에서 행하여 지는 것이 아니며 교환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재산권 제도(property right), 계약(contract)에 관한 규칙 및 거래 당사자간 위험 부담 방법에 관한 규칙을 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또한 결제 방법, 결제 통화의 공급, 도량형 등이 정해져야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제 거래에 관련된 규칙이 꾸준히 진화하여 제도로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제도는 거래 비용을 줄여서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행한다. 제도가 비효율적이면 거래 과정에서 적용을 기피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도태된다. 많은 상거래 관습은 대부분 거래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규칙이다. 즉, 정부가 강제하지 않았음에도 존재하는 상거래 관습은 대부분 거래에 따른 거래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금융 제도 역시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발전하였다. 이것은 교환 수단의 공급을 통한 거래비용의 감소와 자금의 중개에 따른 거래비용의 감소로 구분할 수 있다.
상품의 교환은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거래 당사자간의 적절한 결제 수단을 필요로 한다. 물물교환 경제의 경우 결제 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거래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게 된다. 따라서 거래의 확대는 적절한 결제 수단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결제 수단으로서 화폐가 등장한다. 화폐는 신뢰성과 가치의 안정성이 주어져야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신용은 축적하기가 힘들며, 축적에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비용이 많이 든다. 이러한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신용의 공급이 금융 제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거래에 필요한 신용의 공급은 중앙 은행에 의한 본원 통화의 공급과 민간 은행에 의한 신용의 공급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신용의 공급은 거래 비용을 줄여 분업을 촉진시키고, 경제 활동이 잘 이루어지게 한다. 그런데 통화의 공급이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통화 가치의 안정과 적절한 통화량의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적절한 통화의 공급은 거래 비용을 줄이지만, 지나친 통화 공급으로 인플레가 나타나면 자원 배분의 비효율이 나타난다. 지나친 통화 공급은 물가 상승을 가져와 시장 거래에 따른 이익을 줄익 때문이다. 그 결과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한 통화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이로 인한 거래의 불확실성이 증대한다. 이로 인한 자금 시장의 혼란은 거래를 위축시키고, 기업의 도산 등을 가져다 준다. 이에 따라 시장 거래가 위축되고 생산 활동이 줄어든다. 또한 인플레로 인한 부의 재분배는 자본 이득(windfall)을 얻기 위한 비생산적 활동에 자원을 배분하게 한다.
자금의 중재 거래는 정보의 불확실성, 외부효과, 규모의 경제 등으로 시장 기구를 통한 자원 배분에 많은 거래 비용이 발생한다. 특히 자금 거래에 있어서 역선택(adverse selection) 문제와 도덕적 태만은 상대적으로 큰 비용을 발생시키며, 이에 따라 이러한 비용을 줄이기 위한 금융 제도와 관행이 발달하게 된다.
역선택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발생하며 거래 비용을 증가시킨다. 예를 들어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차입 기업의 투자 수익성이나 위험도를 파악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면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아 지게 되어, 금융 거래가 위축되거나 상대적으로 투자 수익이 낮은 부문에 자금이 배분되게 된다. 물론 시장에서 기업의 각종 정보를 유통하는 기업이 등장하면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의 유통은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하여 누구나 정보를 얻고자 무임승차하고자 하게 되어, 정보 판매 회사는 이윤을 남기기 어려워 특히 산업화 초기의 경제에서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정부가 정보를 알리거나, 기업 스스로 회계정보를 제공하도록 규제를 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금융 중계자로 은행이 등장하여 레몬을 가리고, 보증서를 붙여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은행의 경우 주로 사적인 대출을 통하여 자금을 운용함으로써 다른 자금 대여자의 무임 승차 문제를 줄이게 된다. 또한 차입자의 보증이나 담보를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금융거래가 이루어진 후에는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이 발생할 수 있다. 즉, 자금의 차입 후 채무 불이행을 유발시킬 수 있는 사업에 투자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대출후 차입자의 활동에 대한 각종 제한을 하게 된다. 그래서 모험(venture) 기업이 등장하여 대출을 한 은행은 투자 기업의 경영에 어느 정도 참여하게 된다. 또한 자금의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 금융 조건상에 각종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자금의 공급자는 자금의 유동성, 안정성, 수익성을 선호한다. 즉, 회수기간이 단기간이고, 위험 부담이 적으며 수익성 높은 상품 선호한다. 이에 비하여 자금의 수요자는 장기에 걸쳐 낮은 차입 금리를 선호한다. 이들의 선호에 알맞는 금융 수단을 마련해주는 것이 다양한 금융 기관의 역할이다. 이러한 자금의 차입자와 대부자간의 금융 중개에 따른 중개 비용은 경쟁적 시장에서 가장 낮은 비용으로 행하게 한다.
(2) 산업화와 금융제도
경제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의 축적이고, 이러한 자본 축적을 통하여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이 조달된다. 산업화 초기에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기업의 내부 자금 축적이 부족하여,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외부에서 조달하게 된다. 그러나 산업화 초기에는 국내 소득이 낮아 가용한 투자 재원도 부족할 뿐 아니라, 산업 자금은 장기 투자로 회수에 따른 위험도 높다. 그런데 금융 시장은 다른 상품 거래와 달리 신용과 정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정보와 신용의 축적은 장기를 요한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에 기업이 시장을 통한 직접 투자 재원을 조달하는 것은 어려운 편이다. 이때 국내 자금 시장을 통하여 장기 산업 자금이 조달되도록 하는데 금융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행한다. 역사적 경험을 보면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적은 비용으로 조달하기 위하여 각국의 금융 제도는 발전한다.
영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장기 투자를 위해 금융 제도를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산업화가 완만하게 잔행되었고, 국내 자본 축적이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산업화에 필요한 장기 자금이 대외 무역과 현대화된 농업의 수익에서 조달될 수 있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는 산업 그 자체에서 조달되었다. 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뒤진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자본이 희소하고 분산되어 있었다. 또한 산업 투자에 대한 위험도 컸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이 산업화를 시작할 단계에는 영국의 산업화 초기보다 더 큰 설비 자금을 필요로 하였다. 경제력을 갖춘 공장의 평균 규모도 상대적으로 커졌고, 산업 분야도 상대적으로 자본 집약도가 높은 분야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여건의 차이로 유럽 대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금융 제도가 등장한다. 이러한 금융 제도를 통하여 산업 자금의 중재가 이루어진다. 프랑스는 새로운 형태의 은행으로 Credit Mobilier 가 등장한다. 이 은행은 상업은행과 달리 장기 산업 자금을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상업 은행의 투자는 정부 발행 채권을 인수하거나 외환의 거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은행은 장기 투자인 철도 건설과 산업 자금 공급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모험적 사업으로 새롭게 나타난 금융 제도였다. 이것은 산업자금의 비중이 높아서 영업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주식시장의 활발한 거래에 의존해야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은행 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기존 은행의 경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산업화가 뒤진 독일에서는 산업 자금의 중개를 위하여 겸업 은행 제도(universal banking)가 등장한다. 이것은 영국의 상업은행뿐 아니라 프랑스의 Credit Mobilier 형태의 은행과도 차이가 있었다. 상업 은행은 단기 자금 조달을 하였고, Credit Mobilier 형태의 은행은 장기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러나 겸업 은행 제도는 상업 은행의 단기자금과 Credit Mobilier형태의 장기투자 자금 조달을 결합한 것이었다. 은행은 기업의 당좌 계정 대출(current account credit)를 통하여 형식적으로는 단기이지만 실제로는 장기인 산업 자금을 공급하였다. 은행은 산업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산업체의 설립부터 파산때까지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를 기업의 투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은행은 감독 위원회(supervisory board) 제도를 통하여 기업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배력은 금융의 영역을 넘어서 경영상의 그리고 기업가적인 의사 결정에 까지 미쳤다. 이러한 제도는 조달된 산업 자금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은 산업화 시기에 독일식의 겸업 은행 제도을 규제하였다. 그래서 영국식의 분업 은행 제도를 통하여 자금을 중개하였고, 따라서 높은 중개 비용으로 인하여 자금 조달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겸업 은행제도에서는 큰 은행이 많은 지점망을 갖추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주식과 부채 등 기업에 대한 각종 채권을 보유하게 된다. 또한 기업 발행 채권의 인수자(insurance underwriter)로서 또는 대출 은행으로서 기업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자금 중재에 따른 정보 비용이 적고 장기 자금의 조달 비용도 낮다 . 그러나 분업 은행 제도처럼 세분화된 금융 제도(financial fragmentation)에서는 상대적으로 산업자금을 조달하는데 드는 비용이 높다. 세분화된 금융 제도는 장기 자금의 조달에 따른 중개 비용이 높아서, 설비 투자에 따른 금융 비용이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업은 자금 조달이 어려운 고정 자본에 투자하기 보다 원자재나 노동에 의존하게 하여 생산 과정이 비효율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용 건물이나 장비는 유동성이 낮아서 금융 제약을 받고 있는 기업에게 바림직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 미국과 같은 세분화된(segmented and fragmentated) 금융 제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경제의 다른 활동보다 산업 자금의 조달을 우선시 하는 금융 제도를 창출하여 사업 자금의 조달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금융 제도는 영미 또는 유럽의 금융 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부의 정책 금융 기관이 기업의 산업 자금의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행하였다. 우편저축을 포함한 저축기관을 통하여 조달된 자금은 정책 금융기관만이 아니라 상업은행과 신용 은행을 통하여 장단기 그리고 위험(risky)한 대출로 기업에 공급되었다. 이자율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기업은 적정 수준 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것은 높은 저축율과 금융 자산의 축적 속에서 국내 자금의 조달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정부의 개입으로 자금의 조달과 배분 과정에 나타날 수 있는 비효율은 많은 지대 추구 행위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민간 부문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였고, 산업 정책을 민간 기업이나 민간이 경영하는 기업에 의존하여 달성함으로써 자금 배분의 비효율을 줄일 수 있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금융제도의 발전은 장기 산업 자금의 공급에 큰 기여를 한다. 이러한 금융제도는 다양한 금융 상품을 공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산업 자금 공급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한다. 이러한 금융 제도를 통하여 낮은 금융중개 비용으로 자금 조달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생산적 부문에 자금이 배분되는 것이다.
3) 금융 제도의 변화
(1) 식민지 금융 제도의 유산
해방과 함께 한국경제는 일본의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근대적 화폐 제도, 은행 조직을 물려 받게 된다. 발권 은행으로서의 조선 은행, 일반 상업 은행 및 저축 은행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적 금융 제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불하여야 하는 초기 설치 비용(installment cost)은 줄었다고 할 수 있다. 신용과 정보를 필요로 하는 금융 제도의 발전에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하에 마련된 금융 제도는 해방후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일제 말기의 전쟁 수행을 위하여 금융 제도가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기간동안 전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통화가 증가하고, 강제 저축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쟁후 통제경제가 풀리면서 강제 저축이 구매력으로 나타나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통화 가치가 폭락하게 된다. 따라서 일제하에 마련된 금융 제도를 통한 신용의 공급과 산업 자금의 공급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다.
식민지 금융 제도는 해방후 급격한 인플레를 유발하여 큰 경제적 비용을 유발하였다. 1936년부터 1944년까지 화폐 발행고는 22배 증가하였고 도매 물가는 2.4 배증가하였다.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과다한 통화를 발행하였지만, 강제 저축 또는 배급 경제로 인하여 증가된 통화가 구매력화되지 못하였다.
<표 6-1> 은행권 발행고, 물가 및 임금지수의 변화(36-47년)
년 도
조선은행권 발행고
소매물가지수1)
임금 지수2)
1936
210,654 (100)
100
100
1937
279,502 (132)
109
120
1938
321,978 (152)
131
131
1939
443,987 (210)
153
140
1940
580,534 (275)
169
146
1941
741,607 (352)
174
168
1942
908,646 (431)
183
183
1943
1,466,777 (696)
202
200
1944
3,135,692 (1,488)
226
224
1945
8,763,341 (3,791)
9,606
2,560
1946
17,710,623 (8,407)
21,619
10,837
1947
33,388,164 (15,849)
76,998
15,801
자료: 조선 경제 통계 요람 (1949년)
주 1) 서울 생필품의 소매물가지수
2) 서울 근로자 평균 임금지수
그러나 해방으로 전후 통제 경제로 억압된 구매력이 실현되면서 물가 및 임금 앙등하였다. <표 6-1참조> 45년 한해 동안 소매 물가는 20배 이상 앙등하였다. 이러한 물가 상승은 46년과 47년에도 계속되어 물가는 매년 2배 이상 증가하였다. 46-47년에 이르러서도 물가 상승이 계속된 것은 주로 양곡 수집을 위한 자금이 재정 적자의 주 요인이었다. 미군정은 해방전 통제 경제하에서 이루어진 식량 배급제도를 페지하고 시장 거래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양곡의 시장 거래로 쌀 값이 폭등하자 양곡 수매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양곡 수매 제도로 인하여 막대한 재정 적자가 발생하였고, 이를 조선은행의 차입으로 메꾸게 된 것이다. 48년 정부 수립후에도 거액의 재정 적자는 계속되었는데 정부는 이를 중앙 은행 차입금으로 충당하였다. < 표 6-2 참조> 조세 수입은 한정되어 있는데 비하여 국방비와 치안 유지비, 정부 관리 기업체의 적자 보전을 위한 보조금 지급, 비능률적인 정부 예산 집행 등으로 재정 수요는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표 6-2> 은행권 발행고, 예금 및 통화량(47-52)
년도
은행권
발행고
민간보유
은행권(1)
민간
당좌예금(2)
정부대행기관
당좌예금(3)
민간
기타예금(4)
정부대행기관
기타예금(5)
통화량
(1+2+3)
통화량
(1+2+3+4+5)
1947
33,388
31,183
6,375
1,268
11,855
2,966
38,826
53,647
1948
43,444
40,632
9,126
3,397
17,653
2,863
53,155
73,671
1949
75,105
70,674
15,139
8,064
28,149
8,591
93,877
130,617
1950
229,248
222,835
14,469
14,813
28,876
9,469
252,117
290,462
1951
557,927
539,258
82,975
27,525
109,821
25,227
649,758
784,806
1952
1,014,429
974,272
213,065
25,928
311,178
39,674
1,213,265
1,564,117
식민지 금융 제도로 인한 경제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금융제도의 변화는 신속히 일어나지 못하였다. 금융기관이 대부분 정부에 의하여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화 관리도 어려웠고, 효율적 경영도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일본인 소유 재산이 정부에 귀속됨으써 정부는 대부분 은행의 실질적 소유자가 되었다. 금융조합 및 금융조합 연합회를 제외한 모든 금융기관의 일본인 소유 주식은 미군정에 귀속되었으며, 정부 수립후에는 정부에 귀속되었다. <표 6-3 참조>
< 표 6-3 > 한국 금융기관의 소유 구조(1948년 12월말 현재)
은 행 명
귀 속 주
타 은행 소유
한인 소유
중국인 소유
조선 은행
식산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저축은행
상호은행
신탁은행
환금은행
26. 2
79. 2
29. 0
5.1
37.2
65.7
26.2
-
20.3
14.1
35.3
41.0
56.5
24.8
64.4
100.0
3.5
6.7
35.6
53.7
6.3
9.5
9.4
-
-
-
-
0.2
-
-
-
-
이로 인하여 조선 은행은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사실상 무제한 통화를 발행하여, 유동성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행은 타 금융기관과 경쟁적으로 일반 은행업무를 취급하여 은행 감독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와 함께 저축 은행이나 신탁회사 등과 같은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기관들도 일반 은행 업무의 취급이 허용되어 단기금융업무를 취급하는 일반 은행화되었다. 결국 해방후 식민지 시대의 금융 제도는 청산되지 못하고 경제 발전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47-53년간 실질적으로 국민소득은 거의 증가하지 아니하였다. <표 6-4 참조>
<표 6-4> 국민소득과 물가(47-53)
(단위: 백만원)
국 민 소 득
전국 소매
물가 지수
금 액
지 수
19471)
4,544
100
100
19481)
6,641
145
158
19492)
8,210
183
197
19503)
22,347
490
532
19514)
55,431
1,219
2,128
19525)
184,067
4,053
5,243
19535)
229,726
5,007
7,618
주: 1. 한은 2. 산은 3. 기획처 4. 재무부 5. 한은 기획처 공동 추계
자료: 한국 산업은행 조사부, 한국산업정책 10년사.
한국의 상공업 백년, 84쪽.
그 결과 첫째, 중앙 은행에 의한 통화의 공급과 화폐 가치의 안정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진행된 급격한 인플레가 금융 거래를 크게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생산의 감소는 남북 분단과 일본인 소유 기업의 경영난 등에 기여하지만 급격한 인플레에 의한 부분도 크다. 이 때 진행된 인플레는 일제가 전시 자원 동원을 위해 강제 저축된 통화가 구매력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뿐 만아니라 해방직후 조선 은행권의 팽창에 기여한다. 이 당시 조선 은행은 미군정의 점령지 정책 수행을 위해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거나 정부 수립후에는 재정 수요를 충당하는데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였던 것이다.
둘째, 금융 제도에 의한 자금의 중개도 정부 기관의 대행 업무나 단기 상업 자금의 공급에 그쳤고, 산업 자금의 공급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생산의 위축으로 인한 실업의 증가와 인구 증가는 소득 수준을 낮추고, 자금의 공급 여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금융 기관은 단기 상업 자금의 공급에 치중하여 산업자금의 공급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제 시대 장기 자금을 공급하던 식산은행도 거의 장기 설비 금융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못한채 일반 은행업무에 종사하였다. 금융 기관의 대출 재원은 저축을 통하여 조달되기 보다 조선은행의 차입에 의존하였다. 또한 이 당시 이자율은 그래서 기업의 투자 자금 조달은 어려웠고,
세째, 금융 기관의 경영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대부분 금융기관은 정부 소유하에 있었고, 자금 중개 비용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노력도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더우기 이들 은행은 융자 허가제에 의하여 대출이 억제되었기 때문에 과잉 유동성을 보유하였으며 지급준비제도도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2) 금융 제도의 구축
정부 수립과 함께 새로운 금융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생산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플레의 수습과 통화 가치의 안정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이를 기초롤 장기 산업 자금의 공급을 위한 금융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중앙 은행의 엄격한 통화 관리에 의해 통화 가치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부수립직후 금융 개편 문제가 계속 논의되고 있었다. 이당시 중요한 것은 인플레의 수습이었다. 그래서 이를 통하여 경제의 안정을 높이는 것이었다.
재정의 안정과 중앙은행의 설립이 논의되어 1950년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한국 은행법은 중앙은행이 정부와 독립적으로 금융 정책을 수행할 권한이 있음을 규정하였다. 일반 은행법은 기존의 금융 기관들이 상업은행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한국은행이 중앙 은행으로서 통화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였으나, 이를 시행하기도 전에 6. 25가 발발하여 통화 가치의 안정은 뒤로 미루어졌다.
6.25의 발발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막대한 재정 수요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지출은 한은 차입금을 통하여 조달되었다. 또한 전쟁기간중 UN 군에 대한 대여금도 한국은행이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통화공급은 50년 4/4분기에 90%나 증가하였고, 51년 1/4분기 중에는 46%가 늘었다. 그후 2년동안 통화량은 분기마다 거의 20%씩 늘어났으며 53년에는 30%로 높아졌다. 물가는 전쟁 개시후 첫 분기동안 100% 이상이나 급등하였고, 그후 두 분기동안은 추곡이 출하되면서 물가상승세가 다소 둔화되었다. 51년 2/4분기에 물가가 100 % 가까이 급등한 후 점차 통화 증가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은행 조직은 정부와 UN 군에 전시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 이상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 본격적인 제도의 틀이 갖추어 졌다. 중앙은행은 엄격한 통화 관리를 통하여 통화 가치의 안정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56년부터 60년사이에 통화 증가율은 평균 22% 수준을 유지하였다. 또한 정부 재정 적자가 원조 자금의 판매대금인 대충 자금에 의해 조달됨으로 해서 통화 증가 압력을 줄였다. 55년-58년간 외국 원조는 국민소득의 11%에 달하는 것으로 통화 가치의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다. 한편 정부는 통화가치의 안정을 위하여 엄격한 재정 안정개획을 수립하여 이를 집행하였다. 재정 안정 계획에는 통화, 은행 신용,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정부 차입 및 기타 주요 금융 변수의 분기별 상한선이 설정되었다. 특히, 57년 미국이 개발 차관 기금을 신설하여 무상 원조를 축소하고, 유상 차관으로 전환하자 이러한 재정 안정 계획은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 통화 가치가 점차 안정되어 57년 도매 물가상승율이 16%로 둔화되었고, 58년에는 물가가 하락하기도 하였다.
통화 가치의 안정과 더불어 장기산업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전담 은행이 설립되었다. 중장기 산업 자금의 대출을 위하여 한국산업 은행이 54년 설립하였다. 또한 56년에는 한국농업 은행을 설립하여 농민조합의 금융업무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56년에는 증권 거래소가 설립되어 기업이 주식 공개를 통하여 직접 금융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인플레와 이자율 제한으로 인하여 장기 채권을 통한 자금의 동원이 어려웠다. 따라서 정부 차입금에 주로 의존하였다. 1955년말까지 산업은행은 총 은행 대출의 4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 대출의 약 1/3은 대충자금으로 지원된 것이고, 나머지는 한국 은행으로 부터 조달된 것이다. 이렇게 조달된 자금은 신용 할당에 의하여 배분되었고, 이자율에 의한 자금 배분 기능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50년대에 이르기까지 은행 경영자들은 이자율을 통해 자금의 수요 공급을 조절한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였던 같다. 일제로 부터 물려 받은 전통적 사고 방식, 즉 금리는 가능한 한 낮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탈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물가 상승으로 57년까지 실질 이자율은 부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은행의 대출을 얻기 위한 각종 지대 추구행위를 낳았고, 이에 따른 비효율을 가져다 주었다. 물가 상승율이 낮아진 58-59년에 이르러서 실질 이자율이 양으로 나타났다.
한편 정부는 일반 은행의 민영화를 통하여 금융 중개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1954년부터 시작하여 57년까지 일반 은행의 정부 보유주식을 민간에 처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은행의 소유권이 일반인에게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50년대 후반에 이르러 통화가치가 안정되고, 은행의 민영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성장을 위한 필요한 금융 제도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중앙 은행으로서 한국 은행이 설립되고, 산업 은행을 통한 사업 자금의 공급이라는 금융 제도가 마련되었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용의 공급과 산업 자금의 조달이라는 면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여전히 비효율은 크게 나타났다.
첫째, 50년대 후반에 이르서 통화 가치의 안정이 이루어졌다. 50년대 후반 강력한 재정 안정 계획에 의하여 한국은행 차입에 의한 재정 적자의 보전이 줄어들었지만, 국방, 사법, 경찰, 교육 등의 지출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여전히 한은 차입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59년에 이르러 정부의 세출이 세입과 대충 자금 전입액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투융자재원의 조달을 위한 산업 부흥 채권같은 국채의 발행을 중단하였다. 한은 인수를 통한 통화 증가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이 당시 금융 자금의 조달은 대부분 한은의 발권력과 원조물자의 판매 대금인 대충자금이 원천이었다. 이러한 자금 조달 방식은 자금 배분의 비효율을 높였다. 대충자금은 무상 원조라는 성격 때문에 정부의 실패 가능성이 크다. 원조 자금을 배분할 때 경우 정부는 상환 부담이 적기 때문에 기업의 상환 능력보다 정치적 고려가 우선될 수 있었다. 무상 원조를 제공한 국가는 원조 자금의 배분에 대하여 관여하기가 어렵다. 물론 대충자금의 사용에 대하여 상호 협의를 하지만 경제적 고려가 적을 수 밖에 없다. 피 원조국의 경우에도 상환의 의무가 없기 때문에 자의적 판단에 의한 자금 배분의 가능성이 크다. 우리 나라의 경우 50년대의 대충자금으로 조성된 자금의 대출에 있어서, 정치적 고려에 의한 자금 배분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상 차관은 비 효율적 금융 제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정부로 하여금 효율성에 따라 자금을 배분하도록 구속하는 것이다. 실제 정부는 50년대 말에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외자 도입을 위한 제도를 정비하게 된다.
1957-60년 금융기관의 개혁, 즉 은행의 민영화, 중앙은행 자주성 강화로 50년대 후반에는 인플레가 수속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 등이 이루어졌다. <표6-5> 참조. 59-60년 기간동안 GNP deflator가 낮아졌다.
<표 6-5> 통화량, 물가 및 경제 성장율(54-60)
년 도
통화 증가율
물가 상승율1)
경제 성장율
1954
93. 3
37. 3
5. 5
1955
62. 1
68. 0
5. 4
1956
28. 7
22. 5
0. 4
1957
19. 8
23. 1
7. 7
1958
33. 1
-3. 1
5. 2
1959
20. 7
4. 3
3. 9
1960
- 2. 6
8. 3
1. 9
주 1. 서울 소비자 물가 지수
자료: 재정 금융 30 년사, 342-343쪽.
(3) 성장 금융 제도로의 개편
60년 정치적 불안정으로 물가 불안과 성장율 둔화가 나타났다. 5. 16 이후 군사 정부의 등장으로 50년대 후반 다져졌던 금융 제도가 다시 재편되기에 이른다. 먼저, 농업 협동 조합과 농업 은행을 통합하여 농업 협동 조합 중앙회로 단일화하여 농업 부문의 금융과 판매기구로 재 조직하였다. 농협 중앙회는 농촌 고리대 정리 사업에 착수하여 농민들의 사채를 대출로 전환시켜 주었다.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목적으로 중소기업 은행을 설립하였다. 산업 은행법의 개정으로통하여 자본금을 증액하고, 외국으로부터의 자금 차입, 차관에 대한 지급 보증 등을 허용하였다. 62년 말에는 소규모 상호 금융 회사를 국민은행에 통합하여 기업과 가계의 소규모 금융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수산업에 대한 신용과 판매를 위하여 수산업 협동조합 중앙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특수 은행들은 특별법에 의하여 설립되어 중앙은행의 통제 밖에서 운영되었으며, 이들 사업에 대한 자금의 조달과 배분에 기여하였다.
또한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소유와 통제를 더욱 확대하였다. 일반 은행의 경우부정 축재 재산 환수 조치를 통하여 정부의 소유하에 있게 되었다. 이들 은행에 대한 민간 주식 보유자의 의결권도 10%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였다. 이를 통하여 금융 기관의 인사 및 경영권을 정부의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한국은행법의 개정을 통하여 중앙 은행 역시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한국은행법 제정당시에는 중앙 은행이 행정부로 부터 독립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으나 1962년 법 개정을 통하여 통화 정책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즉, 통화 정책에 대한 금융 통화 운영 위원회의 결정에 대하여 재무부 장관이 재심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신설되었으며, 한은 업무에 대한 재무부의 감사 기능이 주어졌다. 그 결과 금융 통화 정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은 정부에 귀속되었고, 산업화를 위한 자금의 공급을 중시여기는 정부의 영향력으로 부터 독립성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1961년과 62년사이에 군사 정부에 행하여진 금융 제도의 변화는 은행 대출의 현저한 증가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화 증가에 대하여 중앙 은행은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5 16 이후 1년 사이에 통화 공급은 거의 50% 이상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인플레 우려와 함께 시중 자금의 흡수를 위하여 통화 개혁을 단행하여 직접적이고 강력한 금융개입을 행하였다. 그러나 1962년 비생산적으로 퇴장한 자금을 산업자금으로 동원한다는 명분으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경제의 불안정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장 자금 사정의 압박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활동의 위축으로 7월 동결 자금을 전면 해제하였다. 결국 통화 개혁은 통화와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고, 화폐 자산보다 실물 자산의 보유를 선호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금융자금의 조달을 어렵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결과 60년대 중반 물가는 급둥하였다. <표 6-6 참조>
<표 6-6> GNP에 대한 통화의 비율 및 물가 상승율
통화/GNP
총통화/GNP
도매 물가 상승율
1960
9. 9
12. 5
10. 7
1961
12. 1
13. 9
13. 2
1962
11. 3
14. 8
9. 4
1963
8. 6
11. 3
20. 6
1964
7. 0
9. 1
34. 6
지료: 한국은행, 경제통계 년보.
60년대 초에 이루어진 금융 제도의 변화는 첫째, 통화 공급이 정부의 경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하부 정책 수단의 하나로 운용되었다. 정부의 성장 계획이 주어지면, 이러한 계획의 하부 계획인 재정 안정 계획에 의하여 총체적인 신용 공급량이 정하여지고 이 수준에서 통화가 관리되었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한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이로 인하여 거래를 불안정하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금융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은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경제활동을 증대시켜 낭비를 가져다 주었다.
둘째, 자금 조달을 위한 각종 특수 은행의 설립이 이루어져서 국내 자금 조달이 증가한다. 국내 저축율은 1960년의 0.82%에서 63-4년경에는 8% 수준까지 증가한다. < 표 6-7 참조> 이러한 저축율의 증대를 위하여 정부는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의 효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는 매년 재정 안정 계획을 수립하면서 특정 부문, 특정 산업 및 특정 용도에 대한 지시 금융 또는 정책 금융으로 국내 여신의 50- 70%를 배정하고 잔여분에 대해서도 통제권을 행사하였다.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투자 자금의 효율성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는 자금 시장보다 비효율적이다. 자금 배분에 정부가 개입할 경우 각종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정책 자금을 배분하는데 있어서 효율성의 고려는 적게 된다. 60년대 초 정부에 의하여 계획되었던 승용차 생산을 위한 투자, 텔레비젼 조립 공장 설립, 시계 생산 등 중요한 사업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실패하거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당시 외환 사정의 악화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의 경제적 비효율성에서 기인한 면이 있다.
<표 6-7> 투자 및 국민 저축의 GNP 비율
투 자
국민저축
해외 저축
1960
10. 86
0. 82
8. 57
1961
13. 16
2. 86
8. 60
1962
12. 80
3. 26
10. 69
1963
18. 11
8. 69
10. 42
1964
14. 04
8. 74
6. 85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국민소득.
세째, 금융 기관이 정부의 지배하에 있음으로 해서 금융 중개 비용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간 은행은 자금을 가장 싸게 조달하여 단위 위험당 가장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기업에 공급하여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이들 은행간 경쟁은 중개 비용을 가장 낮은 금융 조달 비용에서 결정되게 한다. 그러나 중앙 은행에 의해 자금이 공급되고, 자금의 배분마저 정부에 의하여 이루어지면 은행은 조달 비용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지 않게 된다. 이 때에는 자금의 조달과 공급에 따른 위험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정부에 의하여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금 조달과 배분에 있어서 금융 산업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경영의 비효율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4) 금리 현실화와 외자 도입
민족주의에 주도된 군사정부는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62-66년)중 국내자본을 동원하여 경제발전을 점화하고자 하였다. 자립경제 기반 구축이 그 목표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위한 국내자본의 조달은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특히, 장기 산업 금융의 조달이 어려웠다. 소득 수준이 낮아서 저축의 여력이 낮은데다 실질 예금 이자율은 50년대와 60년대 초에 걸처 2-3년을 제외하고 부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60년대 초 금융 제도의 개편을 통하여 산업 자금을 조달하였지만, 투자 계획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부 통제하에 있는 금융 제도를 이용한 통화 증가를 통하여 자금을 조달하였다. 이것이 63-64년에 물가 앙등을 가져왔고, 경제의 불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정부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 못이겨 국내 신용 창출을 적극 억제하는 동시에 자금 조달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금리 현실화를 통한 국내 저축의 증대와 외자 유치이다.
1965년 정부는 금융 시장의 시장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금리 현실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 시행된 금리 개혁 조치는 예금금리가 대출금리보다 높은 역금리 체계였다. 1년 만기 정기 예금금리를 15%에서 30%로 인상하고 일반 대출금리도 16%에서 26%로 인상하였다. 이러한 금리 현실화로 금융 재원이 대폭 늘어났다. 65-69년 사이에 저축율은 GNP의 10% 수준에서 18%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 표 6-8 참조>
<표 6-8>성장율, 저축률과 실질 이자율
실질GNP 성장율
실질예금 이자율1)
저축/GNP
1965
5. 8
20. 1
7. 37
1966
12. 7
18. 4
11. 84
1967
6. 6
19. 6
11. 38
1968
11. 3
15. 1
15. 08
1969
13. 8
11. 5
18. 83
1970
7. 6
8. 7
17. 33
1971
9. 4
8. 6
15. 36
1972
5. 8
2. 3
15. 71
주: 1) (1년 정기예금 이자율 - 소비자물가 상승율)로 계산. 단, 65년은
도매 물가 상승율임.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국민소득.
이에 따라 은행의 자금 조달과 배분도 달라졌다. 금융 기관의 자금 조달은 한국은행과 정부로부터의 차입에 주로 의존하였다. 그런데 이제 예금을 통한 자금 조달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은행 예금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5년의 10% 수준에서 72년 33%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 표 6-9 참조> 이 기간 동안 소득 증가율이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은행 예금의 증가은 비약적이고 할 수 있다. 비 금융기관의 외부자금 조달에서 예금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도 증가하였다.
<표 6-9> 예금의 GNP 비중
은행예금/GNP
일반은행 예금
특수 은행 예금
1965
9. 7
70. 5
29. 5
1966
11. 7
68. 2
31. 8
1967
16. 0
66. 8
33. 2
1968
22. 5
67. 0
33. 0
1969
28. 7
66. 0
34. 0
1970
29. 5
64. 1
35. 9
1971
29. 8
65. 1
34. 9
1972
33. 1
67. 4
32. 6
자료: 한국은행, 저축총람.
또한 기업의 자금 조달에 있어서 은행의 역할도 증가한다. 주로 제한된 신용공급을 배분하는데 주력하였던 1960년대 초와 비교하여 볼 때 그 이후의 은행 역할은 극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기업의 자금 조달에 있어서 내부 자금의 비중이 감소하고, 금융 기관을 통한 자금의 조달이 증가하였다. 64년 55%에 달하던 내부 자금의 비중이 69년에는 21% 대로 하락한다. 그리고 은행 대출에 의한 자금 조달이 68년에는 31%에 이르게 된다. < 표 6- 10 참조> 66-69년 기간중 은행 총대출과 차관 지급 보증 증가액은 법인 기업의 고정자본 형성의 3/4에 달하였다. 적어도 산업 자금의 조달에 있어서 1965년의 금리 현실화는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표 6- 10> 기업의 자금조달 구성의 변화
내 부 자 금
외 부 자 금
은행 대출
비은행대출
유가 증권
해외 대출
기 타
1963
40. 8
15. 5
12. 6
13. 7
14. 0
3. 4
1964
54. 5
11. 3
14. 3
10. 9
5. 4
3. 6
1965
47. 7
25. 7
9. 5
11. 1
5. 6
0. 1
1966
33. 0
11. 1
14. 0
8. 4
32. 9
0. 5
1967
26. 5
26. 4
13. 1
3. 8
26. 8
3. 4
1968
24. 1
31. 1
8. 9
6. 3
29. 2
0. 4
1969
21. 5
26. 1
13. 5
11. 9
24. 8
2. 2
1970
22. 5
25. 4
12. 3
12. 5
26. 1
1. 1
1971
24. 8
27. 9
10. 7
13. 1
21. 0
2. 6
1972
33. 6
20. 5
12. 3
20. 7
13. 5
-0. 5
자료: 한국은행, 한국의 자금 순환.
이러한 금융 산업의 발전과 함께 60년대 후반에 새로운 금융 기관과 제도가 도입되었다. 먼저, 1967년 한국 외환은행이 한국은행 외국부의 인력, 기구 및 금융재원을 이양 받아 설립되었다. 그리고 시중은행의 신탁부를 합병하여 한국 신탁은행이 설립되었다. 또한 주택 금융 조달을 위하여 주택 은행이 설립되어 주택 매입과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였다. 주택 건설 업체 및 자재 상산 기업에 대출도 행하였다. 그리고 지방 기업들의 자금 수요를 위하여 부산 은행을 비롯하여 10개의 지방은행이 설립되었다. 이들 지방 은행은 민간 소유로 정부 소유의 은행에 비하여 규제나 통제를 적게 받았다. 지방 은행은 본점을 도청 소재지에 두고서 지점을 동일한 도내에만 설치가능하도록 하는 지점 은행 제도를 택하였다.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외국은행의 한국내 지점 개설도 허가되었다.
또한 기업의 직접 금융 조달을 위하여 각종 채권 상품의 거래를 위한 금융 회사도 설립되었다. 1967년 한국개발 금융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주식과 사채의 보증 및 인수 업무를 시작하였다. 1968년에는 정부와 민간은행 공동투자로 한국투자 공사가 설립되어 사채발행 주선, 인수 및 보증을 하였다. 증권담보로 대출도 하였으며, 증권매매도 참여하였다. 이 회사는 77년 투자신탁회사로 발전하였다. 또한 자본 시장을 통한 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하여 68년 자본 시장 육성법을 제정하여 기업 공개 및 주식투자에 대한 세제상 우대 조치를 하였다. 또한 보험회사와 신탁은행의 출자로 증권회사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국내 자본 조달을 위한 금리 현실화와 각종 금융 제도를 마련하는 한편 외자를 조달하기 위한 각종 제도도 마련되었다. 외자 도입의 필요성은 50년대 말부터 제기되었다. 미국의 무상 원조 규모가 축소하면서 차관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후 외자 도입 촉진법을 제정하여 외국 자본에 대한 법적 보호를 명시하고, 61년에는 외자에 대한 조세상의 헤택을 부여하였다. 62년에 이르러 차관에 대한 지불 보증법 제정하여 민간의 상업 차관에 대해서도 정부의 지급 보증이 제공되었다. 또한 장기결제 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연불 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을 허용하였다. 65년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일본으로 부터 상업차관 도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66년에는 외자도입 및 지불 보증 등을 정비하여 단일 외자도입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외자를 통한 기업의 자금 조달은 66년 33%에 달하기도 하였다. <6-10 참조> 그런데 원활한 외자의 도입을 위하여 정부가 마련한 제도가 외채 상환을 위한 지급보증제도였다. 외자를 차입하고자 하는 기업은 경제기획원의 승인을 받고, 경제기획원은 외채 상환을 보장하는 지급보증서를 발급하기 위하여 국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외국 차관선에 대해서는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이 보증서를 발행하였다. 외자 차입 기업이 차관 상환 의무와 환 위험을 부담하지만, 채무 불이행이 발생하더라도 차관은 상환될 수 있었다. 미국과 일본 정부도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거나 투자를 하는 자국인에 대하여 투자 보증을 행하였다. 이러한 지급보증 절차는 다른 시중 은행과 특수 은행으로 확대되어 외자도입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66-71년까지 이러한 외자 도입은 한국기업에게 주요한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외자 도입은 산업 자금의 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외자의 조달에 정부 보증의 제공은 외국의 차관선과 국내 차입자간에 금융 거래 비용을 크게 줄여 차입이 쉽게 이루어지게 하였다. 국제 금융 거래는 국내 금융거래보다 신용과 정보에 따른 거래 비용이 훨씬 크다. 그 당시의 국내 경제 여건으로 보아 정부의 신용이 있다해도 외국 자금을 도입하기는 어려웠다.
국내 자금과 외자를 통한 산업 자금의 조달에 정부가 기여하였다고 하지만, 조달된 자금이 모두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자본의 생산성은 높다. 이 때 자본 투입의 증가는 높은 생산의 증가를 가져다 준다. 자금 배분에 따른 효율은 자금이 생산적인 부문에 배분되었을 때 얻어진다. 그러나 정부 개입은 이것을 어렵게 한다. 왜냐햐면 투자의 효율성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 개입에 의한 자금 배분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자본 투입으로 얻어지는 생산 증대를 상쇄하게 되어 금융 중개의 효율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금 배분과 관련된 부패와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대한 비난이 많았고, 부실 기업의 문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금 배분에 있어서 정부 개입의 비효율은 있었지만 이러한 비효율성이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첫째, 정부에 의해 조달된 자금의 많은 부문이 정부의 자의적 판단보다 기업의 성과에 의하여 자동 대출되는 것이 많았다. 국제 시장에서의 수출의 경우 대부분 국제 시장에서의 경쟁에 직면하여 있었고, 따라서 수출관련 금융은 대체로 효율적인 기업에 배분되게 된다.
둘째, 외자에 의한 경우 투자 배분의 비효율이 적었다. 외자 도입이 이루어질 때 차관선과 도입 기업간 충분한 투자의 효율성에 관한 논의가 일어질 수 있었다. 차관 도입 협상은 차관선과 차입자간에 직접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나서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과정에 정부는 차관에 관한 의사 결정에 있어서 제한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차관 도입 협상은 경쟁적인 국제 금융 시장 원리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고, 경제적 요인이 중시된다. 특히, 차관제공측은 자금 배분에 있어서 국내 금융기관보다 나은 금융 기법을 이용할 수 있었고 한국 정부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둘째, 외자의 상환에 대한 압박감이 자금 배분에 있어서 정치적 영향을 덜 받게 하였다. 국내에서 조달된 자금의 경우 채무 불이행이 발생하면 중앙 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 자금의 경우 그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외자의 경우 정부는 투자의 경제성을 중시하게 되고, 정치적 영향력에 의한 배분을 줄이고자 한다. 또한 차관 보증 기업이 부실화할 경우 강력한 처벌을 하였다. 그래서 외자를 사용하는 기업도 자금의 사용의 효율성을 크게 고려하였다.
세째, 기업간 치열한 경쟁으로 자금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는 것을 막았다. 정부의 금융 배분이 전적으로 정부의 의사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주요 산업에 대한 사업자 선정시 실수요자 공모 방식에 의하여 경쟁적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비교적 초기부터 활발히 존재하고 있었던 경쟁은 사업의 독점적 성격에 의한 비효율을 상당히 제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부 개입에 의한 자금 배분의 비효율임에 불구하고 경쟁적 국제 금융 시장에서의 자금 차입은 이러한 비효율적 요소를 줄이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외자도입은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물론 국내 통화 공급은 여전히 정부의 산업 정책에 의하여 초과 공급되는 경향이 많아 경제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지만 사업 자금 조달을 통한 투자의 증가로 전반적인 경제 성장율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의 개입은 각종 비효율을 낳았고, 정책 자금은 통화 증가의 압력을 가져다 주었다. 이와 함께 정부 보증에 의한 외자 도입은 기업으로 하여금 투자에 따른 위험을 과소 평가하게 하여 자금에 대한 초과 투자 수요 상태가 나타나게 하였다. 그 결과 부실 기업이 등장하였고, 기업의 금융 부채가 급증하면서 70년대 정부가 직접 금융 시장에 개입하기도 한다. 먼저 정부는 자금의 여신과 관련된 도덕적 위험에 대하여 강력히 처벌을 하였다. 72년에는 8. 3조치로 정부가 금융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사금융을 흡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경제의 성장과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 명령에 의하여 기업의 모든 사채 부담을 대폭 줄여 주었다. 즉, 모든 기업의 사채를 신고하도록 하고, 신고된 사채는 3년 거치 후 월 1.35%의 이자와 함께 5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하거나 사채를 빌린 기업에 출자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은행의 대출금리도 인하하여 저금리 정책으로 복귀하였다. 이 때 신고된 사채는 당시 통화량(M1)의 8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5) 중화학 공업화와 국민투자 기금
70년대 들어서서 한국경제는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중화학 공업화는 60년대 까지 추진되었던 경공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경제적 필요성에서 출발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치적 요인이었다. 이 시기는 미군 철수가 논의되고, 월남이 패망하는 시기로서 안보 위기감이 높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중화학 공업화는 정부의 자주 국방 정책에 의하여 군수 산업의 육성과 함께 추진되었다. 그 결과 투자 배분에 있어서 경제적 고려만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자금의 조달과 배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훨씬 강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중화학 공업은 투자에 따른 회임기간이 길고, 위험이 크다. 60년대를 통하여 대기업이 등장하였다고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기업으로서는 대규모의 설비 자금을 내부적으로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대규모 투자를 위한 외국 자본의 투자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금의 조달이 상대적으로 차관보다 국내 자금의 동원에 의존하였다. 차관의 경우도 은행이 조달하여 기업에 배분하였다.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대규모 설비 자금을 국내에서 조달을 위하여 정부는 1973년 국민투자 기금을 설치하였다. 국민 투자기금은 재원을 정부 재정이나 외자, 중앙은행의 발권력이 아닌 금융 기관 및 공공기금에 의해 조성된 국내 저축에 의존하여 조달하고 이를 금융 기관에 대하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 표 6-11 참조> 이것은 사실상 강제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금융기관의 저축성 예금의 일정 비율을 국민투자 채권의 매입에 쓰도록 하였다. 74년부터 81년까지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는 기간동안 금융기관에 의해 공급된 설비 자금의 절반 이상인 57%가 국민투자 기금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 표 6-11> 중화학 공업에 대한 국민투자 기금 대출금 비중(연말 잔액 기준)
( 단위: % )
국민투자기금 대출금/
전금융기관 대출금
국민투자 기금 설비자금/
전금융 기관 설비자금
1974- 81
1982- 91
1974- 91
18. 4
14. 4
16. 2
56. 8
37. 0
45. 8
주: 전금융기관은 예금 은행과 산업 은행 포함
자료: 김준경, 128쪽.
중화학 공업을 위한 재원 조달수단으로 외자도 적극적으로 운용되었다. 1977- 82년 기간동안 상업차관 도입액의 46% 이상이 중화학 관련 외산 기자재 도입에 쓰였다. 그러나 70년대에 이루어지는 외자 도입의 경우 금융 기관을 통한 외자 도입이 증가한다. 1960년대에는 정부의 지급 보증에 의한 민간 부문의 해외 차입이 상업 치관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 총 외채의 75%를 점하였다. 이는 대부분 기업이 해외 자본재 및 원자재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직접 해외 차관선으로부터 공급자 신용의 형태로 도입된 것이다. 1970년대에는 외국은행의 국내지점 개설이 활발해지면서 이들에 의한 외자조달이 민간 부문에 의한 외자 조달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금융 기관의 신용에 의한 외자 조달이 증가하여 1977- 81년기간에는 31. 8%에 이르게 된다. <표 6-12 참조> 이것은 외자 조달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서는 은행의 투자의 효율성 평가가 점차 중요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 표 6-12> 차입 주체별 외채 구성비 추이(잔액 기준)
(단위: % )
공공기관1)
금융기관2)
민간부문3)
계
1961- 69
21. 6
3. 5
74. 9(30. 1)
100. 0
1970- 76
31. 7
16. 5
51. 9(35. 6)
100. 0
1977 -81
26. 5
31. 8
41. 8(26. 9)
100. 0
주: 1) 공공차관
2) 뱅크론, IMF 자금, 외화채권, 외화채권, 외은 갑계정, 리파이넌스, 예수금 등
3) 상업차관, 무역신용, 민간의 외화 채권 등
( )안은 총외채 대비 상업차관의 구성비
자료: 한국은행
김준경(1993), 147쪽.
또한 자금 배분에 있어서 정부는 투자 기업을 직접 정하였다. 정부는 우선 사업에 투자할 기업을 지목하였다. 정부의 지원하에 이루어지는 투자는 실패할 우려가 없다는 판단하에 많은 기업들이 이러한 사업에 열의를 가지고 참여하였다. 이들 기업에게는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졌으며, 이중 하나가 저금리였다. 70년대 중반 1년만기 정기 예금의 금리가 16% 내외, 대출 금리가 18%내외인데 비하여 중화학 국민투자 기금에 의한 대출 금리는 9% 였다. 이러한 역마진은 정부가 보조하였다.
한편 정부는 비은행 금융기관과 자본 시장을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중화학 공업화에 필요한 국내 자금의 조달의 필요성은 증대하였지만, 실질 예금 금리의 하락으로 은행을 통한 자금의 동원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부는 단기 금융회사같은 비은행 금융기관과 기업의 직접 금융 조달을 위한 자본 시장의 육성에 힘쓰게 된다. 1972년에는 공개 촉진법을 제정하여 일정 금액 이상의 은행 대출을 받은 기업들을 공개하도록 하여 유통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증권 금융 제도를 통한 인수제도를 활성화시켜 주식 발행 시장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리고 1977년에는 자본 시장의 성장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증권관리 위원회와 그 집행기구로서 증권 감독원을 설립하였다. 그 밖에 효율적 자본 시장의 운영에 필요한 상장기업의 회계제도 및 회계정보의 공개에 대한 제도를 마련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의하여 자본 시장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상장 회사수는 1972년 66개 회사에서 1980년 352개 회사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주주수도 1972년 10만 3천명에서 80년 75만 3천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1972년 사채 시장의 자금을 제도 금융권에 끌어 들이기 위하여 상호신용금고법, 단기 금융업법 및 신용 협동조합법 등을 공표하였다. 이것은 8. 3조치로 정부가 금융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사금융을 흡수하는 조치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사설 무진업과 서민금고가 상호신용금고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단기 금융업법에 의하여 투자 금융회사가 설립되어 기업 어음의 할인을 통하여 기업의 단기 자금 조달에 기여하였다. 76년에는 기업에 대한 외자 지원과 중장기 자금의 공급을 목적으로 외국 금융기관과 합작투자로 설립되는 종합금융회사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비은행 금의 발달로 비은행 금융기관이 차지하는 여신의 비중도 1972년 18.3%에서 1980년 30.9%로 성장하였다. < 표 6- 12 참조>
< 표 6-12> 은행 및 비은행 금융 기관의 여수신 비중(1972-80)
(단위: %)
은 행
비 은행 금융
수 신
여 신
수 신
여 신
1972
81. 7
77. 4
18. 3
22. 6
1973
78. 6
73. 9
21. 4
26. 1
1974
77. 3
75. 5
22. 7
24. 5
1975
78. 5
74. 6
21. 5
25. 4
1976
76. 1
74. 4
23. 9
25. 6
1977
75. 3
68. 9
24. 7
31. 1
1978
74. 5
67. 8
25. 5
32. 2
1979
72. 2
66. 5
27. 8
33. 5
1980
69. 1
63. 8
30. 9
36. 2
자료: 한국은행, 조사월보.
중화학 공업화를 위한 강제적 국내 자금 조달과 자금 배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경제에 비효율을 증가시켰다. 첫째, 국내 신용 공급이 과다하게 이루어짐으로 해서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비경제적 활동에 많은 자원이 투입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1973년 유가 상승에 의한 물가 압력에 대하여 중앙 은행은 총 여신 규제를 엄격히 하였고, 정부는 아파트 분양 가격의 규제나 소비재에 대한 직접적인 가격 통제 등의 방법으로 인플레 압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앙 은행의 총 여신관리는 중화학 부분에 대한 투자로 인하여 잘 지켜질 수 없었고, 중동 건설붐에 의한 외화유입으로 인한 국내 신용의 증가에 대하여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소비재를 포함한 부동산 등의 자산 가격을 급등하였고, 정부의 직접적인 가격 통제는 암시장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생산적 자원이 부동산 투기같은 비 경제적 활동에 투입됨으로 해서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둘째, 국민투자 기금의 조성은 중화학 공업을 위한 자금 조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중화학 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은 다른 산업 부문에 대한 자금 공급을 줄이게 되었다. 이것은 효율적인 다른 부문에 투자되어야 할 자금이 강제적으로 국민투자 기금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세째, 조달된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의 개입은 비효율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중화학 부문에 대한 투자 계획은 국내 자본의 조달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따라서 자금의 배분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외자의 경우도 은행에 의하여 조달되는 부문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통제하에 있던 금융기관은 조달된 외자의 배분시 개별 프로젝트에 대한 효율적 분석을 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자금 배분에 따른 비효율은 증가하였다.
중화학 공업화를 계기로 나타난 금융 배분에 대한 정부 개입의 비효율성은 금융 기관의 자율적 경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80년대 이르러 정부는 금융의 자율화를 행하게 되었다. 첫째, 정부 개입이 줄어들고 금융제도의 자율 경영이 확대되었다. 1980년 12월 정부는 은행 자율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금융 기관의 자율 경영을 제한하던 각종 규정과 통첩이 대폭 정리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매각하여 민영화 조치를 시작하였다. 81년에는 한일 은행, 82년에는 제일 은행과 서울 은행, 83년에는 조흥은행의 정부보유 주식이 민간에 매각되었다. 이에 따라 한일은행, 서울 신탁은행, 제일 은행 및 조흥은행이 완전 민영화되었다. 그후 특수은행의 일반은행으로의 전환과 함께 89년 외환 은행이 민영화되었다. 82년 말 은행법이 개정되어 금융 기관의 경영에 관한 은행 감독원장의 지시 명령권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금융기관 임원의 임명 승인권을 부여하던 금융 기관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페지되었다.
둘째, 금리 자유화조치도 시행되었다. 그리고 통화 규제 방식도 88년 이후 간접 규제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82년 6월 무역금융과 같은 정책금융의 금리를 일반 대출금리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정책금융에 대한 금리 특헤가 없어졌다. 그리고 84년에는 차입자의 신용에 따라 대출금리를 차별화할 수 있는 대출금리 밴드제도를 도입하였고, 직접 금융시장에서의 무보증 회사채의 금리를 자유화하였다. 그리고 은행간 담합의 근거였던 금융단 협정을 페지하였다. 그리고 88년 전 금융기관의 여신 금리를 자유화하였다. 그러나 금리 인하 압력에 밀려 최고 금리제를 창구지도를 통하여 부할함으로써 금리 재규제로 돌아섰다.
세째, 금융산업 대한 진입 완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신한은행을 비롯하여 몇개의 시중 은행이 새로 설립되었으며 투자금융 및 상호 신용 금고 등 다수의 비은행 금융기관도 새로 인가되었다. 또한 외국 자본의 국내 시장 참여를 점차 개방화시켜 나갔다. 80년대 초부터 민간 은행의 설립을 적극족으로 허용하여 80년대 초 5개에 불과하던 시중은행이 80년대 말 11개로 늘어났고, 90년대 들어서서 15개 은행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비은행 금융기관의 설립도 자유화하여 82년부터 2년사이에 12개의 투자 금둁유회사, 58개의 상호신용금고 회사, 1개의 투자 신탁회사가 설립되었다. 88년부터는 지방 금융 회사의 설립을 개방하여 5개의 지방 투자신탁회사, 11개의 지방 리스회사 등이 설립되었다. 외국 은행의 국내 지점도 80년대 대폭 확대되어 72개점에 이르렀고, 87년부터 외국 보험회사, 증권 회사 등도 합작회사, 현지 법인, 지점 설치 등을 통하여 크게 진출하였다.
네째, 은행 업무도 겸업 은행 제도(universal banking)로 나아가 금융기관의 업무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금융 상품을 도입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금융기관들은 수익성과 유동성이 높은 금융 상품을 개발하여 금융 자산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금융기관이 다른 금융기관의 업무영역에 진출하여 업무 중복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은행도 신탁 상품을 취급하였고, 단기 채권인 양도성 예금증서(CD)도 판매하였다. 그리고 상업 어음의 할인 업무도 시작하였다. 비은행 금융 기관도 자체 어음 발행을 통해 자금 조달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금융시장의 개방은 정부 개입 범위를 줄였을 뿐 아니라 금융 제도의 비효율을 감소시켰다. 자금 배분이 보다 효율적인 부문에 배분됨으로써 비효율성이 감소하였다. 금융기관간 경쟁을 통하여 효율성이 제고되고 이에 따라 소비자의 후생이 증대하였다. 또한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투자재원의 조달이 가능하여 진다. 결국 80년대에 이르러 정부 개입에 의한 자금 배분의 비효율이 금융기관의 자율화를 통하여 감소하게 된다.
4) 금융제도의 변화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
해방 이후 한국 금융 제도의 발전은 대부분 정부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졌다. 신용의 공급량을 결정하고, 산업 자금을 조달하고, 이자율을 정하였으며, 정부가 의도한 특정한 사업에 자금이 배분되도록 하였다. 또한 금융 기관의 설립과 상품의 종류도 허가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금융 기관을 직접 소유하거나 인사권을 행사하였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훨씬 강력한 정부의 개입을 경험하였다.
금융제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시장에 의한 자금 배분을 왜곡함으로써 많은 비효율을 발생시킨다. 첫째, 통화 공급이 산업 정책을 위해 동원됨으로써 통화 가치를 불안정하게 하였고, 그 결과 금융 자산 가치의 유지를 위한 비생산적 활동이 나타났다. 특히, 해방 직후 산업 생산의 감소와 상업의 증가는 이러한 인플레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70년대말과 80년대 말의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이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둘째, 정부의 장기 투자에 대한 정보 부족은 가장 효율적인 부문에 투자가 이루지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 자금이 비생산적인 부문에 배분되도록 하며, 낮은 이자율은 지대추구 행위를 낳아 비생산적 행위를 증대시킨다. 세째, 금융 기관의 설립 허가와 경영에 대한 간섭은 금융기관간 경쟁을 약화시켜 중개 비용을 줄이게 하지 못한다. 또한 이윤 추구의 제약은 기업 경영을 부실화한다.
이러한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금융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보다 효율적인 산업자금의 조달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 초기에 금융 상품의 축적도 부족하고, 신용과 정보가 부족하다. 따라서 투자의 효율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직접 금융의 조달은 어려운 형편이다. 비록 정부에 의하여 산업 자금의 조달이 이루어지더라도 이것은 생산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정부 개입에 따른 금융제도의 변화가 성장에 미친 효과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점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한국의 금융 산업은 정부의 개입에 의하여 뒤떨어져 있고, 따라서 실물 부문의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자. 한국의 금융 산업이 낙후되어 있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낙후성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금융연관 비율의 변화 추이로 살펴보면 금융산업이 낙후되었다는 주장은 인정되기 힘들다. 금융연관 비율은 금융산업이 얼마나 발전되었으며 금융 심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가를 나타내는 척도로 이용될 수 있다. GNP에 대한 금융 자산의 비율은 1963년 0.90에서 1967년 1.23, 1972년 2.11 그리고 1980년의 2.64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증가한다. 물론 이 비율은 금리 현실화와 외자 도입이 활발하던 1965- 1972년 기간동안 2배 이상 증가한다. 그리고 중화학 공업화로 금융 자원의 배분이 왜곡되었던 73-79년의 기간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80년 금융 자율화 이후 거의 10년만에 그 비율은 2배 가까이 증가한다. 따라서 정부의 금융 개입으로 60-70년대 금융산업의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주장은 적어도 60년대에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은행의 부실 채권과 수익성의 측면에서 보면 낙후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은행이란 대출 심사를 통하여 자금을 배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정부의 개입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부실 채권이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부실채권은 80년대 초 크게 증가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중화학 부문에 대한 비효율적 투자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 표 6-13> 부실 채권1) 및 은행의 수익성: 1971-89
(단위: %)
1971-75
1976-80
1981- 83
1984-86
1987
1988
1989
순이익/총자산
0. 44
0. 80
0. 34
0. 20
0. 19
0. 36
0. 66
부실채권 비율2)
1. 3
2. 4
7. 6
10. 5
8. 4
7. 4
5. 9
주: 1) 부실 채권은 구체적인 회수조치 또는 관리방안이 필요한 대출로서 고정(담보유), 회수의
문(담보무 또는 부족), 추정 손실(대손처리)로 구분됨.
2) 부실 채권/ 총여신. 1971-75년 기간은 (회수불능+ 추정 손실)/총대출로 계산.
자료: 한국은행
남상우(1993), 102쪽.
사실 금융자원의 배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비효율을 낳게 된다. 이것은 자금 시장의 수급에 의하지 않고 정부의 정책에 의한 자금 배분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정부는 자금 배분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이에 따라 선정된 방향으로 자금배정이 이루어지도록 금융기관에게 지시하고, 이것이 관철되도록 확실히 하기 위하여 정부가 금융기관의 인사, 예산 등 세부적 내부 경영에 깊이 개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보는 금융기관의 기능이란 가계부문으로부터 저금리로 많은 자금을 받아들여, 정책당국의 지시에 따라 특정한 부문 또는 기업에 대하여 융자가 곧 특혜일 정도로 값싼 자금를 대어주는 일종의 배급 창구였다. 그래서 수출 산업, 방위 산업, 주요 원자재 수입 등에 있어서는 금융지원을 위하여 낮은 금리를 적용하였고, 금리 조절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정책 금융은 자동 재할인을 통하여 통화량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다. 정부는 통화 증가를 막기 위하여 통화량의 총량 관리를 위주로 통화 증가율에 대한 목표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금리는 정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다. 정부는 직접 최고금리, 기준 금리 및 예금 기간별 실행금리를 정하여 주었다. 그리고 금리의 결정은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 정책의 보조 수단으로 운용되었다. 기업의 투자 촉진 및 금융 비용 부담 경감이라는 목적에 치중하여 대출 금리를 경직적으로 운용하였다. 저금리 정책은 기업으로 하여금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수익에 대한 기대와 금융비용을 감안한 투자가 결정되도록 작용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한여 항상 자금의 초과 수요가 빚어졌다. 그 결과 신용 할당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금의 대출을 얻기 위한 지대추구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비생산적 활동이 이루어졌다. 또한 지급 준비금을 통제하고, 통화채를 강제 배정하였으며, 가계 대출 및 서비스 분야의 대츨 등을 간접 규제하였다. 그리고 제도 금융과 다른 비제도권 사금융의 발달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게 되었다. 실물 경제의 성장 지원을 위하여 금리의 자원 배분 기능을 무시한 결과 도리어 투자의 효율이 저하된 것은 분명하다.
금리 체계의 왜곡으로 인하여 자금의 비효율적 배분으로 부실 기업과 은행의 부실 대출이 증가하였다. 자금의 효율적 사용을 위한 투자 결정은 일차적으로 기업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런데 기업은 이러한 투자 자금을 대부분 은행을 통하여 조달하기 때문에 이차적으로 은행에 의하여 투자의 타당성에 대한 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은 은행의 대출 심사 기능을 약화시켜 경영상의 효율성을 개선하지 못하게 된다. 금융 기관들의 심한 부실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정책당국은 이른바 효율성 제고를 뒷전에 물리고 구제작업의 손길을 내밀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한국은행의 특별 금융을 통하여 은행에 대한 지원에 나서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은행이 정부의 개입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은행의 수익성은 악화되었지만 은행의 금융 비용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증대시키지는 못하였다. 한국의 금융 시장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된 결과 그 만큼 금융거래 비용이 높아져 이자율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자금의 초과 수요나 인플레에 대한 예상 때문에 고금리가 유지되는 면도 있지만, 금융 산업의 경쟁력 부족으로 금융 거래 비용이 높아 이자율이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리 왜곡과 비효율적 자금의 배분은 경제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는가. 성장의 잠재력을 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금융산업은 꾸준히 발전하여 경제 성장을 투자 재원을 조달하였다. 금융 산업의 부실화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금융산업의 발전없이 실물 부문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산업화 초기의 제한된 가용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금융에 대한 정부의 강도 높은 개입은 불가피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금융은 저축의 부족으로 인한 산업 자금의 조달이 어려운데 비하여 정부가 의도하는 투자활동수준은 높았다. 그런데 장단기 금융시장은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은 대출을 통한 통화의 공급이 불가피하였고, 중앙은행은 각종 정책 금융제도를 마련 일반 은행의 취급 유인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그 때 그 때의 금융시장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제도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즉, 국민경제의 실물부문으로부터의 금융수요의 변화와 국민소득 향상에 따른 자금 잉여부문의 선호 변화에 따른 자금 잉여부문의 선호변화에 따라 정책 당국이 적절하게 새로운 금융기관을 신설하거나 기존 기관에 대하여 새로운 금융상품을 허용해주는 기민성을 보인 데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민영화된 은행과 독립된 통화당국으로 구성된 금융제도는 정부 통제하의 금융 제도보다 자금 배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국내 저축 동원과 바람직한 자원 배분에 있어서 시장 기능과 시장 유인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 저축이 부족하고 금융 기관의 신용이 부족한 상태에서 민영화된 은행과 독립된 통화 당국이 산업 자원의 조달을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한국의 일인당 소득이 너무 낮아 정책적인 유인이 있더라도 국내 금융 저축의 동원이 어려뚖을 상황이다. 또한 농업과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대부분의 차입자는 대부자와 마찬가지로 농민, 소기업 및 소상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자금 수요도 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단기이며 소액이다. 이러한 특징은 정부의 개입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다수의 소규모 전문 금융기관으로 이루어지는 지역에 기반을 둔 영세규모의 (atomistic) 자금 및 자본 시장의 발달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금융 제도가 정부 통제하의 금융 제도보다 저축 동원에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격상 주로 편의 제공 위주(accomodating)이었다. 이러한 금융 제도는 공업 부문의 발전을 선도하지도, 공업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산업화 초기에 정부의 신용에 의하여 국내 자금과 외자를 조달하여 산업 부문에 배분되도록 한 것은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외자 도입의 경우 기업 신용이 낮아 정부가 지불 보증을 안해주면 어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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