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본질과 역사적 시간
김 기환 (1996.06)
우리는 앞의 1,2장을 통해 존재-시간론을 검토함으로서 존재의 본질과 연관된 몇가지 결론을 얻어냈다. 여기에서 그것들을 요약.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자연과학에 있어서조차 인간적 실천에 의해 형성되는 관계 외부에 독자적으로 실존하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시간은 존재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시간에는 방향이 없으며,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 자연과학의 진보는 인간적 관계양식의 확장과 밀도에 따라 시공간개념이 변화하며, 시간과 공간의 외연과 내포 역시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이다. 따라서 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실천연관에 근거해서만 구축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실천적 변혁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특정한 세계관이자 세계인식의 방법론적 원리가 된다. 이런 점에서 철학이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한 창조적 활동이다. 철학은 세계변혁의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이유와 존재목적, 그리고 성취해야할 목적과 그 방법을 통찰하기 위한 원리적 근거를 찾는 작업이다.
3. 절대시간개념은 존재를 추상적이고 자립적인 실체로 추상할뿐만 아니라 추상화된 존재가 존재자(현존재)일반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며 그것들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몇몇 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서구 형이상학 전반을 지배해온 원리였다. 또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 제기된 순수지속이라는 개념 역시 현존으로서의 시간과 영원으로서의 지속이라는 존재와 존재자간의 심연을 극복할수 없고, 오히려 창조적 실천을 순수지의 심연에 빠뜨릴 뿐이다.
4. 시간을 순간적 현재 그 자체로의 영원한 회귀로 바라보거나 존재자에 의해 무매개적으로 결정된다고 이해하는 대개의 철학적 체계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개별화 시키거나 역사적 실존으로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여 존재의 연대성을 부정하거나 극단적 실용주의로 빠져든다.
5. 현존재의 기획투사적, 탈자적 생기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현존재만의 고유한 특성이며, 존재론적 차이를 발생시키는 현존재의 시간성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시간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전의 시간을 구성한다. 그리고 인간행위가 갖는 집합적, 역사적 성격은 지평적 현전의 시간성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며 이를 둘러싸고 역사적 생산양식의 구조화와 동시에 전략적 실천을 통한 이행이 시작된다.
이제 이상에서 얻어진 결론들을 좀더 구체화하고, 그것을 역사적 실천개념으로 확장함으로써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사회적 생산양식 속에서의 인간실천과 모순의 변증법으로 총괄하도록 해보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필자가 앞서 말했던 존재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에 해당하는 것이며, 모순의 변증법을 통한 이행과 재생산의 통일적 이해를 가능케하는 것이자, 현실변혁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대안적 체제의 원리와 운동양식 전반을 가늠짓는 척도로 역할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해 있던 내적 딜레마 혹은 긴장을 지양하고 21세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지양이라는 과제를 한걸음 더 진전시켜 낼 뿐만 아니라 철학의 종말을 선언하는 데리다의 해체철학과 재구성된 존재론적 맑스주의를 대결시킴으로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증명해 보일 것이다.
1. 실천적 관계양식으로서의 존재-시간론
시간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필연적으로 존재개념에 대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존재-시간론과 관련된 쟁점은 데리다에 의해 보다 급진적으로 평가되어지고, 마침내는 해체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대로 "존재이해가 실존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이 존재이해 또한 시간성에 기초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존재이해의 존재론적 가능조건이 시간성 자체이다. 따라서 시간성으로부터 우리가 존재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 지평을 끄집어 내야한다. 시간성이 존재이해를 가능케하는 일, 즉 존재론을 가능케하는 그 일을 떠맡고 있"기 때문에, 존재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동시에 시간성 혹은 시간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로부터 출발했으나 하이데거를 넘어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체계를 급진적으로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존재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존재론 그 자체를 부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우선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훗설의 경우, 지향성 이론에 기초한 사태의 의미는 하나의 불변적 관념성과 형상(본)으로서 언제나 의식의 현재성에 현존해 있어야 한다. 의식에 현존하지 않는 의미는 살아있는 의미일 수 없다.
따라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념성으로서의 존재규정은 역설적으로 현존으로서의 존재의 규정과 혼용되고 있다. 순수한 관념성이란 관념적인 대상의 관념성, 즉 반복의 행위 앞에 현존하는, 얼굴을 맞대는 그런 대상의 관념성일뿐만 아니라, 시간성의 근원으로서 살아있는 현재, 즉 근원점으로서 지금부터 출발하여 규정된 시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성 혹은 관념성은 모든 사물과 대상에 대한 자기동일화의 관념 혹은 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식의 동일성에 보편적 진리를 구하려고 하는 '자아학'과 동일한 것이라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후설의 지향성에 근거한 시간이론 역시 철저히 아유적이며, 현전의 진리를 말함에도 결국은 그 현전이란 현전 그 자체가 아니라 아유적으로 재구성된 현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파르메니데스부터 후설까지 현재의 특권은 결코 의심되어 본적이 없다. 그것은 명증성 자체이고, 어떤 사유도 현재적 요소 밖에서는 불가능하다. 비현존은 현존의 형식 아래서 언제나 생각된다.....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지나간 현재, 다가올 현재로서 규정된다." 데리다는 이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시간은 현존의 존재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은 진리를 구성하는 근원적 근거이자, 인류이성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더구나 현존의 존재는 본질상 무한하다. 따라서 무한한 존재를 현재에서 표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완결될 수 없기에 미래적 지평에로 방향이 열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미래란 불확정적인 무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의식의 공통성에 근거한 의식의 목적에 의해서만 열려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의 진리가 갖는 시간적 무한성은 의식 혹은 로고스의 목적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목적론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데리다는 비판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에서 존재론을 해체시킬 강력한 무기로 차연과 흔적이라는 개념을 동원한다. 흔적이란 "생생한 현재는 자기와 자기자신과의 차이에서부터, 잡아당겨지는 흔적의 가능성에서부터 솟는다. 흔적은 자기내면적 삶이나 생명만이 있는 현재의 단순성으로서는 생각될수도 없다. 생생한 현재의 자기란 근원적으로 하나의 흔적이다." 즉, 흔적이란 비현재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에 삼투되어 있고, 의식의 내면성이라는 것이 이미 바깥세계의 것과 직물짜기를 하고 있고, 안이 바깥과 하나의 놀이터가 되고 그런 텍스트의 짜집기를 가능케 해주는 원리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점, 혹은 존재의 형식이 아니라 서로의 흔적에 의하여 텍스트의 직물짜기를 해나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흔적인 시간에 선행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현존이란 시간적 동일성이고, 존재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현존이나 시간의 동일성은 흔적이 없이는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했던 현재 혹은 '지금'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문제제기한다. 데리다에 의한다면, "'지금'은 이미 없고 동시에 아직 존재치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존재론적 현존이 될 수 없다. "시간의 요소로서의 '지금'은 그 자체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시간으로 변하여서만 존재하기를 그치고 지나간 존재나 닥쳐올 존재의 형식에서 무화에로의 통과속에서만 오직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시간을 시간의 양식인 과거와 미래에 따라서만 보면 그 시간은 무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존재자는 비시간이다. 그리고 존재자를 현존하는 것으로, 존재를 현존으로 은밀히 규정된 방식에 따라서 보면 시간은 비존재이다"
데리다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앞서의 글에서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금'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했던 말을 상기해보자.
"지금은, 그것이 언제나 이미 무엇으로 존재했던 바, 그것의 관점에서 볼때는 동일한 것, 즉 개개의 모든 지금에 있어서 지금은 지금이다. 다시말해, 지금의 본질, 지금의 무엇은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또한 개개의 '지금'은 모두 본질상 지금마다 각각 하나의 다른 지금이다. 다시말해 지금 존재는 언제나 달리 있음이다."
여기에서 '지금'이란 인간의 영혼에 의해 헤아려진 시간이다. 따라서 헤아려진 시간과 헤아림 이전의 시간이 존재할 수 있다. 지금이란 헤아림 이전의 시간이 인간에 의해 하나의 일점으로서 파악된 것이며, 이 헤아림으로서의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서로 잡아당겨 하나로 모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체 시간이 될 수 없다. 시간은 영원한 흐름이며, 존재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잘리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 '지금'이라는 시간은 시간의 비존재에 불과하다. '지금'은 이미 없고 동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과거와 미래의 끌어당김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끌어당김은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재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부정된다면, 그리하여 지금이 하나의 존재로 파악된다면 '지금' 이전의 시간은 비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이전의 시간이 비존재가 된다면 지금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와 현실태를 나누어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 혹은 지금이 갖고 있는 차이와 동일성의 긴장을 해소하려 했던 이유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긴장,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해법을 부정한다. 데리다가 핵심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금'은 스스로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데, 어떻게 지금이 시간의 현행태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현재는 그 자체 비시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차연으로서의 시간은 존재자의 동일성을 부정한다. 존재자의 동일성 이전에 차이가 먼저 발생하는 것이고, 차이에 의해 동일성으로서의 현존이 나타나지만 이 현존은 차연의 흐름속에서 한갓된 것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론은 존재의 통일성을 위하여 다른 것을 같은 것 내부로 언제나 끌어들인다. 존재 혹은 존재자는 동일성의 논리, 동시성의 논리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 혹은 존재자는 존재하는 것으로 존립 불가능하기 ?문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론은 흔적과 차연 이전의 동일성을 요구하며, 그런 한에서 모든 존재론은 자아학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데리다는 존재론 일반에 반대하여 "차연이 생명의 본질이다.....존재를 현존으로서 규정하기 전에 생명을 흔적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만이 삶이 죽음이고, 쾌락의 법칙의 넘어섬과 반복인 동시에 그 법칙의 넘어섬과 반복이 위배하고 있는것과 함께 근원적이며 함께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하는 유일한 조건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데리다는 현전하는 모든 것들, 진리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정립되자마자 비진리, 비현전으로 되고 만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일체의 형이상학은 극복될수도 완성될수도 없다. 단지 차연의 놀이만이 허용되어 있을 뿐, 철학은 종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데리다의 철학에 대한 종말선언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그의 논리가 갖는 개념적 난해함을 뚫고 시간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재검토 해보도록 하자.
지금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데리다는 지금이란 비존재, 비현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비존재란 무엇에 대한 비존재이며, 비현존은 무엇에 대한 비현존이란 말인가? 존재 자체를 고정되고 불변적인 독립적 실체라고 보았을 때, 마찬가지로 시간을 독립적이고 불변적인 실체적 흐름이라고 볼 때 비로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것 아닌가? 데리다가 "지금은 스스로가 존재를 부정한다"고 말할 때 그가 지칭하고 있는 존재란 절대존재일 뿐이지 현존재는 아니다. 현존재는 부단히 변화하는 기획투사적 실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기획투사적 실천을 통해 자신과 타자르 정립하는 존재이기에 지금은 현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한다. 기획투사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지금'은 주어진 존재, 정립된 존재, 독립적 실체로서의 존재를 부정할 뿐이다. 시간, 특히 지금이 인간의 기획투사적 실천에 의해 형성된 초월적 지평, 초월적 시간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시간은 언제나 지금에 존재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끌어당김의 흔적으로 지금이 존재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끌어당겨지는 과거와 미래란 독립적인 시간흐름을 의미하는 것인가? 데리다는 시간흐름의 끌어당김으로 흔적이 만들어지고, 지금이란 흔적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과거와 미래로서의 시간흐름은 지금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에 의해서야 비로소 과거와 미래의 끌어당김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현존재의 기획투사적 실천이 없다면 시간성의 지평은 열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적 기획투사, 전략적 실천이 없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끌어당겨지는 과거와 미래란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존재-신론에서의 존재론이자 시간론에 다름아니다. 오히려 현존재의 시간적 지평위에서 집중되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성의 실체이며, 지금이 확장되고, 지금의 심연이 깊어질 때 시간은 시간의 흐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심연과 지금의 외연은 인간적 실천, 기획투사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그에 따라 과거와 미래의 끌어당김 역시 그 범위와 심연 역시 달라 질 수 있다. 우리의 끌어당김에 의해 형성되는 시간적 지평은 전략적 실천의 내용과 지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라는 끌어당김은 무한히 변화될 수 있는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논의의 맥락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데리다가 비판하는 훗설의 지향적 시간개념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훗설의 현상학에 의하면 '몸은 구체적 생활세계를 접하는 필연적 조건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몸이 제공하는 시간과 독립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은 결코 인간성의 여러조건과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현상학적 관점이란 "주체가 무엇을 경험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그가 스스로의 경험세계를 어떻게 유의미한 통합체로 구성해 나가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은 의식의 지향적 매개과정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역동적 만남, 활동성, 그것을 통한 구성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개념으로 정립된 것이 바로 경험의 시간적 통일성으로서의 '지향지평'이다.
훗설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시간 그 자체--그것이 무엇이든--가 아니라 경험된 것으로서의 시간, 체험된 시간이다. 따라서 훗설은 경험의 시간적 지평을 파지(retention)와 예지(protention)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파지란 '현재가 드러나는 배경의식의 통합된 전체를 가르킨다.' 그러나 파지는 단지 기억의 중층적, 다양한 뭉치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파지적 지평은 기억과 회상의 중층적 뭉치에서 의미있는 구조와 패턴을 찾아낼때에만 경험과 인식의 통일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각각의 파지는 과거의 흔적들을 일련의 그림자의 형태로 스스로의 내부에 보존하고 있는 계속적 조정활동이다." 그리고 이 구조와 패턴은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변증법적 결합에 의해서만 구축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향성이 어디로부터 기원하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훗설은 하이데거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근원적 시간성으로부터 이 지향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의 방향으로부터 출발한다. 훗설은 경험의 자아적 본질 혹은 주관적 선천성을 지향성의 기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 선천성은 데리다가 말하듯이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시간적 이타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훗설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하는 핵심은 지금이 비존재나 비시간이라는 점이 아니라 시간구성의 유아성, 자아중심성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훗설의 자아중심적 시간성은 니체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이 훗설의 철학체계는 "구체적이지만 경험적이지 않는 지향성처럼 즉 생산적이면서도 동시에 개시적이고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지향성처럼 구성적인 선험적 경험이 발견되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공통된 뿌리로서의 근원적 통일성이야말로 후설에게 있어서 의미의 가능성 자체....였다......이런 공통적 뿌리는 구조와 발생의 뿌리이다."훗설은 자아의 경험세계와 경험지평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성되는 시간성이 곧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연대적 시간성으로 구성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그런한에서 훗설의 체계는 구조와 발생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근원적이고 공통적인 뿌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훗설의 지향적 지평개념에서 거론되는 시간성은 데리다가 지적하는대로 유아적 시간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지적대로 통일적 방식으로 시숙(時熟)하는 것, 축적되는 것이지 경험적 자아에 의해 합성되는 것이 아니기 ?문이다. 왜냐하면 훗설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주체가 무엇을 경험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경험세계를 어떻게 유의미한 통합체로 구성해 가는가'하는 점이 현상학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통일적 시숙 혹은 축적은 파지와 예지라는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 우선 시간은 '구체적인 경험의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을 통해서만 원초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훗설은 세계의 시간, 실재하는 시간과 같은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자연의 시간(자연과학에서도 이런 시간성은 부정된다)은 시간성에 대한 원초적 데이터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경험의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훗설은 이에 대해 명백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그가 후기에 강조했던 경험세계란 결국 인간의 삶이 이뤄지는 역사적 생산양식, 삶의 역사적 정황이 바로 경험의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에 다름 아니다. 부르디외가 말했듯이 "객관적 시공간 개념은 반드시 사회적 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물질적 창조과정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수락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재생산에 기여하는 물질적 창조과정은 집단적 행태를 통해 어떤 일정한 구조를 형성하는 데, 이러한 집단적 구조행태의 구성은 그 사회구성원이 집합적 리듬에 순종할 것이 생존의 요구이며, 그 집단 전체가 바로 그러한 시간성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경험의 사회적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이 곧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이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만약 훗설의 경험의 사회적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을 역사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 혹은 뉘앙스로 이해한다면 훗설의 유아적 시간성, 주관적 선천성은 경험적 전체세계로서의 주변세계(Umwelt), 혹은 세계연대적 시간성으로 전환하게 되는 셈이며, 훗설의 유아성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이미 표적을 잃은 셈이 된다.
훗설은 파지를 설명하면서 '한 점'으로서의 시간개념과 지각되는 대상과 주체의 동일성 논리, 즉 데리다가 '지금'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논파했던 존재-신학적 논리를 역시 비판한다. 훗설이 보기에 순수한 '지금'이란 철학자들의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현재란 분리될 수 없는 시간의 원자적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훗설이 파악하는 '지금'이란 지금은 부재한 과거의 사실들이 축적된 일련의 사건들 더미 안에서 의미와 구조의 패턴을 찾아낸 관계양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과거와 미래적 사건 양자를 접합시킨 하나의 띠와 같은 관계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여기에서 현전과 부재를 명확히 나누어 비현전이니 비존재니 구분하여 나누는 것 자체가 이미 원자적 시간(시각)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의미와 구조의 패턴적 관계양상으로서 구성되는 파지적 지평은 현존재의 명증한 의식의 초점에 의해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훗설의 시간성이 현존재의 특권적 지위와 의식의 명증성을 전제한다는 데리다의 비판은 또 한 번 빗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파지에서 나타나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적 조정과정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존재의 지각과 의식이 차지하는 의미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필자는 당장 여기에서 그것을 세세하게 분석하지는 안겠다. 이는 어차피 민코프스키가 말한대로 "시간적 장은 변화한다.....시간의 초점과 그 성격에 따라 그 장은 확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며" 축소와 확장에 결부된 시간적 장의 밀도 역시 변화하는 다이나미즘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지적 지평은 현존재의 과거 지각이나 경험, 현재의 경험과 의식 혹은 더나아가서 미래적 예지라는 범위에 제한되지 않는다. 파지적 지평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파지적 지평의 역사성은 인간실천이 갖고 있는 역사성으로 인해 객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인간실천으로서의 노동이 행해지는 조건과 결과에 의존할뿐만 아니라 특정하게는 특정한 생산양식 하에서 행해지는 전략적 실천주체의 실제적인 활동을 통해서 규명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하의 글을 통해 계속해서 지향적 시간성에서 나타나는 역동적 조정과정으로서의 현재를 훗설이 해결하고자 했던 구조와 발생의 변증법적 통합이라는 문제의식과 결부시켜 논의할 것이다.
2. 욕망의 본질과 존재의 본질
우리는 시간을 철학사에서의 존재-시간론을 둘러싼 논쟁과 하이데거-데리다의 존재론 전체에 대한 비판적 전복 시도를 통해 훗설의 지평적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통과함으로써 인간행위에 의해 구성된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현재와 역사간의 관계양식으로서 시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존재-시간론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의미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서구 형이상학이 견지해왔던 존재-신론적 함정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지난한 시도였다.
철학에서의 존재론은 모든 학문의 이론적 근원이자 내적 통일성의 근거이며, 철학의 목적 그 자체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론이 빠진 철학은 철학이라 이름할 수 없으며, 개별과학의 일부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이런점 때문에 철학을 해체하거나 철학의 종언을 주창하는 논자들이 줄기차게 전통적 존재론을 비판해 왔으며, 존재론은 관념적 허구에 불과하거나 은폐된 목적론임을 논증하려 그토록 애썼던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에도 예외가 아닌데, 맑스주의의 정통을 옹호하려는 진영에서는 물질 그 자체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지켜져야 할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 진영에서 물질 그 자체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보다 일찍 종언을 고했는데, 이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통한 인식론적 물질 존재증명(칸트의 인식론적 신존재 증명과 비교하라)을 통해서 본격화 되었다.
따라서 현재 철학의 고유한 의미와 역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려 한다면, 현존하는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미래를 예비하려고 하는 누구라도 존재론적 근거를 재구성, 포스트모던의 혼란스러움으로부터 철학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입증해야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제수행은 동시에 철학에 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던적 조류에 정면으로 부딪혀 과거 보여왔던 존재-신론적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존재론적 지평을 획븍해야만 한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과제수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존재와 현존재간의 관계, 이 양자를 관계맺는 현존재의 시간성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존재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시도는 인식론적 맑스주의에 의해 왜곡된, 존재신론적 존재론인 물질 우선성 테제를 기각하고 실천적 존재론을 재구성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존재론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재조명만이 아니라 철학사 전반에 걸친 존재-시간론 분석을 요구하며, 이 과정에서 존재론의 위치를 밝혀내지 않고는 맑스주의의 재구성 자체가 불가능함을 개닫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전개 과정은 바로 필자가 겪어왔던 일련의 사고전개과정을 개념적으로 전개해 나감으로써 위의 문제의식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기반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헤겔-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동-실천개념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를 바탕으로,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라는 마르크스의 천재적 선언을 보다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실천적 존재론의 행위 주체인 인간과 인간적 실천의 관계양식으로서 역사적 존재-시간론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사회적 존재-시간론을 통찰력있게 제시하는 세 사람의 사회학자를 인용하면, "객관적 시공간 개념은 반드시 사회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물질적 실천과정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수락해야 할 (기재의--인용자)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해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르페브르는 "구체적인 공간적 실천은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간 속에서 그리고 공간에 걸쳐서 발생하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흐름들이나 이동들, 그리고 상호작용을 말한다." 부르디외와 르페브르의 언급을 결합하면 훗설의 지평적 시간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삶의 시간과 공간은 집합적 리듬을 통해 형성되는 교차와 정거장으로서 창조되고, 변화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기든스에 의한다면, "인간행위 수행에 관한 적절한 설명은 첫째, 행위 주체이론과 연결되어야 하며, 둘째 행위의 목적, 이유 등을 함께 모여진 것으로 다루기 보다 행동의 연속적 흐름으로 행위를 시간과 공간안에 상정시켜야 한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대로 시간은 행위주체들의 집합적, 역사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며, 행위 주체의 집합적 역사적 실천은 인간행위 주체가 갖고 있는 고유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들의 사회적 시공간 개념/사회적 존재-시간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인간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근원으로서의 욕망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사회적 존재-시간론이 갖고 있는 존재론적 실체를 파악해 나가기로 하겠다.
"인간적인 개체는 즉자대자적이다. 개체는 대자적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러나 개체는 즉자적 존재이기도 하며 개체 스스로가 근원적인 피규정적 존재나 확정된 존재를 갖는다......이러한 존재, 즉 한정된 개체성의 신체가 개체성의 원천이며, 개체의 행위에 의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개체는 이와 동시에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 의해 형성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그의 신체도 역시 개체에 의해 산출된 자기자신의 표현이다. 동시에 신체는 직접적인 사물로서 존속하고 있는 그러한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개체는 자신의 원천적인 본성을 작품화한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본질을 개체가 인식하게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인간은 자연적인 유기체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변의 세계를 즉자존재화 혹은 동일화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즉자존재적 실존, 순수동일성으로서의 존재는 더 이상 인간실존이 아니라 단순한 유기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신체로 인하여 자연에 의해 고정된, 원천적으로 규정된 생물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원천적으로 규정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이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곧 유기체로서의 자신을 무화시키는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대자적 존재로 전화한다. 인간의 행위는 욕망충족적, 목적의식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런한에서 인간은 자신의 즉자존재성을 부정한다.
여기에서의 부정성은 우선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동일성의 부정 즉 무이다. 부정성은 존재하지도, 실존하지도, 현상하지도 않는 것이다. 부정성은 동일성의 부정, 구별과 차이로서만 실존한다. 그러나 인간존재의 자연적 규정성, 유기체적 고정성을 이루는 신체의 활동에 의하여 부정성은 행동이라는 형태로 실존한다. 즉 순수한 부정성은 행동을 통해 현상하는 것이다. 인간행위는 그런 점에서 동일성과 부정성의 변증법적 모순 그 자체이며, 데리다의 순수차연과는 그 질을 달리 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은 관념적 의식상에 있어서만 실존하지도, 현상하지도 않는 근원적 차이와 연기의 흐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차이와 연기의 흐름은 베르그송의 지속개념과도 다른 것이며, 그런한에서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 철학적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차연은 구체적인 작용(우리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모든 유기체의 '작용'이라고 말한다)이 없다면 차연 역시 존재할 수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에 반해 헤겔의 경우는 인간의 행위라는 부정성의 계기가 없이는 존재와 무를 나누고, 그것을 파르메니데스처럼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지적한다. 헤겔이 지적하듯이 인간은 개체성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주어진 개체성으로서의 즉자존재에 대한 부정성은 동일성에 대한 부정과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의 구별을 통한 자기정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헤겔은 인간을 그의 부정성, 혹은 행위를 통해 인간과 다른 유기체를 구분한다. 다른 유기체들의 작용은 자기동일성의 재생산에 머물뿐이고, 자기동일성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부정은 없다. 그들에게는 부정성을 가능케하는 욕망이 없으며, 욕망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의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와 이성의 의지는 표출된 욕망에 다름 아니며, 욕망이 이성과 의지의 근원인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했던 존재의 동일성과 부정성 모두가 욕망에 의해 가능하다면, 욕망은 존재의 동일성과 부정성 전체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욕망의 근원을 결여라고 봄으로써, 주체도 기원도 없는 결여를 본능의 근원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잘못된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 프로이트의 욕망이론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활동으로 요약되며, 에로스의 본능은 자기보존 본능 혹은 쾌락원칙으로 티나토스의 본능은 파괴와 도피로 분화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본능은 이드와 에고 초에고라는 세가지 층위간의 전치와 압축(혹은 환유와 은유)를 통해서 무의식으로 구조화 된다. 여기에서 이드란 쾌락원칙을 의미하고, 초자아란 희소성의 경제에 입각한 억압원칙으로서 나타나며, 에고는 이들 양자간의 갈등과 미끄러짐, 재현과 억압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마르쿠제가 지적하듯이 이드란 미래에 대한 과거의 확장이며, 초자아란 과거에 의한 현재의 제한이다. 특히 억압된 쾌락원칙으로서의 성적 욕망은 제한된 희소성의 경제하에서 신체의 거의 전부가 노동의 도구로 전화되어야 하는 조건하에서는 신체의 일부로 집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시공간적 축소결과이다.
여기에 더하여 라깡은 무의식의 구조를 1차와 2차로 구분하여, 1차적 무의식의 구조는 재현표상의 미끄러짐을 통해 발생하고, 제2차적 억압은 본능이 기표속에서 억압된 욕망이 현실원칙에 의해 지배될 때 나타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라깡에 의한다면 무의식의 1,2차 억압에 의해 주체의 진정한 자리는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라깡이 본능의 근원으로서 제시한 결여라는 개념은 인간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근본적인 열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에는 기원도 주체도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라깡은 결여가 충동이나 성감대보다 먼저 어린아이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여로 인해 사람의 삶은 애초부터 불완전성의 드라마를 이어나가게 된다.
충동의 진정한 대상은 영원히 무의식의 영역속에 갇혀져 버리고, 욕망은 환유와 은유에 의해 은폐와 전이의 축을 따라 떠돌 뿐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욕망을 표현하는 언어는 실재세계를 하나의 기호체계로 번역하고 언어에 의해 매개된 상징세계는 존재의 결여로 인해 지칠줄 모르는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상상세계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활력적인 상상력을 파괴.응고 시켜 버린다. 따라서 주체의 진실인 활력적 욕망은 은유와 환유의 사잇길을 통해 은밀하게만 나타날 뿐이다. 라깡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사회적 구조의 억압기제를 상징하는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언어가 갖는 특이한 효과 혹은 그 결과로써 파악되는 것이다.
결국 프로이트-라깡에게 있어서의 결여란 정신분석학의 원칙을 신경증의 치료와 분석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의 존재론적 원리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라깡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그대로 모방하여 무의식의 세계에 적용한 것이다. 라깡-프로이트가 존재의 결여를 말할 때, 특히 라깡에게서 존재의 결여라는 개념은 이중작용을 행한다. 라깡은 결여를 욕망의 무한성에서 찾기도, 혹은 존재의 원초적 조건으로 결여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은 서구 형이상학의 관념론적 체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모방한 것에 불과한 반면, 전자의 입장은 인간적 실천의 조건이자 결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그가 희열과 쾌락원칙을 구분함으로써 쾌락원칙을 프로이트적 필요의 경제론으로 제한하면서 희열을 한계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할 때 라깡의 존재결여라는 개념은 후자의 입장으로 고착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무한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유기체적, 자연적 신체에서만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을 현존재 이전의 존재로서 파악한다면, 그리하여 주체도 기원도 없는 영원한 실체라고 파악한다면 그것 역시 욕망을 절대존재-신론적으로 신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것을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적 존재-시간론의 결과로 제시된 코나투스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더구나 기원도 실체도 없는 결여로서의 욕망, 혹은 끊임없는 창조적 생성의 흐름으로 욕망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욕망을 메카니즘으로만 파악하게 될뿐 아니라 개체속에 고착되어 있는 억압과 저항의 기제로만 파악하게 될 뿐이며, 욕망 자체가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의 관계성 속에서 형성 된다는 역동성을 간과하기가 쉽다.
인간의 욕망은 감각적 욕망으로서의 수동적 욕망과 정신적 욕망으로서의 능동적 욕망이 있다. 감각적 욕망은 대상에 대한 필요를 의미하며, 따라서 자기자신에 대한 반성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감각적 욕망은 자기동일성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러기에 이기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유아적일 수밖에 없다. 능동적인 욕망은 정신적 욕망이며, 반성적이고 가치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욕망 자체를 욕망할뿐 아니라 타자의 욕망 자체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사회적, 역사적인 것이다. 정신적 욕망은 자신과 타자의 욕망 자체를 통일시키려는 욕망이며, 자신을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전화하려는 의지이고 자율적이며 확대재생산적인 것이다.
이러한 욕망인식은 인간을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실천주체로서, 자신의 자연적 신체에 기반한 자연과 사회내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 들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욕망이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며, 그들에게서 에고로서의 주체란 단순한 이드와 슈퍼에고의 갈등의 장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헤겔이 지적했듯이 인간주체란 이드와 슈퍼에고에 의한 억압과 쾌락원칙의 중층결합체 이전에 자신의 신체적 생존을 위한 자립적, 자주적인 부정성의 주체이다. 만약 이러한 원초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억압원칙과 쾌락원칙은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말한 자기보존 본능이 쾌락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현실원칙은 이 쾌락원칙을 억압함으로써 무의식이 형성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신체는 자기보존을 위하여 과도한 쾌락원칙을 스스로 검열한다. 더구나 쾌락이란 무제한적 충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균형과 조절을 요구한다. 그런점에서 제한경제의 희소성으로 억압원칙을 설명하는 것도 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헤겔이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적 욕망의 특징은 타인의 욕망을 욕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는데, 이러한 인간욕망의 특징은 심리학주의에서의 본능이론이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헤겔은 욕망을 인간의 노동이라는 구체적 실천과 관련하여 파악한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욕구 이전의 욕망이란 추상적 실체일 뿐이며, 그것이 현존재 이전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욕망은 순수한 부정성일 뿐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헤겔의 존재-시간론에서 보았듯이 순수한 부정성이란 논리적으로만 존재 이전의 것일뿐 실제에 있어서는 현존재의 실천을 통해서만 존재가능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헤겔은 욕망이 아니라 욕구개념을 더욱 문제시한다.
헤겔의 욕망개념을 설명한 임석진에 의하면,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과 방식을 항상 새롭고 정교하게 이루어가는 부단한 분화과정은 일종의 탈동물화 및 정신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욕구의 개념을 한낱 악무한적 추상적인 내지 보편적인 자기의식의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진리탐구를 위한 욕구개념으로만 파악하는데 그치지 않을진대 욕구는 모름지기 참된 인간에 의한 노동하는 실천적 형성과정과 대상적인 생산과정과의 구체적 연관 속에서 포착되어야" 한다. 결국 헤겔에게서 욕구의 근원은 자기자신을 속속들이 투과해 가면서 스스로 자기자신과의 구별상태 속에서도 본래의 자기를 지켜나가려는 목적지향적 행위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목적지향적 행위로서의 욕구는 욕구충족을 통하여, 욕구충족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를 지양해야 한다는 점으로 인해, 타자를 통해서만 욕구충족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타자를 완전하게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재산출하게 된다. 더구나 헤겔에게서의 욕구란 욕구된 대상이 곧 욕구의 본질이라는 점을 간파함으로써 욕구 자체는 결여일반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 노동을 통한 기획투사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역시 지적한다. 욕구의 본질인 욕구된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현존재의 부정이며, 그거은 현존재 그 자체의 존재조건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조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욕구는 단순한 환상이거나 몽상에 불과할 뿐 욕구의 실체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것은 실체를 구성하는 내용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욕구를 특정한 실체적 내용으로, 특정한 대상적 실체로 규정하는 것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데, 이는 욕구가 과거와 미래의 접합된 덩어리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된 대상은 현존재의 존재조건으로부터 출발하지만 현존재 그 자체의 즉자적인 부정은 아니다. 그것은 현존재 조건의 변화가능성과 변화가능성이 현존재 조건에 역투사됨으로써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 지평안에 포함되어 있는 외연과 내포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단순한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현존의 객관적 질서를 변형하는 구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욕구는 즉자적 필요라는 차원으로 협소화 되어서도, 욕구가 곧 의식이라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헤겔적 욕구는 타자성에 대한 부정은 물론이고, 타자의 욕구를 욕구하는 욕망의 특별한 성질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타자의 욕구에 대한 욕망은 불가피하게 적대적인 대립,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은 것으로 여겨질 뿐, 상호적 연대성을 통한 실현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가로막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적대적 대립투쟁의 필연성은 욕구충족의 조건이 처음부터 일방에 의해 가로막혀 있거나 원초적인 희소성의 경제가 작동하고 있을 때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원초적인 희소성의 경제는 결여를 존재의 본질로 삼는 라깡적 관점에서나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원초적인 희소성의 경제는 적어도 인간본질을 구성하는 욕망과 실천의 차원에서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재 이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강조했듯이 인간의 행위는 자기초월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초월적 행위를 가능케하는 욕구란 결여가 아니라 창조적 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욕구개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곧 욕구가 노동에 의해 촉발되고, 노동을 통해 충족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욕구를 단순히 현존재 조건의 즉자적인 부정으로만 파악 한다면 욕구 역시 인간의식에 의해 포괄되고, 통제 조정될 수 있다는 헤겔적 단순도식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또한 무규정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욕망을 단순한 필요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구별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헤겔은 "욕구의 충족은 일차적인 직접적 대상인 자아로의 귀환이지만 또한 2차적인 힘에로의 귀환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때의 자기의식은 일체의 타재성을 무화시킴으로써 결국 이것은 욕구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자기의 절대성 속에 놓여진 욕구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인간의 노동이 '완결된 원환운동을 띤 자기의식의 이중운동'으로서 파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욕구와 노동의 상호변증법적 관계는 욕구를 단순한 즉자적 필요로 국한하지 않는 한(그리하여 욕망이라는 자기생동적 활력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단순한 정태적 도식으로 완결되지는 않는다. 욕망충족적이면서도 욕망창조적인 인간의 노동행위는 타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욕구욕망이 의식의 통제영역 안으로 포섭되지 않음에 따라 제3의 실체를 구성한다. 욕구욕망과 노동의 변증법은 이렇게 정신의 원환운동에 포섭되지 않는 제3의 실체를 구성함으로써 헤겔의 도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헤겔은 인간의 부정성으로서의 행위가 "자기의식이 또 하나의 자기의식을 마주보는 과정에서 어느덧 탈자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여기서 그는 타자를 실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자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만, 만약 타자를 실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라고 여긴다면 그러한 부정은 오직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진행될 뿐인 것으로서, 노동을 통한 객관적 실재의 변화는 간과되고 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절대자의 양태의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절대자의 양태란 절대자 자신의 반성적 운동, 다시 말해서 절대자 자신의 규정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절대자 자신의 규정작용이란 자신을 하나의 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드는 것이다. 즉, 그 자신의 현현이며 그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명백한 외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로 향하고 잇음은 동시에 내면성 그 자체이며, 따라서 단순하게 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존재라는 사실을 단정하는 것이다."는 헤겔의 주장은 실체란 주체에 다름 아니며, 주체라는 것은 절대자를 정신으로 표상하는 이념에서 표현된다고 하는 주장의 보다 구체적인 규정이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대상적 실천에서의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을 마주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타자로서 마주 대하는 것이며, 의식속에 포섭되어 있는 대상은 의식에 의해 전면적으로 지배되지 않으며, 타자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다. 의식은 다만 타자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발견할 뿐이며, 자신의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자를 승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 실천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타자에 대한 승인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적인 부정에서 전적인 긍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나선형적으로 관계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의 글에서 나타나는 헤겔의 변증법은 데리다의 동일성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이끌어 낸 레비나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나의 존재에 대한 타자의 영향력은 신비스럽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 아니라 인식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빛에 대해서도 저항적이다" 혹은 단적으로 말해 "타자와의 관계는 전혀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때, 그는 헤겔적인 자기의식의 원환운동안에 포섭되는, 타자를 자아의 동일성하에 지배하려는 의식의 전능함이 갖는 허구성 그 자체이다 따라서 헤겔이 절대정신을 존재 그 자체라고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근거였던 "정신은 자기 포섭적이며 자기완결적이다, 즉 즉자대자적이다"라는 주장은 포기되어야 마땅한, 과도한 권능의 의식에 기댄 오만한 주장일 뿐이다.
우리가 만약 위에서처럼 욕구욕망과 노동의 변증법을 통해 형성되는 역사성으로서의 제3의 실체, 주체와 타자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주체와 타자와의 상호관계속에서 과정적으로 변화해 가는 제3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헤겔의 자기의식은 그 스스로 말했던 '체계적인 진리의 중심을 이루는 절대적 행위자'로서 스스로가 실현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자기의식의 상호투쟁하는 힘을 절대적으로 통일하는 이성적 중심은 자기의식의 이중운동이 이어 나가는 중복된 과정을 통해서 즉자대자의 변증법적 원환운동을 주재하는 절대의식으로 귀결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식은 역사성이나 사회성을 축으로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역사성과 사회성이 통합된 역사적 생산양식이야말로 변증법적 원환운동의 중심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욕구욕망과 노동의 변증법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매개로서의 의지란 의식적인 욕망이며 무의식적 욕망을 절제, 혹은 확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지는 전능하지 않으며, 순전히 자아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의지는 실천과 의식의 상호작용을 통해 즉자대자적인 규정성을 부여받으며, 과거와 미래를 통합시킴으로서 의지의 실현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결국 훗설이 말했던 지향적 지평은 바로 이렇게 절대적인 자기의식의 중심성을 부정할뿐만 아니라 절대적 타자성 역시 부정하는, 자아와 타자, 과거와 미래의 현재적, 연대적 재구성이다. 훗설의 지향적 지평은 인간의 의식이 가능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을 구성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천이 가능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훗설적 선험성이란 본질규정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지 구체적 인간실천 이전의 선험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또 이렇게 이해된 지향적 지평은 의지적 의식, 기획투사적 의식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자, 그것 자체가 인간실천의 객관적 조건을 구성하는 역사성의 본질이다.
그러나 강조되어야 할 점은 역사적 생산양식은 그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 주체인 인간을 통해서만 자신을 변화 시킨다는 것이다. 역사적 생산양식은 스스로에 의해 구조와 발생을 마련하지 않으며 이행과 재생산 역시 생산양식 자체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생산양식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며, 운동의 주체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자기의식을 변증법적 운동의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서 존재를 자기의식의 정점인 절대정신으로 대체하였지만, 실상에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절대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실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은 자기의식의 정점인 절대정신의 자기전개로 역사를 파악하였고, 그런 한에서 절대정신의 자기현현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3. 노동, 그리고 인간의 본질
이제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인간본질로서의 노동과 욕망의 변증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를 통해 존재-시간론에 있어서의 혁명적 전환 뿐만 아니라 헤겔의 노동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움으로써 존재론적 맑스주의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워 냈다. 뿐만 아니라 [강요]는 물론이고 [자본론]을 관통하면서, 노동계급의 필요의 이론을 통해 이행의 객관적인 근거는 물론이고, 인간의 유적 본질을 자주성, 창조성, 연대성이라는 세가지 개념을 통해 정식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문헌적 고증을 통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그의 이론을 재구성하려는 문제의식의 산물이며,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의 저작 전체에 산재해 있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들이 이러한 재구성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이며, 마르크스를 면밀하게 관통하지 않고는 이러한 재구성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스스로 설정하였다. "나의 자연주의 혹은 휴머니즘은 관념론도 아니고 유물론도 아니다. 차라리 그 양자의 통일적 진리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그 대답은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헤겔 거꾸로 세우기로부터 찾아질 수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추상적인 절대정신을 전제하고 있으며, 절대정신의 전개에 비교해 볼 때,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절대정신을 탐지하는 무리에 불과하다. 헤겔은 밀교적이고 사변적인 역사가 경험적 역사에 앞서며,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결국 인간역사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의 추상적 정신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은 천상에서 시작하여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통해 헤겔을 거꾸로 세우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헤겔 거꾸로 세우기는 앞서 보았듯이 정당한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인간실천에 앞서 주어지는 존재란 비존재이기 때문이며, 비존재로서의 존재에 근거한 모든 철학은 관념적 구성물, 사이비적 환영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우리는 현실적 인간, 활동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며, 이들의 구체적인 삶에 근거하여, 삶의 과정이 이념적으로 어떻게 반영되어 전개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역사의 제일의 전제는 생동하는 개인적 인간들의 존재이다. 따라서 최초로 확립되어야 할 것은 육체를 지닌 유기체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이다....."
마르크스가 파악하는 역사란 인간적 자기창조의 과정이며, 역사 속의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창조물을 표현하는 창조주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 혹은 동력은 노동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노동이라는 매개개념은 헤겔의 그것과는 다르다. 헤겔에게 있어서 "매개란 오직 자발적인 운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기동일성으로서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자기자체 내에서의 반성과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계기이며 나아가서는 순수부정성인 것이다. 혹은 이것을 순수한 추상적 상태로 옮겨 놓고 보면 단순한 생성이라고 하겠다"
헤겔에게서 매개개념은 주체의 자기동일성으로 원환회귀하는 순수부정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개는 사실상 관념적인 영역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며, 시간의 진행에 따라 관념이 현실로 전화 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축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흐르는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간없는 시간이 불가능하듯이 구체적인 실천과 그 실천의 대상이 없다면 매개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헤겔의 매개개념 역시 관념론적 사유틀에 여전히 얽매어 있는 것이다. 헤겔에게서 매개란 미리 주어진 필연성의 현실화일 뿐이고, 매개는 매개로서의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기는 커녕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이 거쳐가야할 하나의 통과점이고, 스스로 자기의식에로 귀환함으로서만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입증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매개로서의 노동이란 자연과 인간의 구체적 결합이자 관계양식이며, 자아와 타자의 연대성 속에서 실현되는 객관적 교류양식이고, 인간적 실천을 통해 스스로 확대재생산되는 객관적 실재, 독립적 실재이다. 인간은 노동의 역사적 실천과 누적을 통해 형성되는 현존재의 존재조건으로서 특정한 생산관계에 편입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으며, 그것과 연관되지 않고는 자신을 인간으로서 재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생산관계속에서의 인간실천은 타자를 아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며, 타자를 타자로서 재생산함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풍부화 시킬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노동이라는 매개는 이렇듯 헤겔의 매개개념이 갖는 자존적 원환운동을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적 행위의 전능성이나 무제약성에 한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 특정한 생산관계는 추상적 자연과 추상적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과 구체적인 자연의 관계양식이며, 자연과 인간이 일방적 수탈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동등한 관계로서 위치지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견고하게 잘 다져진 땅위에 서서 실제로 존재하며 신체를 갖고 모든 자연의 힘을 호흡하는 인간이 자신의 실재적이며 대상적인 본질적 힘을 그 자신의 외화를 통해서 대상으로 정립할 때, 그 정립하는 행위는 주체가 아니다. 정립은 대상적인 힘의 주체성인데, 그 대상적인 힘의 작용은 따라서 대상적이어야 한다. 대상적 존재는 오직 대상들만 산출할 뿐이다. 그것은 대상적 존재를 통하여 정립되므로, 그것은 본래부터 자연이다. 그것은 정립행위에 있어서 그의 순수활동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의 산출로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상적 생산물은 그의 대상적 활동을 확증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활동은 대상적 자연적 존재의 활동성으로 확증해 줄 뿐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연의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인 인간에 이르러서 비로소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로소 자연은 인간에게, 인간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타자에 대한 자신의 존재와 자신에 대한 타자의 존재로서, 그리고 또 인간이란 실재의 삶의 구성요소로서 존재하고 따라서 그 자신의 인간존재의 토대로서 존재하기 ?문이다. 여기서 비로소 그의 자연적 존재는 인간존재가 되며 따라서 자연은 그에게 인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란 "자연과 함께 완결된 인간의 본질이며 자연의 진정한 부활이며, 인간의 철저히 전개된 자연주의이며 자연의 철저히 전개된 인간주의이다"라고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인식은 너무나 근본적이고도 명증한 것이어서 더 이상의 해석이나 첨언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마르크스가 말한 특정한 생산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노동은 그 자체 인간의 역사이자 자연의 역사이며, 양자가 통일되어 누적된 인간적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일방적 우위나 자연의 일방적 우위란 존립할 수 없다. 어느 일방의 우위란 대상적 관계가 아니라 비대상적 관계이고, 그런 점에서 헤겔의 자기의식에 의한 원환운동의 관념성, 일방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노동과정을 통해 의식의 경우처럼 단지 지적으로 자신을 재생산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총괄성은 자연전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서 삼는 총괄성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는 스스로에 대한 타자적 관계를 이룬다. 인간의 신체는 인간주체에게 속해 있지만 자연의 유기체적 일부이며 인간과 자연이 맺는 사회적 관계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외부에 대상들이 존재하자마자, 또 내가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나는 타자로서 존재하게 되고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과 다른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3의 대상에 대해서 나는 그 대상과 다른 현실 곧 그것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다른 존재의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어떠한 대상적 존재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대상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감응하는(leidendes)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응은 감각하는 존재, 감응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응성 곧 열정(Passion)은 자신의 대상을 힘차게 추구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마르크스가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라고 단적으로 선언하면서 인간을 대상적 존재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인간 주체 자체가 자연이나 타자에 대하여 또다른 독립적 실존으로서의 타자를 이룬다는 점, 대상적이고 감각적인 존재인 인간은 타자에 대하여 일방적 지배와 향유가 아니라 감응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감응성은 집착이 아니라 열정이며, 양이 아니라 질에 근거한 동등교환의 실현이다. 감응은 양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질의 상호호혜적 교환에 의해 이뤄진다. 따라서 감응의 최고의 형태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즉자적 욕구에 따라 행위하지 않는다. 동물들은 즉자적 욕구에 따라 즉자적인 행위를 통해 즉자적 욕구를 충족할 뿐이다. 그에 반해 인간은 욕망에 따라, 매개를 거쳐서, 욕망된 대상의 가공 및 조형을 행할 수 있다. 인간은 즉자적 욕구가 아니라 창조적 욕망을 통해, 인간은 즉자적 충족이 아니라 창조적 충족을 통해, 인간은 직접적 행위가 아니라 매개된 행위를 통해 자신을 유적 인간으로 재생산한다. 따라서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생활의 대상화이며, 유적생활의 대상화로서 인간적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생활의 풍부화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욕구를 욕구할 수 있다. 인간은 욕구를 욕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욕망적 존재이며, 욕구의 욕구는 타자에 대한 생사를 건 투쟁뿐 아니라 상호인정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욕구의 욕구란 타자에 대한 긍정이며, 타자를 타자로서 재생산하면서도 타자와 자아를 일치시키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이고 유적인 인간본질의 확인이며, 사회를 통한 인간본질의 풍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부르쥬아 경제학자들이나 천박한 욕망을 존재의 본질로 삼으려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여도 아니고 향유도 아니며 질투와 시기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적 욕망이란 인간적 본질의 풍부화이며,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 연대성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려는 인간본성의 표출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빈부의 개념은 "풍요로운 인간과 풍요로운 인간적 욕구가 정치경제학적 빈부개념을 대신하여 등장하게 된다. 풍요로운 인간이란 곧, 인간적인 삶의 표현을 전체적으로 요구하는 인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적인 필연성과 필요(Not or Needs)로서 자기자신의 전개를 요구하는 그런 인간을 말한다....물론 사유재산제란 이러한 직접적인 소유실현을, 삶의 수단이라고 하지만, 실상 수단이 그것을 위해서 사용되는 삶 자체가 사유화 되기에 이르는 바, 인간의 노동도 마찬가지로 자본화 된다. 이제 인간의 모든 감각은 지양되고 하나의 감각 즉 소유라는 감각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 빈곤이다."라는 식으로 이해된다. 사적소유제 하에서는 인간적 본질의 풍부화가 단순한 사적소유욕에 의해 대체되어 버리고, 그것에 의해 압도됨으로써 오히려 절대적 빈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일련의 논의과정을 거쳐 인간본질과 인간본질에 기댄 사회적 부의 개념을 인간적 욕망의 풍부화와 그것을 실현가능케 만드는 사회적 관계로 정의하는데, 사적소유제가 성립한 이후 이러한 인간본질의 실현은 체계적으로 억압당하거나 변질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핵심적 개념인 소외에 관한 그의 입장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소외란 인간본질의 소외,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에 다름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소외를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라고 규정한 후, 그 구체적인 의미로서 인간이 세계를 소유함에 있어 자신을 창조자로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계가 인간에게 낯설은 것으로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특히 마르크스는 노동과 노동분화를 통해 소외의 구체태를 설명하는데, "노동이 산출하는 대상, 즉 노동의 산물은 노동에 대해서 소외된 존재로 나타나며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또 생산자에 대립되는 힘으로 나타난다.....더 나아가 노동자가 그의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받기 보다는 오히려 부정당하며, 행복하게 느끼기 보다는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는 휴식을 가질 때 편안함을 느끼고, 자유로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동력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그의 육체가 괴롭힘을 당하며 그의 정신도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는 휴식을 가질 때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속에서는 불편함을 느낀다" 이는 노동자가 노동과정 뿐만 아니라 노동결과에 의해서도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며, 더욱 본질적으로는 소외된 노동에 의한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 그 과정에서 인간본질의 퇴락을 겪게 되기 때문에 인간성 그 자체의 파멸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경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원리에서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진행되는 자동화에 따른 실업의 급증과 같은 구체적인 사실을 날카롭게 논파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생산력의 고양은 곧 대개 노동자의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 생산증가를 위해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결국 생산자에 대한 지배수단 또는 착취수단으로 변형되고 만다. 그것들은 노동자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바, 노동자는 이제 온전한 인간이 못되고 부분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이제 노동자는 기계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아울러 이러한 생산성 제고를 위해 동원되는 수단들은 결국엔 노동의 의미를 절멸시키고 노동자에게는 다만 고통스러운 노동을 남겨줄 뿐이다. 이제 노동과정에 깃들어 있던 정신적, 지적 잠재력을 제거되어 버리는 바, 독립적 힘을 지닌 과학이 생산과정에 원용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이러한 노동소외는 생산양식 내에서의 특정한 가치매체를 통해 재생산되며, 가치매체의 자립적 힘이 증대하게 됨에따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소외는 물론이고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외를 확대재생산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체제에서의 유일한 욕망의 대상은 화폐이며, 화폐에의 욕망은 인간의 욕망 전체를 일그러뜨리게 된다. 욕망은 탐욕과 질시와 투쟁과 적대와 지배에의 추구로 나타나며, 이러한 욕망 아래에서 이성과 노동은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가 되어버릴 뿐이다. 인간이 소외되면 될수록 소유(Haben)와 사용(Benutzen)의 관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고, "너의 존재가 왜소해지면 왜소해질수록, 그리고 네가 네 삶을 적게 표현하면 할수록 너는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너의 소외된 삶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소외된 축적물도 점저 더 많아질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로부터 인간관계 전체, 자연과 인간관계라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소외를 이끌어 낸다. 이는 노동이 인간의 유적 삶을 가능케하는 근본적인 매개이기 때문이며, 노동이야말로 인간본질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소외개념을 전제하고, 혹은 그것이 내밀하게 관통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자본론]을 서술하였으며, 그것의 지양태로서 [경제철학 수고]와 [강요]를 통해 사회주의의 원리적 근거와 이행의 경로를 제시한다. 그것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일련의 저작들, 정치적 문서들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인간본질에 대한 존재-신론적 기반 위에서 전개 된다는 점 때문에 목적론이 아니냐고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논자들이 있어왔다. 그리하여 [경제철학 수고]를 비롯한 인간본질과 소외론에 관련된 저작들을 '청년 맑스의 철학'으로, [자본론]을 깃점으로하는 후기 저작을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로 구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청년맑스철학'을 제거시켜야만 맑스주의의 핵심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은 알튀셰에 의해 명시적으로 주장되어졌지만 사실 이미 오래전에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맑스의 초기저작 출간이 방해받아 왔으며, 반공주의자들 역시 초기와 후기의 저작을 분리하고 후기의 저작만을 일방적으로 왜곡 해석함으로써 맑스주의를 폄하하기 위해 광분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주장 보다는 오히려 최근 대두하고 있는 포스트주의자들의 반론에 오히려 더욱 주목하고자 하는데, 이들은 마르크스가 소외의 본질을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로 파악하는 자체가 소외론을 존재-신론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인간본질이란 없으며, 실존만이 유일하거나 아니면 인간본질과 실존의 끊임없는 차연적 긴장만이 있을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중에 일부는 노동의 소외는 인정하면서도 본질과 실존의 괴리로 인한 인간본질의 퇴락과 황폐화를 가져온다는 점은 부정하는 논리를 구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소외에 관한 저항을 단순한 도덕주의적, 절차적 합리성에의 요구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따라서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갖고 있는 혁명성을 거세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명백히 인간본질과 실존간의 괴리에서 나타나는 총체적인 인간본질의 퇴락을 지적하고 잇으며, 노동의 소외는 그것이 인간적 본질에게 갖는 핵심적 역할로 인해, 또한 이행의 주요동력과 근거가 노동에서 도출된다는 점 때문에 중심적으로 부각되었을 뿐, 인간본질과 실존간의 괴리라는 총체적 소외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하나의 '부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인간본질과 실존을 왜 구분하였으며, 이 구분의 근거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간본질과 실존의 관계는 존재와 현존재가 맺는 관계와 유사하다. 인간본질은 현존재의 존재론적 실천에 의해, 지향적 실천을 통해 누적된 사회적 결과이다. 그것은 비교적 안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현존재의 존재론적 실천에 있어서의 내적 근거이자 지향적 지평의 내적 실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본질은 고정되어 있는, 주어진 독립적 실체는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역사적 실천에 의해 퇴적되고 구조화되며 서서히 이행해 나간다. 이러한 인간본질은 현존재의 지향적 지평을 구성하지만, 현존재의 즉자적인 이해와 요구로부터는 독립해 있으며, 그것에 의해 즉자적으로 변형되지도 않는다. 이에반해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는 퇴락된 세계의 질서, 세계질서를 매개하는 가치매체에 의해 부단히 영향을 받고,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인간본질은 단순히 현존재의 존재론적 실천이 역사적으로 퇴적된 결과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향적 지평이 파지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지에 의해서도 구성되는 것처럼, 현존재의 미래에 의해서도 구성된다. 인간본질은 현존재의 실존적 퇴락에 직면하여 과거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인간본질의 급진적 전개와 풍부화를 추구하는 전략적 실천에 의해 재구성된다. 실존적 퇴락이 심각할수록, 그리하여 인간본질의 퇴락이 급격하게 강요될 때, 그에 대한 저항 역시 급진적으로 전개된다. 최근 진행되는 급진주의적, 일탈적 저항운동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사태전개의 반영이며 그만큼 인간본질의 퇴락이 폭력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급진적으로 진행되는 저항이 현실에 직면하여 본질의 풍부화에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적 경로를 찾아내게 될 때, 인간본질은 새롭게 재구성된다. 따라서 인간본질 역시 과거와 미래의 현재적 응축이며, 응축의 밀도는 전략적 실천의 강도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실존은 현존재가 기반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충실히 반영하며 그것의 확대재생산에 종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실존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현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소외의 결과 그 자체이다. 실존으로서의 현존재 역시 기획투사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실천을 수행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기획투사적 실천은 지배적 생산관계의 논리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의 재생산에 보다 긴밀하게 관계된다. 왜냐하면 실존적 현존재의 신체적, 육체적 재생산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지배적 생산관계의 논리를 승인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 대한 성과를 인용하면,
"현존재는 항상 결단된 자로서 실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는 우선 대개 비결단적이며, 그 자신에게 고유한 존재가능이 닫혀 있으며, 그의 가능성의 기획투사 양식에 있어 일차적으로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필자의 개념으로는 인간본질)에서부터 규정되어 있지 않다. 현존재의 시간성은 항상 그 본래적 미래에서부터 자신을 현재화 하지 않는다....현존재는 우선 대개는 자신을 사물들에서부터 이해한다. 타인들 함께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직접적으로 손이 닿을만한 거리에 있지 않아도 그들과 거기에 함께 있다. 그들은 그들이 함께 거기 있는 방식으로 사물들에서부터 이해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러한 일상적, 비본래적, 비결단적 실존을 '비본래적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시간성'이라고 말하며 '손 안의 사물들 및 눈앞의 사물들과의 이해하는 행동관계'라는 지평위에 기반해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언급은 좀더 세밀하게 분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현존재적 실존이 갖고 있는 시간지평은 전략적 실천이 갖고 있는, 혹은 인간본질이 갖고 있는 시간성에 비해 그 지평의 범위가 좁고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존재적 실존의 자의적 선택에 의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현존재적 실존을 규정하는 사회적 시간이 압축되고 분절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관계가 총체적이지 못하고, 사회적 교류양식이 제한되어 있으며, 인간적 욕망이 단순할수록 시간지평은 짧고 자신의 실존적 공간을 벗어나기 힘들다. 더구나 인간관계가 총체적이고 사회적 교류양식이 확장되어 있다 할 지라도 사회적 시간성이 분절화되고, 분절된 시간이 압축될수록 그에 따른 실존적 시간성의 지평은 더욱 협소해지게 된다.
현존재적 비결단적 실존을 구성하는 사물적 이해라는 부분은 사람들간의 관계가 사물화 되어 있다는 것으로, 타자는 자아의 도구나 수단이 된다. 이러한 관계는 사물화가 전면화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일반화 되는데,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체제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사물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관계에 좀더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 아래에서 인간본질과 인간실존의 괴리는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가 심각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가 아직 창출되지 않았다. 인간의 노동은 자연환경과 심각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인간적 삶 역시 자연과 인간이 갖는 생태적 리듬에 비교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을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생산관계가 인간의 내적 본질을 변형할만큼 총체적이거나 밀도높게 전개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 봉건제적 생산관계는 인간의 신체를 구속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욕망을 구속하거나 영혼을 구속할 수 없었으며, 지배기제 역시 분절되었기에 저항 역시 분절적으로 진행되었을 뿐이다.
인간본질과 실존이 이렇게 구분되는 이유는 인간실천 그 자체의 조건으로부터 도출된다. 인간실천은 앞서 말했듯이 자연의 일부로서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생산관계내에 존재한다. 그런데 신체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실존규정으로서 부여 받으며, 그것을 재생산함으로써만 실존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실존의 선행적 조건을 역사적 시간성이라고 명명하며, 역사적 시간성은 현존재의 시간적 지평 이전에 현존재의 시간적 지평을 규정하는 것으로써 인간본질과 실존을 재구성한다.
그런데 역사적 시간성은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 중기지속· 단기지속이라는 개념을 원용하면, 장기지속으로서 자연적이고 실체적 생태학적 시간리듬에 규정되는 본질의 시간과 중기지속으로 불리울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업순환주기나 이윤주기에 의해 규정되는 현사회의 구조적 시간성, 그리고 자본회전주기나 노동통제 수단인 시간관리등에 의해 규정되는 단기지속으로 구분될 수 있다. 여기에서 장기지속의 시간성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노동과 실천의 본질로서 역사 전체를 통해 재구성된 인간의 유적 삶이라는 축을 시간성의 본질적 핵으로 삼는 것으로서, 이는 이론적으로 명시되고 현존재적 실존의 존재론적 향수(鄕愁), 본래적 지향으로서 자리 잡는다. 이는 인간실천이 본래적으로 결여의 충족이 아니라 현존재에 대한 부정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승인한다면, 혹은 결여의 의미를 현존재의 부정성으로서 이해한다면 당연한 결론이다.
인간실천은 본래적으로 현존재로서의 실존에 대한 지양을 추구한다. 실존에 대한 지양이 없다면 시간성의 지평 역시 존재할 수 없으며, 시간성의 지평없는 시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단절된 점의 연속이거나 단절된 점들의 산포(散布)일 뿐이다. 따라서 장기지속(인간본질)이 중기지속(인간실존)과 구분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략적 실천에 의해서이다. 전략적 실천은 시간성의 지평을 재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본질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본성의 개념과는 차별적이다. 인간본성 개념은 본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관계양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지속된다고 본다. 그러나 전략적 실천에 의해 구성되는 인간본질은 관계양식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제시되는 인간본질은 대상적 존재의 본질을 해명 하고자 하는, 현존재적 실존의 관계양식을 변혁하려는 당파적 입장에 의해 이끌린 추역사적(追歷史的) 분석의 결과이지 전제가 아니다. 더구나 인간본질은 추역사적 분석결과와 통합된, 그러한 결론이 보여주는 미래적 경향, 대안적 원리에 의해 재구성된다. 따라서 인간본질은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억압된 자의 전통'과 주체의 대안적 원리가 재구성된 결과물이며, 그런 한에서 인류의 전역사가 농축된 대상적 존재의 존재 원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본질은 실존과 달리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누적적으로 재구성되고, 그 시간적 지평 역시 넓고 심대하다.
4. 전략적 실천과 이행의 시간
루카치 학파의 탁월한 정치경제학자 미카엘 레브위츠는 [자본을 넘어서]에서 계급의 사회적 필요와 근본적 필요에 대한 역동적 관계를 설명함으로서 이행의 논리를 제시한다. 필자는 레브위츠의 주장을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며, 그의 필요에 관한 이론의 일부를 존재-시간론과 연결시켜 이행의 시간을 제시, 논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필자의 논리전개는 레브위츠의 성과로 인해 대단히 쉽고 간략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지만,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통합과 지배양식, 이행의 시간에서 중심축을 구성하는 혁명전략의 문제는 좀더 보완되어야 한다.
우선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통합과 지배에 대해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이미 150여년전에 시간의 경제가 갖는 중요성을 통찰하였다. 시간의 경제는 모든 사회에 적용되며, 노동일의 길이를 둘러싼 투쟁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자본주의적 시간성은 사회적 생산관계의 자립적 매체인 화폐의 등장으로 인해 중요하게 부각된다. 르 고프가 지적하듯이상업적 네트워크가 발달함에 따라 상인들은 '일사분란한 사업활동을 위해 보다 적절하고 예측가능한 시간척도를 만들어야만 했다' 상업활동은 국지적 규모와 영역에서 행해지던 원격지 무역을 네트워크형 상업교역망으로 통합해냈다. 이는 활발한 상업활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빈번한 영토의 확장과 생산력 발달에 따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관계양식이 보다 밀접해지고 반복적으로 진행될수록 관계 상대방간의 차이를 점진적으로 해소하고, 보다 원활한 관계양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공통의 척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공통의 척도로 나타난 화폐는 처음에는 공간적 지연으로 인해 시간할인에 따른 시간가격을 책정하게 되지만, 점점 관계양식이 단일해짐에 따라 단일척도로서의 본래적 기능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단일척도의 사용은 절대왕정에 의한 대단위 영토통합과 권력적 지배의 전일성에 의해 보다 확고해지고, 지속적인 재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는바, 비로소 자본주의적 시간성은 그 첫발을 떼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통합이 본격화되는 것은 노동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대공업의 등장에 따라 특정한 한 공간내에 집단적으로 노동자들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시간주기를 통제한다. 자본들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경쟁의 결과로 기술혁신이 나타날분만 아니라 부문이윤율, 자본간 이윤율의 시간격차가 커질수록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통제는 좀더 전면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된다. 테일러리즘, 포디즘적 생산방식의 도입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잉생산으로 인한 이윤율의 하락은 생산과 소비주기의 빠르기를 촉진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들어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더욱이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정보통신혁명의 영향으로 시간은 물론 공간의 압축이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에따른 시공간 분할 역시 치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적 시공간의 압축과 단축, 분절화 경향은 노예로서의 임노동자의 전면적인 자유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인데, 임노동자들은 인신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고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따라서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통제에 능동적으로 순응할때에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최대 소비자이기도 한데, 소비 없이는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서, 그리고 노동결과의 소비에 이르기까지 자본의 통제에 순응해야 한
김 기환 (1996.06)
우리는 앞의 1,2장을 통해 존재-시간론을 검토함으로서 존재의 본질과 연관된 몇가지 결론을 얻어냈다. 여기에서 그것들을 요약.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자연과학에 있어서조차 인간적 실천에 의해 형성되는 관계 외부에 독자적으로 실존하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시간은 존재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시간에는 방향이 없으며,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 자연과학의 진보는 인간적 관계양식의 확장과 밀도에 따라 시공간개념이 변화하며, 시간과 공간의 외연과 내포 역시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이다. 따라서 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실천연관에 근거해서만 구축될 수 있으며, 본질적으로 실천적 변혁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특정한 세계관이자 세계인식의 방법론적 원리가 된다. 이런 점에서 철학이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한 창조적 활동이다. 철학은 세계변혁의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이유와 존재목적, 그리고 성취해야할 목적과 그 방법을 통찰하기 위한 원리적 근거를 찾는 작업이다.
3. 절대시간개념은 존재를 추상적이고 자립적인 실체로 추상할뿐만 아니라 추상화된 존재가 존재자(현존재)일반을 선험적으로 규정하며 그것들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몇몇 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서구 형이상학 전반을 지배해온 원리였다. 또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 제기된 순수지속이라는 개념 역시 현존으로서의 시간과 영원으로서의 지속이라는 존재와 존재자간의 심연을 극복할수 없고, 오히려 창조적 실천을 순수지의 심연에 빠뜨릴 뿐이다.
4. 시간을 순간적 현재 그 자체로의 영원한 회귀로 바라보거나 존재자에 의해 무매개적으로 결정된다고 이해하는 대개의 철학적 체계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개별화 시키거나 역사적 실존으로 파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여 존재의 연대성을 부정하거나 극단적 실용주의로 빠져든다.
5. 현존재의 기획투사적, 탈자적 생기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현존재만의 고유한 특성이며, 존재론적 차이를 발생시키는 현존재의 시간성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시간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전의 시간을 구성한다. 그리고 인간행위가 갖는 집합적, 역사적 성격은 지평적 현전의 시간성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며 이를 둘러싸고 역사적 생산양식의 구조화와 동시에 전략적 실천을 통한 이행이 시작된다.
이제 이상에서 얻어진 결론들을 좀더 구체화하고, 그것을 역사적 실천개념으로 확장함으로써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사회적 생산양식 속에서의 인간실천과 모순의 변증법으로 총괄하도록 해보자.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필자가 앞서 말했던 존재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에 해당하는 것이며, 모순의 변증법을 통한 이행과 재생산의 통일적 이해를 가능케하는 것이자, 현실변혁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대안적 체제의 원리와 운동양식 전반을 가늠짓는 척도로 역할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해 있던 내적 딜레마 혹은 긴장을 지양하고 21세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지양이라는 과제를 한걸음 더 진전시켜 낼 뿐만 아니라 철학의 종말을 선언하는 데리다의 해체철학과 재구성된 존재론적 맑스주의를 대결시킴으로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증명해 보일 것이다.
1. 실천적 관계양식으로서의 존재-시간론
시간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필연적으로 존재개념에 대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존재-시간론과 관련된 쟁점은 데리다에 의해 보다 급진적으로 평가되어지고, 마침내는 해체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대로 "존재이해가 실존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이 존재이해 또한 시간성에 기초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존재이해의 존재론적 가능조건이 시간성 자체이다. 따라서 시간성으로부터 우리가 존재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 지평을 끄집어 내야한다. 시간성이 존재이해를 가능케하는 일, 즉 존재론을 가능케하는 그 일을 떠맡고 있"기 때문에, 존재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동시에 시간성 혹은 시간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로부터 출발했으나 하이데거를 넘어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체계를 급진적으로 해체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존재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존재론 그 자체를 부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우선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훗설의 경우, 지향성 이론에 기초한 사태의 의미는 하나의 불변적 관념성과 형상(본)으로서 언제나 의식의 현재성에 현존해 있어야 한다. 의식에 현존하지 않는 의미는 살아있는 의미일 수 없다.
따라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념성으로서의 존재규정은 역설적으로 현존으로서의 존재의 규정과 혼용되고 있다. 순수한 관념성이란 관념적인 대상의 관념성, 즉 반복의 행위 앞에 현존하는, 얼굴을 맞대는 그런 대상의 관념성일뿐만 아니라, 시간성의 근원으로서 살아있는 현재, 즉 근원점으로서 지금부터 출발하여 규정된 시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성 혹은 관념성은 모든 사물과 대상에 대한 자기동일화의 관념 혹은 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식의 동일성에 보편적 진리를 구하려고 하는 '자아학'과 동일한 것이라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후설의 지향성에 근거한 시간이론 역시 철저히 아유적이며, 현전의 진리를 말함에도 결국은 그 현전이란 현전 그 자체가 아니라 아유적으로 재구성된 현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파르메니데스부터 후설까지 현재의 특권은 결코 의심되어 본적이 없다. 그것은 명증성 자체이고, 어떤 사유도 현재적 요소 밖에서는 불가능하다. 비현존은 현존의 형식 아래서 언제나 생각된다.....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지나간 현재, 다가올 현재로서 규정된다." 데리다는 이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시간은 현존의 존재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은 진리를 구성하는 근원적 근거이자, 인류이성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더구나 현존의 존재는 본질상 무한하다. 따라서 무한한 존재를 현재에서 표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완결될 수 없기에 미래적 지평에로 방향이 열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미래란 불확정적인 무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의식의 공통성에 근거한 의식의 목적에 의해서만 열려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의 진리가 갖는 시간적 무한성은 의식 혹은 로고스의 목적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목적론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데리다는 비판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에서 존재론을 해체시킬 강력한 무기로 차연과 흔적이라는 개념을 동원한다. 흔적이란 "생생한 현재는 자기와 자기자신과의 차이에서부터, 잡아당겨지는 흔적의 가능성에서부터 솟는다. 흔적은 자기내면적 삶이나 생명만이 있는 현재의 단순성으로서는 생각될수도 없다. 생생한 현재의 자기란 근원적으로 하나의 흔적이다." 즉, 흔적이란 비현재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에 삼투되어 있고, 의식의 내면성이라는 것이 이미 바깥세계의 것과 직물짜기를 하고 있고, 안이 바깥과 하나의 놀이터가 되고 그런 텍스트의 짜집기를 가능케 해주는 원리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점, 혹은 존재의 형식이 아니라 서로의 흔적에 의하여 텍스트의 직물짜기를 해나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흔적인 시간에 선행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현존이란 시간적 동일성이고, 존재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현존이나 시간의 동일성은 흔적이 없이는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했던 현재 혹은 '지금'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문제제기한다. 데리다에 의한다면, "'지금'은 이미 없고 동시에 아직 존재치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존재론적 현존이 될 수 없다. "시간의 요소로서의 '지금'은 그 자체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시간으로 변하여서만 존재하기를 그치고 지나간 존재나 닥쳐올 존재의 형식에서 무화에로의 통과속에서만 오직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시간을 시간의 양식인 과거와 미래에 따라서만 보면 그 시간은 무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존재자는 비시간이다. 그리고 존재자를 현존하는 것으로, 존재를 현존으로 은밀히 규정된 방식에 따라서 보면 시간은 비존재이다"
데리다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앞서의 글에서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금'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했던 말을 상기해보자.
"지금은, 그것이 언제나 이미 무엇으로 존재했던 바, 그것의 관점에서 볼때는 동일한 것, 즉 개개의 모든 지금에 있어서 지금은 지금이다. 다시말해, 지금의 본질, 지금의 무엇은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또한 개개의 '지금'은 모두 본질상 지금마다 각각 하나의 다른 지금이다. 다시말해 지금 존재는 언제나 달리 있음이다."
여기에서 '지금'이란 인간의 영혼에 의해 헤아려진 시간이다. 따라서 헤아려진 시간과 헤아림 이전의 시간이 존재할 수 있다. 지금이란 헤아림 이전의 시간이 인간에 의해 하나의 일점으로서 파악된 것이며, 이 헤아림으로서의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서로 잡아당겨 하나로 모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체 시간이 될 수 없다. 시간은 영원한 흐름이며, 존재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잘리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 '지금'이라는 시간은 시간의 비존재에 불과하다. '지금'은 이미 없고 동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과거와 미래의 끌어당김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끌어당김은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재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부정된다면, 그리하여 지금이 하나의 존재로 파악된다면 '지금' 이전의 시간은 비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이전의 시간이 비존재가 된다면 지금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와 현실태를 나누어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 혹은 지금이 갖고 있는 차이와 동일성의 긴장을 해소하려 했던 이유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긴장,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해법을 부정한다. 데리다가 핵심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금'은 스스로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데, 어떻게 지금이 시간의 현행태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현재는 그 자체 비시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차연으로서의 시간은 존재자의 동일성을 부정한다. 존재자의 동일성 이전에 차이가 먼저 발생하는 것이고, 차이에 의해 동일성으로서의 현존이 나타나지만 이 현존은 차연의 흐름속에서 한갓된 것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론은 존재의 통일성을 위하여 다른 것을 같은 것 내부로 언제나 끌어들인다. 존재 혹은 존재자는 동일성의 논리, 동시성의 논리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 혹은 존재자는 존재하는 것으로 존립 불가능하기 ?문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론은 흔적과 차연 이전의 동일성을 요구하며, 그런 한에서 모든 존재론은 자아학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데리다는 존재론 일반에 반대하여 "차연이 생명의 본질이다.....존재를 현존으로서 규정하기 전에 생명을 흔적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만이 삶이 죽음이고, 쾌락의 법칙의 넘어섬과 반복인 동시에 그 법칙의 넘어섬과 반복이 위배하고 있는것과 함께 근원적이며 함께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하는 유일한 조건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데리다는 현전하는 모든 것들, 진리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정립되자마자 비진리, 비현전으로 되고 만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일체의 형이상학은 극복될수도 완성될수도 없다. 단지 차연의 놀이만이 허용되어 있을 뿐, 철학은 종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데리다의 철학에 대한 종말선언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그의 논리가 갖는 개념적 난해함을 뚫고 시간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재검토 해보도록 하자.
지금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데리다는 지금이란 비존재, 비현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비존재란 무엇에 대한 비존재이며, 비현존은 무엇에 대한 비현존이란 말인가? 존재 자체를 고정되고 불변적인 독립적 실체라고 보았을 때, 마찬가지로 시간을 독립적이고 불변적인 실체적 흐름이라고 볼 때 비로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것 아닌가? 데리다가 "지금은 스스로가 존재를 부정한다"고 말할 때 그가 지칭하고 있는 존재란 절대존재일 뿐이지 현존재는 아니다. 현존재는 부단히 변화하는 기획투사적 실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기획투사적 실천을 통해 자신과 타자르 정립하는 존재이기에 지금은 현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한다. 기획투사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지금'은 주어진 존재, 정립된 존재, 독립적 실체로서의 존재를 부정할 뿐이다. 시간, 특히 지금이 인간의 기획투사적 실천에 의해 형성된 초월적 지평, 초월적 시간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시간은 언제나 지금에 존재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끌어당김의 흔적으로 지금이 존재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끌어당겨지는 과거와 미래란 독립적인 시간흐름을 의미하는 것인가? 데리다는 시간흐름의 끌어당김으로 흔적이 만들어지고, 지금이란 흔적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과거와 미래로서의 시간흐름은 지금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에 의해서야 비로소 과거와 미래의 끌어당김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현존재의 기획투사적 실천이 없다면 시간성의 지평은 열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적 기획투사, 전략적 실천이 없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끌어당겨지는 과거와 미래란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존재-신론에서의 존재론이자 시간론에 다름아니다. 오히려 현존재의 시간적 지평위에서 집중되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성의 실체이며, 지금이 확장되고, 지금의 심연이 깊어질 때 시간은 시간의 흐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심연과 지금의 외연은 인간적 실천, 기획투사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그에 따라 과거와 미래의 끌어당김 역시 그 범위와 심연 역시 달라 질 수 있다. 우리의 끌어당김에 의해 형성되는 시간적 지평은 전략적 실천의 내용과 지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라는 끌어당김은 무한히 변화될 수 있는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논의의 맥락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데리다가 비판하는 훗설의 지향적 시간개념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훗설의 현상학에 의하면 '몸은 구체적 생활세계를 접하는 필연적 조건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몸이 제공하는 시간과 독립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은 결코 인간성의 여러조건과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현상학적 관점이란 "주체가 무엇을 경험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그가 스스로의 경험세계를 어떻게 유의미한 통합체로 구성해 나가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은 의식의 지향적 매개과정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역동적 만남, 활동성, 그것을 통한 구성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개념으로 정립된 것이 바로 경험의 시간적 통일성으로서의 '지향지평'이다.
훗설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시간 그 자체--그것이 무엇이든--가 아니라 경험된 것으로서의 시간, 체험된 시간이다. 따라서 훗설은 경험의 시간적 지평을 파지(retention)와 예지(protention)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파지란 '현재가 드러나는 배경의식의 통합된 전체를 가르킨다.' 그러나 파지는 단지 기억의 중층적, 다양한 뭉치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파지적 지평은 기억과 회상의 중층적 뭉치에서 의미있는 구조와 패턴을 찾아낼때에만 경험과 인식의 통일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각각의 파지는 과거의 흔적들을 일련의 그림자의 형태로 스스로의 내부에 보존하고 있는 계속적 조정활동이다." 그리고 이 구조와 패턴은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변증법적 결합에 의해서만 구축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향성이 어디로부터 기원하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훗설은 하이데거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근원적 시간성으로부터 이 지향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의 방향으로부터 출발한다. 훗설은 경험의 자아적 본질 혹은 주관적 선천성을 지향성의 기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 선천성은 데리다가 말하듯이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시간적 이타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훗설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하는 핵심은 지금이 비존재나 비시간이라는 점이 아니라 시간구성의 유아성, 자아중심성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훗설의 자아중심적 시간성은 니체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이 훗설의 철학체계는 "구체적이지만 경험적이지 않는 지향성처럼 즉 생산적이면서도 동시에 개시적이고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지향성처럼 구성적인 선험적 경험이 발견되어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능동성과 수동성의 공통된 뿌리로서의 근원적 통일성이야말로 후설에게 있어서 의미의 가능성 자체....였다......이런 공통적 뿌리는 구조와 발생의 뿌리이다."훗설은 자아의 경험세계와 경험지평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성되는 시간성이 곧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연대적 시간성으로 구성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그런한에서 훗설의 체계는 구조와 발생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근원적이고 공통적인 뿌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훗설의 지향적 지평개념에서 거론되는 시간성은 데리다가 지적하는대로 유아적 시간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지적대로 통일적 방식으로 시숙(時熟)하는 것, 축적되는 것이지 경험적 자아에 의해 합성되는 것이 아니기 ?문이다. 왜냐하면 훗설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주체가 무엇을 경험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경험세계를 어떻게 유의미한 통합체로 구성해 가는가'하는 점이 현상학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통일적 시숙 혹은 축적은 파지와 예지라는 개념에 의해 설명된다. 우선 시간은 '구체적인 경험의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을 통해서만 원초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훗설은 세계의 시간, 실재하는 시간과 같은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자연의 시간(자연과학에서도 이런 시간성은 부정된다)은 시간성에 대한 원초적 데이터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경험의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훗설은 이에 대해 명백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그가 후기에 강조했던 경험세계란 결국 인간의 삶이 이뤄지는 역사적 생산양식, 삶의 역사적 정황이 바로 경험의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에 다름 아니다. 부르디외가 말했듯이 "객관적 시공간 개념은 반드시 사회적 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물질적 창조과정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수락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재생산에 기여하는 물질적 창조과정은 집단적 행태를 통해 어떤 일정한 구조를 형성하는 데, 이러한 집단적 구조행태의 구성은 그 사회구성원이 집합적 리듬에 순종할 것이 생존의 요구이며, 그 집단 전체가 바로 그러한 시간성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경험의 사회적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이 곧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이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만약 훗설의 경험의 사회적 구조속에 각인되는 시간성을 역사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 혹은 뉘앙스로 이해한다면 훗설의 유아적 시간성, 주관적 선천성은 경험적 전체세계로서의 주변세계(Umwelt), 혹은 세계연대적 시간성으로 전환하게 되는 셈이며, 훗설의 유아성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이미 표적을 잃은 셈이 된다.
훗설은 파지를 설명하면서 '한 점'으로서의 시간개념과 지각되는 대상과 주체의 동일성 논리, 즉 데리다가 '지금'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논파했던 존재-신학적 논리를 역시 비판한다. 훗설이 보기에 순수한 '지금'이란 철학자들의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현재란 분리될 수 없는 시간의 원자적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훗설이 파악하는 '지금'이란 지금은 부재한 과거의 사실들이 축적된 일련의 사건들 더미 안에서 의미와 구조의 패턴을 찾아낸 관계양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과거와 미래적 사건 양자를 접합시킨 하나의 띠와 같은 관계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여기에서 현전과 부재를 명확히 나누어 비현전이니 비존재니 구분하여 나누는 것 자체가 이미 원자적 시간(시각)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의미와 구조의 패턴적 관계양상으로서 구성되는 파지적 지평은 현존재의 명증한 의식의 초점에 의해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훗설의 시간성이 현존재의 특권적 지위와 의식의 명증성을 전제한다는 데리다의 비판은 또 한 번 빗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파지에서 나타나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적 조정과정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존재의 지각과 의식이 차지하는 의미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지만 필자는 당장 여기에서 그것을 세세하게 분석하지는 안겠다. 이는 어차피 민코프스키가 말한대로 "시간적 장은 변화한다.....시간의 초점과 그 성격에 따라 그 장은 확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며" 축소와 확장에 결부된 시간적 장의 밀도 역시 변화하는 다이나미즘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지적 지평은 현존재의 과거 지각이나 경험, 현재의 경험과 의식 혹은 더나아가서 미래적 예지라는 범위에 제한되지 않는다. 파지적 지평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파지적 지평의 역사성은 인간실천이 갖고 있는 역사성으로 인해 객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인간실천으로서의 노동이 행해지는 조건과 결과에 의존할뿐만 아니라 특정하게는 특정한 생산양식 하에서 행해지는 전략적 실천주체의 실제적인 활동을 통해서 규명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하의 글을 통해 계속해서 지향적 시간성에서 나타나는 역동적 조정과정으로서의 현재를 훗설이 해결하고자 했던 구조와 발생의 변증법적 통합이라는 문제의식과 결부시켜 논의할 것이다.
2. 욕망의 본질과 존재의 본질
우리는 시간을 철학사에서의 존재-시간론을 둘러싼 논쟁과 하이데거-데리다의 존재론 전체에 대한 비판적 전복 시도를 통해 훗설의 지평적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통과함으로써 인간행위에 의해 구성된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현재와 역사간의 관계양식으로서 시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존재-시간론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의미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서구 형이상학이 견지해왔던 존재-신론적 함정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지난한 시도였다.
철학에서의 존재론은 모든 학문의 이론적 근원이자 내적 통일성의 근거이며, 철학의 목적 그 자체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론이 빠진 철학은 철학이라 이름할 수 없으며, 개별과학의 일부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이런점 때문에 철학을 해체하거나 철학의 종언을 주창하는 논자들이 줄기차게 전통적 존재론을 비판해 왔으며, 존재론은 관념적 허구에 불과하거나 은폐된 목적론임을 논증하려 그토록 애썼던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에도 예외가 아닌데, 맑스주의의 정통을 옹호하려는 진영에서는 물질 그 자체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지켜져야 할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하지만 변증법적 유물론 진영에서 물질 그 자체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보다 일찍 종언을 고했는데, 이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통한 인식론적 물질 존재증명(칸트의 인식론적 신존재 증명과 비교하라)을 통해서 본격화 되었다.
따라서 현재 철학의 고유한 의미와 역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려 한다면, 현존하는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미래를 예비하려고 하는 누구라도 존재론적 근거를 재구성, 포스트모던의 혼란스러움으로부터 철학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입증해야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과제수행은 동시에 철학에 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하는 포스트모던적 조류에 정면으로 부딪혀 과거 보여왔던 존재-신론적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존재론적 지평을 획븍해야만 한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과제수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존재와 현존재간의 관계, 이 양자를 관계맺는 현존재의 시간성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존재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시도는 인식론적 맑스주의에 의해 왜곡된, 존재신론적 존재론인 물질 우선성 테제를 기각하고 실천적 존재론을 재구성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존재론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재조명만이 아니라 철학사 전반에 걸친 존재-시간론 분석을 요구하며, 이 과정에서 존재론의 위치를 밝혀내지 않고는 맑스주의의 재구성 자체가 불가능함을 개닫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전개 과정은 바로 필자가 겪어왔던 일련의 사고전개과정을 개념적으로 전개해 나감으로써 위의 문제의식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기반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헤겔-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동-실천개념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를 바탕으로,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라는 마르크스의 천재적 선언을 보다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실천적 존재론의 행위 주체인 인간과 인간적 실천의 관계양식으로서 역사적 존재-시간론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사회적 존재-시간론을 통찰력있게 제시하는 세 사람의 사회학자를 인용하면, "객관적 시공간 개념은 반드시 사회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물질적 실천과정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수락해야 할 (기재의--인용자)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해야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르페브르는 "구체적인 공간적 실천은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간 속에서 그리고 공간에 걸쳐서 발생하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흐름들이나 이동들, 그리고 상호작용을 말한다." 부르디외와 르페브르의 언급을 결합하면 훗설의 지평적 시간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삶의 시간과 공간은 집합적 리듬을 통해 형성되는 교차와 정거장으로서 창조되고, 변화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기든스에 의한다면, "인간행위 수행에 관한 적절한 설명은 첫째, 행위 주체이론과 연결되어야 하며, 둘째 행위의 목적, 이유 등을 함께 모여진 것으로 다루기 보다 행동의 연속적 흐름으로 행위를 시간과 공간안에 상정시켜야 한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대로 시간은 행위주체들의 집합적, 역사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며, 행위 주체의 집합적 역사적 실천은 인간행위 주체가 갖고 있는 고유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들의 사회적 시공간 개념/사회적 존재-시간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인간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근원으로서의 욕망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사회적 존재-시간론이 갖고 있는 존재론적 실체를 파악해 나가기로 하겠다.
"인간적인 개체는 즉자대자적이다. 개체는 대자적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러나 개체는 즉자적 존재이기도 하며 개체 스스로가 근원적인 피규정적 존재나 확정된 존재를 갖는다......이러한 존재, 즉 한정된 개체성의 신체가 개체성의 원천이며, 개체의 행위에 의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개체는 이와 동시에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 의해 형성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그의 신체도 역시 개체에 의해 산출된 자기자신의 표현이다. 동시에 신체는 직접적인 사물로서 존속하고 있는 그러한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개체는 자신의 원천적인 본성을 작품화한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본질을 개체가 인식하게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인간은 자연적인 유기체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변의 세계를 즉자존재화 혹은 동일화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즉자존재적 실존, 순수동일성으로서의 존재는 더 이상 인간실존이 아니라 단순한 유기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신체로 인하여 자연에 의해 고정된, 원천적으로 규정된 생물이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원천적으로 규정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이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곧 유기체로서의 자신을 무화시키는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대자적 존재로 전화한다. 인간의 행위는 욕망충족적, 목적의식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런한에서 인간은 자신의 즉자존재성을 부정한다.
여기에서의 부정성은 우선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동일성의 부정 즉 무이다. 부정성은 존재하지도, 실존하지도, 현상하지도 않는 것이다. 부정성은 동일성의 부정, 구별과 차이로서만 실존한다. 그러나 인간존재의 자연적 규정성, 유기체적 고정성을 이루는 신체의 활동에 의하여 부정성은 행동이라는 형태로 실존한다. 즉 순수한 부정성은 행동을 통해 현상하는 것이다. 인간행위는 그런 점에서 동일성과 부정성의 변증법적 모순 그 자체이며, 데리다의 순수차연과는 그 질을 달리 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은 관념적 의식상에 있어서만 실존하지도, 현상하지도 않는 근원적 차이와 연기의 흐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차이와 연기의 흐름은 베르그송의 지속개념과도 다른 것이며, 그런한에서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 철학적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차연은 구체적인 작용(우리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모든 유기체의 '작용'이라고 말한다)이 없다면 차연 역시 존재할 수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에 반해 헤겔의 경우는 인간의 행위라는 부정성의 계기가 없이는 존재와 무를 나누고, 그것을 파르메니데스처럼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지적한다. 헤겔이 지적하듯이 인간은 개체성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주어진 개체성으로서의 즉자존재에 대한 부정성은 동일성에 대한 부정과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의 구별을 통한 자기정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헤겔은 인간을 그의 부정성, 혹은 행위를 통해 인간과 다른 유기체를 구분한다. 다른 유기체들의 작용은 자기동일성의 재생산에 머물뿐이고, 자기동일성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부정은 없다. 그들에게는 부정성을 가능케하는 욕망이 없으며, 욕망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의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와 이성의 의지는 표출된 욕망에 다름 아니며, 욕망이 이성과 의지의 근원인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했던 존재의 동일성과 부정성 모두가 욕망에 의해 가능하다면, 욕망은 존재의 동일성과 부정성 전체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욕망의 근원을 결여라고 봄으로써, 주체도 기원도 없는 결여를 본능의 근원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잘못된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 프로이트의 욕망이론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활동으로 요약되며, 에로스의 본능은 자기보존 본능 혹은 쾌락원칙으로 티나토스의 본능은 파괴와 도피로 분화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본능은 이드와 에고 초에고라는 세가지 층위간의 전치와 압축(혹은 환유와 은유)를 통해서 무의식으로 구조화 된다. 여기에서 이드란 쾌락원칙을 의미하고, 초자아란 희소성의 경제에 입각한 억압원칙으로서 나타나며, 에고는 이들 양자간의 갈등과 미끄러짐, 재현과 억압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마르쿠제가 지적하듯이 이드란 미래에 대한 과거의 확장이며, 초자아란 과거에 의한 현재의 제한이다. 특히 억압된 쾌락원칙으로서의 성적 욕망은 제한된 희소성의 경제하에서 신체의 거의 전부가 노동의 도구로 전화되어야 하는 조건하에서는 신체의 일부로 집중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시공간적 축소결과이다.
여기에 더하여 라깡은 무의식의 구조를 1차와 2차로 구분하여, 1차적 무의식의 구조는 재현표상의 미끄러짐을 통해 발생하고, 제2차적 억압은 본능이 기표속에서 억압된 욕망이 현실원칙에 의해 지배될 때 나타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라깡에 의한다면 무의식의 1,2차 억압에 의해 주체의 진정한 자리는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라깡이 본능의 근원으로서 제시한 결여라는 개념은 인간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근본적인 열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에는 기원도 주체도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라깡은 결여가 충동이나 성감대보다 먼저 어린아이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여로 인해 사람의 삶은 애초부터 불완전성의 드라마를 이어나가게 된다.
충동의 진정한 대상은 영원히 무의식의 영역속에 갇혀져 버리고, 욕망은 환유와 은유에 의해 은폐와 전이의 축을 따라 떠돌 뿐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욕망을 표현하는 언어는 실재세계를 하나의 기호체계로 번역하고 언어에 의해 매개된 상징세계는 존재의 결여로 인해 지칠줄 모르는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상상세계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활력적인 상상력을 파괴.응고 시켜 버린다. 따라서 주체의 진실인 활력적 욕망은 은유와 환유의 사잇길을 통해 은밀하게만 나타날 뿐이다. 라깡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사회적 구조의 억압기제를 상징하는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언어가 갖는 특이한 효과 혹은 그 결과로써 파악되는 것이다.
결국 프로이트-라깡에게 있어서의 결여란 정신분석학의 원칙을 신경증의 치료와 분석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의 존재론적 원리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라깡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그대로 모방하여 무의식의 세계에 적용한 것이다. 라깡-프로이트가 존재의 결여를 말할 때, 특히 라깡에게서 존재의 결여라는 개념은 이중작용을 행한다. 라깡은 결여를 욕망의 무한성에서 찾기도, 혹은 존재의 원초적 조건으로 결여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은 서구 형이상학의 관념론적 체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모방한 것에 불과한 반면, 전자의 입장은 인간적 실천의 조건이자 결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그가 희열과 쾌락원칙을 구분함으로써 쾌락원칙을 프로이트적 필요의 경제론으로 제한하면서 희열을 한계없는 그 무엇으로 정의할 때 라깡의 존재결여라는 개념은 후자의 입장으로 고착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무한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유기체적, 자연적 신체에서만 실존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을 현존재 이전의 존재로서 파악한다면, 그리하여 주체도 기원도 없는 영원한 실체라고 파악한다면 그것 역시 욕망을 절대존재-신론적으로 신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것을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적 존재-시간론의 결과로 제시된 코나투스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더구나 기원도 실체도 없는 결여로서의 욕망, 혹은 끊임없는 창조적 생성의 흐름으로 욕망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욕망을 메카니즘으로만 파악하게 될뿐 아니라 개체속에 고착되어 있는 억압과 저항의 기제로만 파악하게 될 뿐이며, 욕망 자체가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의 관계성 속에서 형성 된다는 역동성을 간과하기가 쉽다.
인간의 욕망은 감각적 욕망으로서의 수동적 욕망과 정신적 욕망으로서의 능동적 욕망이 있다. 감각적 욕망은 대상에 대한 필요를 의미하며, 따라서 자기자신에 대한 반성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감각적 욕망은 자기동일성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러기에 이기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유아적일 수밖에 없다. 능동적인 욕망은 정신적 욕망이며, 반성적이고 가치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욕망 자체를 욕망할뿐 아니라 타자의 욕망 자체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사회적, 역사적인 것이다. 정신적 욕망은 자신과 타자의 욕망 자체를 통일시키려는 욕망이며, 자신을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전화하려는 의지이고 자율적이며 확대재생산적인 것이다.
이러한 욕망인식은 인간을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실천주체로서, 자신의 자연적 신체에 기반한 자연과 사회내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 들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욕망이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며, 그들에게서 에고로서의 주체란 단순한 이드와 슈퍼에고의 갈등의 장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헤겔이 지적했듯이 인간주체란 이드와 슈퍼에고에 의한 억압과 쾌락원칙의 중층결합체 이전에 자신의 신체적 생존을 위한 자립적, 자주적인 부정성의 주체이다. 만약 이러한 원초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억압원칙과 쾌락원칙은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말한 자기보존 본능이 쾌락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현실원칙은 이 쾌락원칙을 억압함으로써 무의식이 형성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신체는 자기보존을 위하여 과도한 쾌락원칙을 스스로 검열한다. 더구나 쾌락이란 무제한적 충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균형과 조절을 요구한다. 그런점에서 제한경제의 희소성으로 억압원칙을 설명하는 것도 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헤겔이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적 욕망의 특징은 타인의 욕망을 욕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는데, 이러한 인간욕망의 특징은 심리학주의에서의 본능이론이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헤겔은 욕망을 인간의 노동이라는 구체적 실천과 관련하여 파악한다. 따라서 헤겔에게서 욕구 이전의 욕망이란 추상적 실체일 뿐이며, 그것이 현존재 이전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욕망은 순수한 부정성일 뿐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헤겔의 존재-시간론에서 보았듯이 순수한 부정성이란 논리적으로만 존재 이전의 것일뿐 실제에 있어서는 현존재의 실천을 통해서만 존재가능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헤겔은 욕망이 아니라 욕구개념을 더욱 문제시한다.
헤겔의 욕망개념을 설명한 임석진에 의하면,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과 방식을 항상 새롭고 정교하게 이루어가는 부단한 분화과정은 일종의 탈동물화 및 정신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욕구의 개념을 한낱 악무한적 추상적인 내지 보편적인 자기의식의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진리탐구를 위한 욕구개념으로만 파악하는데 그치지 않을진대 욕구는 모름지기 참된 인간에 의한 노동하는 실천적 형성과정과 대상적인 생산과정과의 구체적 연관 속에서 포착되어야" 한다. 결국 헤겔에게서 욕구의 근원은 자기자신을 속속들이 투과해 가면서 스스로 자기자신과의 구별상태 속에서도 본래의 자기를 지켜나가려는 목적지향적 행위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목적지향적 행위로서의 욕구는 욕구충족을 통하여, 욕구충족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를 지양해야 한다는 점으로 인해, 타자를 통해서만 욕구충족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타자를 완전하게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재산출하게 된다. 더구나 헤겔에게서의 욕구란 욕구된 대상이 곧 욕구의 본질이라는 점을 간파함으로써 욕구 자체는 결여일반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 노동을 통한 기획투사적 성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역시 지적한다. 욕구의 본질인 욕구된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현존재의 부정이며, 그거은 현존재 그 자체의 존재조건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조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욕구는 단순한 환상이거나 몽상에 불과할 뿐 욕구의 실체를 구성하지 못한다. 그것은 실체를 구성하는 내용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욕구를 특정한 실체적 내용으로, 특정한 대상적 실체로 규정하는 것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데, 이는 욕구가 과거와 미래의 접합된 덩어리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된 대상은 현존재의 존재조건으로부터 출발하지만 현존재 그 자체의 즉자적인 부정은 아니다. 그것은 현존재 조건의 변화가능성과 변화가능성이 현존재 조건에 역투사됨으로써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 지평안에 포함되어 있는 외연과 내포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단순한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현존의 객관적 질서를 변형하는 구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욕구는 즉자적 필요라는 차원으로 협소화 되어서도, 욕구가 곧 의식이라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헤겔적 욕구는 타자성에 대한 부정은 물론이고, 타자의 욕구를 욕구하는 욕망의 특별한 성질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타자의 욕구에 대한 욕망은 불가피하게 적대적인 대립,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은 것으로 여겨질 뿐, 상호적 연대성을 통한 실현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가로막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적대적 대립투쟁의 필연성은 욕구충족의 조건이 처음부터 일방에 의해 가로막혀 있거나 원초적인 희소성의 경제가 작동하고 있을 때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원초적인 희소성의 경제는 결여를 존재의 본질로 삼는 라깡적 관점에서나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원초적인 희소성의 경제는 적어도 인간본질을 구성하는 욕망과 실천의 차원에서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재 이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강조했듯이 인간의 행위는 자기초월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초월적 행위를 가능케하는 욕구란 결여가 아니라 창조적 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욕구개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곧 욕구가 노동에 의해 촉발되고, 노동을 통해 충족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욕구를 단순히 현존재 조건의 즉자적인 부정으로만 파악 한다면 욕구 역시 인간의식에 의해 포괄되고, 통제 조정될 수 있다는 헤겔적 단순도식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또한 무규정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욕망을 단순한 필요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구별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헤겔은 "욕구의 충족은 일차적인 직접적 대상인 자아로의 귀환이지만 또한 2차적인 힘에로의 귀환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때의 자기의식은 일체의 타재성을 무화시킴으로써 결국 이것은 욕구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자기의 절대성 속에 놓여진 욕구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인간의 노동이 '완결된 원환운동을 띤 자기의식의 이중운동'으로서 파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욕구와 노동의 상호변증법적 관계는 욕구를 단순한 즉자적 필요로 국한하지 않는 한(그리하여 욕망이라는 자기생동적 활력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단순한 정태적 도식으로 완결되지는 않는다. 욕망충족적이면서도 욕망창조적인 인간의 노동행위는 타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욕구욕망이 의식의 통제영역 안으로 포섭되지 않음에 따라 제3의 실체를 구성한다. 욕구욕망과 노동의 변증법은 이렇게 정신의 원환운동에 포섭되지 않는 제3의 실체를 구성함으로써 헤겔의 도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헤겔은 인간의 부정성으로서의 행위가 "자기의식이 또 하나의 자기의식을 마주보는 과정에서 어느덧 탈자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여기서 그는 타자를 실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자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만, 만약 타자를 실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자기의식이라고 여긴다면 그러한 부정은 오직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진행될 뿐인 것으로서, 노동을 통한 객관적 실재의 변화는 간과되고 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절대자의 양태의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절대자의 양태란 절대자 자신의 반성적 운동, 다시 말해서 절대자 자신의 규정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절대자 자신의 규정작용이란 자신을 하나의 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드는 것이다. 즉, 그 자신의 현현이며 그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명백한 외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로 향하고 잇음은 동시에 내면성 그 자체이며, 따라서 단순하게 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존재라는 사실을 단정하는 것이다."는 헤겔의 주장은 실체란 주체에 다름 아니며, 주체라는 것은 절대자를 정신으로 표상하는 이념에서 표현된다고 하는 주장의 보다 구체적인 규정이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대상적 실천에서의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을 마주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타자로서 마주 대하는 것이며, 의식속에 포섭되어 있는 대상은 의식에 의해 전면적으로 지배되지 않으며, 타자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다. 의식은 다만 타자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발견할 뿐이며, 자신의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자를 승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 실천에 있어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타자에 대한 승인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적인 부정에서 전적인 긍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나선형적으로 관계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의 글에서 나타나는 헤겔의 변증법은 데리다의 동일성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이끌어 낸 레비나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나의 존재에 대한 타자의 영향력은 신비스럽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 아니라 인식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빛에 대해서도 저항적이다" 혹은 단적으로 말해 "타자와의 관계는 전혀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때, 그는 헤겔적인 자기의식의 원환운동안에 포섭되는, 타자를 자아의 동일성하에 지배하려는 의식의 전능함이 갖는 허구성 그 자체이다 따라서 헤겔이 절대정신을 존재 그 자체라고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근거였던 "정신은 자기 포섭적이며 자기완결적이다, 즉 즉자대자적이다"라는 주장은 포기되어야 마땅한, 과도한 권능의 의식에 기댄 오만한 주장일 뿐이다.
우리가 만약 위에서처럼 욕구욕망과 노동의 변증법을 통해 형성되는 역사성으로서의 제3의 실체, 주체와 타자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주체와 타자와의 상호관계속에서 과정적으로 변화해 가는 제3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헤겔의 자기의식은 그 스스로 말했던 '체계적인 진리의 중심을 이루는 절대적 행위자'로서 스스로가 실현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자기의식의 상호투쟁하는 힘을 절대적으로 통일하는 이성적 중심은 자기의식의 이중운동이 이어 나가는 중복된 과정을 통해서 즉자대자의 변증법적 원환운동을 주재하는 절대의식으로 귀결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식은 역사성이나 사회성을 축으로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역사성과 사회성이 통합된 역사적 생산양식이야말로 변증법적 원환운동의 중심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욕구욕망과 노동의 변증법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매개로서의 의지란 의식적인 욕망이며 무의식적 욕망을 절제, 혹은 확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지는 전능하지 않으며, 순전히 자아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의지는 실천과 의식의 상호작용을 통해 즉자대자적인 규정성을 부여받으며, 과거와 미래를 통합시킴으로서 의지의 실현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결국 훗설이 말했던 지향적 지평은 바로 이렇게 절대적인 자기의식의 중심성을 부정할뿐만 아니라 절대적 타자성 역시 부정하는, 자아와 타자, 과거와 미래의 현재적, 연대적 재구성이다. 훗설의 지향적 지평은 인간의 의식이 가능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을 구성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천이 가능할 수 있는 선험적 조건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훗설적 선험성이란 본질규정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지 구체적 인간실천 이전의 선험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또 이렇게 이해된 지향적 지평은 의지적 의식, 기획투사적 의식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자, 그것 자체가 인간실천의 객관적 조건을 구성하는 역사성의 본질이다.
그러나 강조되어야 할 점은 역사적 생산양식은 그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 주체인 인간을 통해서만 자신을 변화 시킨다는 것이다. 역사적 생산양식은 스스로에 의해 구조와 발생을 마련하지 않으며 이행과 재생산 역시 생산양식 자체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생산양식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며, 운동의 주체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자기의식을 변증법적 운동의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서 존재를 자기의식의 정점인 절대정신으로 대체하였지만, 실상에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절대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실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은 자기의식의 정점인 절대정신의 자기전개로 역사를 파악하였고, 그런 한에서 절대정신의 자기현현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3. 노동, 그리고 인간의 본질
이제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인간본질로서의 노동과 욕망의 변증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를 통해 존재-시간론에 있어서의 혁명적 전환 뿐만 아니라 헤겔의 노동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움으로써 존재론적 맑스주의의 기초를 튼튼하게 세워 냈다. 뿐만 아니라 [강요]는 물론이고 [자본론]을 관통하면서, 노동계급의 필요의 이론을 통해 이행의 객관적인 근거는 물론이고, 인간의 유적 본질을 자주성, 창조성, 연대성이라는 세가지 개념을 통해 정식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문헌적 고증을 통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그의 이론을 재구성하려는 문제의식의 산물이며,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의 저작 전체에 산재해 있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들이 이러한 재구성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이며, 마르크스를 면밀하게 관통하지 않고는 이러한 재구성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스스로 설정하였다. "나의 자연주의 혹은 휴머니즘은 관념론도 아니고 유물론도 아니다. 차라리 그 양자의 통일적 진리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그 대답은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헤겔 거꾸로 세우기로부터 찾아질 수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추상적인 절대정신을 전제하고 있으며, 절대정신의 전개에 비교해 볼 때,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절대정신을 탐지하는 무리에 불과하다. 헤겔은 밀교적이고 사변적인 역사가 경험적 역사에 앞서며, 그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결국 인간역사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의 추상적 정신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은 천상에서 시작하여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통해 헤겔을 거꾸로 세우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헤겔 거꾸로 세우기는 앞서 보았듯이 정당한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인간실천에 앞서 주어지는 존재란 비존재이기 때문이며, 비존재로서의 존재에 근거한 모든 철학은 관념적 구성물, 사이비적 환영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우리는 현실적 인간, 활동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며, 이들의 구체적인 삶에 근거하여, 삶의 과정이 이념적으로 어떻게 반영되어 전개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역사의 제일의 전제는 생동하는 개인적 인간들의 존재이다. 따라서 최초로 확립되어야 할 것은 육체를 지닌 유기체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이다....."
마르크스가 파악하는 역사란 인간적 자기창조의 과정이며, 역사 속의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창조물을 표현하는 창조주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 혹은 동력은 노동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노동이라는 매개개념은 헤겔의 그것과는 다르다. 헤겔에게 있어서 "매개란 오직 자발적인 운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기동일성으로서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자기자체 내에서의 반성과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계기이며 나아가서는 순수부정성인 것이다. 혹은 이것을 순수한 추상적 상태로 옮겨 놓고 보면 단순한 생성이라고 하겠다"
헤겔에게서 매개개념은 주체의 자기동일성으로 원환회귀하는 순수부정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개는 사실상 관념적인 영역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며, 시간의 진행에 따라 관념이 현실로 전화 한다는 점에서 공간의 축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흐르는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간없는 시간이 불가능하듯이 구체적인 실천과 그 실천의 대상이 없다면 매개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헤겔의 매개개념 역시 관념론적 사유틀에 여전히 얽매어 있는 것이다. 헤겔에게서 매개란 미리 주어진 필연성의 현실화일 뿐이고, 매개는 매개로서의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기는 커녕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이 거쳐가야할 하나의 통과점이고, 스스로 자기의식에로 귀환함으로서만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입증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매개로서의 노동이란 자연과 인간의 구체적 결합이자 관계양식이며, 자아와 타자의 연대성 속에서 실현되는 객관적 교류양식이고, 인간적 실천을 통해 스스로 확대재생산되는 객관적 실재, 독립적 실재이다. 인간은 노동의 역사적 실천과 누적을 통해 형성되는 현존재의 존재조건으로서 특정한 생산관계에 편입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으며, 그것과 연관되지 않고는 자신을 인간으로서 재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생산관계속에서의 인간실천은 타자를 아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며, 타자를 타자로서 재생산함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풍부화 시킬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노동이라는 매개는 이렇듯 헤겔의 매개개념이 갖는 자존적 원환운동을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적 행위의 전능성이나 무제약성에 한계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 특정한 생산관계는 추상적 자연과 추상적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과 구체적인 자연의 관계양식이며, 자연과 인간이 일방적 수탈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동등한 관계로서 위치지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견고하게 잘 다져진 땅위에 서서 실제로 존재하며 신체를 갖고 모든 자연의 힘을 호흡하는 인간이 자신의 실재적이며 대상적인 본질적 힘을 그 자신의 외화를 통해서 대상으로 정립할 때, 그 정립하는 행위는 주체가 아니다. 정립은 대상적인 힘의 주체성인데, 그 대상적인 힘의 작용은 따라서 대상적이어야 한다. 대상적 존재는 오직 대상들만 산출할 뿐이다. 그것은 대상적 존재를 통하여 정립되므로, 그것은 본래부터 자연이다. 그것은 정립행위에 있어서 그의 순수활동성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의 산출로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상적 생산물은 그의 대상적 활동을 확증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활동은 대상적 자연적 존재의 활동성으로 확증해 줄 뿐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연의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인 인간에 이르러서 비로소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로소 자연은 인간에게, 인간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타자에 대한 자신의 존재와 자신에 대한 타자의 존재로서, 그리고 또 인간이란 실재의 삶의 구성요소로서 존재하고 따라서 그 자신의 인간존재의 토대로서 존재하기 ?문이다. 여기서 비로소 그의 자연적 존재는 인간존재가 되며 따라서 자연은 그에게 인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란 "자연과 함께 완결된 인간의 본질이며 자연의 진정한 부활이며, 인간의 철저히 전개된 자연주의이며 자연의 철저히 전개된 인간주의이다"라고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인식은 너무나 근본적이고도 명증한 것이어서 더 이상의 해석이나 첨언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마르크스가 말한 특정한 생산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노동은 그 자체 인간의 역사이자 자연의 역사이며, 양자가 통일되어 누적된 인간적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일방적 우위나 자연의 일방적 우위란 존립할 수 없다. 어느 일방의 우위란 대상적 관계가 아니라 비대상적 관계이고, 그런 점에서 헤겔의 자기의식에 의한 원환운동의 관념성, 일방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노동과정을 통해 의식의 경우처럼 단지 지적으로 자신을 재생산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총괄성은 자연전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서 삼는 총괄성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는 스스로에 대한 타자적 관계를 이룬다. 인간의 신체는 인간주체에게 속해 있지만 자연의 유기체적 일부이며 인간과 자연이 맺는 사회적 관계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외부에 대상들이 존재하자마자, 또 내가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나는 타자로서 존재하게 되고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과 다른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3의 대상에 대해서 나는 그 대상과 다른 현실 곧 그것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다른 존재의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어떠한 대상적 존재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대상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감응하는(leidendes)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응은 감각하는 존재, 감응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응성 곧 열정(Passion)은 자신의 대상을 힘차게 추구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마르크스가 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라고 단적으로 선언하면서 인간을 대상적 존재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인간 주체 자체가 자연이나 타자에 대하여 또다른 독립적 실존으로서의 타자를 이룬다는 점, 대상적이고 감각적인 존재인 인간은 타자에 대하여 일방적 지배와 향유가 아니라 감응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감응성은 집착이 아니라 열정이며, 양이 아니라 질에 근거한 동등교환의 실현이다. 감응은 양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질의 상호호혜적 교환에 의해 이뤄진다. 따라서 감응의 최고의 형태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즉자적 욕구에 따라 행위하지 않는다. 동물들은 즉자적 욕구에 따라 즉자적인 행위를 통해 즉자적 욕구를 충족할 뿐이다. 그에 반해 인간은 욕망에 따라, 매개를 거쳐서, 욕망된 대상의 가공 및 조형을 행할 수 있다. 인간은 즉자적 욕구가 아니라 창조적 욕망을 통해, 인간은 즉자적 충족이 아니라 창조적 충족을 통해, 인간은 직접적 행위가 아니라 매개된 행위를 통해 자신을 유적 인간으로 재생산한다. 따라서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생활의 대상화이며, 유적생활의 대상화로서 인간적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생활의 풍부화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욕구를 욕구할 수 있다. 인간은 욕구를 욕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욕망적 존재이며, 욕구의 욕구는 타자에 대한 생사를 건 투쟁뿐 아니라 상호인정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욕구의 욕구란 타자에 대한 긍정이며, 타자를 타자로서 재생산하면서도 타자와 자아를 일치시키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이고 유적인 인간본질의 확인이며, 사회를 통한 인간본질의 풍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부르쥬아 경제학자들이나 천박한 욕망을 존재의 본질로 삼으려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여도 아니고 향유도 아니며 질투와 시기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적 욕망이란 인간적 본질의 풍부화이며,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 연대성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려는 인간본성의 표출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빈부의 개념은 "풍요로운 인간과 풍요로운 인간적 욕구가 정치경제학적 빈부개념을 대신하여 등장하게 된다. 풍요로운 인간이란 곧, 인간적인 삶의 표현을 전체적으로 요구하는 인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적인 필연성과 필요(Not or Needs)로서 자기자신의 전개를 요구하는 그런 인간을 말한다....물론 사유재산제란 이러한 직접적인 소유실현을, 삶의 수단이라고 하지만, 실상 수단이 그것을 위해서 사용되는 삶 자체가 사유화 되기에 이르는 바, 인간의 노동도 마찬가지로 자본화 된다. 이제 인간의 모든 감각은 지양되고 하나의 감각 즉 소유라는 감각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 빈곤이다."라는 식으로 이해된다. 사적소유제 하에서는 인간적 본질의 풍부화가 단순한 사적소유욕에 의해 대체되어 버리고, 그것에 의해 압도됨으로써 오히려 절대적 빈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일련의 논의과정을 거쳐 인간본질과 인간본질에 기댄 사회적 부의 개념을 인간적 욕망의 풍부화와 그것을 실현가능케 만드는 사회적 관계로 정의하는데, 사적소유제가 성립한 이후 이러한 인간본질의 실현은 체계적으로 억압당하거나 변질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핵심적 개념인 소외에 관한 그의 입장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소외란 인간본질의 소외,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에 다름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소외를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라고 규정한 후, 그 구체적인 의미로서 인간이 세계를 소유함에 있어 자신을 창조자로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계가 인간에게 낯설은 것으로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특히 마르크스는 노동과 노동분화를 통해 소외의 구체태를 설명하는데, "노동이 산출하는 대상, 즉 노동의 산물은 노동에 대해서 소외된 존재로 나타나며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또 생산자에 대립되는 힘으로 나타난다.....더 나아가 노동자가 그의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받기 보다는 오히려 부정당하며, 행복하게 느끼기 보다는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는 휴식을 가질 때 편안함을 느끼고, 자유로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동력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그의 육체가 괴롭힘을 당하며 그의 정신도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는 휴식을 가질 때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속에서는 불편함을 느낀다" 이는 노동자가 노동과정 뿐만 아니라 노동결과에 의해서도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며, 더욱 본질적으로는 소외된 노동에 의한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 그 과정에서 인간본질의 퇴락을 겪게 되기 때문에 인간성 그 자체의 파멸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경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원리에서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진행되는 자동화에 따른 실업의 급증과 같은 구체적인 사실을 날카롭게 논파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생산력의 고양은 곧 대개 노동자의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 생산증가를 위해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결국 생산자에 대한 지배수단 또는 착취수단으로 변형되고 만다. 그것들은 노동자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바, 노동자는 이제 온전한 인간이 못되고 부분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이제 노동자는 기계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아울러 이러한 생산성 제고를 위해 동원되는 수단들은 결국엔 노동의 의미를 절멸시키고 노동자에게는 다만 고통스러운 노동을 남겨줄 뿐이다. 이제 노동과정에 깃들어 있던 정신적, 지적 잠재력을 제거되어 버리는 바, 독립적 힘을 지닌 과학이 생산과정에 원용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이러한 노동소외는 생산양식 내에서의 특정한 가치매체를 통해 재생산되며, 가치매체의 자립적 힘이 증대하게 됨에따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소외는 물론이고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외를 확대재생산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체제에서의 유일한 욕망의 대상은 화폐이며, 화폐에의 욕망은 인간의 욕망 전체를 일그러뜨리게 된다. 욕망은 탐욕과 질시와 투쟁과 적대와 지배에의 추구로 나타나며, 이러한 욕망 아래에서 이성과 노동은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가 되어버릴 뿐이다. 인간이 소외되면 될수록 소유(Haben)와 사용(Benutzen)의 관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고, "너의 존재가 왜소해지면 왜소해질수록, 그리고 네가 네 삶을 적게 표현하면 할수록 너는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너의 소외된 삶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소외된 축적물도 점저 더 많아질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노동의 소외로부터 인간관계 전체, 자연과 인간관계라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소외를 이끌어 낸다. 이는 노동이 인간의 유적 삶을 가능케하는 근본적인 매개이기 때문이며, 노동이야말로 인간본질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소외개념을 전제하고, 혹은 그것이 내밀하게 관통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자본론]을 서술하였으며, 그것의 지양태로서 [경제철학 수고]와 [강요]를 통해 사회주의의 원리적 근거와 이행의 경로를 제시한다. 그것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일련의 저작들, 정치적 문서들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인간본질에 대한 존재-신론적 기반 위에서 전개 된다는 점 때문에 목적론이 아니냐고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논자들이 있어왔다. 그리하여 [경제철학 수고]를 비롯한 인간본질과 소외론에 관련된 저작들을 '청년 맑스의 철학'으로, [자본론]을 깃점으로하는 후기 저작을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로 구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청년맑스철학'을 제거시켜야만 맑스주의의 핵심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은 알튀셰에 의해 명시적으로 주장되어졌지만 사실 이미 오래전에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맑스의 초기저작 출간이 방해받아 왔으며, 반공주의자들 역시 초기와 후기의 저작을 분리하고 후기의 저작만을 일방적으로 왜곡 해석함으로써 맑스주의를 폄하하기 위해 광분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주장 보다는 오히려 최근 대두하고 있는 포스트주의자들의 반론에 오히려 더욱 주목하고자 하는데, 이들은 마르크스가 소외의 본질을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로 파악하는 자체가 소외론을 존재-신론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인간본질이란 없으며, 실존만이 유일하거나 아니면 인간본질과 실존의 끊임없는 차연적 긴장만이 있을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중에 일부는 노동의 소외는 인정하면서도 본질과 실존의 괴리로 인한 인간본질의 퇴락과 황폐화를 가져온다는 점은 부정하는 논리를 구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소외에 관한 저항을 단순한 도덕주의적, 절차적 합리성에의 요구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따라서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갖고 있는 혁명성을 거세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명백히 인간본질과 실존간의 괴리에서 나타나는 총체적인 인간본질의 퇴락을 지적하고 잇으며, 노동의 소외는 그것이 인간적 본질에게 갖는 핵심적 역할로 인해, 또한 이행의 주요동력과 근거가 노동에서 도출된다는 점 때문에 중심적으로 부각되었을 뿐, 인간본질과 실존간의 괴리라는 총체적 소외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하나의 '부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인간본질과 실존을 왜 구분하였으며, 이 구분의 근거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인간본질과 실존의 관계는 존재와 현존재가 맺는 관계와 유사하다. 인간본질은 현존재의 존재론적 실천에 의해, 지향적 실천을 통해 누적된 사회적 결과이다. 그것은 비교적 안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현존재의 존재론적 실천에 있어서의 내적 근거이자 지향적 지평의 내적 실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본질은 고정되어 있는, 주어진 독립적 실체는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역사적 실천에 의해 퇴적되고 구조화되며 서서히 이행해 나간다. 이러한 인간본질은 현존재의 지향적 지평을 구성하지만, 현존재의 즉자적인 이해와 요구로부터는 독립해 있으며, 그것에 의해 즉자적으로 변형되지도 않는다. 이에반해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는 퇴락된 세계의 질서, 세계질서를 매개하는 가치매체에 의해 부단히 영향을 받고,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인간본질은 단순히 현존재의 존재론적 실천이 역사적으로 퇴적된 결과물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향적 지평이 파지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지에 의해서도 구성되는 것처럼, 현존재의 미래에 의해서도 구성된다. 인간본질은 현존재의 실존적 퇴락에 직면하여 과거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인간본질의 급진적 전개와 풍부화를 추구하는 전략적 실천에 의해 재구성된다. 실존적 퇴락이 심각할수록, 그리하여 인간본질의 퇴락이 급격하게 강요될 때, 그에 대한 저항 역시 급진적으로 전개된다. 최근 진행되는 급진주의적, 일탈적 저항운동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사태전개의 반영이며 그만큼 인간본질의 퇴락이 폭력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렇게 급진적으로 진행되는 저항이 현실에 직면하여 본질의 풍부화에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적 경로를 찾아내게 될 때, 인간본질은 새롭게 재구성된다. 따라서 인간본질 역시 과거와 미래의 현재적 응축이며, 응축의 밀도는 전략적 실천의 강도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실존은 현존재가 기반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충실히 반영하며 그것의 확대재생산에 종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실존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현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소외의 결과 그 자체이다. 실존으로서의 현존재 역시 기획투사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실천을 수행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기획투사적 실천은 지배적 생산관계의 논리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의 재생산에 보다 긴밀하게 관계된다. 왜냐하면 실존적 현존재의 신체적, 육체적 재생산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지배적 생산관계의 논리를 승인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 대한 성과를 인용하면,
"현존재는 항상 결단된 자로서 실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는 우선 대개 비결단적이며, 그 자신에게 고유한 존재가능이 닫혀 있으며, 그의 가능성의 기획투사 양식에 있어 일차적으로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필자의 개념으로는 인간본질)에서부터 규정되어 있지 않다. 현존재의 시간성은 항상 그 본래적 미래에서부터 자신을 현재화 하지 않는다....현존재는 우선 대개는 자신을 사물들에서부터 이해한다. 타인들 함께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직접적으로 손이 닿을만한 거리에 있지 않아도 그들과 거기에 함께 있다. 그들은 그들이 함께 거기 있는 방식으로 사물들에서부터 이해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러한 일상적, 비본래적, 비결단적 실존을 '비본래적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시간성'이라고 말하며 '손 안의 사물들 및 눈앞의 사물들과의 이해하는 행동관계'라는 지평위에 기반해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언급은 좀더 세밀하게 분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현존재적 실존이 갖고 있는 시간지평은 전략적 실천이 갖고 있는, 혹은 인간본질이 갖고 있는 시간성에 비해 그 지평의 범위가 좁고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존재적 실존의 자의적 선택에 의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현존재적 실존을 규정하는 사회적 시간이 압축되고 분절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관계가 총체적이지 못하고, 사회적 교류양식이 제한되어 있으며, 인간적 욕망이 단순할수록 시간지평은 짧고 자신의 실존적 공간을 벗어나기 힘들다. 더구나 인간관계가 총체적이고 사회적 교류양식이 확장되어 있다 할 지라도 사회적 시간성이 분절화되고, 분절된 시간이 압축될수록 그에 따른 실존적 시간성의 지평은 더욱 협소해지게 된다.
현존재적 비결단적 실존을 구성하는 사물적 이해라는 부분은 사람들간의 관계가 사물화 되어 있다는 것으로, 타자는 자아의 도구나 수단이 된다. 이러한 관계는 사물화가 전면화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일반화 되는데,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체제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사물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관계에 좀더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 아래에서 인간본질과 인간실존의 괴리는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본질과 실존의 괴리가 심각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가 아직 창출되지 않았다. 인간의 노동은 자연환경과 심각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인간적 삶 역시 자연과 인간이 갖는 생태적 리듬에 비교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을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생산관계가 인간의 내적 본질을 변형할만큼 총체적이거나 밀도높게 전개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 봉건제적 생산관계는 인간의 신체를 구속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욕망을 구속하거나 영혼을 구속할 수 없었으며, 지배기제 역시 분절되었기에 저항 역시 분절적으로 진행되었을 뿐이다.
인간본질과 실존이 이렇게 구분되는 이유는 인간실천 그 자체의 조건으로부터 도출된다. 인간실천은 앞서 말했듯이 자연의 일부로서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생산관계내에 존재한다. 그런데 신체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실존규정으로서 부여 받으며, 그것을 재생산함으로써만 실존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실존의 선행적 조건을 역사적 시간성이라고 명명하며, 역사적 시간성은 현존재의 시간적 지평 이전에 현존재의 시간적 지평을 규정하는 것으로써 인간본질과 실존을 재구성한다.
그런데 역사적 시간성은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 중기지속· 단기지속이라는 개념을 원용하면, 장기지속으로서 자연적이고 실체적 생태학적 시간리듬에 규정되는 본질의 시간과 중기지속으로 불리울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업순환주기나 이윤주기에 의해 규정되는 현사회의 구조적 시간성, 그리고 자본회전주기나 노동통제 수단인 시간관리등에 의해 규정되는 단기지속으로 구분될 수 있다. 여기에서 장기지속의 시간성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노동과 실천의 본질로서 역사 전체를 통해 재구성된 인간의 유적 삶이라는 축을 시간성의 본질적 핵으로 삼는 것으로서, 이는 이론적으로 명시되고 현존재적 실존의 존재론적 향수(鄕愁), 본래적 지향으로서 자리 잡는다. 이는 인간실천이 본래적으로 결여의 충족이 아니라 현존재에 대한 부정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승인한다면, 혹은 결여의 의미를 현존재의 부정성으로서 이해한다면 당연한 결론이다.
인간실천은 본래적으로 현존재로서의 실존에 대한 지양을 추구한다. 실존에 대한 지양이 없다면 시간성의 지평 역시 존재할 수 없으며, 시간성의 지평없는 시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단절된 점의 연속이거나 단절된 점들의 산포(散布)일 뿐이다. 따라서 장기지속(인간본질)이 중기지속(인간실존)과 구분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략적 실천에 의해서이다. 전략적 실천은 시간성의 지평을 재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본질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인간본성의 개념과는 차별적이다. 인간본성 개념은 본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관계양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지속된다고 본다. 그러나 전략적 실천에 의해 구성되는 인간본질은 관계양식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제시되는 인간본질은 대상적 존재의 본질을 해명 하고자 하는, 현존재적 실존의 관계양식을 변혁하려는 당파적 입장에 의해 이끌린 추역사적(追歷史的) 분석의 결과이지 전제가 아니다. 더구나 인간본질은 추역사적 분석결과와 통합된, 그러한 결론이 보여주는 미래적 경향, 대안적 원리에 의해 재구성된다. 따라서 인간본질은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억압된 자의 전통'과 주체의 대안적 원리가 재구성된 결과물이며, 그런 한에서 인류의 전역사가 농축된 대상적 존재의 존재 원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본질은 실존과 달리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누적적으로 재구성되고, 그 시간적 지평 역시 넓고 심대하다.
4. 전략적 실천과 이행의 시간
루카치 학파의 탁월한 정치경제학자 미카엘 레브위츠는 [자본을 넘어서]에서 계급의 사회적 필요와 근본적 필요에 대한 역동적 관계를 설명함으로서 이행의 논리를 제시한다. 필자는 레브위츠의 주장을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며, 그의 필요에 관한 이론의 일부를 존재-시간론과 연결시켜 이행의 시간을 제시, 논증하고자 한다. 이러한 필자의 논리전개는 레브위츠의 성과로 인해 대단히 쉽고 간략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지만,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통합과 지배양식, 이행의 시간에서 중심축을 구성하는 혁명전략의 문제는 좀더 보완되어야 한다.
우선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통합과 지배에 대해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이미 150여년전에 시간의 경제가 갖는 중요성을 통찰하였다. 시간의 경제는 모든 사회에 적용되며, 노동일의 길이를 둘러싼 투쟁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자본주의적 시간성은 사회적 생산관계의 자립적 매체인 화폐의 등장으로 인해 중요하게 부각된다. 르 고프가 지적하듯이상업적 네트워크가 발달함에 따라 상인들은 '일사분란한 사업활동을 위해 보다 적절하고 예측가능한 시간척도를 만들어야만 했다' 상업활동은 국지적 규모와 영역에서 행해지던 원격지 무역을 네트워크형 상업교역망으로 통합해냈다. 이는 활발한 상업활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빈번한 영토의 확장과 생산력 발달에 따른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관계양식이 보다 밀접해지고 반복적으로 진행될수록 관계 상대방간의 차이를 점진적으로 해소하고, 보다 원활한 관계양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공통의 척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공통의 척도로 나타난 화폐는 처음에는 공간적 지연으로 인해 시간할인에 따른 시간가격을 책정하게 되지만, 점점 관계양식이 단일해짐에 따라 단일척도로서의 본래적 기능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단일척도의 사용은 절대왕정에 의한 대단위 영토통합과 권력적 지배의 전일성에 의해 보다 확고해지고, 지속적인 재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는바, 비로소 자본주의적 시간성은 그 첫발을 떼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시간성의 통합이 본격화되는 것은 노동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대공업의 등장에 따라 특정한 한 공간내에 집단적으로 노동자들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시간주기를 통제한다. 자본들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경쟁의 결과로 기술혁신이 나타날분만 아니라 부문이윤율, 자본간 이윤율의 시간격차가 커질수록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통제는 좀더 전면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된다. 테일러리즘, 포디즘적 생산방식의 도입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잉생산으로 인한 이윤율의 하락은 생산과 소비주기의 빠르기를 촉진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들어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더욱이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정보통신혁명의 영향으로 시간은 물론 공간의 압축이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에따른 시공간 분할 역시 치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적 시공간의 압축과 단축, 분절화 경향은 노예로서의 임노동자의 전면적인 자유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인데, 임노동자들은 인신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고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따라서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통제에 능동적으로 순응할때에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최대 소비자이기도 한데, 소비 없이는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서, 그리고 노동결과의 소비에 이르기까지 자본의 통제에 순응해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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