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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존재론적 맑스주의 정립을 위하여 2

2. 존재와 시간


김 기환 (1996.06)



우리는 1장을 통해서 철학적 문제설정에 있어서 존재-시간론이 갖는 중요성을 검토하였다. 특히 존재-시간론은 철학의 의의와 철학의 본질규정은 물론, 철학적 문제설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실체를 밝히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쟁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철학사 전반에 걸쳐 이러한 쟁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 봄으로서 하이데거가 지적했던 존재-신론적 철학 극복의 대안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러한 대안속에서 차지하는 존재실체로서의 인간본질은 무엇인지, 인간실천의 객관적 조건인 역사적 시간성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철학사에 있어서의 존재-시간개념은 크게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시간론,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존재시간론, 주관적 인식형식으로서의 시간론이라는 칸트적 개념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이 안에서 각각 훗설-(전기)하이데거-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존재의 관계형식으로서의 시간개념, 그리고 베르그송-니체-들뢰즈적 지속개념에 의한 시간론의 대체 등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시간론의 경우는 영원-시간의 관계가 존재-비존재적 관계로 유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시간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 혹은 베르그송-니체-들뢰즈적 시간론은 이것에 대한 정확한 대당을 이룬다. 그리고 훗설-(전기)하이데거-마르크스의 시간론은 이 양자의 평면적 대립을 뛰어넘어 변증법적 실천을 중심에 둔 존재의 관계형식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 부류를 이루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시간개념을 통해 그 정점에 이른다고 보여진다.

물론 이러한 구분법, 혹은 해석은 아직까지는 자의적인 것이다. 특히 훗설-하이데거-마르크스라는 한 묶음이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시간론에 대해 아무런 명시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며, 하이데거나 훗설의 경우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가능성의 경우는 필자의 논의과정을 통해 특정한 하나의 방향으로 해석 가능함이 보여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알렉상드르 꼬제브는 철학사에서의 존재-시간의 관계를 기초로 필자 나름의 해석을 첨가하여 크게 네가지로 나누어 그 특징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개념이란 영원 자체이다. 따라서 개념은 어떤것과도 관계하지 않으며 절대불변하는 고정된 실체이자 근원적 실체이다. 이는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니체에 의해 주장되어졌으며, 이들에 의해 파악되는 시간이란 유한한 존재 그 자체일 뿐으로 영원과 관계하지 않으며 역사는 영원한 회귀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존재와 개념(진리 혹은 말)을 인식할 수 없으며, 신적 인간의 분신(分身)일때에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자유나 실천이란 이미 주어진 것일뿐, 인간에 의해 창조될 수 없다.

2. 개념이란 시간이다. 헤겔은 이를 "시간이란 현존재적 형식을 지닌 개념 자체이다" 그러나 헤겔이 주장한 시간이란 정신의 이념이 실현되는 세계사적 시간이며, 세계사적 시간은 정신의 이념이 실현되어온, 실현되어야 할 영원한 지속위에 세워진 이념실현의 궤적이다. 따라서 헤겔의 시간이란 현존재의 관계양식 속에서 형성된 역사성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의 시간은 꼬제브의 해석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대단히 미묘한 것이다. 헤겔의 시간은 인간의 본질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의 존재와 무의 변증법적 기원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현존재의 관계양식 속에서 형성된 역사성으로 파악될수도, 절대이념이 실현되기 위한 추상적 지속으로 파악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헤겔을 후자로 해석한다면 헤겔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히 동일한 궤적을 그리게 될 것이고,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마르크스의 헤겔 거꾸로 세우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뒤에서 전개될 헤겔의 존재-시간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헤겔의 존재-시간론은 후자, 즉 아리스토텔레스적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확인될 것이다.

3. 개념이란 시간적인 것이다. 따라서 개념은 상대주의적, 경험적 근거위에서만 인정될 수 있을 뿐이고, 진리의 이념을 부정함으로써 철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흄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경험주의나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 현대에 있어서는 로티 등을 필두로하는 포스트모던의 우익적 조류에 의해 대표되며, 이들에게 시간이란 제논의 역설에서 공격당한 바로 그것, 즉 시간은 연장적 실체로서 쪼개진 점들의 집합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시간과 시간적인 것의 구별도 사라지며 현존재와 시간 역시 구분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시간으로써의 역사란 지배를 위한 이념적 수단이거나 실용주의적 도구로 파악된다. 특히 이들이 시간과 시간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현존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배제된 시간이란 4차원 시공간일 뿐이다. 즉 아인슈타인의 그것처럼 시간은 공간의 또다른 한 차원을 결합시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객관세계에 대한 실천적 개입, 혹은 전략적 실천은 시간과 시간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만든다.

4. 개념이란 영원 자체는 아니지만 영원적인 것이다. 개념이 영원 자체가 아니라면 영원과 관계맺어야 한다. 따라서 개념과 관계맺어야 할 것은 신적 중심(절대자)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는 다시 세가지로 나뉘어지는바, 플라톤처럼 영원과 관계하는 영원한 개념이 시간 외부에 존재하는 경우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영원한 개념이 시간속에 존재하는 경우, 그리고 선험적 인식형식으로서의 시공간론을 전개한 칸트로 구분된다. 특히 칸트의 경우는 개념을 관계라고 정의함으로써 개념을 가능케하는 선험적 요구, 선험적 자아를 상정한다. 칸트에게서 선험적 자아란 물자체에 해당하는 것일수도 있고, 혹은 [실천이성비판]이나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했던 순수의지, 혹은 신의 섭리나 도덕율법 일수도 있다. 칸트가 실천이성 비판에서 제시했던 범주표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그 근거를 찾게 되지만 그것의 근원은 결국 선언되어 있을 뿐이며, 인식론적 신존재 증명으로 근거지워진 극히 허약한 체계일 뿐이다.


1) 자연과학에서의 시간개념;


우리는 시간개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자연과학에서의 시간개념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자연과학에서의 시간개념은 여러 가지 오해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변화와 인과관계에 대한 가장 미세하고도 객관적인 기반위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철학적 차원에서의 시간개념에 존재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자연과학적 시간개념에 대한 검토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에서의 시간개념은 철학적 의미에서의 시간개념과는 약간 다르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이란 인간적 사건과는 분리된, 절대적 흐름의 한 지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물리학에서의 시간이란 무시간성으로 이해되어져 왔으며, 이는 위치와 속도의 계측을 위한 측정도구인 시계에 의해서 시간이 표현된다는 점 때문에 더욱 오랫동안 잔존해 왔다. 더구나 자연과학에서의 시간개념은 아인슈타인 이후, 일상적 경험에서 느낄수 있는 시간과는 매우 다르게 표현되어 왔던 탓으로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란 더욱 어렵다. 가령, 아인슈타인이 시간개념에 대한 고전적 관념은 유지한 채로 시간측정 과정에서 관측자의 상태에 따른 시간 빠르기의 상대성을 주장한 것은 시간흐름의 속도불변이라는 뉴튼적 관념에 익숙한 일상경험의 시간개념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자연과학에서의 시간개념, 혹은 시간개념을 둘러싼 오랜동안의 논란은 그 나름대로 철학적 의미에서의 시간개념을 확립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자연과학에서 논의되어온 시간이론, 특히 가역성과 시간의 방향이라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뒤붸아가면서 그토록 난제중의 난제로 여겨져 왔던 시간개념을 잠정적으로 확립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철학적 차원의 시간개념과 자연과학적 차원의 시간개념이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어서도 안된다는 상식적 요구에 답하려는 시도이자 철학적 영역에서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원초적 질문에 대한 통일적 답변을 위한 것이다.


Ⅰ. 절대시간과 상대시간


그리스 철학자들 이래 물리학 영역내에서 최초로 시간을 개념정의한 뉴턴은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대적이며, 진정하고, 수학적인 시간은 자신의 성질에 의하여 ...외부적인 다른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고르게 흐르고 있다" 뉴턴 뉴턴은 이 말을 통해 시간의 절대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뉴턴의 절대시간 개념은 모든 사물을 관통하는, 혹은 사물의 계기적 사상변화를 관장하는 유일한 척도이자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즉,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원불변의 시간개념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절대시간 개념이 완벽한 인과론적 결정론을 취하고 있듯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념이 엄격한 인과론이나 결정론을 포함하고 있음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뉴튼적 절대시간 개념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부정 당했으며, 아인슈타인의 반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뉴턴적 절대시간 관념은 성립할 수 없는 관념적 조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뉴턴의 시간개념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항상 일정한 흐름을 갖는 시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시간흐름의 빠르기, 속도, 변화 조차 측정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상대적 관계를 통해서만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뉴턴이 절대시간 개념을 주장한 이유는 세계의 고정불변 원리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며, 모든 사상과 변화가 엄격한 인과적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신의 아름다운 결정원리'를 구축하기 위해 절대시간 개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뉴튼의 절대시간 개념을 상대적 시간관념으로 바꿔 놓음으로서 상대성 이론을 확립하게 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의 그것 역시 뉴튼적 절대시간 관념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시간 상대성 개념은 지속하는 사상(事像)과 그것에 대한 관찰자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지속의 길이가 달라져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성에 객관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 것이 광속불변의 가정이었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만약 어떤 물체의 속력이 광속에 가까워 지거나 그것보다 더 빠르게 될 때 시간은 충분히 역전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른바 타임머신이라는게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공간내에 블랙홀과 화이트홀이라는 구멍이 있어 이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주장 마저도 제기되고 있지만,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것과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블랙홀은 원래 펜로즈와 호킹에 의해 제시된 시공간 특이점(特異點, Singular point)의 존재를 가정할때에만 논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시공간 특이점을 시원으로 하는 시간흐름이 왜곡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블랙홀의 경우는 빛의 속도를 능가하는 엄청난 중력장이 발생하여 빛(여기서는 빛이 입자로 이해된다)이 빨려들게 되므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시간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된다. 화이트홀은 블랙홀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으로서, 일반 상대성 이론의 시간가역성(혹은 대칭성)으로 인해 가능해진 관념이다.

블랙홀은 밀도도 중력의 세기도 무한대인 특이점과, 그 주위의 사상의 지평면(事象-地平面, Event horizon)으로 형성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는 빛보다 빨리 진행하는 물질은 없다. 가령 블랙홀의 중력이 엄청나게 강하여 빛도 거기서 탈출할 수 없다면, 다른 물질 역시 거기서 탈출할 수 없다. 블랙홀의 내부로 들어간 물질은 영구히 거기에 갇히게 된다. 따라서 빛 역시 블랙홀에 들어가게 된다면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고, 블랙홀에 근접할수록 시간 역시 느리게 진행된다. 그러나 이때 느리게 가는 시간이란 시계시간일 뿐이지 사상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블랙홀에서는 사상의 변화라는 개념으로 이해된 시간흐름은 중력장이 소멸함에 따라 그 개념 자체가 성립불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블랙홀의 존재가 입증된다해도 스티븐 호킹의 주장대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증명되기 어렵다. 또 블랙홀을 통한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화이트홀 역시 불가능함을 의미하는데, 화이트 홀이란 특이점을 중심으로 하는 시간가역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특이점과 인과율이 결합하면 시간방향은 정확히 대칭적이어서 변화의 조건이 정확하다면 사상의 변화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해진다.

이는 빛의 속도는 일정하고 광원과 무관하다는 정의를 통해서 가능한데, 시간-속도의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빛보다 빠른 물질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물질의 변화는 빛이 시공간을 달리는 경로에서 벗어날 수 없고, 초기조건이 확보된다면 그 결과치는 이 경로중의 하나를 따라 진행될 것이므로 결과예측이 가능할뿐만 아니라 광속의 한계를 벗어난다면 과거로의 역전 역시 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인과율 법칙을 유지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튼적 사고의 광속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간관념의 혼란은 논리적으로만 전개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논리는 물리학적 차원에서는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인과율을 가지지 못한 어떠한 과학이론도 성립할 수 없으며, 객관적 인과율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불변의 가치척도가 성립해야만 하고, 이 척도를 통해 사상간의 변화 크기와 속도를 계기적으로 연관지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아인슈타인은 시간개념을 뉴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았던 것인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절대시간 개념의 기준을 광속으로 옮겨 놓은 것일 뿐이다. 광속은 물질의 밀도에 의해 영향을 받게되므로 휘어진 시공에 따라 시간지연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새롭게 추가한 점, 빛의 휘어짐에 의해 관찰자의 위치와 변화속도에 따라 시계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빛의 속도에 근접한 현상들을 보다 일관성 있게 설명한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인 것이다. 이는 상대성 원리가 "물리학의 법칙은 우주의 어느곳에서나 관측자의 속도와 관계없이 동일해야 한다. 빛의 속도는 일정하고 광원의 운동과 무관하다"라고 정의 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경험적 시간관념과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관념의 차이는 타임머신 논리가 시계시간과 변화하는 사상의 실제지속간의 혼동, 광속을 척도로 삼지 않는다고 하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듯이 시간개념의 혼란은 측정과정과 측정척도의 상대성에서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제기한 시간개념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어떨까? 아인슈타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민코프스키가 말한대로, "지금부터는 공간 그 자체, 그리고 시간 그 자체가 그저 그림자속으로 사라져 갈 운명에 놓여 있으며, 이 둘의 어떤 결합만이 한 독립된 실체를 보장할 것이다." 혹은 "시간적 장은 변화한다. ...시간적 초점의 성격에 따라서 그 장은 확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이나, 시공간 만곡(만곡)이 중력에 의해 발생한다는 논리는 물리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우선 민코프스키의 주장을 살펴보면, 시간은 공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자연과학적으로만 보자면 시공간이 결합된 4차원 시공 개념은 상대성 이론의 기반위에서 볼 때 사상의 지속이 속도와 관계하고, 속도가 공간에 관계하므로(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것) 시공간 융합이란 당연한 결론이다.

그러나 이 말을 철학적 개념으로 사용하면 그 뜻이 많이 달라진다. 우선 공간을 단순한 위치로 파악하지 않고 존재의 변화영역(혹은 사상의 변화영역)으로 파악한다면 존재의 변화영역과 그 변화강도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실재론적 개념으로써 이해된 일정한 흐름의 빠르기를 갖는 시간개념은 여기서 부정되는 것이다. 더욱이 아인슈타인은 (그 자신은 그것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해도) 시간이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실재론적. 절대적 시간개념에 일대전기를 마련했는데, 시간과 운동의 관계속에서 파악되는 시간이란 결국 존재형성의 역사로서 시간흐름이 진행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는 시간이 운동의 지반으로 이해되어온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간개념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일뿐만 아니라 이후 양자론과 결합한다면 시간 그 자체가 상관적인 존재라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Ⅱ. 시간은 가역적인가?


양자론적 시간개념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시간이 과연 가역적이냐라는 것이었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측정의 정확도에 관한 문제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표현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날뿐만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동시적 측정 정확성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가역성과 관련된 논란은 과연 관찰자의 개입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가 관념적,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인가 객관적 현상인가 하는 점에 집중된다.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날 때, 모든 가능성들은 하나의 객관적 실재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난다면 과거 상태와 현재상태간의 비대칭성이 나타나게되고, 따라서 시간가역성이라는 논리는 부정 당하게 되는 것이다. (173)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일단의 과학자들은 파동함수의 붕괴가 엄격한 인과율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파동함수는 우주 전체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추상적 장이기 때문에 어떤 한 점에서의 파동함수 붕괴는 우주 전체에 많은 연쇄변화를 일으켜, 관측자에 의해 현실이 창조된다는 결론을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CPT 이론등이 제창되고 있지만(183), 파동함수의 붕괴에 따른 비가역성과 엄격한 인과율의 확립이라는 상반된 요구는 아직까지 명쾌하게 설명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과율과 시간간의 관계를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인과율과 시간비가역성은 동시 양립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인과율이란 사상의 변화, 혹은 변화의 계기적 연속만을 가지고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시간이 가역적이냐, 비가역적이냐하는 문제는 직접적으로 인과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과율이란 목적정립을 전제로 하며, 목적에 대한 적합성을 따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주어진 사상의 계기적 변화는 무수히 많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계기적 변화의 여건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의도된 결과치를 예측, 검증함으로서 인과율 충족을 확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의도된 예측치가 제안된 이론체계의 합리적 전개를 통해서 제출되고, 이 제출된 예측치가 실제 실험이나 측정을 통해 검증되는 과저이 얼마나 일관된 통일성을 확보하느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수없이 많은 자연과학이론의 명멸을 지켜 보았고, 인간의 인식능력, 인간이 관계맺는 대상의 범위와 근접성에 따라 새로운 이론체계를 정립시켜 왔다. 이러한 이론체계의 변동은 인과적 관계설정에 대한 인간의 필요에 따라 선, 후라는 관념을 연결지을 수 있는 관계망 혹은 관계대상 확장의 역사에 다름 아니며, 이 과정에서 인간의 개입이 예측치와 결과치의 변동을 가져 오느냐 가져오지 않느냐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우리가 인과율, 시간개념의 객관적 실재성 혹은 절대성을 부정한다면 인과율과 시간가역성의 관계 역시 별다른 쟁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시간가역성의 문제는 인과율과 대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론과 대당하는 것이기 ?문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인과율과 결정론을 엄격히 구분하고, 인과율은 인간이라는 관측자가 전제될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그것도 일정한 목적을 전제할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며, 따라서 인과론에 있어서 인간적 개입이 주관적 환상으로 치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과율과 결정론, 시간가역성과 비가역성간의 개념적 혼란은 상대성 이론 이후 인과론과 시간가역성을 동일시 하는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과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간 가역적이어야 하고, 시간가역적이라면 과거로의 회귀라는 환상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인과론은 결정론이 아니다. 인과론은 인간의 실천적 개입을 통한 불확정적 미래변화의 가능성을 포섭시킬수 있을뿐만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문에 시간비가역적이다. 이에 반해 결정론은 인간실천, 혹은 관측주체의 개입이 배제된 상태에서 예측치와 측정치의 완전한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뉴튼적 절대시공간론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절대시공간의 불가능성, 변화하는 사상의 배후에서 이 세계변화의 전 체계를 관장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법칙은 존재할 수 없다. 법칙은 변화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 원리 혹은 관찰자 개입에 의한 파동함수 붕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연과학 내에서 인과론과 시간가역성 논리를 결합시키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어 왔으며, 비가역성의 논리는 비평형 열역학 이론에 근거한 혼돈이론으로 대표될 수 밖에 없었는가? 그 가장 큰 이유는 시간측정의 절대적 척도를 마련할때에만 객관세계에 대한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해석과 실천적 개입이 가능하다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요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제기되는 절대적 시간척도의 무생명성에 대한 반론으로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이론이 있으며, 물리학 영역에서는 혼돈이론이 이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철학적 혹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시간화살의 방향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주의 처음과 시작이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설정에 관한 생태학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는 엄격히 말해 시간화살의 방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 인과론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과론은 결정론과 확률론의 중간적 형태, 인간의 실천적 개입에 의한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의 화살이 하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주장은 변형된 형태의 결정론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결정론을 부정한다면 시간의 방향이 존재한다는 주장 역시 포기되어야 하며, 시간가역성 논리 역시 포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방향이란 존재의 변화를 규제하는 존재 이전의 시간흐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Ⅲ. 엔트로피와 시간의 화살


이와 관련하여 혼돈이론, 엔트로피 이론에 의한 시간 비가역성 주장 혹은 시간의 일방향성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엔트로피 이론의 주장자들은 엔트로피의 탄생과 그 방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평평한 시공을 가진 양자적 진공의 불안정성과 비예측성이 바로 물질이 채워진 우주 탄생의 씨앗이 되어 비가역성에 이르게 되며, 물질의 형성과정은 따라서 우주적인 척도에서 비가역적이 되고 이러한 태초의 과정이 흑체복사로 엔트로피를 생산한다. 그리하여 시간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일방성 과정이 된다 "




그러나 엔트로피 법칙과 불확정성 이론의 결합을 통한 시간비가역성, 시간화살의 일방향성 논리는 그 자체로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선 논리 그 자체의 문제점으로는, 엔트로피 증가의 일방향성은 닫힌 체계에서만 증명될 수 있을뿐, 열린체계에서는 증명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식물에 의한 태양에너지를 통한 광합성 작용이나, 인간과 동물에 의한 생명 창조와 진화의 과정은 엔트로피 감소의 과정을 결과시킨다. 더구나 우주의 초기에 있었을 혼돈과 불안정성에 비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우주의 상태는 훨씬 더 조직화되어 있고 안정적이라는 점 역시 부정될 수 없는 경험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 비평형 열역학을 통한 혼돈 속의 자기조직화를 이야기 했던 일리야 프리고진에 의하면 각각의 상이한 계에 대해 동일하게 작용하는 엔트로피 증가를 주장하기는 더욱 어렵다.

해석상의 문제를 살펴보면, 열역학에서의 엔트로피 법칙은 단힌계를 상정하고 있으며, 이 닫힌계에서 시간은 비가역적이다. 시간의 비가역성을 보장하는 시간화살은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 이론 역시 특이점 가정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즉, 엔트로피 탄생 시점에서부터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한 평형상태의 도달이라는 한 지점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연속적 과정을 시간이라 정의하고,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이 곧 시간의 방향이라고 주장한다면, 즉 시간의 처음과 끝을 가정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만약 현실에서 엔트로피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정지해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일련의 연속적 흐름은 시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시간의 절대척도인가?

만약 후자의 의미라면 아인슈타인의 광속을 엔트로피 흐름이라는 또 다른 척도로 대체한 것일뿐 시간개념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제시한 것은 못된다. 전자의 의미라고 한다면, 엔트로피 증가가 각각 다르게 진행되는 차별적 계 사이의 시간흐름은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 물론 우리의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엔트로피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충분게 주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통해 열역학 이론에 근거한 시간비가역성 논리 역시 시간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 위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데, 물컵에 커피를 부었을때, 이 커피가 물속에 확산되지 않고 표면에 떠 올라 있다면 시간은 정지해 있는 것인가? 엔트로피 이론가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경험적 시간개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엔트로피 증가가 역전될 수 없는 것이며, 정지해 있을 수도 없는 영원한 일방통행의 일방향성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뉴튼에서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나아가서는 엔트로피 이론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에서의 시간론은 그것을 절대시간이라고 부르든, 상대론적 시공이라고 부르든 시간에 대한 선험실재론적 가정을 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험실재론적 시간론으로 인해 시간가역성이라는 논란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왔으며,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고는 시간을 공간화함에 따라, 혹은 시간을 선험적으로 실재하는 객관적 실체라고 보는데 따른 고전적 논란은 계속될 수 밖에 없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논란은 철학사에서도 여전히 되풀이 되었는데, 칸트를 거쳐 베르그송에게 이르기까지 시간은 선험실재론적 객관실체로 파악되었다. 물론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인식조건으로 파악함으로써 실재론적 사고를 벗어났지만, 그것이 인식론적 차원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베르그송의 경우는 은폐된 지속실재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자연과학에서의 논란과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특히 시간이론과 관련한 인과론 혹은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와 연관하여 철학사의 오래된 논쟁점이었고, 자연과학내에서는 법칙의 실재성과 그 필연성 문제와 연관된 결정론 논쟁의 근원을 이룬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통해서 본, 혹은 헤겔의 실천변증법에 근거하여 살펴본다면, 우연성과 필연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인과론과 결정론 역시 관계의 밀도와 지속에 따라 역사적으로 규정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왜냐하면, 각 존재가 독립된 인과계열을 이루는 한(즉, 질적으로 다양하다면), 서로에 대해 우연적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목적이 개입하여 이 우연의 인과관계를 결과에 따라 원인으로 연결지을 때 규칙성-필연성이 도입된다(파동함수의 붕괴를 상기하라). 따라서 우연성과 필연성은 그 자체로는 동일한 것에 불과하다. 목적적 행위는 의지에 의해, 그것도 의지의 숙고(熟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데, 숙고는 필연성의 영역에서 작용하지 않고 전적인 우연성의 영역에서도 작용하지 않으며 오직 개연성(蓋然性)에 대해 숙고한다. 결국 의지적 목적(혹은 전략적 실천)은 기계론적 인과성으로서의 필연에도, 전적인 우연성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모순적 종합이며, 연속적으로 변화하며 한계지워지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이 말했듯이, "한정된 의지는 비록 이 의지가 어느 주어진 내용이나 다른 주어진 내용 때문에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마치 자신의 모든 개별적 종류의 현실과 만족을 넘어서 있듯이 그 내용이나 여러 본능을 넘어서 있다. 비록 동시에 .....그 의지가 자신의 본성과 외적인 현실의 결정성에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특히 시간이론과 관련한다면, 양자역학의 파동함수 붕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미시계와 거시계에서의 인과율이 갖는 범주적 차별성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의 흐름은 사상의 계기에 의해 구성되며", 그것도 단순한 사상의 계기만이 아니라 인간이 사상에 대해 맺는 관계의 집중성과 밀도를 포함한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방향을 가지지 않으며 역전되지도 않는다. 다만 관계맺음의 양상과 그 강도에 따라 변화하는 실체라는 측면에 있어서 실체를 이루는 관계가 변화한다면 상이한 관찰체계에 존재하는 관찰자에게 있어서 시간의 속도와 지속은 각각 다르게 경험된다. 이는 민코프스키의 주장에서 그 희미한 빛을 발하는데, "시간적 장은 변화한다.....시간적 초점의 성격에 따라서 그 장은 확장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이 선험적으로 실재하는 객관적 흐름이 아니라 사상의 계기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필연적인 결론인데, 사상의 계기는 그것이 인간의 실천적 개입에 의해 한계지워지고, 관계맺어지지 않는다면 단순한 무일 뿐이다.

자연과학에서 지구와 태양의 관계, 인과율의 개념에 대한 인식변화, 시간과 공간개념의 완만한 변화, 혹은 단적으로 말해 토마스쿤 류의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이 자연세계와 맺는 관계의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인간이 천체의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지워지고, 그것에 의해 심각하게 영향받지 않는다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든,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돌든 문제되지 않는다. 또는 뉴턴의 중력이론이 양자세계에서 적용되느냐, 아니면 복잡성 이론이 인과적 필연성을 부정하고 확률론적 개연성만을 지지하느냐는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 문제되는 영역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2) 철학사에서의 존재-시간개념


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개념과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개념을 두가지 방향에서 정의한다. 그 하나는 "운동하는 존재자의 전체" 그 자체를 시간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간이란 천구 그 자체이다"라는 정의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전자의 개념규정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반면, 후자의 개념규정은 전자의 개념규정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운동하는 존재자의 전체"는 "모든 존재자는 시간안에 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은 또한 모든 존재자의 바깥 경계인 회전하고 있는 천개(天盖) 내부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을 통해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개념은 존재자의 운동이 가능케 되는 근거나 지반으로써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존재의 운동과는 무관하게 존재를 가능케하는 선험적 존재양식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디에나, 또한 모든 것 옆에, 모든 것 곁에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라는 언급을 본다면 절대시간 개념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명백히 모순되는 듯한 문장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물론 시간이 그 자체 운동체의 운동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또한 시간은 운동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의 의미는 '운동의 전후관계라는 지평속에서 운동이 헤아려진 것이 곧 시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설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운동 이전의 선행개념으로써, 운동이 가능할 수 있는 장 혹은 근거로 설명한 다음, 다시 시간이란 운동의 선후관계에 의해 헤아려진 것이라는 일견 순환논리를 구축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순환론이 아니라 시간인식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시간이란 운동 이전의 것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지금의 연속, 혹은 흐름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시간이란 본질적으로 인과적 관계에 결부되어 있다. 하나의 흐름이나 연속은 무규정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미 흐름이나 연속에는 하나의 질적 규정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이 흐름이 되기 위해서는 질의 일정한 기간동안의 흐름이라는 시간 개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점 때문에 시간을 '운동의 전후관계라는 지평속에서 헤아려진 것'으로 재규정했던 것이다.

이를 구분한다면, 시간 그 자체로서의 시간개념과 시간측정으로서의 시간개념이 있을 수 있으며, 전자의 경우는 무차별적 지속이나 흐름으로써, 후자의 경우는 운동적 관계의 인과성, 전후관계를 파악하는 질적 단일성 위에서의 헤아림으로서 각각 구분된다.

그렇다면 후자의 시간척도는 어떻게 만련되는가? 하이데거에 의한다면, 후자의 질적 단일성에 기초한 헤아림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근거이자 척도로서 운동에서의 전후관계, 그 계기인 지금에 의해 측정된다. 질적 단일성이란 연속성, 운동의 연장과 변화의 양상이 하나로 집약된 것을 의미하며, 지금에 의해 모아지고, 규정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시간은 지금에 의해 연속적이 되며, 또한 지금에서 분리된다." 시간은 전후라는 지평에서 헤아려진 운동이기 때문에 헤아림이 일어나는 지금 여기야말로 질적 단일성을 구축하는 출발점을 이룬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지금의 다양성만큼이나 시간의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다양성을 질적 단일성 위에서 측정가능케 하는 계기로 운동에서의 전후관계라는 개념을 끌어 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운동은 연속성과 연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운동 속에서 파악된 시간은 '지금'이라는 계기에 의해 결집되고, 구분된다. "지금은, 그것이 언제나 이미 무엇으로 존재했던 바 그것의 관점에서 볼?는 동일한 것, 즉 개개의 모든 지금에 있어서 지금은 지금이다. 다시말해, 지금의 본질, 지금의 무엇은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또한 개개의 '지금'은 모두 본질상 지금마다 각각 하나의 다른 지금이다. 다시말해, '지금' 존재는 언제나 달리 있음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지금'은 한계가 아니며 옮겨감과 차원으로서 이전과 이후를 향한 열려있음이다. 헤아려진 수로서의 시간은, 수가 헤아려진 것의 사물내용과 존재방식에 의존하지 않고도 규정될 수 있기에 존재방식과 존재내용을 규정하는 한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운동에 의해 파악된 수(數) 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는 점 혹은 조각들의 모음이 아니라 흐름의 연속체, 차연의 흐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된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시간은 운동에 의해 파악되지만, 운동은 시간안에 놓여져 있다. 여기에서 시간이란 헤아려진 수일 뿐이며, 시간 그 자체는 운동을 앞서 있다. 따라서 "시간은 존재자를 감싸안고 있으며, 시간이 조재자보다 앞서, 말하자면 운동체나 정지체보다 앞서 어떻게든 포괄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것으로 파악된다. 무한한 시간속에서 헤아려진 시간은 '지금' 속에서 파악된 존재의 동일성은 동일성과 차이의 모순적 결합이며, 헤아려짐 이전의 시간이란 달리있음, 차이의 연속이다. 즉, 동일성은 헤아려짐이며, 이 헤아려짐으로서의 시간은 인간의 영혼을 요구한다. 헤아리는 것이 없다면 헤아려지는 것도, 헤아려진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개념을 그의 존재론과 연관지워 본다면, 시간개념의 의미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존재(본질)란 모든 것의 궁극원인이며, 자립적 실체이다. 그러나 자립적 실체는 현실적 존재(현존재)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플라톤이 참된 존재를 개별자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히 정반대의 주장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존재의 실존적 규정을 넘어선 영원과 무한, 무규정의 영역에 있다고 주장하는것에 반대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보편형식에 불과하다는 점, 사물과 이데아가 결합될 수 있는 근거가 부재하다는 점, 이데아는 운동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존재를 제일실체로 파악하면서도 제이실체로서의 에이도스, 본질의 본질을 주장한다. 제일실체로서의 현존재를 현존재로서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것, 종적인 것으로서의 형상인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은 비록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의 근본목적이 "존재 그 자체와 이것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고찰하는 것, 제일 첫 번째 것과 원인에 관한 학문, 움직여지지 않는자와 스스로 존재하는 자에 관한 학문"으로 규정하면서, 존재의 근거로서 아무것에도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 실체를 찾는 한, 필연적으로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플라톤의 이데아는 동일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이는 존재와 현존재간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비교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과 관련하여 현존재의 근거인 시간과 공간을 가상적인 것, 유한한 것, 질료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의 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이데아에 의해 비로소 형상과 실체가 규정되는 불멸하는 영혼의 매개체에 불과하다. 이데아는 무시간적, 무공간적인 것으로서 시공간에 의해 구성되는 감각적 세계와 무관하게 자립적으로 존재하며, 시공간에 의해 한계지워지지 않으며, 오히려 시공간에 유한한 우연성만을 부여한다. 따라서 그의 이데아는 영혼과 개념, 신적인 세계일 뿐이며, 현실세계는 그것의 그림자, 혹은 모사일 뿐이다.

이에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이도스를 통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동적인 힘, 구성하는 원리를 사물 자체안으로 끌어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형상은 사물안에서 작용하는 원리이지만, 사물 자체는 아니다. 질료는 순수한 가능태이자 공허한 기체이고, 형상은 이 기체에 운동과 목적을 부여해주는 활동(에네르게이아)이자 보다 더 높은 형상으로의 목적이다. 이는 현존재의 근거이자 형식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도 반복되는데, 이미 살펴 보았듯이 시간 그 자체, 공간 그 자체는 영원에 속한다. 그리고 연장과 연속성을 갖는 운동에서 파악된 지금으로써의 시간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모순적 결합이다. 인간의 영혼에 의해 측정된 시간과 공간은 유한과 한정적 인식을 위한 헤아림인데 반해 시간과 공간 그 자체는 영원한 개방적 흐름인 것이다. 에이도스가 기체를 통해 그 자신은 불변하면서 그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것처럼 시간 그 자체와 헤아려진 시간은 동일한 관계를 이룬다.

결국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는 본질과 현존재의 관계, 영원과 시간의 관계가 분리되어 있느냐 결합되어 있느냐의 차이일텐데, 이는 알렉상드르 꼬제브가 말한대로, 플라톤의 경우는 "영원과 관계하고 있는 영원한 개념(이데아)이 시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유형"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영원과 관계하고 있는 영원한 개념(에이도스)이 시간속에 존재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시간을 유한한 것, 규정된 것, 한갓된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 그 자체를 영원 속의 변화로 파악함으로서 에이도스, 혹은 영원한 개념을 현존재의 변화 가운데 위치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양자 모두 존재의 본질 혹은 개념은 인간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플라톤에게 있어 그것은 단지 기억과 회상으로만 나타날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역시 현존재를 규정하는 영원적, 무규정적 시원으로 이해된다. 시간의 축을 따라 행해지는 생성 역시 "가능태로서의 존재자 자체를 현실화 시키는 것"으로, 시간속에서 진행되는 운동이나 변화와는 무관하게 자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본질과 현상은 영원히 분리되어 있는 독립적 관계이며, 본질은 직접적으로, 혹은 시간의 축을 따라 예정된 경로로 현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념이 영원한 만큼 시간 역시 영원한 것으로 파악되며, 시간은 규정이나 한계로서가 아니라 무규정적 지속의 흐름으로 주장된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을 설명하면서 동일성과 비동일성(달리 있음)의 모순적 결합을 주장했던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가능태와 현실태의 관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관계이다. 즉 지금의 현실태는 더 높은 목적을 위한 가능태로 전화하며, 생성 전체는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 있는 영원한 흐름이다. 따라서 '지금'은 항상 '동일한 것'이자 '달리 있음'으로 파악되며, 지금 이전의 시간은 지금이라는 헤아림의 계기 밖에서는 포착될 수 없는 절대적 시간, 영원 그 자체이다.


Ⅱ.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의 존재와 시간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사유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존재-사유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존재-사유는 영원한 것으로 파악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사람들은 오직 존재자만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와 반대로 무는 없다"는 언급을 통해 생성을 부정한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생성이란 움직이고 있는 반면, 존재는 정지되어 있는 것,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존재-사유의 동일성을 통해 사유가 존재의 드러남으로 파악되며, 인식의 독자성(창조성)은 부정된다. 더구나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전체로서의 일자(一者)라는 규정을 통해 개별적인 것, 다수성, 변화와 생성은 부정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고려될 수 없는 논외의 문제이다. 생성과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존립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시간이 변화와 생성을 배제하고도 존립할 수 있다면, 마치 뉴튼의 절대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는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다.

스피노자 역시 "우리들은 인간정신에 대하여 인간정신이 지속에 의해서 설명되고 시간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는 지속을 부여하지 않는다. 즉 우리들은 인간정신에 대해서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면 지속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은 신의 본질 자체를 통해서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하여 파악되므로 정신의 본질에 속하는 이 어떤 것은 필연적으로 영원하다. ……(왜냐하면--인용자)…… 영원성은 시간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시간과 아무런 관계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시간이해는 그의 존재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즉, 그의 존재론은 자기동일자, 자기충족자이므로 영원 그 자체이며 더 이상 현존재와 관련되지 않는다. 현존재란 영원 그 자체의 모사이자 반영이며, 영원의 속성으로서만 나타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그의 언급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보도록 하자.

"정의 7; 나는 존재가 영원한 것에 대한 단순한 정의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한, 영원성을 통하여 존재 자체를 이해한다. 해명; 존재는 사물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진리로 파악되며, 따라서 지속이나 시간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지속을 처음과 끝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고 할 지라도."

왜냐하면,

"정리 7; 실체의 본성에는 존재가 속한다. …… 정리 8; 모든 실체는 무한하다. …… 정리 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 정리 16; 신성한 본성의 필연성에서 무한한 것이 무한한 방식으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 …… 정리 18;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지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 정리 19; 신 또는 신의 모든 속성은 영원하다. ……"

스피노자에게서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신은 자기충족적,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외부적 원인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론에 연결될 수 있다. 더구나 스피노자는 "지속은 존재의 무규정적 연속이다"라는 언명을 통해, 혹은 이 문장에 대한 해명에서 "존재의 연속은 결코 존재하는 것의 본성 자체에 의하여 한정될 수 없으며 또한 작용인에 의해서도 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용인은 사물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정립하지만 그것을 제거하지는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에서 모아진 시간을 '동일성과 달리있음'으로 파악했던 것과 유사한 결론을 내린다.

더구나 스피노자는 존재의 본질과 그 속성 및 양태의 관계에 대해,

"정리 21;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항상 그리고 무한하게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거나 또는 바로 이 속성에 의하여 영원하며 무한하다.…… 정리 23; 필연적으로 그리고 무한하게 존재하는 모든 양태는, 필연적으로 신의 어떤 속성의 절대적 본성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필연적이며 무한하게 존재하는 일종의 양태적 변용으로 양태화한 어떤 속성에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 정리 29;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 정리 32; 의지는 자유원인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필연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시간속에 규정되어 있는 현존재를 에이도스의 현실적 전개과정으로 보는 것과 동일한 논리를 구사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원인을 형상인, 질료인, 목적인, 운동인 등 네가지로 파악함으로써 한계적으로라도 생성과 변화, 영원한 본질과 현존재간의 변증법적 관계를 다이내믹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반면, 스피노자의 경우는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작용인만을 인정할 뿐이어서 개별적인 것, 생성, 시간 등등은 절대적 자기동일성의 어둠속으로 잠겨버릴 뿐이다. 이 점에 관하여 플라톤은 스피노자의 전신이라고 할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존재가 실제로 하나라고 한다면 상이한 모든 것들, 개별자, 가변적인 것을 배제한다면 시간은 무효한 것이 되고, 사람들은 영원한 존재, 자기동일적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고 정당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이러한 플라톤의 비판은 스피노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스피노자의 인간이 신적 본성, 절대적 영원으로서의 자기동일자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인간이 신적 속성을 반영하고 있거나 인간 그 자신이 신(神)일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인간이란 신일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거나 오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연장의 양태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은 신체에 의해 반응된 것, 자극된 것을 통해서만 정신을 구성하며, 정신안에는 이해하고 욕구하며 사랑하는 등의 절대적인 능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신체를 통해서 나타나며 신체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은 신과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적 본질의 사유적 속성이 곧 정신이기 때문이며, 신적 양태로서의 사물들은 신의 속성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에 인간정신이 그것을 보다 일반적으로, 보다 다양하게 받아들이는 한 신의 사유적 속성에 다가갈 수 있고, 정신이 신과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정서와 신체자극에 의해 교란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따라서 신적 본질에 대한 파악은 오직 본질직관(Wesenssch며)이며, 이성적 앎은 시간적 우연적 관점이 아니라 초시간적인 본질필연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감성적 지각은 정서와 감각, 욕망 등에 의해 교란되기 때문이며, 영원한 본질은 시간 이전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고, 양상과 속성의 근원은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피노자의 진술을 인정한다해도, 본질직관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느님이 인간의 영혼의 본질을 결정하고 있고, 이러저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하느님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은 자신의 신체의 현재적 존재를 파악하는 시간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지속을 파악하며, 그런 경우 사물을 시간과 연관하여 파악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러나 영원성은 지속으로 설명할 수 없다.……(따라서--인용자)……사물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생각하는 이 능력은 오직 정신이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파악하는 한에서만 정신에 속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한 상 아래에서의 신체의 본질 파악'이란 신적 속성이나 양태로서 개물들 혹은 현재적 존재를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한에서 직관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각각의 개별적 인간들은 수동적 관념에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서 있으며, 시간속에서의 생성과 변화를 보기 ?문에 내적인 필연적 연관을 잊어버리게 된다. 더구나 스피노자가 강조했듯이 신은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과 무관계하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전 체계는 오직 스피노자 자신이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파악했거나, 동일한 말이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신일 때에만 가능한 체계가 된다. 앞서도 여러번 지적했듯이 시간을 넘어서 있는 존재는 유한한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신만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파르메니데스에서 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존재-사유의 동일성론, 연관된 전체로서의 일자라는 관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게 행했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시간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철저하게 봉쇄돼 있는 상태이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의 존재시간론은 플라톤의 근세적 재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인간은 존재실현의 도구조차 못되는 가상의 존재일 뿐이다.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인간의 정열, 욕망은 존재의 유일한 규정인 인과적 결정에 의해 사전에 규정된 것이거나, 자극과 반응의 물리학에 머물뿐이다. 역설적이게도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윤리학은 존재 그 자체의 규정으로부터 미리 주어진 것일 뿐이며, 신적 실체로부터 기하학적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된 모든 것들에는 악이나 불행, 그리고 한계가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윤리학이 자리잡을 수 있는 영역이 없으며,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물리학에 충실할 때 신에게로 좀더 쉽고,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다.


Ⅲ. 베르그송의 존재-시간론


베르그송은 칸트와 데카르트를 넘어 객관적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주관주의를 정초하려 노력한다. 특히 칸트의 상대적 객관합리성을 넘어서 절대지, 물자체에 대한 진입을 시도하는데, 이는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직관은 일차적으로 의식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순수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통해 사뭇 도전적인 출발을 시도한다.

"발생하고 있는 상태의 방향변화를 경향이라고 부른다면 모든 실재는 경향이다...우리의 지성은 그 자연적 성향을 따라 한편으로는 응고된 지각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된 개념을 통해 진행해 간다....그러나 우리는 고정개념들을 움직이는 실재로부터 사유를 통해 추출할 수 있으나 그 개념들의 고정성으로는 실재적인 것의 운동성을 어떻게 해서라도 재구성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따라서 철학 한다는 것은 사유작용의 습관적 방향을 역전시킨다는 것이다." 혹은 "개념형성의 기능은 통합이라는 작업을 진행해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실재적인 것에서 수많은 질적 차이점들을 사상해 버리고, 우리의 지각을 부분적으로 소멸시켜 버리며, 아울러 우주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시력을 약화 시킨다. 개개의 철학은 좋건 싫건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철학에 대립되는 여러 철학들이 생겨나게 된다.

물론 베르그송의 지적은 그 자체로는 정당하다.

우리의 오성은 현존재에게 드러난 감각적 직접성, 즉자적 동일성을 통해 수많은 질적 차이점들을 사상해 버리거나, 우리에 의해 드러난 것 이외의 다양한 가능성을 봉쇄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 의해 드러난 것 이외의 다양한 가능성이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창조되어지는 것인가? 움직이는 실재란 과연 인식주체를 배제하고도 움직이는 실재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오성의 규정작용이 갖는 한계를 인정한다 해도, 인간의 전략적 개입과 실천에 의해 발생하는 더 큰 우연성, 더 큰 자유도의 증가, 더 많은 가능성의 창조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베르그송은 이러한 단순한 질문조차 던지지 않고 과감하게 다음 질문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돌진은 결과적으로 무모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의 지속을 향한 돌진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한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인식은 개념적 작용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우회 혹은 초월적 방법을 제안한다. "단순한 분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직관에 의하여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실재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 그것은 시간속에 흐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인격이요, 지속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이다."

그는 의식에 대한 직관을 통해 인간의 의식상태를 지속(dure'e)으로 규정한다. 지속이란 리듬의 소악절과 같이 계속이자 융합으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 있어서의 지속은 정지가 아니라 변화이며, "우리 자신은 변화를 통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므로 지속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베르그송은 지속개념을 통해 객관적 인과론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를 구출해내고자 하며(이런 의미에서 그는 창조적 관념론자, 생성론적 관념론자이다) 자유를 "구체적 자아와 자아의 행위동작과의 관계"로서 규정한 뒤, 이러한 관계는 개념적으로 파악하거나 언어적으로는 정의 불가능 하다고 주장한다. 즉 합리적 객관성, 인과성을 부정하는 우연과 우발성으로 자유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지속이라는 개념을 확장함으로서 의식 혹은 의지의 창조적 생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기억과 물질]에서 그가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의식과 뇌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물론적 견해를 반박하고자 하는데,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의식의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국소적 일부가 제거된다해도 그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결론을 통해 의식과 뇌의 직접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뇌를 '현실생활에로의 주의'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행동을 준비하고 운동을 전달하는 매개체일 뿐이고, 진정한 의식의 본질은 기억과 연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체는 지금 여기에 있으나 기억은 과거와 미래의 현재적 상호침투인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신체를 넘어서며 신체를 넘어선 곳에서 지속의 본래적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자유가 인간의 현존재적 규정성과는 무관하게, 그것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며, 시간을 공간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르그송은 시간과 공간을 엄격하게 분리한다.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공간이란 동질적인 것이고, 지속은 이질적 다양성이다. "공간이란 동시적이고 동일한 여러감각을 서로에게 구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따라서 그것은 질적인 구별의 원칙과는 다른 어떤 구별의 원칙이며 또한 결과적으로 질이 없는 하나의 현실이 된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파악하는 정신의 활동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넓이의 동질(homoge'ne'ne'ite)이란 형태 하에서 질적인 이질(he'te'roge'ne'ite' qualitative)로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동질을 이질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인식은 이러한 불가능한 시도를 행하고 있으며, 이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강요)된다. 따라서 "동질적 환경이라는 형태로 생각하고 있는 시간이, 순수의식의 영역에 공간의 관념이 투입함으로서 생긴 절충적 개념이 된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공간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과 달리 "동일하면서도 동시에 변하는 존재, 아무런 공간개념도 갖지 않는 존재가 지속에서 얻을 수 있는 표상은......구분이 없는 계속, 각각의 요소들이 전체를 표상하면서, 오직 추상할 수 있는 사고에서만 서로 구별되는 여러요소들의 상호침투, 연대성, 내적조직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적 구분은 상식적인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 혼란과 당혹감을 안겨준다. 구분이 없는 계속, 공간개념 없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이론적 인식, 개념적 파악은 어떻게 가능한가? 개념이나 인식이란 주어진 사물에 대한 규정이며, 헤겔에 따른다면 주어진 존재의 부정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베르그송은 자신의 주장이 갖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속을 그것의 본원적 순수로 표현하려는데 있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곤란을 느낀다. 이 사실은 아마도 우리만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렇다. 시간은 공간안에서만 존재한다. 혹은 존재는 시공간 내에서 존립하고, 그것을 통해 시공간이 한계지워진다. 베르그송이 아무리 지속과 시간을 구분한다 해도 지속이 생성과 변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공간을 점유하고, 공간은 관계에 의해 형성된 공속적 장(場)이다. 따라서 어찌한다해도 지속은 공간과 공속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관계지워지지 않은 지속이란 뉴튼적 절대시간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무(無)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베르그송은 이 곤란을 외면하기로 결심한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고, 순수주관의 영역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아니다. 베르그송은 우리의 순수자아와 대상적 실천으로서의 타자적 관계형성의 주체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는 성공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순수자아란 파르메니데스적인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영원한 존재이거나, 신비한 영혼의 본질이 영원으로 흐르는 어떤 무엇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것들은 도저히 우리에 의해 인식불가능한 영역으로 격리되어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베르그송의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구분법이다. "우리의 자아 가운데에는 상호외재성이 없는 계속이 존재하는 한편, 자아의 외부에는 계속이 없는 상호외재성이 존재한다." 운동이 생성(devenir)과 변화라고 한다면, 운동(행위)은 끊임없는 질의 지속적 변화이자 재생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은 운동의 질적 다양성이 서로 상호침투하면서 진행되는 일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고, 운동의 시간적 파악인 것이다. 더구나 운동은 일정한 관계의 한계를 가지며 그 한계가 바로 공간과 시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지속과 시간을 대립시키려는 베르그송의 시도는 시공간 개념을 운동의 사전적 개념, 선험적 인식형식으로 바라본 칸트적 오류(칸트와는 달리 단지 인식론적 제약만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에 기반해 있거나, 비합리주의적 신앙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우리의 비판에 대한 베르그송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운동은 넓이라기 보다는 지속이고, 양이 아니라 질이기 때문에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질적 다양성으로서의 운동을 하나의 연장으로 파악함으로써 연장과 연장의 관계맺음을 통해 운동을 매개로 지속을 공간적 지평으로 투영한다고 베르그송은 주장한다. 결국 "공간만이 동질적이라는 것, 공간에 위치한 물체들은 분명히 구별되는 다양성을 형성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분명한 다양성은 그 공간에서의 전개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그의 주장이다. 일단 베르그송의 논리전개가 갖는 난해함을 넘어선다면, 공간은 존재의 결정이나 규정을 통한 동질화의 논리를 요구한다는 점, 동질적 존재규정은 공간 내에서의 연장적 점유를 통해 그 점유의 정도와 크기를 통해 측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확장한다면 베르그송의 지속이란 영원한 다양한 본질의 차이적 흐름으로, 공간은 단절적인 제한과 규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공간의 지평에서 헤아려진 시간이란 존재의 생성이라는 흐름을 일면적으로 고정시킨 죽은 인식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유와 운동]을 통해서 제시한 결론 그것이다. 베르그송은 여기에서 인간의식의 가능성은 공간을 통해서만 주어지고, 그것으로 인해 질적 다양성을 양적 다양성으로 전환, 구별과 계산과 형태규정이 가능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지속-시간개념은 인간의 주체적 실천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따라서 그것은 언어로 표현 불가능하다)이며 시간의 실재성은 공간화된 시간, 관계형성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무규정적인 지속의 흐름이라는 의미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선험 실재론적, 절대적 시간개념). 물론 지속을 헤아려진 시간 혹은 현존재적 시간으로서의 시간적인 것과 구분하여 시간성 혹은 시간 그 자체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구분된 지속(시간성)은 순수한 직관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의 집중성, 관계의 양상에 따라 질적으로 다양해 질 수 있으며, 그 관계의 질적 재생산이라는 점을 베르그송은 간과하고 있다.

물론 베르그송의 지적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다. 베르그송이 지적하듯이 "시간은 창조와 선택의 수송체이며,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에 비결정적인 것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시간이란 비결정성 그 자체"이다. 시간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창조되어진 관계양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정되어 있으면서도 결정되어 있지않은, 역사내적으로는 결정되어 있음에도 역사궁극적으로 보면 비결정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베르그송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사물을 분할 할 수 있으나 행위를 분할 할 수 없다는 것을 잊고서, 운동에다가 그것이 통과한 공간의 불할가능성까지 부여하기도 하고, 한편 그 행위 자체를 공간에 투영하고, 동체가 통과한 선을 따라서 그것을 고정시키는 것, 한마디로 행위를 고체화 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못된 습관'은 인간적 삶의 재생산을 위한 최소조건이라는 점을 베르그송은 의도적으로 간과한다. 더구나 베르그송이 지적하는 '못된 습관'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 시간을 점의 연속이 아니라 관계양식의 지속과 확대재생산으로 재정의, 재구성된다. 그것이 바로 인간적 본질의 역사성인 것이다.

베르그송이 "의식은 구별하려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시달린 나머지 현실에다 상징을 대치하거나 상징을 통해서만 현실을 지각한다."라고 말할 때, 그는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기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욕망은 라캉적 결핍도, 들뢰즈적 창출도 아니다. 물론 이 욕망을 들뢰즈처럼 도구적 이성을 통한 세계의 인간화, 인간적 지배형식의 전통과 결부시켜 배제되어야 할 것, 부정되어야 할 노예의 욕망이라고 비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으로서의 욕망은 욕망일 수 있는 것일까? 현존에 대한 부정이 없이 욕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긍정은 욕망이 아니다. 긍정은 회귀이며 현실에로의 침잠일 뿐이고, 따라서 욕망이 없다면 인간의 자유도 없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자유를 신비적 방식으로 재개념화 함으로서 이러한 곤란을 회피하고자 한다. 그는 "자유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마음 전체에서이며, 행위가 매어있는 동적 계열이(la se'rie dynamique) 근본적 자아와 동일화를 더욱 지향할수록 그 행위도 그만큼 더욱 자유로와 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유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합리성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순수하게 우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베르그송의 자유론은 결국 지속으로의 침잠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근본적 자아와의 동일화를 지향한다'는 말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지속으로의 침잠'이거나 근본적 자아라고 불리우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향수어린 회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이어지는 바로 뒷문장인 '자유는 순수하게 우발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고려한다면 베르그송의 의도는 전자에게로 돌려지게 된다.지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질적 차이들, 복수적 차이들의 흐름에로 내맡겨 그 이질적 흐름의 우연한 해후를 기다리든가, 아니면 그 흐름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이러한 시간-지속론은 존재론적 근거를 가진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베르그송의 직접적 언급은 지극히 간단하거나 산발적으로만 개진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존재론을 들뢰즈의 해석에 기대어 재정식화하고자 한다.

베르그송은 존재의 실체는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으며,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베르그송은 정통형이상학이 "경험의 밖에서 순수개념에만 근거하여 작용하므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연역해낼 수 있고, 또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런 개념"을 존재라고 불러왔으며, 이것이 바로 현대 철학의 독단론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러한 존재론이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내기 보다는 제한된 인식, 일면적 인식의 추상물로 존재를 대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관련하여 베르그송은 칸트 철학에 대한 평가로부터 존재를 생동적 지속 그 자체와 동일시하려 한다.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가져온 결과 중 가장 명백한 것은 피안의 세계에는 오직 투시,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으나 이러한 직관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점에 있다. 칸트가 이러한 직관의 불가능성에 대해 주장했던 것은 직관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실재 자체였기 때문인데, 그러한 실재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은 변화 자체에서부터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며,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영역을 벗어나 시간 너머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입장 차이가 곧 형이상학에서의 주요 대립지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적 지식이 갖고 있는 모순과 상대성을 절대성 혹은 완전성과 분리시키기 위해 시간에서 벗어날 필요도, 변화에서 해방될 필요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화와 지속을 그 본래적 운동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는 존재하지만 변화 밑에 변화하는 사물(실재 그 자체--인용자)이 있지는 않다. 변화란 담지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운동도 존재한다. 그러나 불활성적이고 불변적이면서 운동하는 대상이 있지는 않다. 운동은 움직이는 것(운동의 기체--인용자)을 함축하지 않는다. 절대란 완전과 동의어이다. 그러나 절대는 이성을 통한 재현이나 번역을 통해서는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절대는 완전히 본연의 것이라는 점에서 완전하며, 직관은 그런 점에서 완전한 본연의 것으로 직접 도약한다.'

위에서 간단하게 재구성한 베르그송의 주장은 대단한 직관의 성과이다.

우선, 실재 자체가 존재한다는, 따라서 그것이 직관에 의해 투시될 수 있다는 관념은 베르그송 혹은 니체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도그마일 뿐이다. 현실 자체가 이미 모순적이기 때문에 모순을 넘어선 완전과 절대란 시간의 밖에서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시간내적 존재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런점에서 볼 때 변화밑에 존재하는 실재 그 자체, 운동을 움직이는 운동의 기체를 찾으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현존재로서의 인간과는 무관한 절대적 존재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절대자의 존재는 칸트가 증명했듯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불가능성'이라는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베르그송처럼 직관으로서의 절대지로 도약하는 대신 불가능한 시도의 연속이었던 서구 형이상학이 왜 그토록 영원과 시간을, 존재와 현존재를 연결시키려 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철학이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혹은 세계에 대한 실천적 전유로서의 철학은 목적과 근거를 통일시킬 수 밖에 없고, 행위의 합리적 근거를 총체적으로 구성해야만 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근거를 찾는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고양시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과 시간, 존재와 현존재의 관계라는 문제는 철학의 근본문제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서구 형이상학에서의 도그마를 단순하게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현존재의 존재론적 이해를 새롭게 시도해야만 한다.

더구나 베르그송은 절대지로의 직관적 도약을 통해 지속이야말로 절대이며, 완전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절대와 완전이 실재한다는 관념을 암암리에 전제하는 것이고(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 혹은 생성만이 모든 것이라는 셀링류의 생각을 반복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관련하여 전자의 해석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들뢰즈가 이해하는 베르그송의 헤겔비판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대립물 속에서의 매개과정은 필연적으로 외부적 인과성에 의존한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일자로서의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대신하여 제시하는 존재의 실체개념은 "실질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즉 스스로를 분열시키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현존한다. 실질적 존재는 무한하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순수하고 초험적인 존재이다. 현실화된 존재는 미분화되고 질적으로 규정되고 제한된다는 점에서 실재적 존재이다." 이는 "생명이 그 안에 지니고 있는 폭발적인 힘"으로부터 생겨난 차이화의 결과인데, "차이는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의 이러한 본질적 연관에 있어서 하나의 차이화이다." 들뢰즈는 이를 "순수한 본질과 실재적 현존을 연결시키는 가운데 실재화되고, 실재화되기 위해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현존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적 관념의 영향이거나 라이프니츠적 단자론의 재판으로 보인다. 더욱이 순수본질과 실재적 현존간의 관계설정은 차라리 플라톤적 시원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영원한 실체와 이에 대한 현세적 실존의 종속성이라는 구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바라보는 철학의 과제는 "순수한 존재의 차이화의 과정을 통해 본성의 차이의 결들을 따라 구분하고 자르는 과정을 통해 발산하고 현실화된다. 이것이 바로 차이화가 질과 양의 존재론적 기준을 다루는 방식이다." 들뢰즈-베르그송은 시간을 통한 순수한 본질의 실재적 현존으로의 전개는 가능적인 것에서 실재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실질적인 것은 현실적일 수 없지만 실재적인 반면, 가능적인 것은 현실적일수는 있지만 결코 실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원인보다 결과가 더 많은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는 인과성의 근본원리에 따라 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는 존재 자체의 풍부함, 다수성, 발산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다면 현실의 다양과 풍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베르그송-들뢰즈적 존재이해는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적 오류와 마찬가지로 인식론적, 실천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질 들뢰즈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구분이 생겨난다. 지속은 자신의 부분이 본성의 모든 차이를 띄고 있거나 지니고 있는 경향이 있다. 공간은 정도의 차이를 띠고 있거나 지니고 있는 경향이 있다. 공간은 정도의 차이 이외의 것은 결코 제시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심지어는 "지속은 능산적 자연과 같고, 물질은 소산적 자연과 같다"라고 말함으로써 "단일하고, 보편적이며, 비인격적인, 단 하나의 시간"을 지속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스피노자에게 있어서의 능산적 자연이란 신 그 자체로서의 자기동일적 존재에 다름 아니며,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 단 하나의 시간이란 신(神)의 시간일 뿐이다. 더구나 신의 시간 역시 그 실현을 위해서는 한계지워지고, 규정된 양태를 취하며, 양태란 규정이고 제한임을 들뢰즈는 망각하고 있다.

다음으로, 베르그송-들뢰즈가 말하는 차이화의 과정으로서 생성, 혹은 지속은 어떻게 현존재의 독창적 배열, 혹은 정합성을 창조할 수 있는가? 혹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지속으로서의 현존재적 유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들뢰즈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실재적인 것은 자연적 분절들 혹은 본성의 차이들에 따라 잘리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동일한 이상적 혹은 실질적 점을 향해 수렴하는 길들을 따라 다시 교차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들뢰즈의 답변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관한 논의에서 그 단초를 보이는데, 베르그송은 말하기를 과거를 향한 포함적 운동속에서 팽창하고 확장하는 회상-기억과 특수화 과정으로서 미래를 향해 집중하는 수축-기억의 개념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기억이론에 기대어 지성과 사회성의 간극을 메우는 직관의 기원인 창조적 정서가 조직화의 기초이자 계선임을 밝히려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지점에 대해 결코 명확히 진술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역능의 존재론적 기반에서 존재의 윤리학적 창조라는 연관된 또 다른 주제로 옮아 갈 뿐이다. 들뢰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베르그송적인 질서의 복수주의가 갖는 취약함을 깨닫고 조직화의 복수주의를 주장 하는데, 조직화의 복수주의는 존재의 적극적 발산인 역능의 개념에 의해 전개된다. 그러나 그 결론은 "미지의 행복, 미지의 기쁨, 미지의 신"이라는 모호한 원리에 의해 조직화의 복수주의, 현존재의 유일성을 차이적으로 배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들뢰즈식의 애매모호한 답변은 스피노자에 의해서도, 니체에 의해서도 대답될 수 없었던 것으로, 우리는 그 이유를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이미 살펴 보았다.


Ⅳ. 헤겔의 존재-시간론


헤겔에게 있어서 존재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절대자의 양태의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절대자의 양태란 절대자 자신의 반성적 운동, 다시 말해서 절대자 자신의 규정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절대자 자신의 규정 작용이란 자신을 하나의 '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드는 것이다. 즉 그 자신의 현현이며 그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운동을 의미하는 명백한 외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로 향하고 있음'은 동시에 내면성 그 자체이며, 따라서 단순하게 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존재'라는 사실을 단정하는 것이다. "

헤겔은 여기에서 본질과 현상의 관계,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절대이념으로서의 본질은 영속적인 것, 살아있는 자기인식적 진리, 역동하는 생명의 근원, 자기반성의 총괄개념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헤겔에게서의 존재개념은 그 자체의 근거를 갖지 않는 자기충족적 존재인 라이프니츠나 스피노자적 존재-실체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헤겔은 시원으로서의 즉자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원은 순수하고 단순한 하나의 직접성이지 않으면 안되며, 단적으로 말해 직접성 그 자체이지 않으면 안된다. 시원이 그외의 다른 어떤 것과는 달리 아무런 규정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시원은 그 자신 속에 아무런 규정이나 내용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직접성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그것처럼 자기동일성, 자기충족성으로의 존재라는 해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적 직접성, 감각적 확실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헤겔의 시원적 즉자존재를 후자의 것으로 해석하며, 인식의 직접적 계기이자, 논리적 근거로 즉자존재를 위치지운다. 왜냐하면,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명시적으로 "학의 시원은 감각적 경험에서 비롯되지만, 감각적 경험의 대상은 단순한 직접성으로서의 순수존재, 즉 존재와 무의 모순"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존재와 무의 모순이야말로 "자기운동의 원리이며 모든 운동과 생동성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헤겔은 파르메니데스의 자기동일적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백한 반대입장을 표명한다. " '절대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이다.' 라는 이 단순한 언명과 규정적이고 완전한 지식의 유기적인 전체 또는 완전한 발전을 추구하고 요구하는 지식의 유기적인 전체를 대립시키는 것---이것은 매우 천박한 지식의 공허함이다. "

헤겔은 파르메니데스의 자기동일적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즉자존재의 외부에서 작용하는 타자적 존재를 도입한다. 만약 이러한 타자의 도입이 없다면 모순, 생성이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자존재에 모순이나 생성, 운동이 포함된다면 즉자존재는 이미 규정된 것이고, 제한된 것이어서 외부적 도입, 즉자존재의 타자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와 무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이 부정성은 어디에 근거해 있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헤겔의 대답은 [엔찌클로페디]에서와 [정신현상학]에서 각각 다르게 대답된다. [엔찌클로페디]에서 헤겔은 자연적 존재 그 자체에 이미 내재적 모순, 존재와 무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정신현상학]에서는 정신의 활동에 의해 비로소 존제와 무의 모순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필자는 위에서와 같은 논거를 이유로 [엔찌클로페디]에서의 존재와 무의 모순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헤겔 역시,

"참된 실재는 타자 속에서, 그리고 타자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반성하는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는 이러한 과정이며, 본래적이고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