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치론 해석에 대한 두 가지 편향과 그 정치적 함의
--아우토노미아 이론을 중심으로 --
*****[맑스주의 코리아]라는 웹동호회에서 있었던 가치론 이해에 대한 논쟁중 제가 쓴 글입니다. 아래 이진경과 유동민의 글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간접적인 관련은 있겠군요^.^ 시간이 되면, 아래 두 사람의 논지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작성해볼텐데, 통시간이 안 나는군요. 때늦은 것 같기도 하고.....****
들어가며
이하의 글에서는 경어를 사용하지 않고 작성되었습니다. 글의 전반적 어감을 살리려면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게 좋다는 판단에서 입니다.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히 도발적으로 쓸려고 노력했습니다. 뜬금없이 자기주장만을 펼치기 보다는, 아래 조목조목 짚어서 논쟁을 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판단입니다. 굳이 도발적인 글을 쓰는 이유 역시 몇가지 쟁점을 잡아서 제대로 끈기있게 논쟁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경어를 생략합니다.
이 글은 약간은 학술적인 배경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된다. 다만 앞뒤 논리 전개과정을 눈여겨 살펴보기 바란다. 대부분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치론은 평균이윤율 경향적 저하법칙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논리체계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논의의 편리함을 위해 가치론만을 다룬다.
1. 학설사적인 배경
노동가치론은 중농주의자들로부터 아담 스미스에게로 넘어오면서 이론적 중요성을 획득한 후, 리카아도에 의해 경제학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아담 스미스에게 있어서 노동가치는 투하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축이 만난 결과로서 제시된 반면, 리카아도는 초기에 투하노동 가치만이 가치의 원천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스라파에 의해 재해석된 후기 리카아도의 경우는 현대 추상노동학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그 본질이 유사한 불변의 가치척도인 표준상품 가치론(따라서 추상노동설적 가치론)을 주장하게 된다. 맑스의 경우 역시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리카아도와 거의 동일한 노동(력)가치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1950년대 이전 소련의 공식적 견해에 따르자면 투하노동가치설이, 1950년대를 넘어오면서는 추상노동가치설이 대표적인 맑스 가치론 해석으로 자리잡아왔다.
스미스, 리카아도, 맑스를 일컫어 흔히 고전파 경제학자들이라고 지칭하는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가치론을 경제학의 근본원리로 삼은 것은 리카아도가 선언했다시피 경제학의 근본문제는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담 스미스의 경우는 분배만이 아니라 부의 성장, 성장하는 국부의 원천을 밝히는 문제가 핵심적인 관심사였기에 그의 노동가치론은 매우 불안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반적인 비판과는 달리, 앞서 말했듯이 아담스미스의 가치론이 교환가치와 투하노동 가치의 이중적 통합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이론적 불철저함 탓이라기 보다는 그의 주된 관심이 성장론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균형 동학적 성장이론과 정태 일반균형론으로서의 가치이론은 근본적으로 화해불가능한 관계를 갖는다. 이 화해불가능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후술하겠다.)
맑스는 리카아도 이전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국민경제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이제까지의 국민경제학은 부의 원천을 분석함에 있어서 그 원천의 계급적 기원과 착취의 확대재생산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맑스는 리카아도가 가치의 원천이 노동에 있음을 주장했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배가 노동(력)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투하된 자본의 크기에 따라 분배 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드러내지 못했음을, 착취의 재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2. 추상노동인가 투하노동인가?
그런데 문제의 핵심인 착취의 발생기원, 착취 확대재생산의 원천에 관한 문제는 노동가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혹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의 가치를 스라파식으로 해석하거나 추상노동학파의 견해대로 정의한다면, 자본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사회적 필요노동량,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해 허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 정의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 묶음의 단위 가치량"이 곧 노동력 가치의 실체로 정의된다. 만약 노동력의 가치가 이렇게 정의된다면, 노동력 가치를 그렇게 인정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노동자 착취를 승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추상노동학파들이 노동과정에서의 착취나 사회적 필요노동량을 변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렛대로서 화폐조절정책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이다. 착취의 발생을 가장 명확하고 쉽게 나타낼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두 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두가지 경로 외에 그 밖의 다른 경로를 통해서는 노동가치론의 내부논리로 착취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스라파주의자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으로 착취의 문제는 가치론 외부의 사회적 계급갈등, 임금협상이나 단체협약등을 통해 결정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결정된 이윤-임금율이 주어지면 그에 따라 노동가치가 내부적으로 결정되는 논리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계급투쟁이 노동가치를 결정 한다는 점에서 멋지게 보일수도 있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생산양식 차원의 착취와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발생하는 착취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시말해 생산양식 차원의 착취가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화해불가능한 대립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하게되고, 이것이 체계적으로 이어져 사회적 재생산의 차원에서 격돌하는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들이 주장하는 착취는 직접적 노동과정에서의 "초과착취"를 통해서만 나타날 뿐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개별적 노동력 담지자로 나타나고, 사회적 재생산의 과정에서도 역시 개별적 시민으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노동가치론 외부에 "인간학적 가치판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추상노동학파나 스라파식 노동가치론은 노동계급의 가치론(그게 어떤 것이든, 계급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이 될 수 없다.
3. 노동가치론인가 노동력 가치론인가?
이것이 바로 유동민이나 정운영이 인간학적 가치판단의 문제를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인간학적 가치판단은 가치론 내부의 논리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외부적인 고려사항이다. 이렇게해서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철학적 인간학과 결별하게된다. 물론 이러한 결별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결별을 통한 통합을 더 바람직한 대안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분리와 결별이 아니라면 두가지 편향이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첫번째 문제는 자본론 해석의 논리적 수미일관함에 관련된 문제인데, 복잡하기만 할 뿐 실천적인 쟁점과 직접 연결되지 않기에 생략한다. 그러나 학설사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문헌적 근거를 위해서는 중요하다. 계속해서 맑스의 [자본]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이 있다면, 문헌적 근거를 가지고 재론하겠다.
두번째 편향은 자본주의 붕괴론적 편향이다.
노동가치를 자본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평균이윤율 수준에 의해 정의하지 않는다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불가피하게, 어떠한 반경향에도 불구하고 관철된다. 맑스가 주장한 반경향은 필연적으로 가치구성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데, 이 가치구성은 앞서 주장한대로 추상노동학파적 논리구조하에서만 발생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상노동학파적 노동력 가치규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순환적 위기하에서도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게 아니라, 항상적인 전반적 위기에 노출된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채겠지만, 추상노동학파식의 노동력 가치규정이 아니라 투하노동설적인 해석을 가하게 된다면, 정반대의 주장이 가능해진다. 특히 투하노동의 가치를 단순한 시계시간 노동력 투입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투하노동가치론자들은 노동력의 가치가 실제로 투입된 물리적 노동력의 시간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애초부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시계시간으로 계산된 노동력 투입량이라는게 규정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력 투입량에는 노동강도의 문제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구체노동의 일반노동으로의 환원이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리카아도의 경우에는 이 환원을 "아무런 자본도 갖지않고 백사장에서 하루동안 금을 주은 양"으로 정의하자고 순진한 제안을 한적도 있긴 하지만, 어쨋든 이 환원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면, 추상노동학파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노동력 투입분에 대한 규정에서 그 실체적 내용에 인간학적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규정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된다. 본래부터 노동의 가치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노동력의 가치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 발상은 아주 기발한, 그러나 대단히 공허한 것인데, 공허한 까닭은 착취를 설명하기 위해 착취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는 순환론에 빠진다는 점이고, 기발한 까닭은 이런 해석에 따른다면 붕괴론적 해석으로 이어지지 않고도 자본주의 체제동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완전히 단절된 두개의 이중적 논리구성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추상노동 가치론이 아니라 투하노동가치론을 선택했을때 불가피하게 도출되는 논리적 결론인 붕괴론적 경향과, 그럼에도 붕괴론적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잠재적으로"만" 혁명적인 노동자 계급구성 이라는 논리축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에 따른다면 자본은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 됨에도 불구하고 가치구성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을 거듭할 수 있다. 자본은 무소불위하고, 그 이면에서 노동의 자주성 역시 더욱 증폭한다. 무소불위한 자본과 무소불위한 노동의 잠재력은 한번도 마주침이 없이 병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논자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러한 가치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가 화해불가능한 대립과 모순을 겪게 된다. 계급간 대립과 모순은 자본이 변신할 때마다 단 한번도 현상하지 않은 채 거듭 심화된 형태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해석의 세련된 형태가 바로 이진경과 유동민의 논쟁시 이진경이 취한 입장이며, 네그리의 노동가치론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어쨋거나, 이진경이 유동민을 일컫어 노동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당한 자라고 비판하는 이유나 유동민이 이들 포스트맑스주의자들에 대해 근거없는 맹신, 과학 이전의 신앙이라고 비판한 근거가 무엇인지 이제 명확해졌으리라.
4. 공허한 자위행위, 아우토노미아
그러나 이 주장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데,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구분하는 근거가 가치론 내재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착취의 발생도, 착취의 확대재생산도, 그에 다른 계급투쟁의 심화도, 그 어떤 이후의 주장도 자기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 구분은 오직 네그리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기에 착취의 재생산도, 계급투쟁의 확대심화도, 그 전복적 지양인 공산주의도 역시 머리속에서만 진행될 뿐이다.
앞서 추상노동학파의 논리적 난점을 지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가치와 노동력의 가치가 갖는 모순이 노동력 가치의 교환, 노동력 가치에 따른 분배와 재생산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잠재적으로 규정되어진 혁명적 노동자 계급과 현실의 실존하는 임노동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가 갖는 본질적 차이는 혁명적 공상가의 명령에 의해 선언되었다. 선언 그 이후는 오직 노동력 가치만이 존재할 뿐이다. 현실의 자본운동은 노동력 가치에 따라 움직여지고, 노동의 가치는 그 배후, 심연을 따라 흘러간다. 아무런 연관도 없이 독자적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만약 이 양자를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알튀셰식으로 표현하자면 문화적 얼간이가 된 노동자를 만들어내거나 광란하는 펑크 테러리스트를 만들어낼 뿐이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가 들뢰즈와 네그리에 심취해 실제로 이런 테러리스트 그룹을 조직한 적이 있는데 그 이름을 까먹었다. 그래서 이름을 거명할수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이 왜 네그리와 들뢰즈를 짬뽕시킨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이 상징으로서의 문화에 대해, 무규정적 욕망에 대해, 자본과는 독립적인 아우토노미아를 강조할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수식을 걷어내고 본다면, 과거 우리가 그토록 귀 따갑게 들었던 "노동자 계급은 본래부터 혁명적이다" "노동자 계급에게 본래 그들 스스로의 욕망, 자주성에의 욕망을 불어넣으면 혁명이 불타오를 것이다"라는 공허한 수사만을 남긴 채 더 이상의 아무런 정치적 전략도 제시하지 못할 뿐이다. 공허한 자위행위 뒤의 씁쓸함을 아직도 맛보지 않은자들만이, 혁명운동의 그 길고 지난한 고통을 맛보지 못한 자들만이 공허한 수사에 현혹될 뿐이다.
5. 다시한번 더,
맑스의 자본은 정치경제학 비판,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인가?
맑스의 가치론은 정치경제학 비판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인가? 만약 노동가치론을 리카아도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러하다. 앞서 지적했듯이 리카아도의 가치론은 분배의 원리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착취의 원리로서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 특히 등가교환 과정을 통한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맑스의 핵심적 문제의식이라고 규정한다면, 리카아도식 가치론은 맑스가 설정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걸 인정한다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맑스의 가치론은 과연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증명하는가? 맑스 가치론을 추상노동학파식으로 해석한다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추상노동학파적 가치론을 노동가치론이라 명명한 뒤, 맑스의 자본론은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맑스의 [자본]은 과연 무엇인가?
맑스가 그토록 세심하게, 그토록 장대하게 가치론을 설명한 뒤, 맑스 그 자신이, 자본론 1권 전체를 통해 제시한 노동가치론이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설명한다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론의 핵심은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과 그로인한 계급투쟁의 불가피성,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모순의 확대심화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본]이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말한다면, 노동가치론을 비판하는 맑스의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말해 맑스의 [자본]이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혹은 해석하는 그 "올바른 가치론 (혹은 올바른 인간학, 혹은 정치학)"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현재까지 그 올바른 가치론, 정치적으로 해석된 가치론의 실존하는 형태로서 네그리의 그것 외에 발견한 것이 없다. 그리고 네그리식 가치론의 난점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자본]을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해석상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또다른 문제가 남는다. 바로 문헌적 근거이다. 나는 [자본]론의 인간학적, 혹은 정치적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본]의 문헌적 근거를 들어 이를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네그리나 클레버는 [자본]이 아니라 [요강]을 통해, 혹은 [경철수고]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해석을 증명하는 사려깊은 조심성을 보여주었던 반면, 그 얼치기 후예들은 자위행위의 달콤함에 빠져 [자본]을 그들의 "창조적 해석"의 전거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창조적 해석"은 자유다. 공허한 자위행위 역시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를 위해 맑스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맑스의 [자본]은 자위행위에 필요한 무엇도 아니고, 돗대기 시장에서 싸구려 물건을 치장하는 포장지도 아니다. 맑스가 경외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던 사람이 기지도 못하면서 날기만을 몽상하는 어리석은 몽상가의 방패로 삼아도 좋을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어리석은 후예들은 차치하고라도, [자본]이나 [요강]을 가지고 정치적 해석을 시도했던 네그리나 클리버를 살펴보자.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노동의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굳이 맑스에게서 그 문헌적 근거를 찾는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사용가치이다. 그러나 사용가치에 대해 맑스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구체적인 욕구의 대상", 사용가치에 대한 규정은 [자본] 전체를 뒤져보아도 열 줄을 넘지 않을 것이며, 그 열 줄 마저도 앞서 말한 것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 과연 맑스는 노동가치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의 핵심적 개념이 될 수도 있는 사용가치에 대해 단 열줄도 안되는 공간을 할애했단 말인가?
좋다. 맑스가 맑스가 뭐라고했건 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렇다면 네그리나 클리버, 더 나아가 들뢰즈는 이 사용가치, 혹은 역능, 혹은 아우토노미아, 유목민성에 대해 얼마나 풍부한 개념을 제시해주었는가? 노동하는 계급의 현존과 그 전능한 역능의 가교는 얼마나 튼튼하게 제시되었는가? 이에대해 침묵하는 것은, 무규정적 개념이 춤을 추는 포스트맑스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전능한 신 역능은 가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인가?
머릿속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혁명을 그렸다 지우는 이들에게 나의 이러한 질문은 하챦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묻는다. 관념의 혁명이 아니라 몸의 혁명을 위해.
--아우토노미아 이론을 중심으로 --
*****[맑스주의 코리아]라는 웹동호회에서 있었던 가치론 이해에 대한 논쟁중 제가 쓴 글입니다. 아래 이진경과 유동민의 글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간접적인 관련은 있겠군요^.^ 시간이 되면, 아래 두 사람의 논지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작성해볼텐데, 통시간이 안 나는군요. 때늦은 것 같기도 하고.....****
들어가며
이하의 글에서는 경어를 사용하지 않고 작성되었습니다. 글의 전반적 어감을 살리려면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게 좋다는 판단에서 입니다.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히 도발적으로 쓸려고 노력했습니다. 뜬금없이 자기주장만을 펼치기 보다는, 아래 조목조목 짚어서 논쟁을 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판단입니다. 굳이 도발적인 글을 쓰는 이유 역시 몇가지 쟁점을 잡아서 제대로 끈기있게 논쟁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경어를 생략합니다.
이 글은 약간은 학술적인 배경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된다. 다만 앞뒤 논리 전개과정을 눈여겨 살펴보기 바란다. 대부분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치론은 평균이윤율 경향적 저하법칙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논리체계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논의의 편리함을 위해 가치론만을 다룬다.
1. 학설사적인 배경
노동가치론은 중농주의자들로부터 아담 스미스에게로 넘어오면서 이론적 중요성을 획득한 후, 리카아도에 의해 경제학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아담 스미스에게 있어서 노동가치는 투하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두 축이 만난 결과로서 제시된 반면, 리카아도는 초기에 투하노동 가치만이 가치의 원천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스라파에 의해 재해석된 후기 리카아도의 경우는 현대 추상노동학파들이 주장하는 것과 그 본질이 유사한 불변의 가치척도인 표준상품 가치론(따라서 추상노동설적 가치론)을 주장하게 된다. 맑스의 경우 역시 문제의식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리카아도와 거의 동일한 노동(력)가치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1950년대 이전 소련의 공식적 견해에 따르자면 투하노동가치설이, 1950년대를 넘어오면서는 추상노동가치설이 대표적인 맑스 가치론 해석으로 자리잡아왔다.
스미스, 리카아도, 맑스를 일컫어 흔히 고전파 경제학자들이라고 지칭하는데,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가치론을 경제학의 근본원리로 삼은 것은 리카아도가 선언했다시피 경제학의 근본문제는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담 스미스의 경우는 분배만이 아니라 부의 성장, 성장하는 국부의 원천을 밝히는 문제가 핵심적인 관심사였기에 그의 노동가치론은 매우 불안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반적인 비판과는 달리, 앞서 말했듯이 아담스미스의 가치론이 교환가치와 투하노동 가치의 이중적 통합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그의 이론적 불철저함 탓이라기 보다는 그의 주된 관심이 성장론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균형 동학적 성장이론과 정태 일반균형론으로서의 가치이론은 근본적으로 화해불가능한 관계를 갖는다. 이 화해불가능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후술하겠다.)
맑스는 리카아도 이전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국민경제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이제까지의 국민경제학은 부의 원천을 분석함에 있어서 그 원천의 계급적 기원과 착취의 확대재생산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맑스는 리카아도가 가치의 원천이 노동에 있음을 주장했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배가 노동(력)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투하된 자본의 크기에 따라 분배 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드러내지 못했음을, 착취의 재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2. 추상노동인가 투하노동인가?
그런데 문제의 핵심인 착취의 발생기원, 착취 확대재생산의 원천에 관한 문제는 노동가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혹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력의 가치를 스라파식으로 해석하거나 추상노동학파의 견해대로 정의한다면, 자본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사회적 필요노동량,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해 허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 정의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 묶음의 단위 가치량"이 곧 노동력 가치의 실체로 정의된다. 만약 노동력의 가치가 이렇게 정의된다면, 노동력 가치를 그렇게 인정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노동자 착취를 승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추상노동학파들이 노동과정에서의 착취나 사회적 필요노동량을 변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렛대로서 화폐조절정책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이다. 착취의 발생을 가장 명확하고 쉽게 나타낼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두 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두가지 경로 외에 그 밖의 다른 경로를 통해서는 노동가치론의 내부논리로 착취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스라파주의자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으로 착취의 문제는 가치론 외부의 사회적 계급갈등, 임금협상이나 단체협약등을 통해 결정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결정된 이윤-임금율이 주어지면 그에 따라 노동가치가 내부적으로 결정되는 논리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계급투쟁이 노동가치를 결정 한다는 점에서 멋지게 보일수도 있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생산양식 차원의 착취와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발생하는 착취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시말해 생산양식 차원의 착취가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화해불가능한 대립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하게되고, 이것이 체계적으로 이어져 사회적 재생산의 차원에서 격돌하는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들이 주장하는 착취는 직접적 노동과정에서의 "초과착취"를 통해서만 나타날 뿐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개별적 노동력 담지자로 나타나고, 사회적 재생산의 과정에서도 역시 개별적 시민으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노동가치론 외부에 "인간학적 가치판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추상노동학파나 스라파식 노동가치론은 노동계급의 가치론(그게 어떤 것이든, 계급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이 될 수 없다.
3. 노동가치론인가 노동력 가치론인가?
이것이 바로 유동민이나 정운영이 인간학적 가치판단의 문제를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인간학적 가치판단은 가치론 내부의 논리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외부적인 고려사항이다. 이렇게해서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철학적 인간학과 결별하게된다. 물론 이러한 결별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결별을 통한 통합을 더 바람직한 대안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분리와 결별이 아니라면 두가지 편향이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첫번째 문제는 자본론 해석의 논리적 수미일관함에 관련된 문제인데, 복잡하기만 할 뿐 실천적인 쟁점과 직접 연결되지 않기에 생략한다. 그러나 학설사적인 맥락에서, 그리고 문헌적 근거를 위해서는 중요하다. 계속해서 맑스의 [자본]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이 있다면, 문헌적 근거를 가지고 재론하겠다.
두번째 편향은 자본주의 붕괴론적 편향이다.
노동가치를 자본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평균이윤율 수준에 의해 정의하지 않는다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불가피하게, 어떠한 반경향에도 불구하고 관철된다. 맑스가 주장한 반경향은 필연적으로 가치구성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데, 이 가치구성은 앞서 주장한대로 추상노동학파적 논리구조하에서만 발생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상노동학파적 노동력 가치규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순환적 위기하에서도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게 아니라, 항상적인 전반적 위기에 노출된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채겠지만, 추상노동학파식의 노동력 가치규정이 아니라 투하노동설적인 해석을 가하게 된다면, 정반대의 주장이 가능해진다. 특히 투하노동의 가치를 단순한 시계시간 노동력 투입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투하노동가치론자들은 노동력의 가치가 실제로 투입된 물리적 노동력의 시간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애초부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시계시간으로 계산된 노동력 투입량이라는게 규정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력 투입량에는 노동강도의 문제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구체노동의 일반노동으로의 환원이라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리카아도의 경우에는 이 환원을 "아무런 자본도 갖지않고 백사장에서 하루동안 금을 주은 양"으로 정의하자고 순진한 제안을 한적도 있긴 하지만, 어쨋든 이 환원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면, 추상노동학파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노동력 투입분에 대한 규정에서 그 실체적 내용에 인간학적 가치판단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규정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된다. 본래부터 노동의 가치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노동력의 가치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 발상은 아주 기발한, 그러나 대단히 공허한 것인데, 공허한 까닭은 착취를 설명하기 위해 착취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는 순환론에 빠진다는 점이고, 기발한 까닭은 이런 해석에 따른다면 붕괴론적 해석으로 이어지지 않고도 자본주의 체제동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완전히 단절된 두개의 이중적 논리구성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추상노동 가치론이 아니라 투하노동가치론을 선택했을때 불가피하게 도출되는 논리적 결론인 붕괴론적 경향과, 그럼에도 붕괴론적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잠재적으로"만" 혁명적인 노동자 계급구성 이라는 논리축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에 따른다면 자본은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 됨에도 불구하고 가치구성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을 거듭할 수 있다. 자본은 무소불위하고, 그 이면에서 노동의 자주성 역시 더욱 증폭한다. 무소불위한 자본과 무소불위한 노동의 잠재력은 한번도 마주침이 없이 병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논자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러한 가치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가 화해불가능한 대립과 모순을 겪게 된다. 계급간 대립과 모순은 자본이 변신할 때마다 단 한번도 현상하지 않은 채 거듭 심화된 형태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해석의 세련된 형태가 바로 이진경과 유동민의 논쟁시 이진경이 취한 입장이며, 네그리의 노동가치론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어쨋거나, 이진경이 유동민을 일컫어 노동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당한 자라고 비판하는 이유나 유동민이 이들 포스트맑스주의자들에 대해 근거없는 맹신, 과학 이전의 신앙이라고 비판한 근거가 무엇인지 이제 명확해졌으리라.
4. 공허한 자위행위, 아우토노미아
그러나 이 주장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데,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구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구분하는 근거가 가치론 내재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착취의 발생도, 착취의 확대재생산도, 그에 다른 계급투쟁의 심화도, 그 어떤 이후의 주장도 자기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 구분은 오직 네그리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기에 착취의 재생산도, 계급투쟁의 확대심화도, 그 전복적 지양인 공산주의도 역시 머리속에서만 진행될 뿐이다.
앞서 추상노동학파의 논리적 난점을 지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가치와 노동력의 가치가 갖는 모순이 노동력 가치의 교환, 노동력 가치에 따른 분배와 재생산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잠재적으로 규정되어진 혁명적 노동자 계급과 현실의 실존하는 임노동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가 갖는 본질적 차이는 혁명적 공상가의 명령에 의해 선언되었다. 선언 그 이후는 오직 노동력 가치만이 존재할 뿐이다. 현실의 자본운동은 노동력 가치에 따라 움직여지고, 노동의 가치는 그 배후, 심연을 따라 흘러간다. 아무런 연관도 없이 독자적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만약 이 양자를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알튀셰식으로 표현하자면 문화적 얼간이가 된 노동자를 만들어내거나 광란하는 펑크 테러리스트를 만들어낼 뿐이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가 들뢰즈와 네그리에 심취해 실제로 이런 테러리스트 그룹을 조직한 적이 있는데 그 이름을 까먹었다. 그래서 이름을 거명할수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이 왜 네그리와 들뢰즈를 짬뽕시킨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이 상징으로서의 문화에 대해, 무규정적 욕망에 대해, 자본과는 독립적인 아우토노미아를 강조할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수식을 걷어내고 본다면, 과거 우리가 그토록 귀 따갑게 들었던 "노동자 계급은 본래부터 혁명적이다" "노동자 계급에게 본래 그들 스스로의 욕망, 자주성에의 욕망을 불어넣으면 혁명이 불타오를 것이다"라는 공허한 수사만을 남긴 채 더 이상의 아무런 정치적 전략도 제시하지 못할 뿐이다. 공허한 자위행위 뒤의 씁쓸함을 아직도 맛보지 않은자들만이, 혁명운동의 그 길고 지난한 고통을 맛보지 못한 자들만이 공허한 수사에 현혹될 뿐이다.
5. 다시한번 더,
맑스의 자본은 정치경제학 비판,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인가?
맑스의 가치론은 정치경제학 비판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인가? 만약 노동가치론을 리카아도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러하다. 앞서 지적했듯이 리카아도의 가치론은 분배의 원리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착취의 원리로서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 특히 등가교환 과정을 통한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맑스의 핵심적 문제의식이라고 규정한다면, 리카아도식 가치론은 맑스가 설정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걸 인정한다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맑스의 가치론은 과연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증명하는가? 맑스 가치론을 추상노동학파식으로 해석한다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추상노동학파적 가치론을 노동가치론이라 명명한 뒤, 맑스의 자본론은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맑스의 [자본]은 과연 무엇인가?
맑스가 그토록 세심하게, 그토록 장대하게 가치론을 설명한 뒤, 맑스 그 자신이, 자본론 1권 전체를 통해 제시한 노동가치론이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을 설명한다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론의 핵심은 착취의 구조적 재생산과 그로인한 계급투쟁의 불가피성,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모순의 확대심화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본]이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말한다면, 노동가치론을 비판하는 맑스의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말해 맑스의 [자본]이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혹은 해석하는 그 "올바른 가치론 (혹은 올바른 인간학, 혹은 정치학)"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현재까지 그 올바른 가치론, 정치적으로 해석된 가치론의 실존하는 형태로서 네그리의 그것 외에 발견한 것이 없다. 그리고 네그리식 가치론의 난점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자본]을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노동가치론 비판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해석상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또다른 문제가 남는다. 바로 문헌적 근거이다. 나는 [자본]론의 인간학적, 혹은 정치적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본]의 문헌적 근거를 들어 이를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네그리나 클레버는 [자본]이 아니라 [요강]을 통해, 혹은 [경철수고]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해석을 증명하는 사려깊은 조심성을 보여주었던 반면, 그 얼치기 후예들은 자위행위의 달콤함에 빠져 [자본]을 그들의 "창조적 해석"의 전거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창조적 해석"은 자유다. 공허한 자위행위 역시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를 위해 맑스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맑스의 [자본]은 자위행위에 필요한 무엇도 아니고, 돗대기 시장에서 싸구려 물건을 치장하는 포장지도 아니다. 맑스가 경외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던 사람이 기지도 못하면서 날기만을 몽상하는 어리석은 몽상가의 방패로 삼아도 좋을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어리석은 후예들은 차치하고라도, [자본]이나 [요강]을 가지고 정치적 해석을 시도했던 네그리나 클리버를 살펴보자.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노동의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굳이 맑스에게서 그 문헌적 근거를 찾는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사용가치이다. 그러나 사용가치에 대해 맑스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구체적인 욕구의 대상", 사용가치에 대한 규정은 [자본] 전체를 뒤져보아도 열 줄을 넘지 않을 것이며, 그 열 줄 마저도 앞서 말한 것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 과연 맑스는 노동가치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의 핵심적 개념이 될 수도 있는 사용가치에 대해 단 열줄도 안되는 공간을 할애했단 말인가?
좋다. 맑스가 맑스가 뭐라고했건 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렇다면 네그리나 클리버, 더 나아가 들뢰즈는 이 사용가치, 혹은 역능, 혹은 아우토노미아, 유목민성에 대해 얼마나 풍부한 개념을 제시해주었는가? 노동하는 계급의 현존과 그 전능한 역능의 가교는 얼마나 튼튼하게 제시되었는가? 이에대해 침묵하는 것은, 무규정적 개념이 춤을 추는 포스트맑스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전능한 신 역능은 가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인가?
머릿속에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혁명을 그렸다 지우는 이들에게 나의 이러한 질문은 하챦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묻는다. 관념의 혁명이 아니라 몸의 혁명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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