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형설지공/경제경영

[경제윤리]경제학과 합리적 도덕성

경제학과 합리적 도덕성


모든 것을 개인의 자유의 한 가치 또는 생산의 한 가치에 바탕을 두는 것처럼 경제학자들이 단순하게 도덕상의 지나친 단순화에 빠질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합리적 도덕 철학들에서 지침을 추구하여 왔다. 예를 들어 많은 19세기의 논쟁들은 일반적으로 행복, 만족(happiness)의 가치에 의해 지배되어져야 한다는 관점인 공리주의에 의해 세워진 구조에서 이루어졌다. 행복은 보편적인 선이 것처럼 보이고, 어떻게 자기를 위하여 그리고 사회를 위하여 달성되어질 수 있는지에 관하여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for the most people)' 원리에 의하여 경제 정책 문제들에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경제상의 번영(well-being)에 대한 증대는 언제나 행복의 증가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의심할 여지없이 공리주의는 특히 19세기와 20세기 초기 영국의 사회 운동에서 만들어진 몇몇 중요한 기여들을 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두 가지 주요한 이유 때문에 윤리적 지침의 확실성이 없는 근거로 판명되었다. 첫째, 사람들이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진 가지각색의 모순된 관점들을 일치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행복의 서로 다른 질(質)들로서 구분하려 했던 John Stuart Mill의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Mill은 '만족스러운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운 인간인 것이 훨씬 낫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Mill의 시대 이전 그리고 이후의 많은 쾌락(pleasure)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보편적인 철학의 바탕을 둘 수 있겠는가? 행복 원리가 가진 다른 문제는 단지 사람들이 행복을 구하기 때문에 행복이 궁극적으로 선(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증거 없이) 주장된 행복의 몇몇은 가학성애자(sadist)가 다른 이의 고통에서 취하는 행복과 같이 확실히 선(善)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추구할 때가 아니라, 다른 목적들을 추구하고 있을 때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것이다. (테니스 선수는 경기를 진행하는 동안 행복한, 만족한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경기 그것 자체의 부차적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매우 만족스러운 접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다.

도덕철학의 다른 종류는 요즈음 대서양 양편에서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것은 Harvard 철학자, John Rawls에 의해 제안된 정의론이다. 주1) 사회의 몇몇 경제학자들과 그 밖의 학생들은 Rawls가 경제 정책 토의를 위한 가장 잘 어울리는 도덕적 토대로 판명될 것을 전개하였다고 믿는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분명히 매우 중요한 것이고 충분히 우리들의 주의를 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Rawls는 흥미 있는 고안을 사용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분별 있는 사람들의 그룹이 무(無)에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상황을 상상하도록 요청했다. 그 그룹의 구성원들이 미리 알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들 각자가 실제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들 자신의 이익이 어떻게 판명되어질지 미리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각자 그들 자신의 이익이 보호되어지기 위해서 어떻게 책임들과 보상들을 배분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경제적) 계획의 결과는 그룹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현재 소유가 확정된 이익에 관하여 '정의'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일 것이다. 최근에 생겨난 이러한 개념은 아무 사람의 현재의 특권을 위한 단순한 합리화가 아닐 것이다. 동시에 그 개념은 각자가 사회에서의 그의 실제상 미래의 역할을 개의치 않고 이익이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Rawls에 의하면, 합리적인 그룹의 구성원들은 사회가 각 구성원에게 '공정(fair)'하여야만 한다고 결정하게 될 것이다. 각자는 그가 불공정하게 취급받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 때문에 Rawls는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는 포괄적인 개념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을 의미하는가? Rawls는 그것이 특히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첫째, 그것은 평등(equality)을 의미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받아야만 하거나, 또는 상황이 공정(fair)으로서 묘사되어질 수 있다. 누구나 같은 규칙에 의해 행위하고, 그들의 규칙은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될 수 없다. 그러나 둘째로, Rawls는 절대적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 최소 특권이 있는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각자 모두에게 불리하게 될 것으로 판명 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불평등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공정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서, 불공정들은 단지 '그것이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주2) 고려되어질 수 있다. 불공정은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조직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또한 그들이 완전한 평등의 상황 내에 있을 때보다 더욱 형편이 좋게 된다는 것을 느낄 경우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불운한 자의 처지가 그로 인해 더 향상된다면 소수자가 더 큰 이익을 취한다고 해도 부정의한 것은 아니다.' 주3)

누군가의 특별한 이기주의(selfishness)의 범위를 넘어서 관계(reference)의 객관적인 점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윤리학의 견지에서 Rawls의 개념은 중대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잠재적으로 측정 가능한 출발점(즉, 평등)과 그러한 출발점으로부터의 어떠한 일탈행위라도 고려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것은 추정(presumption)에 대해 1장에서 논의된 접근법에 적합하다. 일탈행위에 대하여 공정을 위한 최초의 추정은 거증(擧證) 책임을 지는 것을 필요로 한다. 거증 책임은 단지 사회에서 가장 적게 유리한 것이 가장 유리한 것의 보다 많은 특권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 직면될 수 있다. 분명히 Rawls는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 사회를 조직하는 공정하고 정당한 방법으로써 이것에 동의하여야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Rawls의 이론에 관한 모든 노작들을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저작에 친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Rawls의 견해가 이러한 짧은 기술의 바탕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개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Rawls는 인간이 단지 차가운 합리성을 가지고 그들 자신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한 것을 꾀하는 개인들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사상 시도에 의해 구상된 사회계약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을 위해 상호간을 이용하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뜻깊은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공유된 사회(commonwealth)의 기여와 경험을 통하여 완성을 발견하는 우리들의 인간성에 필요하다. : '우리들은 남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일부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 갖는 사회성의 특징이다. 우리는 보류해야만 하거나 전혀 결여하고 있는 탁월성을 얻는 일을 타인들에게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의 전체 활동, 많은 단체들과 그것들을 규제하는 최대 공동체가 갖는 공공 생활은 우리의 노력을 뒷받침해 주고 우리의 기여를 유도해 낸다.' 주4)

나는 사려 깊은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이러한 포괄적인 정의론의 유용함에 점점 집착하게 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는다. 평등의 원리로부터 필요한 일탈을 위한 자리를 내주면서, 평등(equality)의 원리를 강조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어떠한 주요한 방법으로서 내 자신의 시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Rawls가 곤란한 경제 질문들의 부담을 견디기에 철저히 충분한 정의의 개념에 근거했는지 의아해한다. 그는 그의 이론을 모든 합리적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그것에 의하여 특정한 종교적인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시각의 보편성을 달성하는 공정(fairness)의 개념에 논거를 두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경제 생활을 위한 도덕 토대의 견지에서 매우 중요한 무언가, 경제 문제의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근거(a grounding in the ultimate meaning of economic problems), 가 희생되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가 모두 합리적이라는, 그리고 방어하기 위한 어떠한 부여된 이익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가정의 객관적인 출발점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RaWls는 완전히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론이 충분히 질서가 잡힌 공정한 사회가 카드놀이에서 그들이 적은 이익을 가진 게임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타격을 가한다는 것을 충분히 하였는지 의아해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게임에서 공정히 행동하고 있는지 어떤지 질문을 넘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게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까지 그것에 대한 참가(commitment)를 위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점이, 다소 험악하게, London 대학 경제학자의 분명히 중대한 어구에 의해 제의되었다.


세상의 모든 자원을 모두 다 사용해 버린 결과로써 인간의 삶이 끝났다고 상상해보자.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종교적인 신념은 제쳐놓고, 인간 종의 막연한 존속에 대하여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가? 이미 여기 지구에 있는 거의 누구든지 죽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누구든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의미심장한 의미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가 만일 그들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보다 만일 그들이 태어난다면 더욱 형편이 좋다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견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주5)

이러한 어구를 인용한 Robert Heilbroner는 '이렇게 합리성의 의견을 말하는' 혐오라고 논평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이성의 수단으로서 어떻게 사람들을 납득시키는지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들을 종교로 귀의시키는지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논평한다.

정의에 관한 Rawls의 이념 이면에는 인간은 날 때부터 궁극적으로 합리적이라는,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인간 존재의 의미가 놓여 있다는 근원적인 추정(presumption)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은 종교적이며, 그래서 그들은 합리적인 방법으로서 증명될 수 없다.

Bertrand Russel이 '덧없고 무력한 것이 인간의 인생이다. 인간과 모든 인간의 인생행로에서, 확실히 운명은 무자비하고 음울하다.'라고 한 그의 어구에서 한 것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반대 명제(contrary)를 입증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더 많이 현재의 우리의 이기심과 양립하는 다른 게임의 규칙들을 발견할 때 왜 우리는 합리적으로 평등에 기초한 정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가?


Source : J.Philip Wogaman, The great economic debate - An ethical analysis (Philadelpia:The Westminster press, 1977) pp. 34-38



Reference

1.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Also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1972. (황경식 譯, 사회정의론, 서광사)
2. Ibid., pp. 14-15 (황경식 譯 p.36)
3. Ibid., p.15. (황경식 譯 p.36)
4. Ibid., p.529 (황경식 譯 p.538)
5. Quoted by Robert L. Heibroner, An Inquiry into the Human Prospect, W.W.Norton, New York 1975 edition, p.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