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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반자본주의 인류연대(ACHF)의 깃발아래 다시 모이자

반자본주의 인류연대(ACHF)의 깃발아래 다시 모이자

"80년대 변혁의 주체를 위하여"

지난 세월 우리가 잃은 것은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열정이다. 우리가 맑스주의의 도그마에 매달려 자기변신하는 자본주의의 생명력과 세계의 운동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실패"라 불리우는 인류사적 대실험의 실패를 겪으며 우리는 맑스주의를 스스로 쓰레기통에 쳐 박고 말았다.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검증도 없이 현실에서의 실패가 모든 것에 대한 증명이라도 되는 듯이 우리는 그랬다. 이것은 물론 일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지난날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하지 못했다. 아니 경직된 도그마에 매달려 도그마에 배치된 어떠한 사고의 단초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표현함이 더 타당할지 모르겠다. 사실 그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일상에 매몰된 지금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합리화 해줄 수 있는 것은 결단코 아무것도 없다.

사상을 상실하여 무장해제 된 채 노동운동권, 현실 정치권, 각종 시민단체, 충실한 직장인 …… 등등 다양한 사회분야에 흩뿌려진 그 옛날의 동지들이여! 맑스주의를 우리의 사상으로 믿었던 이유가 그것이 휴머니즘에 기반한 과학이었기 때문임을 기억한다면, 지금 우리가 부정해야 할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었던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일 뿐이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 인류미래에 대한 자기헌신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과학의 붕괴를 핑계로 욕조의 더러운 물을 버리다 그 속의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닌지 냉철히 자문해 보자. 세계가 변하면, 과학 역시 변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또 다른 불변의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과거 우리의 도그마를 송두리째 날려버린 사건 즉,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원인과 현 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동지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자.
10년 전 그때는 못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 이제는 누구의 눈에도 선명하게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현실사회주의 실패에 대한 전망도 같이 우리 앞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보려는 의지가 없는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너무도 긴 시간을 무장해제 된 패잔병으로 살아온 탓에 그 맑던 영혼의 눈이 잠시 어두워진 것뿐이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순간, 우리는 그 옛날 공유했던 맑은 영혼과 뜨거운 열정을 되찾게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 장엄한 첫걸음을 위해 다음의 문제를 화두로 굳건히 잡고 잃었던 지난날의 열정을 되살려 다시 한번 치열하게 붙어보자.

(1) 현실사회주의는 왜 실패하였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사회체제는 각기 그 발전동인을 가지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문제의 핵심이다. 발전동인이란 그 사회를 유지·성장시키는 내적요인이며, 사회경제적으로는 생산력 향상으로 나타난다.
사회주의의 발전동인을 다루기에 앞서서 먼저 자본주의의 발전동인을 규명하자.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적소유에 기반한 이윤추구 및 그 과정으로서의 경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력 향상을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개인에 대한 봉건적인 경제외적 강제(인격적 구속)가 제거되고 사적소유제도만 보장이 된다면 달리 특별히 부가되어야 할 조건은 없다.
반면에 사적소유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주의의 경우 , 그러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을 수 있을 정도의 생산력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역사적 한계를 가진 사회주의에 있어서 내적 발전동인은 전혀 다르다.
끈임없이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확보해야만 하는 사회주의의 내적 발전동인은 사회주의 인민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발적인 헌신 및 봉사" 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교육과 선전·선동이 필요하며, 그 극단적인 모습을 우리는 인위적인 카리스마 조작의 한 형태인 "수령론"에서 볼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가 사회주의 건설전략 또는 전술의 오류(한때 이런 관점에서 초기저작과 많은 비주류(?) 맑시스트에 대한 연구가 유행되었다)가 아니라 근본적인 역사적 한계였음을 인정한다면 맑스주의는 그 혁명적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버림이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는 생산력 수준이 밑밭침되지 못한채 엄청난 대가를 치룬 인위적인 역사적 도약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을 버렸다.

(2) 현단계 자본주의 물적토대의 변화는 무엇인가?
맑스는 자본론에서(명시적으로 적시된 사항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사멸원인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의 저하경향이 관철되는 악순환(경기순환), 그리고 그 순환의 종착역인 공황의 주기적 발생이라 하였으며, 이는 주요 생산수단이 생산공장으로 대변되는 "산업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일정정도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주요 생산수단이 "지식"으로 전화해 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즉 "지식자본주의"의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시킬 기간산업 또는 기간시설은 국가 또는 정부차원에서 투자를 대신하여 자본측의 부담을 덜어주고, 지식에 의해서 창출되는 가치의 양은 "수확체증의 법칙"의 적용을 받아 전단계 자본주의 즉, 산업자본주의하의 이윤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는 결코 스스로 사멸하지 않으며,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소유한 유기체와 같이 강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임을 확인한다.
지식 또한 인간노동의 산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가치론에서처럼 평균화하여 상호비교 측정하고 교환할 수 있는 환원 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그 핵심은 인간의 자발성과 창조력에 근거한다. 바로 여기에 벤처(기업)의 본질이 있다. 자본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끊임없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및 이윤율저하(이는 경기순환 및 그 종착점인 공황으로 나타남)에 압박받던 자본이 새롭게 성장하는 IT산업에서 그 탈출구를 마련한 것이 바로 벤처이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폐기한다.

현단계 자본주의 주요생산수단으로서 지식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지식은 독점이 아니라 공유됨으로서만 수확체증의 법칙을 적용받아 그 가치가 증폭된다. 그러나 자본은 본질적으로 이를 독점코자 하는 자기모순에 직면하며, 이는 지금 현재도 사회적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극대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이는 단순히 경기순환곡선의 저점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수단의 대규모 집적에 의한 생산의 사회화와 구별해야 한다).

둘째, 자본의 탈출구로서 등장한 벤처(기업)의 본질은 해당 사업분야의 종류(소위 IT산업)와 무관하며, 해당 사업분야의 리스크 또는 기대 수익의 대소(소위 high-risk, high-return)와도무관하며 단지 경영환경, 또는 경영방식에 달려있을 뿐이다. 환언하자면 해당조직 구성원의 자발력과 창의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경영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이것은 지식의 효율적 창출조건이자 유통조건이며, 나아가 사회주의 발전의 내적동인과 일치하는 모순을 발견한다. 결론적으로 자본의 생존본능이 찾아낸 탈출구로서 벤처(기업)의 등장-지식자본주의의 성립-은 세계가 상품과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전화해 가고있음을 보여주는 이정표이며 우리는 그 긴 터널의 입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