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한 세기를 되돌아보며 세계의 언론들은 '20세기의 10대 사건'들을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어느 경제학자는 세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제치고 '트랜지스터의 발명'을 20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꼽았다. 물론 트랜지스터의 발명이 반도체의 발전으로 이어져 오늘날 컴퓨터·정보통신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공로는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인인 그가 심사숙고 끝에 '트랜지스터의 발명'을 선택한 데는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작은 발명품 하나가 오늘날 일본을 경제대국의 반석 위에 올려놓고 지난 반 세기동안 1억 2천만명의 일본 국민들을 먹여 살린 양식이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60년대 초반까지 만해도 전자제품 시장은 미국과 유럽세로 철저히 양분되어 있었다. 미국의 RCA나 GE, 유럽의 필립스, 지멘스 등 오랜 역사를 가진 기라성 같은 회사들이 세계 전자산업을 주름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도전장을 낸 것은 당시 이름도 없었던 일본의 소니(Sony)였다. 소니는 패전 이듬해 다 쓰러져 가는 도쿄의 한 건물에서 도쿄통신공업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여기서 이부카(井深大)와 모리타(盛田昭夫)라는 두 청년 기술자가 열정적으로 신기술 개발에 몰두하여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한 것이다.
당시 라디오는 진공관으로 만든 탁상형밖에 없었기 때문에 갖고 다닐 수 있는 소형 라디오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소니의 연구진들은 밤낮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트랜지스터의 성능을 진공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트랜지스터 회로의 프린트 배선화에 성공하여 전자기기의 소형화·양산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 기술의 싹은 그후 수많은 연구원과 기술진들의 피와 땀에 의해 착실하게 커져갔다. 소니의 트랜지스터식 라디오의 제작기술과 원리는 TV, 워크맨, VCR 등 신제품 개발로 이어졌으며, 또한 반도체의 개발력은 도시바와 히타치제작소, NEC 등에 전수돼 반도체, 컴퓨터 분야의 독보적인 기술로 발전되었다. 또 여기에 '에사키 다이오드'를 발명하여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에사키(江崎玲於奈)와 같은 많은 연구원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원천기술이 하나 둘 쌓여간 것이다.
이것이 일본을 부동의 전자 강국으로 만들어 자동차 공업과 더불어 일본경제를 먹여 살리는 두가지 핵심 축으로 굳건히 자리 매김시킨 것이다.
얼마전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켄이치(大前硏一)는 '한국에는 한국에서밖에 살 수 없는 물건이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한국경제는 장래 북한 인구까지 포함하여 6,700만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가 고유한 독창적인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음을 강하게 몰아세운 말이다.
우리나라는 반도체나 이동통신 분야 등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 일류기업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원천기술을 갖고 있지 못해 대부분의 핵심기술과 부품들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 제품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이나 자동차, 철강 등은 한때 우리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나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급격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 세계 시장을 주도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지 못한 탓으로 호황은 10년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일본경제 중흥의 불씨가 되었던 트랜지스터 기술의 시초는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1948년 미국 벨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작은 광물 조각에 전선을 접속했을 때 전기신호의 증폭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상용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파생된 기술을 부단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이 기술력이 100년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개발의 초기단계에서는 외국의 기술을 모방하고 개조하는데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로 한가지 기술을 가지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몫이다. 그런데 조급증에 걸려 있던 탓인지 우리는 차분히 독자기술을 개발하기보다는 남의 것을 사들여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데만 열중해 왔다.
그래서 우리의 기술은 '꺾꽂이 형'이라 말한다. 몇 해 쓰다가 낡고 시들해지면 새로 사와 갈아치운다. 그러나 기술은 뿌리를 갖고 있는 '화분 형'이 되어야 한다. 오랜기간 정성껏 물을 주고 가꾸어야 새로운 꽃도 볼 수 있고 종자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장의 원동력은 기술혁신에 있다. 우리가 100년을 먹여 살릴 기술을 갖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독자기술을 키우는데 정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적어도 우리 과학기술정책의 한 축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한 세기를 되돌아보며 세계의 언론들은 '20세기의 10대 사건'들을 특집으로 꾸미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어느 경제학자는 세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제치고 '트랜지스터의 발명'을 20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꼽았다. 물론 트랜지스터의 발명이 반도체의 발전으로 이어져 오늘날 컴퓨터·정보통신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공로는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인인 그가 심사숙고 끝에 '트랜지스터의 발명'을 선택한 데는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작은 발명품 하나가 오늘날 일본을 경제대국의 반석 위에 올려놓고 지난 반 세기동안 1억 2천만명의 일본 국민들을 먹여 살린 양식이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60년대 초반까지 만해도 전자제품 시장은 미국과 유럽세로 철저히 양분되어 있었다. 미국의 RCA나 GE, 유럽의 필립스, 지멘스 등 오랜 역사를 가진 기라성 같은 회사들이 세계 전자산업을 주름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도전장을 낸 것은 당시 이름도 없었던 일본의 소니(Sony)였다. 소니는 패전 이듬해 다 쓰러져 가는 도쿄의 한 건물에서 도쿄통신공업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여기서 이부카(井深大)와 모리타(盛田昭夫)라는 두 청년 기술자가 열정적으로 신기술 개발에 몰두하여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한 것이다.
당시 라디오는 진공관으로 만든 탁상형밖에 없었기 때문에 갖고 다닐 수 있는 소형 라디오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소니의 연구진들은 밤낮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트랜지스터의 성능을 진공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트랜지스터 회로의 프린트 배선화에 성공하여 전자기기의 소형화·양산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 기술의 싹은 그후 수많은 연구원과 기술진들의 피와 땀에 의해 착실하게 커져갔다. 소니의 트랜지스터식 라디오의 제작기술과 원리는 TV, 워크맨, VCR 등 신제품 개발로 이어졌으며, 또한 반도체의 개발력은 도시바와 히타치제작소, NEC 등에 전수돼 반도체, 컴퓨터 분야의 독보적인 기술로 발전되었다. 또 여기에 '에사키 다이오드'를 발명하여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에사키(江崎玲於奈)와 같은 많은 연구원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원천기술이 하나 둘 쌓여간 것이다.
이것이 일본을 부동의 전자 강국으로 만들어 자동차 공업과 더불어 일본경제를 먹여 살리는 두가지 핵심 축으로 굳건히 자리 매김시킨 것이다.
얼마전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켄이치(大前硏一)는 '한국에는 한국에서밖에 살 수 없는 물건이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한국경제는 장래 북한 인구까지 포함하여 6,700만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가 고유한 독창적인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음을 강하게 몰아세운 말이다.
우리나라는 반도체나 이동통신 분야 등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 일류기업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원천기술을 갖고 있지 못해 대부분의 핵심기술과 부품들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 제품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이나 자동차, 철강 등은 한때 우리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나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급격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 세계 시장을 주도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지 못한 탓으로 호황은 10년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일본경제 중흥의 불씨가 되었던 트랜지스터 기술의 시초는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1948년 미국 벨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작은 광물 조각에 전선을 접속했을 때 전기신호의 증폭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상용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파생된 기술을 부단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이 기술력이 100년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개발의 초기단계에서는 외국의 기술을 모방하고 개조하는데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로 한가지 기술을 가지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몫이다. 그런데 조급증에 걸려 있던 탓인지 우리는 차분히 독자기술을 개발하기보다는 남의 것을 사들여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데만 열중해 왔다.
그래서 우리의 기술은 '꺾꽂이 형'이라 말한다. 몇 해 쓰다가 낡고 시들해지면 새로 사와 갈아치운다. 그러나 기술은 뿌리를 갖고 있는 '화분 형'이 되어야 한다. 오랜기간 정성껏 물을 주고 가꾸어야 새로운 꽃도 볼 수 있고 종자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장의 원동력은 기술혁신에 있다. 우리가 100년을 먹여 살릴 기술을 갖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독자기술을 키우는데 정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적어도 우리 과학기술정책의 한 축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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