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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지금은 때가 아니다

97년 말에 닥친 외환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었다.
우리 경제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는 인식은 90년대 중반부터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고비용 저효율' 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당시 정부 내에서도 어느 정도 있었다.
96년부터 노개위와 금개위를 구성해 노사관계 개혁과 금융산업 구조조정 방안을 논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96년 말 비록 노동관계법의 날치기 통과와 이의 철회라는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여야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정리해고제의 도입과 무노동 무임금 원칙과 같은 어려운 문제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영원히 고비용 저효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런 국가적 차원의 결정을 내린 국회의원들이 바로 지금 국회의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결국 경제위기를 당하고 말았는가.

그것은 당시 무력화된 대통령과 이익집단의 반발 때문에 입법화된 개혁조치들이 제때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가 만든 개혁방안들이 그대로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의 요구에 의해 시행됐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경제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었고, 또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우리 손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경제위기를 당했고, 외세에 의해 개혁을 강요당했다.

왜 우리는 우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분란에 빠지기만 하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 민족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 경제 체질이 강화돼서라기보다 다분히 정책적인 경기부양과 일시적 엔화강세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연출된 반짝 경기가 단기적으로 국민의 민생고를 다소 완화해주고, 집권당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을지 모르나, 아직도 고비용 저효율을 초래했던 과거의 나쁜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고, 넘어야 할 고비가 아직도 국내외적으로 산적해 있는 우리 경제를 놓고 경제위기가 끝난 것처럼 정부가 앞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그동안 애국심과 위기극복의 일념으로 고통을 참아온 근로자와 국민에게 보상심리를 유발하고 긴장의 이완을 초래해 애당초 우리 경제를 붕괴시킨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불거지고 있는 노동계의 요구와 노사정(勞使政) 갈등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지난 2년간 우리가 뭐하자고 이 고생을 한 것인가.
잘못된 제도와 관습을 고쳐 우리 경제 체질을 강화하고 다시는 경제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경제가 회복되고 일자리가 다시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경제가 조금 나아졌다고 정부와 기업.노조가 다시 예전의 잘못된 행태로 되돌아간다면 지난 2년 동안의 고생은 무의미한 헛고생이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또다시 계절병인 정치열병에 휩싸여 자체 문제해결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불과 3년 전 지금 국회의원들이 임기 초에 우리 경제를 고비용 저효율의 한국병에서 건져내보겠다고 만든 개혁조치들이 다시 그 이전 상태로 되돌려지려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노사정 갈등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도 수십만명의 실직자가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노조가 무슨 명분으로 파업과 거리투쟁을 한다는 말인가.

필자는 우리나라 근로자들과 노동계 지도자들의 애국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지금 그런 요구를 해도 된다고 믿도록 만든 정부의 홍보와 경제정책에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노사정 갈등은 정부와 정권 담당자들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다.

장밋빛 비전과 선심공약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얼마 동안은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없는 것이 경제현실이다.

현 정부는 그동안 모든 사람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약속을 남발하다가 지금 신뢰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라도 정부는 국가경영의 정도를 걸어야 한다.
그러면 역사의 정당한 평가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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