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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칼럼]신생산체제 확립을 위한 기업구조조정

저명한 문명 비판가인 앨빈 토플러는 한국경제 위기가 대량생산체제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외환위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토플러가 던진 이 말은 크게 주목되지 못했다. 몇몇 일간 신문에서 아주 간단하게 그의 주장을 전달하였을 뿐이었다. 파국적 외환위기와 금융위기가 진정된 지금 이제 경제재건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 그의 주장을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대로 그동안 한국경제는 중저가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수출을 통해 고도성장을 달성하였다. 한국에서 대량생산체제는 1970년대 중반이후 중화학공업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대규모 설비와 결합된 노동력은 대부분 단순반복노동을 하는 단능 숙련의 노동력이었다. 기능공이라 불렀던 이들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 구상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직무 자율성도 없이 상명하달의 위계적 통제 구조 아래 파편화된 간단한 공정을 수동적으로 수행할 뿐이었다.
이러한 생산체제를 보통 포드주의적 대량생산체제라 부른다. 이 생산체제에서는 작업속도의 증대를 통해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여 평균비용을 낮추는 것이 경쟁력의 주요 원천이 된다. 자동차 산업에서 컨베이어의 속도를 증가시킴으로서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 생산체제에서는 생산관리의 초점은 단순반복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증대시키는데 모아진다. 고생산성과 고품질의 실현을 위해 현장 노동자들의 고숙련과 창의력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그리고 전제적 노사관계가 이 생산체제의 지속을 담보하는 버팀목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대량생산체제에서 생산된 중저가품은 세계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대량생산과 대량수출이 결합되어 지속적 고성장이 가능하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이러한 생산체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와 전제적 노사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노동조합의 증대된 교섭력이라는 노사관계 요인과 노동력 부족이라는 노동시장 요인이 결합되어 임금이 단기간에 급상승하고 마침내 고임금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단위노동비용이 크게 상승하여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제 한편에서는 중저가품 시장에서 중국과 같은 저임금 국가에 밀리기 시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가품 시장에서 일본과 같은 고품질 국가에 밀리게 되는 상태에 빠진다.
이와같이 저임금에 기초한 가격경쟁력이 상실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품질에 기초한 새로운 경쟁우위를 획득하지 못한 상황은 진정한 의미에서 생산체제의 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산체제의 위기는 1987년이후 10년 동안 점차 심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1997년말 폭발한 경제위기의 기초에는 그동안 누적되어온 생산체제의 위기가 가로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앨빈 토플러가 한국경제의 위기는 대량생산체제의 위기라고 지적했을 때 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것이 아닐까 한다.
1987년 이전의 '저임금-고생산성-중저품질' 상태에서 1987년 이후의 '고임금-고생산성-중저가품' 상태로 전화됨에 따라 생산체제에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한다면, 생산체제 위기 극복방향은 두가지 길로 집약될 수 있다. 하나는 고임금 구조를 타파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고가품 생산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고임금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임금과 고용을 유연화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고용불안과 생활 불안을 가져다 준다. IMF관리체제 아래의 경제위기속에서 대부분의 기업들이 임금을 삭감하거나 동결하고 정리해고를 실시하였다. 이는 기업들이 고임금 구조를 타파하는 길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위기 극복의 길은 대량실업과 노동소득 감소, 빈곤증대, 빈부격차 심화를 초래하였다. 이 길은 단기적으로 위기 탈출과 경쟁력 회복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기업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실현하는 위기 극복의 길은 고부가가치의 고품질 제품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고능률의 신생산체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경북대학교 김형기 교수님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