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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노동가치론과 (탈)근대성

노동가치론과 (탈)근대성
- 이진경,「맑스의 근대비판 :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 부쳐 -

류동민(충남대, 경제학)

0. 이진경의『맑스주의와 근대성 : 주체 생산의 역사이론을 위하여』(문화과학사, 1997년)는 부분적으로 이전에 씌어진 글들을 모아 펴낸 것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면서 근대성(또는 탈근대성)과 맑스주의 철학간의 관계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직업적인 저술가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이 책은 그 다루고 있는 주제의 광범함이나, 한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위기 이후 유행했거나 지금도 유행 중에 있는 수많은 사상가들의 이론이 명쾌하게 자신의 체계 속으로 녹아들어오고 있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80년대 후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에 못지 않은 지적 자극을 준다. IMF사태 이후 현실의 변화가 탈근대성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들의 위력을 현저히 감소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의 제1장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바대로 '변혁'이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맑스를 어떻게, 또는 아직도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80년대에 '운동'이나 '혁명'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었던 사람들, 적어도 사회과학적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명색이 노동가치론의 전문연구자로 행세하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볼 수밖에 없었던 부분은 이 책의 제3장「맑스의 근대비판 :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제시되고 있는 노동가치론에 대한 분석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가치론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아직 익숙하다고 볼 수는 없는 미셸 푸코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소개하고 그에 대해 반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느낀 문제의식과 비판을 제기하고자 한다.

1. 먼저 논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이 책 제3장의 내용을 요약해보기로 하자.
2절에서 요약되고 있는 푸코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한 것이다. 즉, 모든 시대는 무의식적으로 그 시대에 고유한 담론들의 전개방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인데,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 pist m )라는 개념으로 부른다. 푸코는 15-6세기, 17-8세기, 그리고 19세기의 세 시기를 각각 특징적인 에피스테메를 갖는 시기로 구분하는데, 정치경제학에 있어서 노동가치론은 푸코가 '근대'라고 부르는 역사적 시간(즉, 19세기)의 에피스테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한 표상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라는 형식을 취하는데, 정치경제학에서 그것은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부에 관한 모든 표상을 기초지우는 객관적인 기준으로서의 노동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리카도나 맑스는 모두 동일한 에피스테메에 기초한 근대적 사유의 틀 안에 있다. 즉, 흔히 말하는 고전학파 정치경제학과 맑스의 단절이라는 것은 다같이 근대적 사유 내에 속하는 입장끼리의 상대적인 단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진경의 궁극적인 결론은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은 "근대의 무의식적인 인식론적 배치를 넘어서 있다"(p.111)는 점에서 푸코의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주장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 중에 발견된다. 즉, 수학자인 괴델의 분석틀을 원용하여, 리카도로 대표되는 고전학파 정치경제학이 설정한 노동가치론의 몇 가지 명제를 공리계로 파악하고, 맑스의 잉여가치론은 그 "공리계로부터 추론되지 않으며...[그것에] 대해 외부적"(p.79)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즉, "가치론의 공리만으로는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를 증명도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반박할 수도 없다"(p.84). 노동가치론의 공리계와 맑스 잉여가치론의 공리계를 이루는 명제들을 요약하면 각각 다음과 같다(pp.75-6).

<노동가치론의 공리>
① 모든 상품은 가치에 따라 교환된다. 즉 모든 교환은 등가교환이다.
②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즉 노동(시간)이 가치의 척도이다.
③ 가치는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 즉 가치의 기원은 노동이다.

<잉여가치론의 공리>
①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
② 노동은 노동력이란 상품의 사용가치다.
③ 노동력을 사용하여 생산하는 가치량은 그 구입에 지출된 가치량과 무관하다
(물론 가치의 증식이 발생하려면 전자가 후자보다 커야 한다).

잉여가치론의 공리가 설명하려는 것은 등가교환의 법칙을 준수하면서 사실상 부등가교환의 결과를 가져오는 자본증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이른바 자본증식의 비밀이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이 '노동력의 사용가치'라는 질적인 것으로 정의됨으로써 해결되고 있기 때문에, 가치의 기원이 양적인 것으로서의 노동이라는 노동가치론의 공리 ③을 위배한다는 것이다. 결국 맑스가 수행한 것은 "가치론의 공리계를 해체"(p.80)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은 가치론의 해체는 궁극적으로 '잉여가치의 외부성', 나아가 자본축적 그 자체도 가치론(또는 등가교환)에 입각한 내부적 과정이 아니라 "자본 자체에 대해 외부적"(p.102)이라는 '자본축적의 외부성'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이 끊임없이 수반하는 상대적 과잉인구의 창출은, 가치법칙에 대해서는 외부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치법칙에 필수적인 전제라는 의미에서 "내재하는 외부"(p.105)이고, 이것이야말로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이 끊임없이 돌파하려고 하지만 부딪히게 되는 내적 경계 또는 근대성의 경계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노동가치론 및 잉여가치론의 문제를 하나의 공리체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노동가치론이라는 문제가 하나의 공리체계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었거니와, 사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그것을 후진적인 체계로 머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주류 미시경제학에서 가치의 문제가 폐기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 체계가 그만큼 선진적이라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다. 이진경의 뛰어난 점은 이를 인식한 데서 머무르지 않고, 공리계를 구성하는 명제들을 보다 세분화하여 제시하고 그들간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자로 하여금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게 만드는가를 살펴보자.

2. 가장 큰 문제는 노동가치론의 문제를 왜 근대성과 탈근대성간의 대립이라는 구도 속에서 파악하려는가라는 점이다.
과연 맑스의 가치론을 "근대적 정치경제학을 넘어서...열어놓은 탈근대적 사유의 공
간"(p.113)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정말로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은 "근대적 사유와 끊임없이 조우하며 대결"(p.100)하였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노동가치론의 어떤 측면이 근대성 또는 탈근대성과 연결지워지는가를 알아야 한다. 물론 그는 같은 책의 다른 장들에서 근대적 주체생산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노동가치론과 관련해서는 사실 푸코의 논의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성이란 결국 부라는 표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존재로서의 노동에 대한 관념인 바, 맑스가치론이 탈근대적 사유공간으로 달려가고 있는(이진경의 표현을 빌면 '탈주하는') 것이라면 이를 부정하는 측면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을 노동력상품의 사용가치라는 질적 측면으로 정의한다고 해서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인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맑스에게 있어 부인할 수 없는 대전제, 또는 보다 근본적인 공리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을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형하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발전을 파악하려는 역사유물론의 관점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자신의 자연까지도 변화시킨다'라는 테제. 그것이 천부인권이라는 근대적 관념의 산물이건 또는 자연주의의 소산이건간에, 이를 부정하고 맑스의 가치론을 고찰하는 것은 최소한 맑스의 텍스트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다.
이진경은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서 ex-modern이라는 영어표기까지 덧붙이면서, 자신이 말하는 탈근대가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의미임을 강조한다(p.269). 그 근거로 자신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근대와는 다른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는 현재의 자본주의사회가 근대와 구별되는 탈근대사회에 접어들었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진경 스스로 말하듯, "근대의 초극이 정말로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되어야 하는 역사적 조건"(p.113)이라 보는 한, 이미 근대/탈근대의 대립구도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근대성을 탈각하지 못한 주체들로 가득찬 현실사회주의사회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같은 책 서두에서의 그의 문제제기(p.18), '자본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 뿐만 아니라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을 추적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외적인 경계를 긋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다른 혁명의 문제를 다시 사유"(p.89)하여야 한다는 주장 등은, 그가 근대성을 '지양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낸다. 필자는 일단 이러한 대립구도는 작위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푸코와 같은 방식의 논의가 지닌 한계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푸코는 "어떤 주어진 문화, 주어진 시점에는 오직 하나의 '에피스테메'만이 존재하면서 모든 지식의...가능 조건을 규정"한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어마어마한 거대담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논의를 가치론과 같은 특정 분야에 다소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마치 들을 때는 명쾌하지만 돌아서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문화비평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푸코나 이진경이 무관심한 것으로 보이는 주류경제학의 가격이론의 역사를 일람해보면 그것은 쉽게 드러난다. 근대의 에피스테메가 '표상으로 환원불가능한 객체'를 상정하는 데에 있다고 할 때, 가격 또는 부라는 표상을 노동이 아니라 효용(또는 제3의 그 무엇이라도)이라는 객체로 환원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대성의 경계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똑같은 논리로, 만약 그러한 객체로의 환원을 부정하는 논의는 근대성의 경계를 벗어난, 탈근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격을 배후에 존재하는 어떠한 객관적 실체와 연결지울 필요성도 부인하는 일반균형이론의 에피스테메는 근대적인가 탈근대적인가? 만약 근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뭔가 중요한 기준을 간과하고 있는 부정확한 유비(analogy)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이 탈근대의 영역에 속한다면, 이미 주류경제학은 일반균형이론의 창시자인 왈라스로부터 근대성의 경계를 벗어나거나 그것으로부터 '탈주'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푸코가 '근대'를 19세기라는 한정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였다는 점, '지식의 고고학'을 서술함에 있어 일반균형이론은 고고학적 조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그는 필자가 제기하는 혐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이진경처럼 푸코를 빌어 근대/탈근대를 구분하려
면, 후자보다는 차라리 전자를 인정하는 쪽이 유망할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의 유비가 놓치고 있는 것, 또는 오히려 이진경이 그것을 근대/탈근대라는 구도로 확장시킬 때 간과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의 문제라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휴머니즘이란 합리적이고 동질적인 주체를 전제한다거나, 역사를 움직이는 대문자 주체(Subject)를 강조한다거나 하는 등의 거창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그 주체가 이기성과 합리주의로 무장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경제인(Homo economicus)이건, 제한된 합리성 밖에 갖추지 못했지만 주어진 전략적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제도경제학적 인간유형이건, 노동력 밖에 팔 것이 없고 자본으로부터 끊임없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이건, 노동해방의 이념으로 무장한 의식화된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이건간에, 인간의 문제를 중심으로 놓고 가격형성의 문제를 설명하려 한다는 의미에서의 휴머니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휴머니즘으로부터는 맑스도 주류경제학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휴머니즘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 가격 또는 가치에 대한 근대적 사유를 비판하는 것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이진경은 자신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푸코와 견해를 같이 한다. 같은 책의 다른 장에서 그는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체', 즉 근대적 에피스테메로서의 노동의 등장은 그것이 인간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실증성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음, 이것이 노동을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파악하는 인간학적 담론에 기초한 유물론의 등장에 반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스스로 질문한다. 그러나, 그는 이 인간학은 "인간적 속성에서 분리된 노동, 소외된 노동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며, 객체의 형식을 취하는 노동의 보충물"(p.215)이라 결론짓는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의 실증성은 그 인간학적 동굴내에 위치한다"라거나 "19세기의 경제학은 인간의 자연적 유한성에 대한 언설에 관한 인간학에 의존하게 된다"라는 푸코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이제 보다 세부적인 문제를 지적해보자.
먼저 이진경이 제시하는 잉여가치론의 공리계는 타당한가? 과연 그것은 노동가치론의 공리 ③, 즉 가치의 기원은 노동이다라는 명제를 전면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과연 스스로 가치를 가져야만 하는가? 만약 꼭 그런 것이 아니라면, 잉여가치론의 공리 ①이 노동가치론의 공리 ③과 모순되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여기에서 '기원'이라는 용어도 그냥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푸코-니체-들뢰즈로 이어지는 현란한 인용 끝에 '혈통'의 이질성 또는 '발생'의 외부성이라는 어려운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다. '기원'이라는 용어가 도대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필자의 기억으로는 맑스가 별로 사용하지도 않은) 이 용어를 굳이 쓰지 말고 차라리 그냥 '노동에 의해 가치가 생산된다'라는 쉬운 말, 즉 명제 ③의 첫 번째 문장으로 바꾸면 안될까?『자본론』에서 맑스가 설명하듯이, 그리고 이진경 자신도 인용하고 있듯이, "자본의 생산력이란 노동의 생산력[이며], 자본의 증식이란 바로 노동이 생산한 추가적 가치"(pp.88-9 : 강조는 인용자)에 다름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론의 공리 ①과 노동가치론의 공리 ③이 모순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이진경이 제시하는 근거란 "질은 양에서 도출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p.76)라는 베르그송의 입장일 뿐이다. 노동을 노동력의 사용가치라는 질적 측면으로 정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질적 측면의 작용에 의해 양적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까지 인정하지 않을 필요가 있는가? 이진경은 "물론 순수하게 질적인 것은...양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으로 변환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노동에 대한 '노동의 가치'의 관계일 것이다"(p.77)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이 노동력의 사용가치라 할 때 그것이 누구의 관점에서 사용가치인가를 생각해보라. 생산수단을 갖추고 노동을 결합시킴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을 자신의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본(가계급)의 입장에서만 그것은 사용가치가 된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질적인 것으로부터 변환된 '양적이고 공간적인 지속'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력 가치와 잉여가치의 합으로 정의되) '가치생산물'이다. 자본가에게는 사용가치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에게는 통제된 형태로의 노력(effort)의 지출이라는 양면성을 갖는 '노동'은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노동력 가치와 잉여가치로 양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계급적 적대가 "자본이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것(노동력의 가치)과 노동을 통해 획득하는 것(가치생산물) 간의 적대"가 아니며, "차라리 그 각각의 항에 내재적"(p.98)이라는 이진경 자신의 서술도 오히려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가치형태분석에서의 맑스의 논리를 생각해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자가 소유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타인(자본가)을 위한 사용가치, 즉 노동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상대적 가치형태에 놓인 상품 A가 등식의 우변에 놓인 등가형태의 상품 B의 사용가치를 통해서만 스스로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말 문제는 노동력의 가치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노동가치론의 공리 ②에서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투여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노동력은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가치론의 공리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한, 노동력의 생산에 투여된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이론적으로 정의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모순되는 것은 잉여가치론의 공리 ①과 노동가치론의 공리 ③이 아니다. 아니, 근본적으로 잉여가치론의 공리계에서 필요한 명제는 ①이 아니라, 노동력 상품의 가치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그것을 편의상 ①'라 부른다면 ①'는 노동가치론의 공리 ②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른바 '자본축적의 외부성'과 관련된 논의를 살펴보자.
여기에서 이진경의 논의는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자본주의적 과잉인구의 법칙이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치법칙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먼저 외부적이라는 말이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 축적의 내적인 곤란과 결부되어 있음"(p.106)을 의미할 뿐이라면 필자로서는 별다른 이의는 없다. 그런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구분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혹시 이진경은 여기에서는 '자본주의 고유의 것'과 '자본주의에 고유하지 않은 것(따라서 비자본주의적인 것)'간의 대립구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가? 비록 축적의 외부성이 '내재하는 외부'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유보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p.106)은 이와 같은 혐의를 두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음을 암시한다. '미국에 자본주의가 존재하는가?'라는 기상천외의 질문을 던지고 진지한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어느 포스트모던 맑시스트의 논문은 자본주의/비자본주의의 대립구도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일 때 생겨날 수 있는 해프닝에 다름 아닌 것이다.한편 자본주의적 과잉인구가 가치법칙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진경은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짐작해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가치법칙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라는 문제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것인데, 가치론의 공리계를 이루는 세 가지 명제를 살펴보면 상대적 과잉인구문제와 관련되리라 추측되는 것은 명제 ①이다. 즉, 모든 상품은 가치에 따라 교환된다는 등가교환의 원리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노동력도 상품인 이상 그 가치대로 교환되어야 할 것이므로, 상대적 과잉인구가 가치법칙에 필수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노동력 상품의 등가교환을 위해서는 과잉인구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노동시장의 초과공급'이 '노동력의 가치대로의 교환'을 위한 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맑스 자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애매하게 남아있는 부분이다. 맑스는 한편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면, 그들의 작용은 상쇄되며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 동등하게 된다"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체계가 케인즈의 체계와 더불어 노동시장의 초과공급, 즉 불완전고용을 전체 경제의 균형조건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동의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외부적이면서 동시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 이와 같은 맑스 체계의 특징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앞서 지적한 것처럼, 노동력 상품의 가치에 대한 규정이 어떤 형태로든 잉여가치론의 공리계에 삽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필자 나름대로 해석하고 넘어가기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자본은 가치법칙에 반하는 노동력 상품의 탈가치화를 통해 인구를 과잉화시키고 임금을 저하시킨다"(p.105 : 강조는 인용자)라는 서술은, 기술혁신에 의해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함으로써 임금을 떨어뜨리는 것이 가치법칙에 어긋나는 경향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즉, 노동력의 공급이 부족하면 임금이 올라가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인데, 신기술도입에 의해 떨어뜨리도록 만드는 것이 가치법칙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여기에서 이진경은 노동인구를 항상적인 과잉의 상태로 유지하는 경향이 오히려 가치법칙이 제대로 작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때 말하는 탈가치화라는 것은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정리해보면, 수급균형이 이루어질 때에만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가치론의 공리인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잉인구를 창출함으로써 노동시장에서는 등가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만, 즉 가치론의 공리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때 즉각 연상되는 것은, 이미 (물리적인 의미에서보다는 심리적으로) 꽤 오래 전에 등장했었던 한국판 '과학적 맑스주의'의 견해, 즉 노동시장의 초과공급이 항상 노동력 가치 이하로의 임금지불을 가져옴으로써 '절대적 궁핍화'로 연결된다는 견해이다. 지금에 와서 볼 때, 이러한 류의 견해가 얼마나 무모한 주장으로 귀결되었던가를 생각해 보라.
굳이 문학적 상상력까지 발휘하여 이러한 지적을 해두는 것은, 이진경이 어디에서도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얘기는 하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암묵적으로 노동가치론의 공리 ②와 노동력 상품간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문제를 느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이라 보여진다.

4. 이진경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이 외부적 명제를 계속 공리로 추가함으로써 "'과학적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 아래, 스미스, 리카르도에 의해 마련된 근대적인 지반으로 맑스의 돌파지점을 반복하여 재코드화하고 재영토화"함으로써 끊임없이 맑스의 사상을 "근대성 안으로 회귀"(pp.112-3)시켰다고 비판한다. 소비에트 경제학교과서로 상징되던 '정치경제학'이 때로는 '과학', 때로는 '정통'이라는 이름 아래 이른바 논리역사설을 통해 절충적인 이론을 계속 추가시켰던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자본론』Ⅰ권에 등장하는 상품-화폐-자본이라는 핵심적인 범주들간의 매 연결고리마다 등장하는 이론적 난관들은 '논리=역사'라는 편리한 공식에 의해 해결(실제로는 '해소')되곤 하였다. 사실 이진경이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자본증식의 비밀이라는 주제야말로 '80년대의 그 많던『자본론』세미나에서 논리역사설이 가장 인상적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던 부분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애초에 괴델을 빌어와 노동가치론으로부터 잉여가치론으로의 이행을 공리계의 확장으로 이해한 이진경의 논의는 '과학적 정치경제학'과 어떤 점에서 준별되는가? 결국 '탈근대적 사유의 공간'을 열어젖히자는 주장으로 귀착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가 근대/탈근대라는 대립구도 하에서 맑스경제학을 파악하는 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또한 이 책 전체의 부제이기도 한 '주체 생산의 역사이론'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며, 최근 그의 논의를 일관되게 지배하는 키워드인 '탈주의 철학'(또는 철학의 탈주?)인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노동가치론은 어떻게 되는가? 잉여가치론의 공리계를 통해 그것은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자본』에는 맑스의 가치론[은]...없다"(p.108)는 것이다. 결국 맑스는 근대성의 에피스테메가 지배하던 시대에 살면서 근대성의 경계를 끊임없이 초월하려 하였던 탈근대적인 사상가인 것이다. 이미 이진경에게 있어 자본주의 사회의 가격결정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로서의 가치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이러한 해석이 전체적으로 맑스를 올바르게 이해한 것인가의 여부를 떠나서, 또한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견해와 실천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물음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아직도 맑스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효과적인 답변이 될런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혹시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오면 맑스에게도 이미 그런 내용이 있으니까 염려할 것 없다고, 포스트모던 이후의 또다른 어떤 시기가 오면 그 때에는 다시 그것도 맑스에게 이미 있었다고 주장하는 '끊임없는 탈주'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부르주아 경제학은 더욱 치밀하고 정교한 분석도구로 현실을 분석하는데, 가격형성에 관한 설명도 포기해버린 주체형성이론으로서의 가치론만으로 맑스경제학, 아니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생명력은 유지될 수 있을까? 경제학에서 철학으로, 문화비판으로, 다시 또 그 무엇으로 정처없이 '탈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경제학 전공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