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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존재론적 맑스주의 정립을 위하여 1

존재론적 맑스주의 정립을 위하여

김 기환 (1996.06)



1. 철학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이미 이 전의 책을 통해서 철학이란 "인간이라는 현존재의 존재근거와 존재양태, 그리고 존재의 목적에 대한 질문"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핵심적 질문은 인간의 유적본질에 대한 규명에로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 횡행하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철학에 대한 조롱이 애초부터 잘못 설정된 문제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철학은 여전히 모든 학문의 내적 통일과 학문의 근거를 제시해야만 하며,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행의 아포리]에서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철학은 절대적 시원으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 매몰된 서구의 정통형이상학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역설했던 실천적 변혁으로서의 철학, 바로 그것이었다. 필자가 이해하는, 재구성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적 실천을 서구형이상학에서의 존재론적 문제설정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 그 자체'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절대적 시원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발전하는 역동적 총체로서의 존재를 주장한 것이고, 하이데거의 말대로 서구 형이상학이 인간학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의 철학적 인간학은 서구 형이상학의 고립적 주체가 아니라 연대적 주체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 마르크스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적 존재론이 갖고 있는 자기동일적 존재의 예정조화론이 아니라 생동적 실천을 통한 현전과 부재로서의 '창조되는 역사'이며, 서구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공략의 대상으로 삼는 절대적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관계와 양상으로서의 진리를 정립해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확인되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말했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언급은 단지 당위적 요청의 차원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위와 같은 언급은 대단히 미묘하고도 중요한 철학적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단적으로 말해 마르크스 철학의 출발점이자 그 결론이며, 존재론적 맑스주의의 재구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인 자주성, 창조성, 연대성을 관통하며 그것들 각각을 연관짓는 중심적 매개이다.

마르크스는 이제 세계의 본질을 파악했으므로 세계를 변혁하기만 한다면 철학의 과제는 종료된다는 의미에서, 혹은 인간적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포이에르바하가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고 감성적 직관에 호소함으로서 헤겔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실천적인 인간의 감성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를 비판할 때, 마르크스는 철학의 본질을 단순명료하게 정식화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활동적 측면, 즉 인간의 주체적이고 전략적인 실천의 활동적 측면이 관념론과 유물론에 의해 각각 일면적, 추상적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유적본질에 기초한 총체적, 혁명적, 비판적, 실천적 활동의 철학적 의미를 파악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실천적 활동이야말로 서구 형이상학이 드러냈던 온갖 곤란과 도그마를, 혹은 이론을 신비주의로 유도하는 모든 신비를 넘어설 수 있는 핵심적 대안 바로 그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단적으로, 마르크스는 서구 형이상학에서 거론해 왔던 '존재'가 인간의 실천에 다름 아니며, 인간실천의 역사적 형성 그 자체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모든 철학은, 모든 역사이론은 그것이 언명된 순간 본래적으로 실천적이며, 목적론적이다. 이는 서구 형이상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철되는 원리이며, 심지어 철학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각각의 논자들이 주장하는 목적이 단일성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든 다양성으로 주어지는 것이든, 혹은 미리 주어진 고정불변의 선험적 전제이든 형성되어질 불확정적인 것이든, 혹은 직접적으로 언표되는 것이든 은유적으로만 드러나는 것이든, 혹은 본래적인 것으로의 회귀이든 본래적인 것의 해체와 부단한 재구성으로서의 것이든, 그것이 개입과 실천을 통한 현재 상황에 대한 맞섬이고, 그것에 대한 변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서구형이상학이나 맑스주의나 모두 공유하는 철학의 근본적 존재이유이고, 심지어는 철학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의식적 활동 단순한 유희조차 이러한 점에 종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철학이 갖고 있는 진정한 혁명적 성격은 무엇이며, 무엇이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서구 형이상학을 구별짓는 것인가? 혹은 마르크스가 말한 실천으로서의 철학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이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현재 철학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혼란과 독단, 그리고 무분별한 조롱과 해체를 넘어설 수 있는 단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멀고도 험한 도정을 거쳐서야만 비로소 찾아질 수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먼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어찌보면 가장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대답을 찾는 여정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철학의 가장 단순한 물음들이 진보한 듯한 현대의 온갖 거들먹거림이나 잡다스러운 문제들로 시비를 걸려는 불평욕을 부리지 않고 더 근본적으로 제기될수록 더욱더 직접적인 현실적 철학함과의 직접적 의사소통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철학적 질문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그러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존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질문하는 주체의 권력에의 의지의 표현이며, 권력에의 의지가 마련하는 척도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니체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질문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점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으며, 질문이 올바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이미 답변되어야 할 내용의 절반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철학함에 있어서 이 단순하고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의외로 무지했으며, 문제설정 자체를 잘못 이해함에 따라 존재론을 둘러싼 온갖 곤란과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고, 존재의 이름으로 생에 대한 은폐된 지배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서구 형이상학에서의 존재론적 문제설정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일별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서구 형이상학에서 철학의 원리적 근거인 존재론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모든 존재의 기본적 근거(탈레스)', '그 자체 규정되어 있지 않은 무한한 것으로서 모든 생성의 저장고(아낙시만드로스)', '내재적인 생성의 법칙(헤라클레이토스)', '변화하는 세계의 목적이자 궁극적인 구성요소(소크라테스)', '모든 가치의 영원한 원리(플라톤)', '보편적 실체이자 운동의 근원(아리스토텔레스)', '참된 존재(토마스 아퀴나스)',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데카르트)', '선험적 인식근거이자 실천적 당위의 근거(칸트)', '생성의 원리로서의 절대적 앎(헤겔)' '권력에의 의지(니체)', '진리의 본질이자 존재일반의 의미(하이데거)' .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존재론적 문제설정, 존재이해가 철학의 원리적 근거로 되어야 하는가? 철학의 완성자라고 스스로를 자칭했던 헤겔의 경우는 [정신현상학]을 통해 철학이란, '절대지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지, 존재의 총체성을 완전하고 적합하게 드러내게 할 수 있는 인간은 무엇인지, 절대적 지의 성립과 현현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문제설정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거대한 종합적 체계를 제출함으로써 철학의 완성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체계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현대의 철학자들, 혹은 철학의 종말을 앞당기려는 몇몇 논자들은 이러한 시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데리다의 말을 각각 들어 보기로 하자. 니체는 헤겔철학이 서구 형이상학에서 기독교적 이념의 지배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철학에서 말해온 진리나 절대자는 인간의 가치정립, 권력에의 의지의 표현일 뿐이고,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가 근본적 원리임을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모든 존재자를 존재케하는 최고의 원리, 즉 가치정립 그 자체이며, 가치정립은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치를 정립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니체는 가치정립을 권력에의 의지로 해석하면서, 권력에의 의지야말로 모든 철학과 변화의 절대적 척도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니체의 시도야말로 플라톤 이래 서구 형이상학의 완결판일 뿐으로, [형이상학 입문]을 통해 플라톤에 기원하는 서구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본질에 대한 숙고와 진리의 본질에 대한 결단을 수행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해석과 진리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파악을 통해 하나의 시대에 그의 본질형태의 근거를 부여함으로써 그 시대를 근거짓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러한 철학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근대의 근본과정은 세계를 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상이라는 말은 이제 표상하면서 산출하는 행위의 총체적 상을 뜻한다. 이 총체적 상 속에서 인간은 모든 존재자에게 척도를 제공하고 원칙을 이끌어가는 그러한 존재자일 수 있는 입장을 마련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 입장은 세계관으로 자신을 확실히 분류하고 언표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자신의 결정적 전개에 있어서 존재자와의 근대적인 관계는 세계관들의 대결로 변하는데, 이 대결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최종적으로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근본입장들과 관련된 그런 대결이다. 이러한 세계관들에 대한 투쟁을 위하여, 그리고 이 투쟁의 의미에 걸맞게, 인간은 모든 사물을 계산하고, 계획하고, 사육하기 위해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근본원인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목표로 존재자 전체를 설명하고 평가하는 인간에 대한 전술한 철학적 의미......인간의 존재자 전체에 대한 근본태도를 세계관으로 규정하는"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니체를 근대 형이상학의 완결판이라고 보았던 이유이고, 소위 하이데거적 '전회'의 핵심적 이유이고,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하이데거를 자신의 사상적 기원으로 삼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인간학적 존재론이 아니라 존재적 존재론(하이데거는 이를 기초 존재론이라 부른다)을 주장하는 것이며, 존재자로부터 분리되어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존재에로의 도약을 통해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경우는 형이상학은 이항대립적 체계를 본질로 삼는다고 이해한다. 이는 형이상학의 내면이 형이하학적인 모든 것(감성적, 외면적, 신체, 물질, 시간적인 것, 개별성과 특수성, 변화하는 것, 우연한 것 등등)과의 대립항으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은 존재라는 것의 존재론적 의미를 그것이 시각앞에 현재적으로 출석하거나 형상할 수 있는 '표상'의 가능성을 맹목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 전체에 대한 단일한 규정과 본질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이며, 존재의 운동에 대한 인식가능성과 인식의 방법론, 존재의 운동이 형성, 발생, 전개해 나가는 전체적 체계로서의 논리학이며, 존재가 모든 것을 관장하고 예비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기존의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전면적인(sic!) 문제제기를 행하면서도 그 자신은 정작 차연(差延)이라는 개념으로 모순을 대체할 뿐, 대안의 문제설정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데리다의 주장은 훗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헤겔을 거쳐 하이데거에 이르는 '기나긴 부정과 포섭의 지적행로'가 가져온 결과인데, 데리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현존의 형이상학에서 차연의 놀이로 철학을 전환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인간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자아학으로서의 형이상학과 구분하여, 인간학 그 자체에 대한 좀더 철저한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차연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철학은 '반근대적 인간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상, 개략적으로 살펴본 철학에 대한 몇몇의 문제설정은 철학의 존재 이유와 의미, 그에 따른 철학적 답변의 오류와 한계를 논하고 있으며 새로운 철학적 문제설정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들이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논의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곧 결론으로서의 철학체계 그 자체로 이어진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판단하며, 이하에서는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더 자세하게 검토함으로써 그에 따른 존재론의 철학사적 전환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추적하도록 하겠다. 이는 하이데거야말로 니체를 넘어 서구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시도했으면서도, 그 자신 파르메니데스적 존재론으로의 회귀를 통해 "은폐된 존재신학"을 다시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시성이 데리다의 "차연의 놀이"라는 '은폐된 인간학'이 가능할 수 있었던 철학적 지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일련의 논의전개는 이어지는 2장, 존재와 시간, 3장, 존재와 인간이라는 글을 통해 필자가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존재론적 맑스주의의 정식화를 위한 철학적 논거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맑스주의의 개념을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출발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1) 철학과 세계관


하이데거는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셰계관이 그저 자연사물들간의 연관에 대한 파악만으로가 아니라, 동시에 인간현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해석, 따라서 역사에 대한 해석으로도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관은 그 자체안에 언제나 인생관을 포하하고 있다. 세계관은 세계와 인간 현존재에 대한 전체적인 숙고에서 자라나온다." 따라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개개의 현존재와 더불어 주어져 있는 어떤 범위를 지닌 세계에 대한 파악들과 더불어 인간 현존재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생겨나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말했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네 번째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집약되면서 세계의 기원과 목적, 미래를 이론적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 갖는 근본문제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현존재가 그러하듯이 현사실적으로 역사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면 존재자 역시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 대해 주목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을 일면 부정하면서, 일면 긍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이데거는 현실적인 것에 대한 모든 경험에 앞서 현실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전적인 서구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적 문제제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경험에 앞서 현실성, 혹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야말로 철학의 유일한 주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철학은 존재에 관한 학문, 혹은 존재론이라고 규정하면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적인 것이라고 한계지으며, 철학은 세계관이 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하이데거의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반대는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 근거지워지는 존재론적 철학이 보다 근원적이라는, 따라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은 존재론적 철학에 종속될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철학은 존재적 철학인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그 하나의 해석이다. 두 번째 해석은 존재적 철학으로서의 세계관과 존재론적 철학을 절대적으로 구별한 뒤, 철학의 유일한 주제는 존재이며, 세계관이어서는 안된다는 해석이다. 만약 두 번재 해석을 채택한다면 하이데거는 현존재와는 무관한 존재 그 자체를 철학적 문제설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며, 당장 존재 그 자체란 무엇인가라는 곤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두 번째 입장에 근거한 전회를 시도하며, 존재론적 진리, 혹은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존재의 열어밝힘 앞에 서는 것, 혹은 진리의 빛을 모으는 것이라는 은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존재론적 철학을 완성하려 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해 접근하는 것은 대단히 이중적이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혼란과 애매모호함이 데리다의 '은폐된 형이상학으로서의 하이데거주의'라는 비판을 가능케 한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이 인간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구성하고 있고, 또한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에 존재이해가 속해 있다면 존재 이해 역시 시간성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유에서 존재를 시간에서부터 해석한다. 이것이 소위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시성의 근본 문제틀'이다. 하이데거의 애매모호함과 혼란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엄격히 분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시간성으로부터 존재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간성과 시간은 다른 것이며, 현존재와 현존재의 의미 역시 다른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말을 인정한다해도 시간 혹은 현존재와 구분되는 시간성이나 현존재의 의미는 존재 그 자체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적 이해방식은 '존재에 대한 이해는 존재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공허한 동어반복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이데거가 시간, 시간적인 것, 시간성 혹은 존재, 현존재의 의미, 현존재 등으로 매개개념을 설치한다해도 존재에 대한 이해는 그 자체로 이루어지지 않고 현존재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세계관의 철학과 존재론적 철학은 그토록 철저하게 분리될 수 있는가, 존재자에서 존재로의 도약은 타당한가라는 질문 이전에 도대체 그것이 가능한 것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단지 진리 가운데 실존하는 현존재를 통해 드러내 밝혀져 있음으로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존재는 오직 진리가, 다시말해 현존재가 실존할때에만 존재한다"는 명제가 의미하는 것은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현존재를 존재자 전체에 대해 특권화 시킴으로써' 현존재를 통해 밝혀져 드러나 있는 존재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현존재에 의한 구성적 존재로 전화시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적 특징이자 모든 존재자와 현존재를 구분하는 결정적 계기인 "모든 존재자를 규정하고 모으는 절대적 무조건,... 사유이고 사유하는 것,....근원적으로 하나이게 하는 통일"로서의 정신에 대해 "하나의 사유가 본원적이면 본원적일수록 그 사유의 생각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의 사유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선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존재론에 흐르고 있는 파르메니데스적 존재 사유의 동일성론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다시말해 하에데거는 전자의 입장인 현존재로부터 존재를 구성하는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후자처럼 존재로부터 현존재를 구성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환원과 현상학적 구성, 환원적 구성을 위한 해체를 통해 현상학적 존재론과 철학의 개념을 새롭게 재정의하는데 있어 명백한 이중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며, 이는 다시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과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하이데거가 설정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세계관으로서의 철학과 구분한 존재역운으로서의 철학은 '완전한 침묵'이거나 언어를 통해서 인간이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회상과 기억, 혹은 경험을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는 언어와 형이상학 이전의 그 무엇일 뿐이다. 존재로부터 현존재에로의 이행과 현존재에서 존재로의 접근이 갖고 있는 존재론적 차이를 밝혀놓은 뒤, 하이데거는 이 양자의 긴장과 모순을 단번에 해결하려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시도도 결국 실패하거나 침묵하는 길을 선택할 뿐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하이데거가 형이상학 극복 혹은 해체로 이름지은 이러한 시도는 형이상학의 극복도, 해체적 재구성도 아닌 포기 그 자체 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세계관으로부터, 혹은 현존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어떠한 철학도 궁극에 있어서는 침묵을 선택하거나 설명 불가능이라는 논리적 난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2. 존재역운으로서의 철학


하이데거는 존재역운으로서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현존재로부터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는다. 하이데거에 따른다면 지각의 지향성안에는 지향함과 지향된 것이 속하며, 지향된 것에서 지향되고 있는 존재양식에 대한 이해 역시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존재자를 지각함에 있어서 지향함과 지향된 것 혹은 지향되고 있는 존재양식이 문제로 제기되고, 이것이 곧 존재론적 차이로서의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칸트로부터 근세존재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결론은 이해함이란 실존의 근원적 규정성이며, 이해함을 통해 존재가능, 즉 "무엇에 대한 자유로움 안에 존재하고 있는 셈", 혹은 현존재는 가능성 자체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함이란 현존재의 가능한 그 모든 특수한 행동관계들에 대한 가능조건이며, 그런 한에 있어서 "자기자신을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이라는 존재속에서 이해함이 이해함에 대한 근원적 실존론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계속하여, 이해함이란 실존이 현존재의 생기(Geshegen)로서 자신의 역사속에 자신을 시간화하고, 타인들과의 특정한 가능적인 더불어 있음과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로의 특정한 가능적 향해 있음이 기획투사되어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기획투사로서의 이해는 시간을 시간화하는 탈자적, 초월적 지평을 열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한에 있어서 시간성은 존재이해의 가능조건이자 그로써 존재를 시간에로 기획투사함의 가능조건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기이한 도약을 시도하는데, 하이데거는 "기획투사 속에서 존재가 대상적으로 파악되어 있거나 대상적으로 파악된 것으로서 해석되고 규정되어, 말하자면 개념파악되어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기획투사에 대한 그의 독특한 개념규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기획투사란 "현존재가 [무엇에로]기획투사하는 것이자 존재가 현존재에게 기획투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존재와 존재자는 기획투사로서 대상화 되기 이전에, 대상화 되기 위해 어떤식으로든 밝혀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이한 전회는 플라톤의 '진리의 빛'이라는 은유와 밀접하게 맞닿아 해명되고 있는데, "이해함 자신은 그 자신 거기에로 기획투사하고 있는 그것을 밝혀져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확신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기이한 전회는 존재에 대한 그의 규정을 통해 어느정도 해명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개념을 "존재란 고유한 양식을 지닌 지향적 행동관계, 말하자면 현재화 함이다. 다시말해 존재란 하나의 고유한 도식, 즉 현재시를 지닌 시간성의 단일성속에 있는 탈자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존재론적 차이를 발생케하는 현존재의 시간성 이전에 주어지는 존재, 현존재의 시간성이 마련하는 탈자적, 초월적 지평을 가능케하는 그것, 즉 시간이전의 선험적 존재를 현존재와 구분되는 존재 그 자체로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이때 말해지고 있는 존재이해는 현존재로부터 존재에로의 접근에서 나타나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존재규정은 [형이상학 입문]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네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있음은 변화됨과의 대립에 있어서 머무름(Blieben)이다. 있음은 가상과의 대립에 있어어 머물러 있는 모델/모범, 항상 똑같은 것이다. 있음은 생각과의 대립에 있어서 그 바닥에 놓여 있는 것, 존속하는 것이다. 있음은 당위와의 대립에 있어서 아직 실현하지 못한 아니면 벌써 실현된,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언제나 앞서 놓여 있는 것이다. 머무름, 언제나 같은 것, 단순하게 존속할뿐인 것,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모든 것은 그 근본에서 볼 때 모두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출석, 우시아라는 의미에서의 온(ՏՍ)" 즉, 이때의 존재규정은 현존재의 지향성에서 비롯되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하이데거 후기의 존재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후기에 나타나는 존재개념은 아예 언어적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풍요롭고 공허한 것, 일반적이면서 유일한 것, 무규정적인 것, 가장 믿을 수 있는 것, 가장 망각된 것, 가장 자주 말해지는 것, 가장 깊이 침묵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도래를 정당화하기 위해 현존재가 탈자적, 초월적 지평을 가진 시간성 속에서 실존한다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현존재의 탈자적, 초월적 시간성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근원을 존재자와의 왕래나 현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혹은 현존재보다 앞서는 미리 장악한 미래적 가능성, 혹은 의미연관이다. 이는 하이데거의 {인문주의 서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존재는 스스로를 인간에게 탈자적 기획투사에서 밝힌다. 그렇지만 이 기획투사가 존재를 마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외에도 기획투사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던져진 기획투사이다. 그리고 기획투사함에서 던지고 있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존재 자신이다. 존재 자신이 인간을 그의 본질인 현존재의 탈존(Ek-sistenze)으로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하이데거의 이상과 같은 언급을 고려한다 해도 현존재의 탈자적, 초월적 실존을 가능케하는 시간성 이전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간성 이전의 시간이란 개념이 모호할뿐만 아니라 도대체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조차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차라리 하이데거가 말한대로 고유한 양식을 가진 지향적 행동관계 그 자체를 존재로 부른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수도 있겠지만, '현재시를 지닌 시간의 단일성속에 있는 탈자태'를 시간성 이전의 선험으로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물론 지향적 행동관계를 가능케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 현존재의 본질을 통해 규명되어야 할 문제이지 인간이전의 선험적 존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는 특권적 지위에 올려 놓았으면서도(이는 인간의 고유한 탈자적, 초월적 실존본질을 승인한다는 말이며, 이것이 없다면 하이데거의 말대로 철학은 물론 일체의 학이 불가능해진다.) 현존재의 독특한 본질규정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왜 이런 시도를 행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시도의 문제의식은 [형이상학 입문]과 [세계상의 시대]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 두 저작에서 주요하게 논의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비록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세계상의 시대]에서 근대에 대한 그의 독특한 규정을 시도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본질에 대한 숙고와 진리에 대한 결단을 수행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해석과 하나의 특정한 파악을 통해 하나의 시대에 그의 본질형태의 근거를 부여함으로써 그 시대를 근거짓는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된 근대란 "존재자의 한 영역에 있어서 근본윤곽을 기투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지며 기투의 근거에 따라 개별화되고, 학문은 경영의 일부로 변질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근대학문의 특징은 "인간이 스스로를 종래의 속박(기독교적 속박)으로부터 자기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이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의 존재방식과 진리방식에서 근거지우는 그러한 존재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에 따른다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존재자란 "존재에 의해 요구되고 규정되기 때문에 존재에 속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와 고대 그리스 시대를 특징짓는 준거점이다. 근대의 인간은 "대상적 존재자와 맺어야 할 태도방식을 자기 힘으로 설정"하여 "인간능력의 영역을 존재자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척도와 이행의 공간으로 확보하는 인간존재의 양식"이다. 하지만 "인간은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존재는 현전성이고 진리는 비은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근대적 학문에 있어서는 가치표상이 존재자의 존재를 상실하도록 강제한다. "존재자가 표상의 대상으로 되는 곳에서 비로소 존재자는 일정한 방식에 있어서 존재를 상실한다. 사람들은 가치자체를 모든 행동과 활동의 목표로 만듦으로써 그러한 상실을 대체하였다.…… 상(象)이된 세계에서 가치는 표상하며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욕구 목표가 대상화 된 것이다" 이때의 가치란 "가치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의미에서의 있는 것의 있음에 대립되어 마주서 있는 것이며, 그 자체가 있음(존재/Sein)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치는 "모든 있는 것의 영역에 걸쳐서, 다시말해 단순히 존속하고 있을뿐인 모든 것에 대해서 결정적인 것이다. 역사라는 것 또한 다른 아무것도 아닌 가치들의 실현일 뿐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니체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한 시도]라는 주장이 가치개념의 기원을 이해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치지배로 철학을 윤색했다는 점에서 니체야말로 서구형이상학, 혹은 존재망각의 역사의 완성자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하이데거가 여기에서 비판하고 있는 서구형이상학에서의 존재-신론이란 "보편근거 혹은 최고근거에 입각하여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탐구하며 그의 근거를 캐들어가는 존재론일뿐만 아니라 최고근거로서 파악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에 입각하여 자연과 역사 전체를, 다시말해 존재자 영역 전체를 정초하려는 신론"이다. 결국 이러한 존재-신론은 "존재자가 존재자를 가장 잘 근거짓기 위해", 혹은 "존재자를 위하여" 존재가 표상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자 없이 존재를 사유하고자" 한다. 존재자 없이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근거지음의 인과관계없이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내어나름'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는 시점이다. '내어나름'이란 존재의 건너옴과 존재자의 도래 사이에는 이 둘이 서로 나뉘어지면서도 서로에게 향해가는 나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내어나름이 바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현존재의 시간성에서 나타나는 생기는 동일한 사태연관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하이데거는 이 양자의 차이에 주목해야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주목할 것이 아니라 양자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과관계에 주목한다면 필연적으로 이원론으로 빠져들어가게 되고, 차이를 차이로서 주목하지 않게 될 때, 혹은 언어로서 그것을 개념포착하려 할 때 원형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하나의 가상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존재는 정적의 소리를 통해서만 울려나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단적으로 "존재를 위한 언어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란 드러내면서 은폐하는 것, 혹은 명사적 실체가 아니라 동사적 변형이기 때문이다. 이제 형이상학은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존재자들 없이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자들과의 관계를 존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1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존재라는 의미에서나, 혹은 존재론적 차이에 의해 존재가 존재자들을 위한 있음으로 생각되는 경우를 막론하고 존재가 형이상학적 태도로는 사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존재에 대한 도약은 오직 회상과 은유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며, 직접 그것을 인식하려는 시도는 단념되어야 했던 것이다.


3. 니체와 하이데거


과연 하이데거의 근대적 학문, 혹은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에 대한 대안적 시도로 제시된 존재역운의 철학은 어떻게 근대를 넘어섰는가? 단적으로 말해,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묻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자에만 머물고, 존재 자체에로 향하지 않는다.....형이상학은 형이상학으로서 그 자체의 본질에 따라 존재의 경험에서 제외되어 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이미 존재자로부터 지시된 것 안에 있어서만 항상 존재자를 표상하기 때문이다"라는 문제제기는 과연 정당하고, 성립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져져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형이상학의 극복은 단지 단념되어야 할 뿐이고,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단지 언어의 침묵이거나 언어를 통한 미끄러짐의 틈으로만 스며나오는 존재의 언어를 모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데리다에 의해서 좀더 정교해지고 대안적 정립에로 나아가게 되지만 그것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여기에서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하이데거의 문제제기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점만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하이데거는 현존재로부터 존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모두 존재망각으로 이어지거나 인간적 주체에 의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지배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극단적 예로 제시된 것이 바로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이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란 존재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존재자와 분리된 존재의 본질은 가상의 것, 기만일 뿐이다.

니체는 "존재의 성격을 생성에 각인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힘에의 의지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니체의 언급은 생성을 존재속에 각인함으로써만이 실제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존재가 생성을 지배하거나 종속시키는 것(기독교적 이념에 의한 인간지배)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니체는 "영원이란 정지해 있는 현재가 아니며 또한 무한속을 흐르는 현재의 연속도 아니다. 그 스스로 돌아오는 현재이다. 이것이 숨겨진 시간의 본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존재, 즉 힘에의 의지를 영구회귀로 사용하는 것, 가장 중요한 철학사상을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를 시간으로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함으로써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이 갖고 있는 근원을 하이데거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지적하고 있다.

즉, 하이데거가 '존재자로부터 존재를 규정하는 것, 현재에로의 영구회귀를 시간의 본질로 삼는 것'이 곧 현존재에 의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지배의 근원으로 바라보고 있음에 반해 니체는 그러하지 못했던 것이 곧 존재에 의한 현존재 지배의 근원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플라톤 이후 서구 형이상학이 존재자와 분리된 절대존재를 상정했으며, 절대존재가 존재자를 규정하는 관계로서 철학을 정립했음에도 그것의 본질이 바로 가치정립 자체였음을 은폐, 혹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치명적인 한계이자 결함이었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가치정립으로서의 존재원리가 무엇인지 이전에 그 원리를 묻고자 하는자는 누구인가를 먼저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존재원리란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현존재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존재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자는 그 질문의 목표와 의미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고찰로부터 "삶 자체는 우리에게 가치를 정립하도록 강요한다. 삶 자체란 우리가 가치를 정립할 때 우리에 의해 평가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의지란 무엇인가?

셸링이 말했듯이 "마지막 최고단계에서의 의지와 다른 존재란 거의 없다. 의지란 근원존재이다"라는 의미에서인가? 아니면 라이프니츠가 말한대로 '지각력(perception)과 욕망(appetitus), 표상과 의지의 근원적 통일'을 말하는 것인가?

니체는 '마음의 능력과 보편적 지향성으로서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뛰어넘어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의지'를 주장한다. 이러한 니체의 차별적 강조는 "자신을 넘어서 밖으로 뻗치는 이러한 의욕의 결정에는 의욕안에서 개방된 의욕과 결단속에서 포착된 것으로 확정된 그러한 것에 대한 지배력과 주도력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 의미에서의 의지가 갖는 나약함, 자연적 성향을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를 목적과 가치일뿐만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본질로 삼는다. 왜냐하면 일반적 의미에서의 목적과 가치란 자연적 성향일 뿐 존재 그 자체로부터 명령된 것, 혹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니체가 일반적 의미에서의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했다면 그것은 결코 그가 비판했던 서구 형이상학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의지란 원시적인 정서형식에서 비롯되지만 그 가장 발달된 형태를 지칭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존재로 추상화된 인간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의지규정을 통해 권력에의 의지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동인과 동일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동인이란 스스로 응집시키고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능력,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디나미스라고 부른 것이다. 힘이란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강력함과 같은 것이며, 힘의 작용, 즉 에네르게이아 이다. 따라서 니체에게 있어서 힘에의 의지란 무분별하고, 무정형적이며, 디오니소스적 혼동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충동과 무규정적 활력, 혹은 디오니소스적 정서는 원시적 정서형식의 단계에서나 승인될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의 본질로서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규정에 걸맞게 그의 권력의지가 지배와 질서로 고양될 것을, 온갖 정서와 활동이 권력에의 의지에 복무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는 그의 예술에 대한 주장을 통해 드러난다. "예술이란 힘에의 의지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예술이야말로 "우리의 본질 가운데 스스로를 최고조로 주장하고 다시 우리 자신을 넘어 상승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와 우리행위와 능력을 규정하는 것"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의 최고형태는 "유기체의 충만함에 대한 압도가 있다. 절제가 지배가 되고, 어떤 강한 영혼의 편안함은 스스로 움직이는 근거가 되며, 지나치게 활력있는 유기체에 대한 불쾌의 근거가 된다. 일반적인 사례 법칙은 존중되고 강조된다. 거꾸로 예외적인 것은 배제되며 미묘한 차이는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존재의 본질에로 향하는 '드물고 오래 지속되는 정지, 단순화, 생략, 집중을 표현하는 최고의 힘에 대한 감정이 집중되어 있는 고전적 양식' 이야말로 위대한 양식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니체는 "가치라는 시점은 생성내에서 상대적으로 지속하는 생의 복합적인 제형상의 유지와 고양을 위한 제조건을 형성하는 시점이다"라고 말한 뒤, "가치란 본질적으로 이러한 지배중심들의 증감을 위한 시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권력강화를 중심에 둔 가치척도를 제시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 하이데거가 우려했던 다음과 같은 결론은 필연적인 것이다. "가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량이다. 나는 인류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류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전형(Typus)이며 인류는 한갓 시험재료일 뿐이며 실패한 자들의 거대한 과잉상태이고 하나의 폐허이다"

결국 하이데거가 지적하고 있듯이 니체의 주장은 존재자 전체를 인간의 권력에의 의지의 수단과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까지도 권력에의 의지의 도구로 전화시키는 급진적 결론마저 스스럼없이 제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니체류의 시도를 '주체성의 형이상학'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인식된 것을 인간의 소유로 전환시키는 근대적 형이상학의 완성판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가 주장하고 있는 것이 "존재의 근본성격을 권력에의 의지로서, 진리는 권력에의 의지를 고양시키는데 있어서 필요한 수단이나 도구로, 혹은 그것의 척도로 파악될 뿐이고 그리하여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니체는 데카르트를 넘어선 것이 아니라 단지 변형했을 뿐이며, 존재는 존재자의 근본성격이 투영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에서 존재와 존재자간의 진정한 관계는 아직 질문조차 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과연 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 인간은 주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혹은 현존재로부터 존재를 파악하려는 시도, 존재자와 존재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구분하려는 시도는 모두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지배, 존재망각의 역사를 필연화 시키는가? 그런데 이러한 하이데거의 질문은 두가지 방식으로 나눠질 수 있다. 첫째 하이데거의 주장은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둘째, 하이데거의 주장이 부당하다면 왜 니체나 헤겔류의 존재자 전체에 대한 현존재의 지배가 가능할 수 있었는가? 하이데거적 방식외에 제 3의 대안은 없는가?

첫째에 대한 답변은 앞에서 살펴본대로 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망각의 역사에서 의미하는 존재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뒤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현존재 이전의 시간이란 순수한 무일 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현존재 일반의 관계양식에 의해서만 시간이 실존할 수 있으며, 관계양식의 계기적, 밀도적, 양상적 흐름이 곧 시간을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성 이전의 시간이란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현존재가 없다면 존재도 없으며" 현존재가 없다면 시간성도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간성이란 현존재에 고유한 것이지 존재자로 인해 나타나는게 아니다. 시간성은 현존재의 생기에 의해 실존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 입문]에서 지적한 존재, 즉 "있음은 변화됨과의 대립에 있어서 머무름(Blieben)이다. 있음은 가상과의 대립에 있어서 머물러 있는 모델/모범, 항상 똑같은 것이다. 있음은 생각과의 대립에 있어서 그 바닥에 놓여 있는 것, 존속하는 것이다. 있음은 당위와의 대립에 있어서 아직 실현하지 못한 아니면 벌써 실현된,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언제나 앞서 놓여 있는 것이다. 머무름, 언제나 같은 것, 단순하게 존속할뿐인 것,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모든 것은 그 근본에서 볼 때 모두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출석, 우시아라는 의미에서의 온(ՏՍ)"이라는 규정은 현존재의 탈자적, 초월적 지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위에서 말한 존재가 현존재 이전에 선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미래적 가능성 혹은 행위의 합목적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적 행위가 근거하는 욕망과 욕망실현의 조건에 대한 숙고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존재로부터 기원한다. 특히 머무름, 언제나 동일한 것, 앞에 놓여 있는것이라는 규정은 현존재의 기회투사적 본질을 지칭하는 것이자 현존재의 기획투사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유적본질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것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안정된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언제나 같은 것, 머물러 있는 것, 행위 이전에 앞서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이데거는 인간의 목적의식적 행위를 본질로 하는 현존재의 생기에 대해 주체와 객체간의 이분법을 통해 분석한다. 이는 존재가 현존재 이전에 선행할때에만 현존재의 생기, 기획투사, 혹은 탈자적 초월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존재의 탈자적 기획투사는 인간행위를 가능케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전략적 실천(피에르 부르디외)'에 의해 현실화되는 것이다. 전략적 실천은 곧 부정 혹은 지양을 의미하는 것이고, 현존을 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전략적 실천은 존재자 일반이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기획투사의 실체는 존재자의현상태와 인간이라는 행위 주체의 욕망의 내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지 외부적으로 도입되는 제 3의 실체가 아니다. 즉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현존재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도 하이데거는 존재를 인간적 실천과는 무관한 독립된 실체로 다룬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의 생기 자체가 주체-객체관계에 대한 전략적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내어나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해석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 왜 니체나 헤겔의 시도는 하이데거적 비판을 가능케 하는가?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대안은 없는가? 여기에서는 니체의 시도가 갖는 오류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 3의 대안은 마르크스주의의 존재론적 재구성을 통해, 헤겔의 경우는 존재-시간론을 통해 논의될 것이다.

핵심적으로 니체는 현존재의 전략적 실천을 통해 나타나는 현존재의 시간성, 혹은 존재론적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현존재의 시간성이란 니체적인 의미의 영원회귀가 아니다. 니체의 영원회귀적 시간성은 현재 그 자체밖에 존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 누적, 강도, 확장이 존재할 여지가 전혀 없다. 들뢰즈는 니체의 영겁회귀를 "역능적 힘들의 종합"이라고 억지로 의미부여하지만 이는 근거없는 추론에 불과할 뿐이다. 니체는 명백하게 "존재를 시간으로 사유하는 것"을 철학의 본질로 이해했고, 그렇게 할 때에만 권력에의 의지가 존재의 본질로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시간을 존재로 이해하고, 그것의 시간성을 영겁회귀로 파악했을 때 니체에게 순간 이외의 시간이나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의 탁월한 지적대로 '미래를 잘라내어 버리면 과거와 현재는 그 고유한 내용을 잃고 붕괴'하여 버린다. 니체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제거해 버린 것은 존재를 지배하는 생성의 흐름, 존재 이전의 시간이란 존재를 억합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가 파악하는 존재의 본질인 권력에의 의지란 정확히 개체적 개인, 개인의 시간속에서 고립적으로 파악될 뿐이며, 타자와의 관계는 주체에로 해소될 뿐이다. 결국 하나의 개별적 주체에 의해 모든 다른 현존재와 존재자 전체가 지배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는 앞에서의 필자 해석에 따른다면 인간주체의 역사성과 현전성간의 긴장, 혹은 모순관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니체에게는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 역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가 시간을 관계로서 이해하기 보다는 절대적 순간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마르크스의 철학적 문제설정


마르크스의 철학은 철학 그 자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비록 그의 철학박사 학위논문에서 자연변증법을 논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철학은 정치철학으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실제로 헤겔 법철학 비판으로부터 본겨화된 마르크스의 사상적 발전 과정 역시 변혁이론으로서의 철학이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에 본래적 의미의 철학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철학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두가지 방향으로 대답될 수 있다. 철학의 본래적 의미가 하이데거가 말한대로 존재자를 넘어선 존재에로의 도약을 의미할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세계를 구성적으로 환원하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에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학의 본래적 의미를 역사적 인간학, 실천적 인간학에 다름 아니며, 그것에 기초하여 세계에 대한 실천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일 것이다.

필자는 이하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성립과정을 그의 인간학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서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이 무엇인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하이데거-니체-데리다-들뢰즈의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서론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적어도 이하에서 필자가 다루고 있는 방식으로 철학적 문제설정에 다가서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의 논의전개는 마르크스의 철학적 발전과정을 통해 그의 기본입장만을 확인한 뒤, 그것에 기초한 존재론적 맑스주의 재구성의 기초적 원리들만을 제시하는것에 한정지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보다 진전되고 확장된 의미에서의 존재론적 맑스주의는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는 철학적 문제설정의 근본쟁점을 구성하는 존재-시간론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존재론의 핵심이 역사적인 실천적 행위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존재이해야말로 그동안 서구 형이상학을 가로막아왔던 존재신학-이성의 이름으로 인간을 지배할뿐만 아니라 도구적 세계이해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을 실증함으로써만 어느정도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마르크스의 철학적 편력을 간략하게 조망해 보도록 하자.

마르크스가 독불연보를 창간하면서 포이에르바하에게 셀링에 대한 비판을 의뢰했던 것은 당시의 셀링이 프랑스 사회에서 낭만주의자와 신비주의자에게는 '나는 철학과 신학의 결합이다'로, 프랑스 유물론자들에게는 '나는 육체와 사상의 결합이다'로, 회의론자에게는 '나는 독단론의 파괴자이다'라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이러한 마르크스의 시도는 불행하게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는 원고청탁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에 유행하고 있던 비판적 비판주의 혹은 청년헤겔학파의 의식개혁 운동이 갖고 있던 관념성과 헤겔을 넘어서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결국은 철학 그 자체에 매몰된 관념적 급진성에 다름 아님을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포이에르바하는 맑스의 원고청탁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원고청탁 내용중의 일부(혹은 전부)가 포이에르바하를 난처하게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르크스는 원고청탁 내용중에 "셸링은 당신을 예기한 회화화이며, 현실이 회화에 직면하자마자 후자는 공중분해 되어야 한다....따라서 당신은 셸링의 필연적이고 자연적인 반대자로 간주된다"고 썼다. 비록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청탁은 실패했지만,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게 요구했던 내용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마르크스 그 자신에 의해 스스로 표명되었다. "역사에 봉사하는 철학의 즉각적 과제는 일단 인간의 자기소외의 종교적 형태가 폭로되면, 세속적 형태의 자기소외를 폭로하는 것이고,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화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청년헤겔학파의, 관념적 급진성의 대표자인 유행하던 셸링주의를 현실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인간관계와 인간세계를 인간 그 자체에로 환원함으로써 인간해방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는 포이에르바하가 헤겔의 절대정신에 대해 그것이 "인간의 밖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 사유행위의 밖에 존재하는 사유의 본질"임 밝혀 내었으며, 마르크스는 "사유와 존재의 통일은 이 통일의 근거와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파악될때에만 의미를 갖고 진리가 된다. ...그 자체로 고립되고 폐쇄된 사유, 즉 감각이나 인간이 부재하고 인간의 밖에 있는 사유는 절대적인 주관이며 그것은 다른것에 대해서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바로 그것 때문에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대상이나 존재에로 나아가는 통로를 찾지 못한 것이다."라는 포이에르바하의 통렬한 지적이야말로 헤겔전도의 결정적 계기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포이에르바하는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양식이다. ....시간을 벗어난 감정, 시간을 벗어난 의지, 시간을 벗어난 사유등은 무이며 허깨비이다......사변철학은 시간에서 유리된 하나의 발전을 절대자의 형식과 속성으로 만들었다""라고 힘주어 강조할 때, 이미 서구형이상학이 고질적으로 안고 있었던 존재-신학의 테두리를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철학비판을, 포이에르바하가 "관념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에로의 이행은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실천적인 정치철학 비판에로 곧장 전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헤겔법철학 비판에서 행했던 헤겔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은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을 정치적 영역에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대한 진전이 일어 났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와 국가의 영역에서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내려감으로서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이 갖고 있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요약되고 있듯이 포이에르바하는 인간활동 자체가 대상적 활동임을, 인간적 본질이 개별적인 주체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주체로서임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포이에르바하의 결정적 한계였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한계가 인식론적 문제설정에 머물고 있는 기계론적 유물론임을 정확히 지적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이 지닌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지각 등을 단지 대상 또는 지각이라는 형태로 파악했을뿐, 감성적 인간활동이라든가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던데 있다. 그리하여 인식에 있어 활동적인 측면은 관념론에 의해 추상화되어 유물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관념론은 실재하는 지각행위 그 자체를 알 수 없다. 포이에르바하는 지각하는 행위와 사유대상간의 실질적 구별을 강행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행위 그 자체를 대상적인 행위로 파악하지 않았다"

인식론적 문제설정속에서의 유물론은 철학의 근본문제를 물질 우선이냐 의식우선이냐라는 문제에 집중시킨다. 이러한 접근은 인식의 확실성과 객관성에 주목한 것일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한 이론적 통일성의 최초근거를 확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구 형이상학에서 지속되었던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단순한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식론적 문제설정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인식영역과 도덕영역, 인식의 객관성과 절대성에 관한 애매모호한 해결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구 형이상학에서 차지해 온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영원과 현전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창조영역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세계의 원리적 근거와 일치할 수 있는지를 묻는 존재와 당위의 통일에 관한 문제였다. 따라서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존재론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직접적으로는 신학과 윤리학으로, 나아가 정치철학과 미학의 차원으로, 존재인식을 위한 방법론으로 전개되어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완성된 인식론적 문제설정 속에서의 유물론은 물질과 의식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인식의 객관성과 확실성을 물질에 부여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러한 기계적 유물론의 입장이 인간의 창조적 실천을 배제할뿐만 아니라인식과 실천이 불가분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역사적 관계양식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정당하게 비판한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적 견해를 따른다면 인간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자연사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을 개체로서만 파악했을뿐 역사적 유적 존재로서 파악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게 되었는데, "(포이에르바하는) 그의 주변의 감성적 세계가 왜 영원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주어진 늘 변함없는 물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상태의 산물인지 그 까닭을 모른다" 단적으로 말해,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세계의 원리란 인간이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신비한 물질의 내재적 법칙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이 그것을 찾아내기만 하면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경제철학 수고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로 드러난다.

"나의 자연주의 혹은 휴머니즘은 관념론도 아니고 유물론도 아니다. 차라리 그 양자의 통일적 진리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선언은 유물론자들에겐 대단한 충격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다음과 같은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비판적 접근으로부터 비롯된 필연적 결과일 따름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비판을 좀더 확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겔에게 있어서) 역사란 그것의 주체로서 전제되는 인간의 현실적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생성하는 행위, 인간의 생성사로서 파악된다"이는 헤겔의 철학체계가 존재에 대한 절대적이고 고정된 추상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 따라서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론이 갖고 있었던 영원불변하는 추상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라는 관념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부르쥬아적 물신성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헤겔에게 있어서는) 자기의식의 외화가 물성을 정립한다. 인간은 자기의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외화된 대상적 본질 혹은 물성(인간에 대해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과 대상은 진실로 인간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현실적 대상이며, 따라서 인간의 대상적 본질이다. 이제 현실적 인간 그 자체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따라서 자연도 주체가 되지 못하는 대신 오직 인간의 추상물 곧 자기의식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물성은 외화된 자기의식일 수밖에 없다)은 외화된 자기의식이며, 물성은 이러한 외화를 통해 정립된다. 대상적인 다라서 물질적인 자연적 존재, 고유한 자기능력을 갖추었거나 지니고 있는 살아있는 자연적 존재가 자기 존재의 현실적인 자연적 대상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존재의 자기외화가,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외면성이라는 형식아래 있는, 따라서 자신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강압적인 대상적 세계의 정립이기도 하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마르크스는 위에서의 헤겔비판을 통해 헤겔적 체계는 정신의 자기외화에 의해 모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물성(인간 및 자연)이 강압적으로 지배될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기의식에 의해 규정적으로 정립될 뿐이라는 점,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현실적 조건을 변혁하는 대신 자기의식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현실적 모순이 관념적으로만 지양될뿐 실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순을 은폐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적 체계는 정신 혹은 이성의 세계지배일뿐만 아니라 현실적 고통을 은폐하는 환상적 종교형태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의 핵심적 지점을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시한다.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물이다. 인간은 한편으로 자연물로서, 그리고 생명을 가진 자연물로서 자연력 곧 생명력을 갖추고 있으며, 활동적 자연물로서 존재한다. 이 힘들은 인간속에 소질들과 능력들로서,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연적이고 몸을 지니고 있고, 감각적이고, 대상적인 존재로서 동물과 식물처럼 감응하고 조건지워져 있고 제약된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본능의 대상들은 인간 바깥에 인간과 무관한 대상들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의 욕망의 대상들이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실증하고 확인하는데 필요불가결한 본질적인 대상들이다.....스스로 제3의 존재를 위한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는 어떠한 존재도 자신의 대상으로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한 존재는 대상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 그의 존재성은 결코 대상적 존재성이 아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자기의식에 대한 문제제기뿐만 아니라 그러한 철학체계가 가능했던 근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마르크스 위에서 헤겔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 단순히 자기의식 그 자체의 활동에 의해 대생적 세계가 정립되는 거꾸로 선 철학체계를 비판하는데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해도, 마르크스는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헤겔의 존재론, 더 나아가서는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도한 셈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서구 형이상학에서의 존재론은 자존적 실체, 따라서 비대상적 존재를 존재론의 핵심적 실체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인간과는 무관한, 자연에 대해서도 무관한 철학체계를 정립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철학체계는 그 본래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철학체계를 구축하게 된 근원으로 역할했던 것이다.

이어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주장했던 기계론적 유물론에 대해서도 비판하는데,

"그러나 인간은 자연물일뿐만 아니라 인간적 자연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존립을 자각하는 존재, 따라서 유적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를 통해서도 자신이 유적존재임을 입증하고 확인하여야 한다. 인간적 대상들은 직접적으로 제공되는 자연적인 대상들이 아니다 또한 직접적으로 존재하고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감각은 인간적 감성, 인간적 대상성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포이에르바하의 한계는 인간을 독립적이고 추상적인 개체로 파악함으로서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킨 것이었으며, 따라서 인간적 자유와 인간적 실천을 통한 창조행위로서의 역사는 포이에르바하가 유물론자이기를 포기할때에만 나타나는 것이다.엥겔스가 정당하게 지적했듯이, "포이에르바하의 철학 전체가 귀착하는 바는 1) 자연철학-자연의 전능에 대한 수동적인 숭배, 열광적인 복종 2) 인간학 더구나 생리학과 심리학 3) 인간일반의 도덕"을 설교하는 것으로 끝났을 뿐이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의 오류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가(포이에르바하) 분석한 추상적 개인은 사실은 일정한 사회형태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이 가르키는 것은 단순한 사적소유 상태의 반영일 뿐이며, 그것에 대한 감성적 반란 이상을 넘지 못한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과 대안은 [사적소유와 공산주의]에서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를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적 소유는 인간이 자기자신을 대상적으로 지각하고 동시에 자기 스스로 낯설고 비인간적인 대상으로 전화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삶의 표현이 인간의 삶의 외화라는 것을 단지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적소유의 실증적 지양,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과 삶 곧 대상적 인간 곧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하여 생산된 인간적 산물들의 감각적 획득은 단지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향유, 곧 점유와 소유라는 의미로서만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포이에르바하가 말했던 감각과 대상과 현실은 인간의 역사적 실천과는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대상들이었고,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조야한 공산주의라는 결론으로 이끌려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오감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감각들, 실천적 감각들, 한마디로 말해 인간적 감각 혹은 감각의 인간성은 그 대상의 현존재 곧 인간화된 자연을 통하여 비로소 생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단순성으로의 복귀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 공산주의를 자신의 목표로 설정하지 못하고 "가난하고 욕망이 없는 인간의 비자연적 단순성으로의 복귀, 보편적 매음관계, 인간적 본질의 전반적 결핍"을 의미하는 조약한 공산주의로 이끌린다고 간파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조야한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자신의 이념적 지향으로서 "인간의 감각들을 인간적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풍부한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본질에 상응하는 인간적 감각을 창조하기 위한 활동,..... 자연의 완전한 회복과 완성된 인간의 자연주의요 완성된 자연의 인간주의로서의 사회창조"를 공산주의적 목표로 제시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의 존재론은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독립된 개별적 물성으로서 파악된 것이 아니라 인간실천의 역동적 생산성 그 자체였으며, 인간실천의 역동적 생산성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혁신되는 공산주의적 과제와 목표로 인해 공산주의란 실현되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자기지양의 과정으로 위치지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존재와 당위의 긴장스러운 변증법을, 자존적 실체인 추상적 존재에서 직접적으로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인간의 창조적 실천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지양태로서, 인간적 본질의 역동적 실체로서 정립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한 창조적 활동이다. 철학은 세계변혁의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이유와 존재목적, 그리고 성취해야할 목적과 그 방법을 통찰하기 위한 원리적 근거를 찾는 작업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는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가능할 수 있는 원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문제설정은 단순한 인식론으로도, 인간실천과 무관한 추상적 존재를 설정함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으며, 세계의 시원적 기원을 찾는 것으로도, 인간과 무관한 세계의 내적 통일성을 확립하는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의 과제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방법과 근거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진영에서는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결정적으로 왜곡하거나 오해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오해는 아직도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주요하게 포이에르바하의 기계적 유물론과 연관된 '물질'에 대한 신비화와 주체와 객체의 실천연관을 인식론적으로만 제한하여 이해하려는 인식론적 경향이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느냐 여부의 문제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라는 마르크스의 언급은 '인식의 객관성이 실천에 의해 담보된다'는 조야한 의미가 아니다. 대상적 진리란 이미 대상적 관계를 전제로 하며, 사유의 대상은 대상적으로 구성된 관계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론적 파악이란 대상적 관계가 아니라 인식주체와 인식객체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추상적, 비대상적 실체 인식이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실체인식은 두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그 하나의 경우는 실체 자체가 인식내용을 미리 담지하고 있는 독립적, 자존적 실체일때 가능하고, 또 다른 가능성은 인식주체의 의식작용에 의해 객체가 재구성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흔히 유물론적 전통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로 거론되어온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이며,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은 위에서 말했던 세계인식의 잘못 설정된 두가지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의 근본문제는 위에서 보았듯이 애초부터 잘못 제기된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논쟁 구도속에서 파악된 인간의 창조적 실천의 가능성은 오히려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 진영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었다는 마르크스의 탁월한 지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유물론자 진영에서 말하는 물질이 비대상적 존재이고, 그러한 물질을 통해서는 어떠한 창조적 인간실천의 가능성도 부정된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물질의 개념에 대한 가장 세련된 정식은 레닌에 의해 표현되었다. "물질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만 접촉되고, 인간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면서 감각에 의해 복제되고 촬영되며 반영되는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레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이란 질료적 실체가 아니라 추상적 실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질료적 실체로서의 물질이란 가변적이고, 무한히 다양한 것이며, 특정한 성질을 가진것이기에 질료로서의 물질을 세계의 궁극적 본질, 원리적 근거로 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물질 그 자체를 철학적 개념으로 추상화 한 뒤, 존재하는 모든 실재를 물질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레닌이 말하는 물질은 보편적 전체의 각인을 내재하고 있으며, 영원성, 불멸성, 창조불가능성을 본질로 한다. 뿐만 아니라 물질의 운동형태인 공간과 시간 역시 물질의 보편적 존재형식으로서 이해되며, 물질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라면 시간과 공간 역시 무한하고 불변적이다. 유물론자에게 있어서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이다. 결국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물질이란 서구형이상학이 견지해온 존재론의 재판일 뿐이며, 그것조차 인식론적으로 이해되어온 반쪽자리 존재론이다.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인간행위나 그 결과등은 물질의 표현형태로서, 그것의 반영이거나 반사에 불과하다.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자유란 물질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것에 충실하게 조응할 때에만 존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