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절 합리적인 소비
1. 소비가 뭐길래
소비(consumption)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유상으로 구입하는 일체의 경제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모든 욕구충족은 바로 이 소비행위를 통하여 달성된다.
그런데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득이 있어야 한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화폐적 지출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까운 소득의 일부를 지출하여 소비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러한 화폐의 지출로 인하여 느끼는 '서운함'보다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소비하는데서 느끼는 '즐거움'이 더 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지출한 금액보다 못한 즐거움만을 느낀다면, 그러한 재화나 용역에 대한 소비행위는 잘못된 선택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소비란 모든 경제행위의 궁극적인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모으는 것도 결국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기 위한 방법이며, 따라서 저축도 알고 보면 미래의 소비를 위한 현재의 절약인 셈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소비야말로 모든 경제활동의 으뜸이자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건전한 소비활동은 기업의 생산을 증가시킴으로써, 고용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소득을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더 풍족한 소비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2. 밥그릇과 밥맛
가지고 있으면 든든하고 없으면 허전한 것이 돈이다. 지갑이 두툼할 때와 홀쭉할 때를 비교해 보라. 외출시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가 달라질 것이다. 돈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 물건의 가치가 지불하는 돈의 가치보다 더 큰 만족감을 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폐를 지출하고 재물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재물을 구입하는데서 얻는 총효용가치가 그 재물을 구입하는데 실제로 들어간 총화폐가치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때 소비자가 느끼는 즐거움 또는 만족감을 효용(效用, utility)이라고 한다. 이 효용은 소비하는 재화마다 다르며, 같은 재화일지라도 소비량에 따라 다르다. 즉, 동일한 재화일지라도 첫번째 단위의 소비에서 느끼는 효용과 마지막 단위의 소비에서 느끼는 효용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할지라도 배고플 때 먹는 첫번째 숟가락의 밥맛과 배가 무척 부른 후에 먹는 마지막번째 숟가락의 밥맛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여기서 맨 나중에 먹은 밥맛이 주는 효용을 한계효용(限界效用, 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계효용은 밥을 먹는 수량이 늘어남에 따라 증가하지만, 그 증가하는 정도는 점점 작아진다. 왜냐하면 밥을 먹는 수량이 점점 많아질수록 밥을 더 먹고 싶은 욕망이 점점 작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한계효용은 밥을 먹고 싶은 욕망의 크기에 비례하고 밥을 먹는 양에 반비례한다.
이와 같이 밥을 먹는 양이 많아짐에 따라 밥으로부터 얻는 한계효용이 점점 작아지는 현상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限界效用遞減의 法則, law of diminishing 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다 보면 질린다. 이 때 질린다는 것은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는 의미이다.
3. 서울역 폭행사건
돈의 경우에도 효용은 존재한다. 돈 때문에 일어난 많은 사건 중에서 상당히 오래 전에 서울역에서 있었던 폭행사건은 돈의 효용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 사건은 50원 때문에 발생했다.
서울역에서 150원을 받고 등짐을 운반해 주기로 했는데, 운반한 다음 짐주인이 "50원만 깍아 주라"고 했다. "50원이면 어디에다 쓸지 모르는데, 50원만 깎아 주라니 말이 되느냐"고 짐꾼은 화를 냈다. 그러다가 둘은 실랑이를 벌였고, 급기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짐꾼이 짐주인을 마구 때려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짐주인에게는 50원이 사소한 돈이었을지 모르지만, 짐꾼의 입장에서는 큰 액수로 생각되었기에 급기야는 폭행까지 저지르고 말았는지 모른다.
이처럼 같은 액수의 돈이라도 그 가치나 효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1천만원 중의 1천원과 1만원 중의 1천원에서 느끼는 애착의 정도는 분명히 다를 것이며, 또 그 돈을 어떻게 해서 벌었느냐에 따라 돈에 부여하는 가치도 다를 것이다.
앞에서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1만원으로 소비를 한다고 해도 소득이 적은 사람과 소득이 많은 사람의 소비행태를 보면 자못 다르다. 소득이 적은 사람에게는 1만원의 화폐가치가 상대적으로 클 것이다. 따라서 소비를 함에 있어서도 구입하는 물건에서 1만원 이상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지를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한편 소득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1만원의 화폐가치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비를 함에 있어서도 그 물건을 꼭 구입해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구입하기보다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구입하기가 쉽다.
또한 같은 소득일지라도 어떻게 벌었느냐가 소비에서는 중요하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은 같은 금액이더라도 그만큼 값진 돈인 셈이다. 따라서 그러한 돈에 부여하는 가치 또한 클 것이므로 어떤 재화의 소비로부터 얻는 심리적 만족이 그보다 더 클 경우에만 구입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소비행태는 당연히 근검과 절약을 바탕으로 한 알뜰한 소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정상적인 노력에 의해서 얻은 소득이 아닌 경우에는 같은 액수의 돈이더라도 성실하게 번 돈과는 그 가치가 다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총화폐가치가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기 때문에 소비하려는 재화로부터의 즐거움이 그 돈의 가치보다 더 클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소비행위를 하기가 쉽다. 결국 같은 금액의 돈이더라도 거기에 부여하는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며, 동일한 가격의 물건일지라도 그로부터 느끼는 만족감 또한 제각기 다른 것이 사실이다.
4. 현명한 주부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화를 소비하는데서 얻는 만족감, 즉 효용은 재화마다 다른 것이 사실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소비하는 것이 경제적 소비, 즉 합리적 소비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소비하는 모든 재화로부터 얻는 한계효용이 각각의 재화마다 똑같아지도록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계효용균등의 법칙(限界效用均等의 法則, law of equi-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효용이란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만족감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로 잴 수 없다는데 있다. 만일 효용을 측정할 수 없다면, 이는 실생활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효용은 비록 자로 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1만원을 가지고 쌀과 소금을 산다고 해보자. 어느 것을 얼마만큼 살 것인가는 두 재화의 한계효용이 같도록 구입하면 된다. 즉, 1만원이라는 일정한 소득을 가지고 쌀과 소금을 구입해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쌀과 소금의 한계효용이 같도록 구입량을 정하고 지출을 해야 한다.
만일 쌀과 소금을 똑같이 5천원 어치씩 구입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쌀의 양은 조금인데 비해 소금은 상당히 많은 양이 될 것이다. 이는 정작 중요한 쌀은 조금 밖에 못사고 덜 필요한 소금은 많이 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입량이 적은 쌀의 한계효용은 대단히 큰데 비해, 필요 이상으로 구입량이 많은 소금의 한계효용은 매우 작을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다. 만족이 그리 크지 않은 선택인 것이다. 따라서 선택을 바꿔야 한다. 즉, 쌀을 더 많이 구입하고 소금의 구입량은 줄여 나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선택이 된다.
쌀의 구입량을 늘려감에 따라 대단히 컸던 쌀의 한계효용은 점점 체감한다. 반면에 소금의 구입량을 줄여감에 따라 매우 작았던 소금의 한계효용은 점점 커진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면 어느 단계에서는 쌀과 소금의 한계효용이 같아지는 수준이 존재할 것이다. 그수준은 1만원으로 쌀은 많이 구입하고 소금은 적게 구입하는 선택점일 것이다. 결국 동일한 지출을 통하여 최대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구입하는 모든 재화로부터의 한계효용이 같도록 구입량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가정에서 먹는 식품들을 유심히 살펴 보면, 쌀, 김치, 고추, 콩나물 등의 순으로 많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주부들이 무의식 중에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만일 쌀보다 콩나물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집이 있다면, 그 집은 살림살이를 잘못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많은 콩나물을 일부만 먹고 나머지는 아마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콩나물에서 얻는 한계효용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쌀에서 얻는 한계효용이 크므로, 쌀의 구입량을 더 늘리면 한계효용이 증가하여 만족이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쌀의 구입은 더 많이 하고 콩나물의 구입은 적게 하는 것이 만족을 극대로 하는 합리적인 소비행위인 것이다.
5. 뷔페 먹는 법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은 뷔페 요리를 먹을 때에도 나타난다. 뽀식이·뽀동이·뽀병이는 올해 같은 대학에 진학한 유치원 삼총사이다. 하루는 '뽀뽀뽀 뷔페'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1인당 1만원씩이었다.
홀에는 사람들로 붐볐고, 요리 종류도 수십 가지나 되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뽀식이는 다소 긴장했다. 얼떨결에 불고기만 몽땅 담아서 자리에 앉았다. 뽀동이는 이것 저것 다양한 음식을 같은 양만큼 가져다 먹었다. 뽀병이는 이 요리 저 요리 조금씩 담아서 먹고는 그 중에서 맛있는 것만 골라 두 번 세 번씩 가져다 먹었다.
어쨋든 배불리 먹은 세 친구는 뷔페의 문을 나섰다. 그런데 나오는 세 사람의 표정이 각기 달랐다. 뽀병이는 매우 흐믓한 표정이었다. 뽀동이는 그런대로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뽀식이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똑같은 1만원 짜리 뷔페를 먹었지만 이들의 표정이 저마다 다른 것은 한계효용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뽀식이는 불고기만 먹다 보니 배는 불렀을지라도 마지막 한 점의 불고기에서 얻은 한계효용이 작았다. 뽀돌이는 이것 저것 골고루 먹었으므로 한계효용은 뽀식이보다 훨씬 컸지만, 같은 양만큼씩 먹다 보니 한계효용이 더 큰 요리, 더 작은 요리들이 있었다. 그래서 최고의 만족을 얻지는 못했다.
뽀병이는 일단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조금씩 갖다 먹고, 그 중에서도 더 맛있는 요리는 더 많이 갖다 먹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하니 요리마다의 한계효용이 같아져서 동일한 1만원으로 세 사람 가운데 최고의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6. 옷값과 효용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은 모든 소비생활에 다 적용된다. 정해진 액수의 지출로부터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면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 장보기를 할 때도 즉흥적인 기분에 이거 저거 사다 보면 정작 사야 할 물건은 돈이 떨어져 못사는 수가 있다. 계획성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액수의 돈이더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기도 하고 형편없는 가치만을 갖기도 한다. 현명한 사람은 같은 돈에서도 더 큰 만족을 얻는 것이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쓰기 위해서 벌기 때문이다. 결국 꼭 필요한 용도에 꼭 필요한 지출을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소비를 하는 것이며,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을 잘 지키면,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소비와 필요하지 않은 소비를 구별할 수 있게 되어 합리적 소비를 하게 된다. 또한 합리적 소비를 하게 되면 저축도 늘게 되어 그만큼 돈을 버는 셈이 된다.
합리적 소비와 효용의 문제는 옷구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보통 우리나라 주부들은 '할인전'이나 '재고전'에 약하다. 잘만 고르면 아주 싼 가격에 마음에 드는 좋은 옷을 구입할 수 있으니 매력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곰곰 따져볼 대목도 있다. 우선 이들 행사는 시즌 중반 이후 시작되기 때문에 입는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3월초 의류업체들이 봄 신상품을 막 내놓기 시작했을 때 사 입었다면 석달쯤 제대로 입을 옷을, 4월 들어 세일마감기에 샀다면 한달도 채 입기 힘들다.
물론 시즌초에도 전년도 제품의 재고전이 있다. 그러나 이들 재고전에선 구색을 갖춘 옷 한벌 구입하기가 힘들다. 유행에 맞지 않는가 하면, 섬유가 상한 것을 고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다음 해에는 십중팔구 못입게 된다.
보통 의류업체들은 2월말, 4월말, 8월말, 10월말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신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하고 한달간의 정상영업 뒤에 세일에 들어간다. 이를 파악해 두었다가 어느 시기에 옷을 구입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합리적 옷구매'란 얼마나 싸게 샀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최대효용을 이끌어 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7. 가격파괴
그런데 같은 효용일 경우에는 가격이 좀더 저렴한 상품을 구입할 수만 있다면 소비자로서는 큰 만족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소비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현상 한 가지가 있다. '가격파괴' 현상이 그것이다. 국내에서는 1994년 하반기부터 창고형 도소매점, 디스카운트 스토어 등 신종 업체들이 등장하면서 가격파괴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에 자극을 받아 대부분의 백화점들도 기존 매장 안에 별도의 할인판매코너를 개설해 신종 업체들과의 가격경쟁에 나서는 등 가격파괴 현상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잘 알려진 상술 가운데 박리다매(薄利多賣)라는 방식이 있다. 이는 일본의 대표적 상술이라는 오사카 상술의 비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 상술을 '바보상술'이라고 비웃는다. 많이 팔면 많이 벌어야지, 많이 팔아 적은 이익을 남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이다. 박리경쟁은 상인들이 서로의 목에 밧줄을 걸고 잡아당기는 '목죄기 경쟁'이라는 것이 유태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유통업계에는 신종 박리다매 방식이 등장하여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바로 가격파괴 현상이 현대판 박리다매인 것이다. 물건은 싸게 팔면서 이익은 챙길만큼 챙기는 새로운 상술이다. 미국과 일본의 소비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이 값내리기 경쟁은 이제 세계적인 조류가 되었다. 비단 가격인하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통혁명을 가져올 수도 있는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백화점이 개장한 회원제 할인점에는 몰려드는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회원수만도 6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대단한 기세이다. 국내에도 급속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미국에서는 백화점과 재래시장이 박리다매와 초저가를 표방하는 할인점에 밀려난지 이미 오래이다. 미국의 대표적 할인업체인 월마트의 1994년 한해 동안 매출액은 무려 673억 달러로 미국내 유통업체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소비자들을 몰려들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알고 보면 간단하다. 첫째, 제조업자들로부터 현금으로 대량구매를 함으로써 싼 값에 물건을 공급받는다. 이 과정에서 대량구매를 무기로 하여 유통업자가 제조업자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전통적으로 가격은 공급자가 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유통업자가 싼 가격을 지정하고 생산업자가 이를 거부하면, 질좋고 싼 제품을 찾아 거래선을 바꾸어 버린다. 공급자의 유통자 지배가 유통자의 공급자 지배로 바뀐 것이다.
둘째, 고객들이 스스로 고르고(self-selection), 스스로 포장하고(self-package), 스스로 배달하는(self-delivery) '3S 방식'을 도입하고, 실내장식을 없애며, 무포장제를 실시하여 부대비용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절약한 비용만큼 파격적인 낮은 가격으로 파는 것이다. 결국 최대한 싸게 사서 최대한 싸게 판다는 것이 가격파괴를 선도하고 있는 할인업체들의 기본전략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가격파괴는 소비자들에게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장이 다소 허술하고 셀프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원가에 가깝게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물건값이 비싼 나라도 없다. 해외 유명상표가 달린 국산제품만 해도 그렇다. 3퍼센트의 브랜드 로얄티를 지불했다면 제품가격은 3퍼센트 더 비싸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가격표는 2-3배로 껑충 뛰어 있다. 터무니 없이 높게 매겨진 정가를 50퍼센트 세일 해준들 여전히 비싸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공급자의 가격횡포의 한 사례이다. 가격파괴는 과거의 가격 관행을 깨뜨리는 신선한 충격이다.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그처럼 턱없이 높은 가격을 주고 산단 말인가." 이로써 소비자들의 가치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할인점들이 물건을 얼마나 싸게 파느냐 하는 것과는 별도로 '합리적 소비생활'이라는 시각에서 소비자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소비자들이 뚜렷한 소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적 소비는 곧 절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절약이란 단순히 물건을 권장소비자가격보다 얼마나 싸게 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파격적으로 싼 제품을 얼마나 많이 손에 넣었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입하는 것, 그것이 절약의 요체요, 합리적 소비의 지름길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가격파괴가 유통시장에도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대형 할인업체들이 유통혁명을 주도하면서 가격결정권이 서서히 유통업체로 넘어가고 있다. 당연히 제조업체의 가격지배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가격파괴가 가져온 유통혁명은 도매업과 제조업까지를 포함한 상품의 전체 유통경로에 걸쳐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가격경쟁을 몰고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도 유통혁명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은 국내의 할인점들은 저(低)마진의 가격정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할인점은 땅값이 싼 도시 근교에 대규모 부지를 확보해 넓은 매장과 주차장을 갖추고 점포개설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다. 반면 국내 할인점들은 대부분 도심권에 위치해 점포개설비용부터 높게 책정된데다 인건비·물류비 등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결국 비용절감이 뒷받침되지 않는 저가(低價)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또 제조업체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구축해온 유통망 장악력을 바탕으로 신종 할인업체와 가격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신종 할인업체들이 대량구매를 앞세워 납품가격을 깎으려 드는 반면, 제조업체들은 기존 유통업체와의 형평성을 들어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격파괴가 계속 촉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가격정책의 관점에서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가령 현재의 권장소비자가격을 없애고 공장도가격만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불필요한 유통마진을 줄이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유통시장 완전 개방을 앞두고 선진국형 유통업체들이 대거 상륙하면서, 국내 유통업계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유통혁명의 형태는 다양할지 모르나 원칙은 간단하다. 그것은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가장 싸고 편리하게 제공하자는 것이다. 또 경쟁은 이같은 변화를 더욱 빠르게 하고 있다.
8. 누가 중산층인가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하고 합리적인 소비생활의 습관을 기르게 해주는 것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계부'이다. 가계부는 1년 동안 가계의 수입 및 지출 내역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계획성있는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도록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자신이 고소득층인지 저소득층인지를 판별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말로 중산층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각종 단체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한국민의 60-70%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응답한다. 흔히 중산층이라고 하면 생활수준이 중간 정도인 계층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다분히 심리적인 중산층의 개념을 반영한 것이지, 정확한 의미에서의 실제적 중산층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중산층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 우선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중산층이라고 해야 할지도 정립된 견해가 없으며,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도시의 경우 최소한 무주택자를 중산층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볼 때, 실제로 현실적 중산층은 심정적 중산층보다 적은 것만은 틀림없다고 보여진다.
경제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중산층을 고소득층도 아니고 저소득층도 아니면서 문화생활을 무리없이 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보통 정기적으로 식구들과 외식도 하고, 신문도 구독하면서 수영장이나 헬스클럽에 나가 건강관리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진 계층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이 때 고소득층인가, 저소득층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으로써 경제학에서는 흔히 엥겔계수를 사용한다. 엥겔계수(Engel coefficient)란 150년전 독일의 사회통계학자 엥겔(C.L.E. Engel)이 처음 창안한 것으로 가계의 소비지출 중에서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따라서 수입이 많은 가계일수록 소비지출총액 가운데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므로 엥겔계수도 낮은 수치를 보일 것이다.
결국 엥겔계수가 낮은 가계일수록 그만큼 생활수준이 높다는 반증이 되므로, 사회경제지표나 문화수준의 척도로써 엥겔계수를 자주 인용한다. 일반적으로 엥겔계수가 20% 미만이면 상류생활, 25% 이하이면 여유있는 생활, 30% 이하이면 약간 여유있는 생활, 그리고 50% 이상이면 겨우 살아가는 생활수준이라고 말해진다.
일반가정에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알고 싶으면 가계부를 이용하여 측정이 가능하다. 즉, 가계부상의 1년 동안의 소비지출총액과 음식비 지출액을 따져 보면 엥겔계수로 표시한 생활수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계부 작성의 필요성과 생활화가 매우 미흡한 실정인데, 이는 살림살이를 합리적으로 꾸려 나가기보다는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운영한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가계부를 쓰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제행위를 하는 모든 집단은 1년 동안에 들어오고 나간 수입과 지출내역을 상세히 기록하여 경제활동을 분석해 봄으로써 다음 해의 보다 알찬 경제활동을 위한 중요한 참고자료로서 활용한다. 가정에서의 가계부, 기업에서의 회계장부, 그리고 정부에서의 예산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기 위해서는 예산을 잘 수립하고 집행하여 예산낭비를 막아야 한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회계장부에 많은 이익을 남겨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는 가계부를 꼼꼼히 적어 1년 동안의 가계경제를 분석함으로써, 쓸데없는 지출은 줄여 나가고 현재소비 대신 미래소비를 위해 저축을 늘려 나가는 것이 곧 부자가 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결국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은 낭비와 불필요한 소비를 자제하고 자신의 생활수준에 맞는 합리적인 소비행위를 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생활자세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엥겔계수를 보면, 도시근로자들의 경우 1980년까지만 해도 엥겔계수가 42.6%를 차지했으나, 그 수치가 점점 낮아져 1994년말에는 29.3%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체 식료품비 가운데 외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1994년 도시근로자가구의 가계수지동향'에 따르면, 1994년 도시근로자가구의 한달 외식비는 10만원을 넘어서서 전체 식료품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가용 승용차의 보편화로 소비지출액 중 교통통신비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식생활을 비롯한 소비형태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진지잡수셨읍니까"가 아침인사말인 적이 있었다. 1950년대만 해도 춘궁기가 되면 굶주린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식당집의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독이 든 복어의 알과 내장을 뒤져다 삶아 먹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분수에 넘치게 풍족한 소비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8. 밤깊은 마포종점
소비자들이 소비과정에서 얻는 효용과 관련하여 '소비자잉여'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회사원인 김영삼씨는 출퇴근시 매일 상도동에서 마포까지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종점에서 타서 종점에서 내리는 셈이다. 영삼씨는 항상 버스 맨 뒷자리에 앉는다. 궂이 뒷자리에 앉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만일 종점에서 종점까지 걷는 경우를 생각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300원만 내면 그 먼 길을 편히 올 수 있다. 어쩌다 졸고 있기라도 하면 운전기사가 깨워주기까지 하니 고맙다 못해 미안한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밤깊은 마포종점에 혼자서 내리는 날이면 미안한 생각은 더욱 더하다. 그래서 그는 뒷자리에 앉는 것이다.
과연 영삼씨는 미안해 할 필요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먼저 영삼씨가 미안해 하는 이유는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데서 얻는 편안함에 비하면 버스요금이 너무 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소비자잉여(消費者剩餘, consumer's surplus)라고 한다. 즉, 소비자잉여란 소비자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지불하는 돈의 크기보다 그로부터 얻게 되는 효용의 크기가 더 클 때 발생한다. 소비자잉여는 소비자가 구입과정에서 얻는 당연한 권리이다. 소비자잉여를 많이 얻을수록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익이 된다.
영삼씨가 미안해 하는 두번째 이유는 늦은 시간에 손님 한 두 명 태우고 다니면 버스회사가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그렇지 않다. 버스회사가 종점에서 종점까지 한 번 운행하는 데에는 어차피 일정한 비용이 들어간다. 만일 버스요금이 운행비용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버스회사는 버스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버스를 운행한다는 것은 비용보다 승객들이 내는 요금의 수입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를 생산자잉여(生産者剩餘, producer's surplus)라고 한다. 즉, 생산자잉여는 생산자가 상품을 판매할 때 실제로 받은 수입이 꼭 받으려고 했던 수입보다 많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생산자잉여가 크면 클수록 생산자의 수입은 증가한다. 결국 손님과 버스회사의 입장에서 다 같이 이득을 얻고 있는 셈이니,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탄다고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10. 미국에서 당한 이야기
효용은 시간에서도 얻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버스나 택시, 기차, 비행기 등 편리한 교통수단들이 많다. 이러한 편의장치를 이용하는 과정에서도 사람들은 효용을 얻는다.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만족을 얻는 것이다.
만일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를 간다면 어떤 기차를 이용하겠는가. 새마을호는 통일호보다 요금이 비싸다. 과연 얼마나 비싼 것일까. 이 때 기차표값만 계산하면 안된다. 기차요금 외에 중요한 비용은 '시간비용'이다. 시간도 돈 못지않게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많이 소요하는 것은 귀한 자원을 소비하는 것이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에 시간비용과 관련하여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노부부가 자식 덕택에 한번은 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오랜 여정에 시달렸던 터라 미국에 도착하고 보니 머리도 어지럽고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타국에서 큰일났다 싶어 병원으로 달려 갔다. 진찰 결과 별다른 증세는 없고 여독이 덜 풀린 탓이니 안심하고 돌아가 안정을 취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런데 병원을 나오려고 하니 진료비를 내라는 것이었다. 주사를 맞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을 준 것도 아닌데 무슨 진료비냐고 따졌지만 소용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돈을 치루었다. 호텔에 돌아와서 곰곰 생각해보니 분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에서 온 사람인줄 용케 알고 바가지를 씌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날 변호사를 찾아 가서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변호사 역시 당연히 진료비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풀이 죽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는 한 장의 엽서가 날아와 있었다. "귀하와 상담하는 동안 다른 고객과의 상담을 못했으므로 다음과 같이 상담료를 청구합니다....."
11. 통일호와 새마을호
시간비용은 사람마다의 시간가치에 따라 다르다. 시간비용은 그 시간을 다른 곳에 사용했을 때 벌 수 있는 돈이나 얻을 수 있었던 효용가치로 측정한다. 할 일 없는 사람에게는 한 시간 더 걸려도 시간비용이 높지 않기 때문에 통일호를 이용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 많거나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시간비용이 높다. 따라서 기차요금과 시간비용을 합하면 새마을호가 오히려 저렴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의 시간비용은 어떠한가. 극단적이긴 하지만 시간이 많아서 남아도는 사람은 서울에서 대전까지 걸어다닐 수도 있다. 시간비용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가능한 한 빠른 교통편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시간비용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주어진 시간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 한정된 시간을 하루하루 소비하며 살고 있다. 한 번 소비한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하루는 일생 동안 다시는 오지 않는 시간이다.
따라서 목표가 있고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 앞에서 돈의 효용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시간효용도 사람마다 다르다. 시간을 가치있는 일에 많이 배분할 때 시간효용은 증가한다. 하루 24시간을 소비하다 보면 중요한 일도 있고 사소한 일도 있다. 중요한 일의 순서대로 시간을 잘 활용할 때 가장 큰 만족을 얻는다. 이름하여 '한계시간효용균등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1. 소비가 뭐길래
소비(consumption)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유상으로 구입하는 일체의 경제행위를 말한다. 인간의 모든 욕구충족은 바로 이 소비행위를 통하여 달성된다.
그런데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득이 있어야 한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화폐적 지출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까운 소득의 일부를 지출하여 소비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러한 화폐의 지출로 인하여 느끼는 '서운함'보다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소비하는데서 느끼는 '즐거움'이 더 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지출한 금액보다 못한 즐거움만을 느낀다면, 그러한 재화나 용역에 대한 소비행위는 잘못된 선택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소비란 모든 경제행위의 궁극적인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모으는 것도 결국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기 위한 방법이며, 따라서 저축도 알고 보면 미래의 소비를 위한 현재의 절약인 셈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소비야말로 모든 경제활동의 으뜸이자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건전한 소비활동은 기업의 생산을 증가시킴으로써, 고용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고,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소득을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더 풍족한 소비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2. 밥그릇과 밥맛
가지고 있으면 든든하고 없으면 허전한 것이 돈이다. 지갑이 두툼할 때와 홀쭉할 때를 비교해 보라. 외출시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가 달라질 것이다. 돈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 물건의 가치가 지불하는 돈의 가치보다 더 큰 만족감을 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폐를 지출하고 재물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재물을 구입하는데서 얻는 총효용가치가 그 재물을 구입하는데 실제로 들어간 총화폐가치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때 소비자가 느끼는 즐거움 또는 만족감을 효용(效用, utility)이라고 한다. 이 효용은 소비하는 재화마다 다르며, 같은 재화일지라도 소비량에 따라 다르다. 즉, 동일한 재화일지라도 첫번째 단위의 소비에서 느끼는 효용과 마지막 단위의 소비에서 느끼는 효용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할지라도 배고플 때 먹는 첫번째 숟가락의 밥맛과 배가 무척 부른 후에 먹는 마지막번째 숟가락의 밥맛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여기서 맨 나중에 먹은 밥맛이 주는 효용을 한계효용(限界效用, 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계효용은 밥을 먹는 수량이 늘어남에 따라 증가하지만, 그 증가하는 정도는 점점 작아진다. 왜냐하면 밥을 먹는 수량이 점점 많아질수록 밥을 더 먹고 싶은 욕망이 점점 작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한계효용은 밥을 먹고 싶은 욕망의 크기에 비례하고 밥을 먹는 양에 반비례한다.
이와 같이 밥을 먹는 양이 많아짐에 따라 밥으로부터 얻는 한계효용이 점점 작아지는 현상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限界效用遞減의 法則, law of diminishing 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다 보면 질린다. 이 때 질린다는 것은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는 의미이다.
3. 서울역 폭행사건
돈의 경우에도 효용은 존재한다. 돈 때문에 일어난 많은 사건 중에서 상당히 오래 전에 서울역에서 있었던 폭행사건은 돈의 효용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 사건은 50원 때문에 발생했다.
서울역에서 150원을 받고 등짐을 운반해 주기로 했는데, 운반한 다음 짐주인이 "50원만 깍아 주라"고 했다. "50원이면 어디에다 쓸지 모르는데, 50원만 깎아 주라니 말이 되느냐"고 짐꾼은 화를 냈다. 그러다가 둘은 실랑이를 벌였고, 급기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짐꾼이 짐주인을 마구 때려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는 이야기이다. 짐주인에게는 50원이 사소한 돈이었을지 모르지만, 짐꾼의 입장에서는 큰 액수로 생각되었기에 급기야는 폭행까지 저지르고 말았는지 모른다.
이처럼 같은 액수의 돈이라도 그 가치나 효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1천만원 중의 1천원과 1만원 중의 1천원에서 느끼는 애착의 정도는 분명히 다를 것이며, 또 그 돈을 어떻게 해서 벌었느냐에 따라 돈에 부여하는 가치도 다를 것이다.
앞에서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1만원으로 소비를 한다고 해도 소득이 적은 사람과 소득이 많은 사람의 소비행태를 보면 자못 다르다. 소득이 적은 사람에게는 1만원의 화폐가치가 상대적으로 클 것이다. 따라서 소비를 함에 있어서도 구입하는 물건에서 1만원 이상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지를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한편 소득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1만원의 화폐가치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비를 함에 있어서도 그 물건을 꼭 구입해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구입하기보다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구입하기가 쉽다.
또한 같은 소득일지라도 어떻게 벌었느냐가 소비에서는 중요하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은 같은 금액이더라도 그만큼 값진 돈인 셈이다. 따라서 그러한 돈에 부여하는 가치 또한 클 것이므로 어떤 재화의 소비로부터 얻는 심리적 만족이 그보다 더 클 경우에만 구입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소비행태는 당연히 근검과 절약을 바탕으로 한 알뜰한 소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정상적인 노력에 의해서 얻은 소득이 아닌 경우에는 같은 액수의 돈이더라도 성실하게 번 돈과는 그 가치가 다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총화폐가치가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기 때문에 소비하려는 재화로부터의 즐거움이 그 돈의 가치보다 더 클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소비행위를 하기가 쉽다. 결국 같은 금액의 돈이더라도 거기에 부여하는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며, 동일한 가격의 물건일지라도 그로부터 느끼는 만족감 또한 제각기 다른 것이 사실이다.
4. 현명한 주부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화를 소비하는데서 얻는 만족감, 즉 효용은 재화마다 다른 것이 사실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소비하는 것이 경제적 소비, 즉 합리적 소비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소비하는 모든 재화로부터 얻는 한계효용이 각각의 재화마다 똑같아지도록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계효용균등의 법칙(限界效用均等의 法則, law of equi-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효용이란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만족감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로 잴 수 없다는데 있다. 만일 효용을 측정할 수 없다면, 이는 실생활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효용은 비록 자로 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1만원을 가지고 쌀과 소금을 산다고 해보자. 어느 것을 얼마만큼 살 것인가는 두 재화의 한계효용이 같도록 구입하면 된다. 즉, 1만원이라는 일정한 소득을 가지고 쌀과 소금을 구입해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쌀과 소금의 한계효용이 같도록 구입량을 정하고 지출을 해야 한다.
만일 쌀과 소금을 똑같이 5천원 어치씩 구입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쌀의 양은 조금인데 비해 소금은 상당히 많은 양이 될 것이다. 이는 정작 중요한 쌀은 조금 밖에 못사고 덜 필요한 소금은 많이 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입량이 적은 쌀의 한계효용은 대단히 큰데 비해, 필요 이상으로 구입량이 많은 소금의 한계효용은 매우 작을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다. 만족이 그리 크지 않은 선택인 것이다. 따라서 선택을 바꿔야 한다. 즉, 쌀을 더 많이 구입하고 소금의 구입량은 줄여 나가는 것이 보다 현명한 선택이 된다.
쌀의 구입량을 늘려감에 따라 대단히 컸던 쌀의 한계효용은 점점 체감한다. 반면에 소금의 구입량을 줄여감에 따라 매우 작았던 소금의 한계효용은 점점 커진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면 어느 단계에서는 쌀과 소금의 한계효용이 같아지는 수준이 존재할 것이다. 그수준은 1만원으로 쌀은 많이 구입하고 소금은 적게 구입하는 선택점일 것이다. 결국 동일한 지출을 통하여 최대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구입하는 모든 재화로부터의 한계효용이 같도록 구입량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가정에서 먹는 식품들을 유심히 살펴 보면, 쌀, 김치, 고추, 콩나물 등의 순으로 많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주부들이 무의식 중에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만일 쌀보다 콩나물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집이 있다면, 그 집은 살림살이를 잘못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많은 콩나물을 일부만 먹고 나머지는 아마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콩나물에서 얻는 한계효용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쌀에서 얻는 한계효용이 크므로, 쌀의 구입량을 더 늘리면 한계효용이 증가하여 만족이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쌀의 구입은 더 많이 하고 콩나물의 구입은 적게 하는 것이 만족을 극대로 하는 합리적인 소비행위인 것이다.
5. 뷔페 먹는 법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은 뷔페 요리를 먹을 때에도 나타난다. 뽀식이·뽀동이·뽀병이는 올해 같은 대학에 진학한 유치원 삼총사이다. 하루는 '뽀뽀뽀 뷔페'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1인당 1만원씩이었다.
홀에는 사람들로 붐볐고, 요리 종류도 수십 가지나 되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뽀식이는 다소 긴장했다. 얼떨결에 불고기만 몽땅 담아서 자리에 앉았다. 뽀동이는 이것 저것 다양한 음식을 같은 양만큼 가져다 먹었다. 뽀병이는 이 요리 저 요리 조금씩 담아서 먹고는 그 중에서 맛있는 것만 골라 두 번 세 번씩 가져다 먹었다.
어쨋든 배불리 먹은 세 친구는 뷔페의 문을 나섰다. 그런데 나오는 세 사람의 표정이 각기 달랐다. 뽀병이는 매우 흐믓한 표정이었다. 뽀동이는 그런대로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뽀식이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똑같은 1만원 짜리 뷔페를 먹었지만 이들의 표정이 저마다 다른 것은 한계효용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뽀식이는 불고기만 먹다 보니 배는 불렀을지라도 마지막 한 점의 불고기에서 얻은 한계효용이 작았다. 뽀돌이는 이것 저것 골고루 먹었으므로 한계효용은 뽀식이보다 훨씬 컸지만, 같은 양만큼씩 먹다 보니 한계효용이 더 큰 요리, 더 작은 요리들이 있었다. 그래서 최고의 만족을 얻지는 못했다.
뽀병이는 일단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조금씩 갖다 먹고, 그 중에서도 더 맛있는 요리는 더 많이 갖다 먹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하니 요리마다의 한계효용이 같아져서 동일한 1만원으로 세 사람 가운데 최고의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6. 옷값과 효용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은 모든 소비생활에 다 적용된다. 정해진 액수의 지출로부터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면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 장보기를 할 때도 즉흥적인 기분에 이거 저거 사다 보면 정작 사야 할 물건은 돈이 떨어져 못사는 수가 있다. 계획성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액수의 돈이더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기도 하고 형편없는 가치만을 갖기도 한다. 현명한 사람은 같은 돈에서도 더 큰 만족을 얻는 것이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쓰기 위해서 벌기 때문이다. 결국 꼭 필요한 용도에 꼭 필요한 지출을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소비를 하는 것이며,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효용균등의 법칙을 잘 지키면,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소비와 필요하지 않은 소비를 구별할 수 있게 되어 합리적 소비를 하게 된다. 또한 합리적 소비를 하게 되면 저축도 늘게 되어 그만큼 돈을 버는 셈이 된다.
합리적 소비와 효용의 문제는 옷구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보통 우리나라 주부들은 '할인전'이나 '재고전'에 약하다. 잘만 고르면 아주 싼 가격에 마음에 드는 좋은 옷을 구입할 수 있으니 매력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곰곰 따져볼 대목도 있다. 우선 이들 행사는 시즌 중반 이후 시작되기 때문에 입는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3월초 의류업체들이 봄 신상품을 막 내놓기 시작했을 때 사 입었다면 석달쯤 제대로 입을 옷을, 4월 들어 세일마감기에 샀다면 한달도 채 입기 힘들다.
물론 시즌초에도 전년도 제품의 재고전이 있다. 그러나 이들 재고전에선 구색을 갖춘 옷 한벌 구입하기가 힘들다. 유행에 맞지 않는가 하면, 섬유가 상한 것을 고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면 다음 해에는 십중팔구 못입게 된다.
보통 의류업체들은 2월말, 4월말, 8월말, 10월말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신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하고 한달간의 정상영업 뒤에 세일에 들어간다. 이를 파악해 두었다가 어느 시기에 옷을 구입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합리적 옷구매'란 얼마나 싸게 샀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최대효용을 이끌어 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7. 가격파괴
그런데 같은 효용일 경우에는 가격이 좀더 저렴한 상품을 구입할 수만 있다면 소비자로서는 큰 만족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소비자들에게 매우 반가운 현상 한 가지가 있다. '가격파괴' 현상이 그것이다. 국내에서는 1994년 하반기부터 창고형 도소매점, 디스카운트 스토어 등 신종 업체들이 등장하면서 가격파괴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에 자극을 받아 대부분의 백화점들도 기존 매장 안에 별도의 할인판매코너를 개설해 신종 업체들과의 가격경쟁에 나서는 등 가격파괴 현상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잘 알려진 상술 가운데 박리다매(薄利多賣)라는 방식이 있다. 이는 일본의 대표적 상술이라는 오사카 상술의 비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 상술을 '바보상술'이라고 비웃는다. 많이 팔면 많이 벌어야지, 많이 팔아 적은 이익을 남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이다. 박리경쟁은 상인들이 서로의 목에 밧줄을 걸고 잡아당기는 '목죄기 경쟁'이라는 것이 유태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유통업계에는 신종 박리다매 방식이 등장하여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바로 가격파괴 현상이 현대판 박리다매인 것이다. 물건은 싸게 팔면서 이익은 챙길만큼 챙기는 새로운 상술이다. 미국과 일본의 소비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이 값내리기 경쟁은 이제 세계적인 조류가 되었다. 비단 가격인하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통혁명을 가져올 수도 있는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백화점이 개장한 회원제 할인점에는 몰려드는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회원수만도 6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대단한 기세이다. 국내에도 급속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미국에서는 백화점과 재래시장이 박리다매와 초저가를 표방하는 할인점에 밀려난지 이미 오래이다. 미국의 대표적 할인업체인 월마트의 1994년 한해 동안 매출액은 무려 673억 달러로 미국내 유통업체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소비자들을 몰려들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알고 보면 간단하다. 첫째, 제조업자들로부터 현금으로 대량구매를 함으로써 싼 값에 물건을 공급받는다. 이 과정에서 대량구매를 무기로 하여 유통업자가 제조업자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전통적으로 가격은 공급자가 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유통업자가 싼 가격을 지정하고 생산업자가 이를 거부하면, 질좋고 싼 제품을 찾아 거래선을 바꾸어 버린다. 공급자의 유통자 지배가 유통자의 공급자 지배로 바뀐 것이다.
둘째, 고객들이 스스로 고르고(self-selection), 스스로 포장하고(self-package), 스스로 배달하는(self-delivery) '3S 방식'을 도입하고, 실내장식을 없애며, 무포장제를 실시하여 부대비용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절약한 비용만큼 파격적인 낮은 가격으로 파는 것이다. 결국 최대한 싸게 사서 최대한 싸게 판다는 것이 가격파괴를 선도하고 있는 할인업체들의 기본전략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가격파괴는 소비자들에게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장이 다소 허술하고 셀프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원가에 가깝게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물건값이 비싼 나라도 없다. 해외 유명상표가 달린 국산제품만 해도 그렇다. 3퍼센트의 브랜드 로얄티를 지불했다면 제품가격은 3퍼센트 더 비싸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가격표는 2-3배로 껑충 뛰어 있다. 터무니 없이 높게 매겨진 정가를 50퍼센트 세일 해준들 여전히 비싸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공급자의 가격횡포의 한 사례이다. 가격파괴는 과거의 가격 관행을 깨뜨리는 신선한 충격이다.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 그처럼 턱없이 높은 가격을 주고 산단 말인가." 이로써 소비자들의 가치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할인점들이 물건을 얼마나 싸게 파느냐 하는 것과는 별도로 '합리적 소비생활'이라는 시각에서 소비자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소비자들이 뚜렷한 소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적 소비는 곧 절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절약이란 단순히 물건을 권장소비자가격보다 얼마나 싸게 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파격적으로 싼 제품을 얼마나 많이 손에 넣었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꼭 필요한 것만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입하는 것, 그것이 절약의 요체요, 합리적 소비의 지름길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가격파괴가 유통시장에도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대형 할인업체들이 유통혁명을 주도하면서 가격결정권이 서서히 유통업체로 넘어가고 있다. 당연히 제조업체의 가격지배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가격파괴가 가져온 유통혁명은 도매업과 제조업까지를 포함한 상품의 전체 유통경로에 걸쳐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가격경쟁을 몰고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도 유통혁명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은 국내의 할인점들은 저(低)마진의 가격정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할인점은 땅값이 싼 도시 근교에 대규모 부지를 확보해 넓은 매장과 주차장을 갖추고 점포개설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다. 반면 국내 할인점들은 대부분 도심권에 위치해 점포개설비용부터 높게 책정된데다 인건비·물류비 등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결국 비용절감이 뒷받침되지 않는 저가(低價)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또 제조업체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구축해온 유통망 장악력을 바탕으로 신종 할인업체와 가격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신종 할인업체들이 대량구매를 앞세워 납품가격을 깎으려 드는 반면, 제조업체들은 기존 유통업체와의 형평성을 들어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격파괴가 계속 촉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가격정책의 관점에서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가령 현재의 권장소비자가격을 없애고 공장도가격만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불필요한 유통마진을 줄이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유통시장 완전 개방을 앞두고 선진국형 유통업체들이 대거 상륙하면서, 국내 유통업계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유통혁명의 형태는 다양할지 모르나 원칙은 간단하다. 그것은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가장 싸고 편리하게 제공하자는 것이다. 또 경쟁은 이같은 변화를 더욱 빠르게 하고 있다.
8. 누가 중산층인가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하고 합리적인 소비생활의 습관을 기르게 해주는 것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계부'이다. 가계부는 1년 동안 가계의 수입 및 지출 내역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계획성있는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도록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자신이 고소득층인지 저소득층인지를 판별해 볼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말로 중산층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각종 단체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한국민의 60-70%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응답한다. 흔히 중산층이라고 하면 생활수준이 중간 정도인 계층이라고만 막연히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다분히 심리적인 중산층의 개념을 반영한 것이지, 정확한 의미에서의 실제적 중산층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중산층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 우선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중산층이라고 해야 할지도 정립된 견해가 없으며,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도시의 경우 최소한 무주택자를 중산층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볼 때, 실제로 현실적 중산층은 심정적 중산층보다 적은 것만은 틀림없다고 보여진다.
경제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중산층을 고소득층도 아니고 저소득층도 아니면서 문화생활을 무리없이 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보통 정기적으로 식구들과 외식도 하고, 신문도 구독하면서 수영장이나 헬스클럽에 나가 건강관리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진 계층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이 때 고소득층인가, 저소득층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으로써 경제학에서는 흔히 엥겔계수를 사용한다. 엥겔계수(Engel coefficient)란 150년전 독일의 사회통계학자 엥겔(C.L.E. Engel)이 처음 창안한 것으로 가계의 소비지출 중에서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따라서 수입이 많은 가계일수록 소비지출총액 가운데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므로 엥겔계수도 낮은 수치를 보일 것이다.
결국 엥겔계수가 낮은 가계일수록 그만큼 생활수준이 높다는 반증이 되므로, 사회경제지표나 문화수준의 척도로써 엥겔계수를 자주 인용한다. 일반적으로 엥겔계수가 20% 미만이면 상류생활, 25% 이하이면 여유있는 생활, 30% 이하이면 약간 여유있는 생활, 그리고 50% 이상이면 겨우 살아가는 생활수준이라고 말해진다.
일반가정에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알고 싶으면 가계부를 이용하여 측정이 가능하다. 즉, 가계부상의 1년 동안의 소비지출총액과 음식비 지출액을 따져 보면 엥겔계수로 표시한 생활수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계부 작성의 필요성과 생활화가 매우 미흡한 실정인데, 이는 살림살이를 합리적으로 꾸려 나가기보다는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운영한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가계부를 쓰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제행위를 하는 모든 집단은 1년 동안에 들어오고 나간 수입과 지출내역을 상세히 기록하여 경제활동을 분석해 봄으로써 다음 해의 보다 알찬 경제활동을 위한 중요한 참고자료로서 활용한다. 가정에서의 가계부, 기업에서의 회계장부, 그리고 정부에서의 예산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기 위해서는 예산을 잘 수립하고 집행하여 예산낭비를 막아야 한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회계장부에 많은 이익을 남겨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는 가계부를 꼼꼼히 적어 1년 동안의 가계경제를 분석함으로써, 쓸데없는 지출은 줄여 나가고 현재소비 대신 미래소비를 위해 저축을 늘려 나가는 것이 곧 부자가 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결국 가계부를 작성하는 것은 낭비와 불필요한 소비를 자제하고 자신의 생활수준에 맞는 합리적인 소비행위를 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생활자세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엥겔계수를 보면, 도시근로자들의 경우 1980년까지만 해도 엥겔계수가 42.6%를 차지했으나, 그 수치가 점점 낮아져 1994년말에는 29.3%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체 식료품비 가운데 외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1994년 도시근로자가구의 가계수지동향'에 따르면, 1994년 도시근로자가구의 한달 외식비는 10만원을 넘어서서 전체 식료품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가용 승용차의 보편화로 소비지출액 중 교통통신비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식생활을 비롯한 소비형태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진지잡수셨읍니까"가 아침인사말인 적이 있었다. 1950년대만 해도 춘궁기가 되면 굶주린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식당집의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독이 든 복어의 알과 내장을 뒤져다 삶아 먹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분수에 넘치게 풍족한 소비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8. 밤깊은 마포종점
소비자들이 소비과정에서 얻는 효용과 관련하여 '소비자잉여'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회사원인 김영삼씨는 출퇴근시 매일 상도동에서 마포까지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종점에서 타서 종점에서 내리는 셈이다. 영삼씨는 항상 버스 맨 뒷자리에 앉는다. 궂이 뒷자리에 앉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만일 종점에서 종점까지 걷는 경우를 생각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300원만 내면 그 먼 길을 편히 올 수 있다. 어쩌다 졸고 있기라도 하면 운전기사가 깨워주기까지 하니 고맙다 못해 미안한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밤깊은 마포종점에 혼자서 내리는 날이면 미안한 생각은 더욱 더하다. 그래서 그는 뒷자리에 앉는 것이다.
과연 영삼씨는 미안해 할 필요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먼저 영삼씨가 미안해 하는 이유는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데서 얻는 편안함에 비하면 버스요금이 너무 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소비자잉여(消費者剩餘, consumer's surplus)라고 한다. 즉, 소비자잉여란 소비자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할 때 지불하는 돈의 크기보다 그로부터 얻게 되는 효용의 크기가 더 클 때 발생한다. 소비자잉여는 소비자가 구입과정에서 얻는 당연한 권리이다. 소비자잉여를 많이 얻을수록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익이 된다.
영삼씨가 미안해 하는 두번째 이유는 늦은 시간에 손님 한 두 명 태우고 다니면 버스회사가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도 그렇지 않다. 버스회사가 종점에서 종점까지 한 번 운행하는 데에는 어차피 일정한 비용이 들어간다. 만일 버스요금이 운행비용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버스회사는 버스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버스를 운행한다는 것은 비용보다 승객들이 내는 요금의 수입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를 생산자잉여(生産者剩餘, producer's surplus)라고 한다. 즉, 생산자잉여는 생산자가 상품을 판매할 때 실제로 받은 수입이 꼭 받으려고 했던 수입보다 많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생산자잉여가 크면 클수록 생산자의 수입은 증가한다. 결국 손님과 버스회사의 입장에서 다 같이 이득을 얻고 있는 셈이니,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탄다고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10. 미국에서 당한 이야기
효용은 시간에서도 얻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버스나 택시, 기차, 비행기 등 편리한 교통수단들이 많다. 이러한 편의장치를 이용하는 과정에서도 사람들은 효용을 얻는다.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만족을 얻는 것이다.
만일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를 간다면 어떤 기차를 이용하겠는가. 새마을호는 통일호보다 요금이 비싸다. 과연 얼마나 비싼 것일까. 이 때 기차표값만 계산하면 안된다. 기차요금 외에 중요한 비용은 '시간비용'이다. 시간도 돈 못지않게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많이 소요하는 것은 귀한 자원을 소비하는 것이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에 시간비용과 관련하여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노부부가 자식 덕택에 한번은 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오랜 여정에 시달렸던 터라 미국에 도착하고 보니 머리도 어지럽고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타국에서 큰일났다 싶어 병원으로 달려 갔다. 진찰 결과 별다른 증세는 없고 여독이 덜 풀린 탓이니 안심하고 돌아가 안정을 취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런데 병원을 나오려고 하니 진료비를 내라는 것이었다. 주사를 맞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을 준 것도 아닌데 무슨 진료비냐고 따졌지만 소용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돈을 치루었다. 호텔에 돌아와서 곰곰 생각해보니 분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에서 온 사람인줄 용케 알고 바가지를 씌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날 변호사를 찾아 가서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변호사 역시 당연히 진료비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풀이 죽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는 한 장의 엽서가 날아와 있었다. "귀하와 상담하는 동안 다른 고객과의 상담을 못했으므로 다음과 같이 상담료를 청구합니다....."
11. 통일호와 새마을호
시간비용은 사람마다의 시간가치에 따라 다르다. 시간비용은 그 시간을 다른 곳에 사용했을 때 벌 수 있는 돈이나 얻을 수 있었던 효용가치로 측정한다. 할 일 없는 사람에게는 한 시간 더 걸려도 시간비용이 높지 않기 때문에 통일호를 이용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일이 많거나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시간비용이 높다. 따라서 기차요금과 시간비용을 합하면 새마을호가 오히려 저렴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의 시간비용은 어떠한가. 극단적이긴 하지만 시간이 많아서 남아도는 사람은 서울에서 대전까지 걸어다닐 수도 있다. 시간비용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가능한 한 빠른 교통편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시간비용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주어진 시간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그 한정된 시간을 하루하루 소비하며 살고 있다. 한 번 소비한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하루는 일생 동안 다시는 오지 않는 시간이다.
따라서 목표가 있고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 앞에서 돈의 효용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시간효용도 사람마다 다르다. 시간을 가치있는 일에 많이 배분할 때 시간효용은 증가한다. 하루 24시간을 소비하다 보면 중요한 일도 있고 사소한 일도 있다. 중요한 일의 순서대로 시간을 잘 활용할 때 가장 큰 만족을 얻는다. 이름하여 '한계시간효용균등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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