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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논평]시장경제시스템 정립을 위한 과제

「국민의 정부」는 출범 후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을 경제부문 국정운영의 중심틀로 내세웠다.
자본주의경제라면 당연시해야 할 시장원리 자체를 정권차원의 슬로건으로 채택하게 된 데에는 경제주체의 자발적 의사결정과 자유경쟁을 저해하는 비효율적 요소가 우리 경제의 기본틀을 위협할 만큼 축적되어 있다는 인식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경제체제 전반에 걸친 수술 -4대 부문 개혁

정부가 내세운 금융ㆍ기업ㆍ노동ㆍ공공부문 등 4대 부문의 구조개혁은 경제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경제 각 부문의 구조적 비효율을 제거하는 일로서 우리 경제체제 전반에 걸친 수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생산시장과 요소시장이 규제와 관행보다는 자율과 경쟁에 근거해 움직여야 한다는 시장경제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집권 전반기를 마친 시점에서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빠른 경기회복을 유도했다는 측면에서는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고 있지만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구조개혁 분야에 있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했던 금융구조조정의 경우 비교적 합리적인 계획하에 과감하게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지만 최근 들어 모멘텀이 약화되었다는 우려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업부문의 경우 재무구조개선 등 정책 효과가 두드러진 부분도 있었지만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이나 경제력집중의 완화와 같은 핵심 분야는 아직도 가시적인 효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대우와 같은 대표적인 재벌도 시장의 힘을 무시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과거와는 다른, 눈에 띄는 변화라 할 수 있다.
실업률이 상승하던 어려운 여건에서 시작된 노동부문의 개혁은 노사정위원회의 부침에서 보듯이 인위적인 타협에 의한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고용보험의 확대 등 사회안전망에 대한 제도정비를 촉진시켰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컸다.

공공부문의 개혁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작성한 마스터 플랜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의 정부주도 경제운영의 비효율이 공공부문 자체보다는 정부의 민간개입 과정에서 더 두드러졌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민영화의 진척도나 정부기구의 개편 등 단편적인 변화보다는 규제개혁 등 시장경쟁체제 확립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원칙과 비전에 입각한 지속적인 개혁 추진해야

이제 국정 후반기를 시작하는 「국민의 정부」는 구조개혁의 성공적인 진척을 위해 지금까지의 전략과 성과를 냉정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 구조개혁의 기본 원칙이나 전략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첫째, 경기의 부침과는 달리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구조개혁 작업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 2년 반의 경험을 보면 인위적으로 서두른 부분의 경우 당장의 반짝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게 돌아선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는 비판이 있어도 원칙과 비전에 입각한 지속적인 개혁만이 성공할 수 있다.
둘째, 4대 부문 구조개혁 대부분의 경우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당연한 전제로 삼아야 한다. 정책은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집행능력을 상실하면 소용이 없다. 재벌의 세습경영이나 부실기업의 문책과 같이 사회적 책임과 관련있는 분야는 국민적 합의에 근거한 정책을 수립하기 쉽겠지만 일자리와 관련된 구조조정은 보다 신중하게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형평하지도 않고 또 먹히지도 않을 정책을 남발해서는 안된다.
셋째, 분야별ㆍ각론별로 구조조정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구조개혁 노력이 실패한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개혁의 내용이 지나치게 나열식이어서 초점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저항이 예상되는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한번에 하나씩이라는 신중함과 집요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의 계획이나 전문가들의 조언을 보면 백화점식의 아이디어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넷째, 민주화된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의 고도성장 경험에 익숙한 경제학자들이 범하는 가장 흔한 오류 중의 하나는 성장과 분배가 분리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논리에 의해 자원배분의 효율성이 결정되는 최선의 상태는 이익집단의 지대추구동기가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분배문제에 관한 적절한 정치적 배려가 오히려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정책자유도를 높여줄 것이다.

우선순위 조정이 국정 후반기 개혁의 핵심원칙

구조개혁의 원칙에 관한 이상의 관찰을 바탕으로 할 때 전략에 관한 몇 가지 제안이 가능할 수 있다. 개혁의 진정한 목적이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에 있다면 이에 적합한 방향으로 정책의 내용과 우선순위가 정립될 수 있어야 한다. 개혁대상의 병렬식 나열이 아니라 우선순위의 조정이 국정 후반기 구조개혁의 핵심 원칙이 되어야 한다.

금융부문이 최우선 개혁 분야
우선 금융부문은 4대 부문 중 가장 중점을 두고 개혁을 서두를 필요가 있는 분야이다. 외환위기로 추락된 국가신인도가 단기적인 거시지표의 상승만으로 회복되기는 힘들다. 외국자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내세우는 순진한 개방정책의 귀결은 자본시장의 종속과 혼란이 되기 쉽다.
우리의 정책 영역을 벗어나는 국제자본의 흐름과 예상치 못한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 기회에 국내 금융기관의 체질을 철저하게 개방형ㆍ경쟁형으로 바꿔야 한다. 새로운 기업이 금융산업에 진입할 문호를 개방하고, 부실한 금융기관의 퇴출을 과감하게 진행해야 한다. 금융구조조정이야말로 향후 우리 경제가 시장원리에 충실한 경제체제로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름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금융구조조정의 성공 여부를 결정할 가장 중요한 변수는 공적자금의 투입과 관리다. 현재 진행중인 구조조정작업이 보다 확실한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기존에 사용된 자금의 용도와 실효성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추가적인 공적자금을 조성하되 부실의 확실한 청산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공채로 조달된 자금의 잠재적 재정부담도 정확하게 추정해 공표하는 것이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길이 될 것이다. 국채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은 그 절대규모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증가하는 속도와 총수요에 미치는 파장, 나아가 정부의 신인도에 미치는 영향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재벌기업 개혁이 기업부문 개혁의 관건
기업부문의 개혁은 부실기업 청산과 같은 현안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율과 경쟁이라는 시장원리의 정착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경제력의 집중과 각종 비효율의 중심축에 놓여 있는 재벌기업의 개혁이 최대의 관건이다. 재벌의 내부거래문제는 곧 불공정경쟁을 의미하므로 시장경제의 틀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경쟁정책의 큰 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부당거래행위를 규제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결합재무제표와 같이 기업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회계감사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기업들에게 구체적인 재무개선 지침을 주는 일이나 높은 부채비율을 조세를 통해 조정하려는 일 등은 별 실익도 없으면서 정부 개입에 따른 추가적인 비효율만 초래하기 쉽다.
재벌기업의 지배구조문제는 일개 기업의 내부문제가 아니라 경제전반의 효율성에 영향을 주는 분야이므로 경쟁정책의 차원에서 다룰 의미가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정부가 특정기업의 내부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개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정책 수행 방식이다. 일차적으로 어떤 기업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을 국민적 공감대에 근거해 수립하고 상속세법이나 기타 경영권 이전과 관련된 법령 등을 정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수순이다. 지금처럼 기업지배구조문제가 마치 정부와 재벌간의 협상의 대상이 되는 식으로 비춰지는 것은 시장원리에 역행하는 것이다.

분배정의와 효율성 원칙 아래 추진해야 할 노동부문 개혁
노동시장의 개혁은 금융이나 기업부문과는 달리 중산층 및 저소득계층의 복지문제와 직결될 수 있는 사안이므로 단순히 효율성의 논리만으로 풀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사람은 기계나 자금과는 달리 인위적인 방식으로 배분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여 분배정의와 효율성 원칙을 병행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분배정의의 실천은 재정수단을 통한 소득재분배라는 차원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계층간의 수직적 이동을 수월하게 해주는 사회시스템의 정립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제도를 포함한 인력관리정책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시급하다. 노동시장의 수평적 유연성은 정리해고와 같은 피동적 방식보다는 자발적 동기에 의해 이직과 구직이 이루어지게 하는 시스템을 정립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벤처기업과 같은 새로운 직장기회를 창출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나 계획 없는 벤처지원이 불필요한 거품만 양산해 노동시장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지원만 해주면 무엇이든지 된다는 경직적 사고에서 벗어나 시장의 힘이 어떻게 쏠리는지를 판단하고 이를 저해하는 요소를 합리적으로 제거해 주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정부의 시장개입 방식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 필요
공공부문 개혁의 경우 이를 단순히 정부조직의 개편이나 공기업 민영화와 같은 좁은 차원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공기업의 방만한 운영과 같이 공공부문 내부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문제점은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경제에 시장원리가 제대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규제개혁을 담당하는 부서나 위원회의 활동이 보다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규제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며 공정한 시장운행을 위해 강화돼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따라서 규제의 수치를 몇 개 줄였다는 식으로 운영되는 기존의 규제관련업무는 대폭 개선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의 틀을 확립하는 구조개혁 작업은 비전과 전략과 집행력을 가진 주체에 의해 시간을 두고 흔들림 없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 특정 정권의 차원이 아니라 국익의 차원에서 계획이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성공의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계획하고 실천하고 있는 4대 부문 개혁의 상당부분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일의 우선순위와 장기일정을 재조정하고 국민들의 합의를 구하는 것만이 정부의 개혁노력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이 될 것이다.끝.

<전주성ㆍ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 나라경제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