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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제 2 절 인플레이션 이야기

제 2 절 인플레이션 이야기


1. 한 지붕 두 가족


물가는 끊임없이 변동한다. 오르내림을 거듭한다. 다만 물가의 등락이 수치로 발표되다 보니 사람들은 물가의 움직임 속에 담겨져 있는 중요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기 쉽다.

봉수네와 일룡이네는 한지붕 두가족이다. 아래층에 사는 일룡이네는 중년의 집주인으로서 집살 때 빌린 돈을 갚느라고 승용차가 없이 지낸다. 윗층에 사는 신혼부부인 봉수네는 전세로 살지만 주말이면 자가용을 타고 교외로 나간다. 이들은 서로를 바보같이 산다고 흉본다.

"버는 돈을 저렇게 먹고 즐기는대만 쓰다가는 평생 가도 전세집 신세를 못면할거야. 우리야 자동차가 없어서 조금 불편할 뿐이지, 집을 사두기를 참 잘했어. 일단 집을 장만해놨으니, 이사 걱정 안해서 좋고, 집값이 오른다 해도 걱정할 것 없고. 이제 은행에서 빌린 돈만 갚으면 돼. 돈이야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자꾸 떨어지니까. 빚진 돈 갚는 부담도 점점 떨어질거야."

오늘도 드라이브와 외식을 즐기고 돌아온 신혼부부 봉수네는 2층으로 올라가면서 빈정거린다. "이 좋은 날씨에 저렇게 집안에만 쳐박혀 낑낑거리며 살아서 뭐해. 젊어서 멋지게 살아야지.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집 한채 갖고 있다고 별건가.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만, 가버린 청춘은 다시 올리 만무할걸."

과연 누가 바보처럼 살고 있을까. 그 대답은 여러분의 가치판단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다. 1년전에는 1천원으로 사과 2개를 살 수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은 사과 1개만 살 수 있다고 하자. 같은 1천원을 가지고 종전에는 사과 2개와 바꿀 수 있었는데, 지금은 1개와 바꿀 수밖에 없으니 1천원의 값어치가 떨어진 것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자면 돈으로 표시한 사과의 값어치가 올라간 것과 같다. 즉, 1년전에는 사과 1개에 5백원이었는 데 지금은 1천원이므로 사과의 값이 2배나 오른 것이다. 그런데 1년전에 비해 사과값만 오른 것이 아니라, 오징어, 쌀, 햄버거, 구두, 버스요금, 목욕요금 등 전반적인 재화 및 서비스 요금이 다 올랐다고 하면, 이는 물가가 올랐다고 말한다. 또는 같은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의 양이 줄었으므로 화폐가치가 하락했다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물가상승과 화폐가치의 하락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 할머니와 돈바구니


이때 물가가 일정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가리켜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고 한다. 인플레이션의 유래는 남미의 소장수로부터 나왔다. 어느날 소장수가 소에게 소금을 억지로 먹였다. 물먹인 소를 팔기 위해서였다. 소금을 먹은 소는 목이 말라 물을 몽땅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물먹인 소의 팽팽해진 배. 그것을 영어로 인플레이트(inflate, 부풀리다, 팽창시키다)라고 표현했으며, 인플레이션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인플레이션은 풍선을 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풍선에 바람을 넣으면 풍선이 부풀어 오른다. 사람들은 이 때 풍선이 커진 것으로 착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풍선의 무게는 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는 것이다. 오히려 부풀어진 풍선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은 부풀어오른 풍선과도 같다. 그래서 커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속빈 강정과도 같다. 실속이 없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당시에 일어났던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어느날 할머니가 장을 보러 가고 있었다. 당시 독일은 전후배상문제 등이 얽혀 마르크화를 남발한 나머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던 때였다.

살인적인 물가폭등으로 화폐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져 돈을 왠만큼 가지고 가서는 이쑤시개 하나도 사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바구니에 가득 돈을 담고서 시장에 가던 참이었다. 한참을 가다가 잠깐 쉰 할머니는 돈바구니를 챙기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돈만 수북히 쌓여 있고 바구니는 감쪽같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물가가 터무니없이 올라 화폐는 휴지조각에 불과하고 실물의 가치만이 선호되어 나타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3. 미망인과 예금


이야기는 또 있다. 독일 어느 도시에 한 미망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스위스로 건너가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독일은행에 60만 마르크를 예금해놓고 스위스로 떠났다. 4년만에 독일로 다시 돌아온 그녀의 집에는 은행으로부터 3통의 우편물이 와 있었다.

첫번째 것은 평소에 잘 알던 은행원이 보낸 것이었는데, "부인이 당은행에 맡기신 거액의 예금을 차라리 다른 곳에 투자하시길 권합니다.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질 전망이니 다른 실질적인 것에 투자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언제 시간이 나시면 저와 상의하도록 하십시오."

두번째 편지는 다른 은행원이 쓴 것이었는데, "귀하의 예금은 액수가 너무 적어서 은행 입장에서 더 이상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예금을 찾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 편지에는 그녀가 스위스에서 돌아오기 몇주 전에 보낸 것으로, "아무리 연락을 드려도 소식이 없어서 귀하의 구좌를 임의로 폐쇄했읍니다. 현재 저희 은행에서 보유하고 있는 소액권이 없어서 백만 마르크짜리 지폐를 동봉합니다."

그래서 이 미망인은 지폐를 찾으려고 봉투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지폐는 보이지 않고 겉봉투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백만 마르크짜리 우표만 붙어 있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60만 마르크의 예금이 4년만에 우표 한 장 값에도 못미치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경제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4. 말의 인플레이션


우리가 늘상 하는 말의 표현에서도 인플레이션 현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대를 했다 하면 '결사반대'요, 슬픔도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이다. '살을 에이는 추위'요, '뼈를 깎는 아픔'이다. 이처럼 말의 인플레이션 속에 살다 보니, 평범한 표현으로는 본래의 의도를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 '좋다'는 표현이 '너무 좋다'로도 모자라 '너무 너무 좋다'가 되더니, 이제는 '진짜 너무 너무 좋다'가 되었다.

약간의 말의 인플레이션은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도가 지나치다 보면 이쪽의 좋은 의도도 상대방쪽에서 할인하여 듣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말의 인플레이션은 언어의 신뢰도를 떨어뜨려 불신풍조를 야기시키는 좋지 못한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것도 알고 보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화려한 말로 포장해서 유권자들에게 남발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말의 인플레이션은 정직성만을 떨어뜨릴 뿐이다.


5. 가마솥의 물


인플레이션은 왜 일어나는가. 한 마디로 '너무 많은 돈이 너무 적은 상품을 붸아다닐 때' 인플레이션은 발생한다. 인플레이션은 시중에 나오는 돈의 양이 생산량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할 때 발생하며, 증가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인플레이션율은 높아진다. 이것은 경제학에서 가장 확고하게 정립된 명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화폐량과 물가는 분명히 함께 움직인다. 그렇다면 화폐증가가 물가상승을 가져올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가. 많은 역사적 경험들은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를 분명히 밝혀준다. 상당수의 인플레이션에서는 화폐가 직접적인 원인이고 물가상승은 그 결과이다. 상당률의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돈의 흐름을 바로 잡는 것이다. 돈이란 재화의 교환과정에서 지불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상품생산의 증가 없이 돈만 많이 풀어대면 물가만 뛸 뿐 아무 것도 좋아지지 않는다.

화폐량과 물가의 관계는 장작에 불을 지펴 가마솥의 물을 끓이는 경우와 비슷하다. 이 때 장작은 화폐량과 같고 물은 물가와 같다. 처음에 장작불을 지피면 가마솥안의 물이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다. 장작불을 계속 지피면, 이윽고 가마솥의 물이 펄펄 끓어 넘치려고 한다. 장작을 너무 많이 때서 가마솥의 물이 끓어 넘칠 때 근본원인인 장작을 빼낼 생각은 않고 끓는 물에 물만 더 붓는다면 가마솥의 물이 넘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물가가 뛰면 화폐공급량을 줄여야 한다. 근본원인인 화폐량을 줄이지 않고서는 뛰는 물가를 잡을 수 없다. 다른 어떤 처방도 궁극적으로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되면 기업이 자금난을 겪고 부도사태를 맞는 기업도 속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정부가 돈을 풀어주면 안된다. 그것은 일부의 기업들을 위해 인플레이션을 조장함으로써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결과 밖에 안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돈을 느슨하게 풀었을 때 경제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곤 했다.


6. 술과 인플레이션


인플레이션은 술을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술은 처음에 마시기 시작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저절로 흥이 나서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다. 그래서 한 잔 더 마시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기분이 술을 청하고 술이 기분을 부른다. 인플레이션도 처음에는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나라에서 인플레이션이 처음 진행될 때는 여러가지 좋은 효과들이 나타난다. 화폐의 증가는 사람들의 지출을 증가시킨다. 일자리가 늘어나고, 사업은 활기를 띠며, 거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처음에는 그렇다.

그러다가 술이 정도에 지나치게 들어가면 서서히 나쁜 증상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이 취했다고 해도 들으려 하지 않으며, 술주정을 부리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숙취상태에서 깨어날 때는 머리가 무겁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숙취를 풀기 위해 해장술이라도 마시는 지경에 이르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알콜중독자의 신세가 되어 인생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하면 경제에도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임금이 명목상으로는 상승했지만, 실질구매력은 감소했음을 알게 된다. 기업가들은 생산비의 상승으로 제품의 가격상승 없이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격인상과 수요감소가 맞물리면서 인플레이션의 나쁜 효과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시적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성장은 둔화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화폐증가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마치 알콜중독자가 해장술로 숙취를 풀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알콜중독과 인플레이션의 공통점은 처방에서도 발견된다. 알콜중독의 처방을 말로 하기는 쉽다. 금주가 최선인 것이다. 그러나 이 처방을 실행하기는 어렵다. 술을 끊어야 하는지 알면서도 한 잔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처방도 마찬가지이다.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실행하기는 어렵다. 화폐량의 과도한 증가가 인플레이션의 중요한 원인이듯이 화폐증가율의 감소가 인플레이션의 유일한 중요 처방이다. 문제는 처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아주 쉽다. 정부가 화폐의 증가속도를 늦추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정치적 의지가 과연 있느냐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질병의 치료에 따르는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느냐에 있다.


7. 아르헨티나의 고민


인플레이션은 그 직접적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일종의 질병이다. 그것도 위험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제때에 억제하지 못하면 사회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도 알고 보면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궁전처럼 으리으리한 목욕탕의 건설이 로마를 망하게 했다는 말도 있지만, 당시 로마사람들의 사치와 낭비가 인플레이션을 가져 왔고 결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후 러시아와 독일의 '초(超)인플레이션'은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등장을 가져왔다. 오늘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거듭되는 경제적 불안과 정치혼란으로 이어져 군사정권의 출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0세기초만 해도 세계 제6위의 부자나라였던 아르헨티나. 그러나 연간 약 1,00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사치와 낭비는 여전하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15% 정도가 자가용 헬기에 자가용 요트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국내 항공기를 이용하는 승객 중 10%만이 요금을 내고 나머지는 공짜로 타고 다닌다고 한다.

세계에서 축구 잘하기로 유명한 나라인 아르헨티나는 인구의 95%가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모여 산단다. 그런데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산이 하나도 없고 도시 전체가 평야지대라고 한다. 아무데나 물컵을 놓아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단다. 게다가 기후가 좋아 잔디가 무성한 덕분에 아무 곳에나 골대만 세우면 훌륭한 잔디구장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러니 축구를 잘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경제가 엉망이니 어떡하랴. 그 좋은 자연조건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때문에 지금은 세계 84위의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8. 인플레이션의 퇴치


밀턴 프리드만(M. Friedman)과 같은 경제학자는 인플레이션을 퇴치하는 것이 알콜중독자가 술을 끊거나 애연가가 담배를 끊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인플레이션은 모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인플레이션의 질병을 앓아본 국가와 국민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안다. 독일의 경우에는 제1·2차 세계대전후의 지독한 경험 때문에 무언가 인플레이션 대책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 결과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전후 줄곧 낮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미국경제의 경우는 그러한 의지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것이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훨씬 높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19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물가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플레이션이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일부러 인플레이션정책을 채택하는 경우도 있다. 경기회복이 필요한 경우이다. 심각한 불황으로 인해 가라앉은 경기를 정상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할 때 취하는 정책이다. 이것을 '리플레이션'(reflation)정책이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1932년 이후 미국이 실시한 뉴딜정책을 들 수 있다.

인플레이션과 반대되는 말로 디플레이션(deflation)이 있다. 이것은 경기가 나빠 물건은 잘 안팔리고 생산이 줄어 물가가 내리는 현상이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최근 많이 볼 수 있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은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불경기라는 점에서는 디플레이션과 비슷하나 물가가 오른다는 점에서는 인플레이션과 비슷한 것이다. 이는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가 겪고 있는 골치거리이기도 하다.


9. 10원짜리 동전의 운명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돈의 가치가 떨어지다 보니 천대받는 것 중의 하나가 동전이다. 1원짜리와 5원짜리 동전이 사라진 것은 옛날이고, 10원짜리나 50원짜리도 푸대접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공중전화를 걸고 남는 몇 십원 정도는 아까워 하지 않으며, 택시요금에서 50원 단위의 거스름돈이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 시중의 슈퍼마켓이나 구멍가게들은 10원짜리 동전을 구하느라 여념이 없다. 물건을 사가는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주어야 하는데 10원짜리 동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예 1백원짜리를 내주자니 물건 팔아 손해를 보는 것이고 그렇다고 거스름돈을 안줄 수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이런 사정은 일년 열두달 쉬지 않고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의 경우 더욱 심하다.

이 때문에 은행이나 우체국을 돌며 미리부터 눈도장을 찍어 놓거나 아니면 동네 꼬마들에게 10원짜리로 5백원을 가져오면 6-7백원을 주면서 조달하기도 한다. 은행에서 받아오는 동전은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손님이 받아만 가고 가져 오지는 않아 이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예전 같으면 10원짜리를 버스회사에서 바꿔올 수도 있었고 가게에 공중전화라도 설치해 놓으면 제법 쌓이곤 했었으나 이제는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길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을 만큼 가치가 떨어진 10원짜리지만 아직 돈으로서의 기능은 갖고 있다. 게다가 10원짜리 제조비용이 24원 44전이나 된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10원짜리 모으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지만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구득난이 심화된다면 1원짜리나 5원짜리처럼 역사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현재 1원짜리와 5원짜리는 제조를 중단한데다 국고수납때도 10원 미만은 절삭토록 되어 있어 10원짜리가 언제 이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이는 우리 돈의 가치를 잘 말해 주는 현상이다. 외국상품의 가격표를 보면, 가령 '10달러 5센트' 식으로 몇 달러 몇 센트까지 표시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 돈의 1원, 1전에 해당되는 작은 단위까지 표시하는 것만 보아도 돈의 가치가 우리보다 훨씬 높고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작은 돈도 소중히 여기며, 거스름돈은 반드시 작은 것부터 받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상품에 표시되어 있는 가격표를 보면 55,000원, 150,000원 하는 식이다. 100원 단위나 10원 단위는 아예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길을 가다가 주머니에서 10원짜리 동전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창피해서 줍지도 못하고 태연한 척 황급히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뒷모습이다. 작은 돈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씀씀이가 헤프다는 증거이며, 인플레이션 현상에 모든 사람들이 흠뻑 절여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바람만 잔뜩 들어간 얇디 얇은 풍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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