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야기(1)대우사태를 계기로 재벌개혁이 또다시 세간의 화두(話頭)가 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재벌을 해체하고 비호세력까지 포함한 인적 청산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재벌은
경제적 기여보다 폐해가 더 많은 사회의 공적(公敵)인가. 글로벌 시대에는 없어져야 할 기업형태인가. 앞으로 몇회는 재벌의 경제학에 대해 음미해보기로 하자.
재벌은 출자나 혈연관계를 통해 상호 계열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군(群)을 일컫는다. 공정거래법에서는 일본에서 유래한 재벌이라는 말대신에 기업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 선단식이나 문어발식이라고 불릴 만큼 서비스 산업에서 제조업,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우리 재벌의 현실이다. 흔히 30대 재벌이라고 하지만, 재벌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 5대 재벌의 지배력이 훨씬 막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재벌이라는 기업형태가 등장했는가. 혹자는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정책이 빚어낸 부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경제적 논리는 이보다 더 포괄적인 설명을 한다. 기업조직에도 진화론, 즉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재벌이라는 조직도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조직의 하나로 탄생된 것이다. 이것을 ‘최상의 현실적응’(best practice)모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여러 업종에 계열기업을 거느리게 되면 사업의 안전성이 강화된다. 계열기업이 많으면 서로 사주고(상호구매), 서로 도와주어(상호보조) 불황을 겪는 계열기업을 회생시킬 수도 있다. 모험적인 사업에 신규 투자하거나 투자성과가
불확실한 연구개발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 특히 첨단산업에 신규 진출 할 경우에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안전장치로서의 기능이 중요하다.
정치경제학적인 논리로도 설명될 수 있다. 금융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개발도상국에서는 큰 재벌이 작은 기업보다 신용도를 높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삼성자동차에서 금융기관들이 부채를 회수하는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정경유착이 심하고,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많은 경제에서는 재벌과 같은 조직이 있어야 모든 일을 원만하게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정부 또한 일단 신규산업에 진출하면 독과점적인 지위로 프리미엄(Entry Premium)을 보장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글로벌 환경하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제적인 신인도가 약한 초기단계에서는 대기업집단이 신뢰도 구축에 유리하고, 여러 업종을 기반으로 패키지 딜(Package Deal)을 할 수 있으며, 브랜드 이미지(Brand Image)를 쉽게 구축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다.
세계시장에서 개도국 기업이 맞닥뜨리는 높은 진입장벽을 대기업집단이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재벌해체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경제환경에서 대기업집단이 탄생한 것은 적자생존을 위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업집단의 기반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 경제의 성장과 세계적 위상을 갖는 기업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시장이 경쟁적 환경으로 바뀌면 기업은 또다시 새로운 조직으로 생존을 위한 변신을 시도할 것이다. 환경과 제도는 그대로 둔 채 기업조직만 바꾸라고 강요한다면 경쟁력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재벌을 왜 개혁하라고 하는가. 다음 호에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연세대 경제학 교수]
매경ECONOMY1999.09.07
[정갑영의 풀어 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2)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Janus)’는 두 얼굴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 신전에 세워진 그의 모습을 보면 한쪽 얼굴은 아침의 일출을, 또 다른 얼굴은 저녁의 석양을 쳐다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처연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재벌의 모습도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이미지와 같다. 재벌이 경제발전에 공헌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다음 문장에서는 항상 그에 따른 병폐를 지적한다. 재벌의 발전과
부(富)의 축적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력 집중과 사회적 형평, 정경유착과 불공정거래 등으로 얼룩진 행태를 비난한다.
일부에서는 “그렇기 때문에(because of)” 해체돼야 할 조직이라고 비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긍정적 측면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에 대한 기여를 내세워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비난도 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개혁이 도마 위에 오르고, 총수들이 법정에 드나들기도 한다. 과연 재벌이라는 조직은 밝고 어두운 모습을 모두 가진 야누스의 두 얼굴인가.
기업집단이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당연히 높아진다. 이 결과 대기업집단으로 국가의 경제력이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경제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
우선 경제적 안정이 저해될 수 있다. 대재벌이 부실화되면 나라경제가 휘청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는 가급적 대기업을 살리려 한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업측에서 보면 재벌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생존의 안전성이 강화된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경제논리이다.
또한 경제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부(富)의 불균등한 분배가 심화돼 사회적 형평이 왜곡된다. 이것은 물론 사회적 안정을 저해하게 된다.
특히 동질성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좀처럼 부의 상대적 격차를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처럼 모든 국민이 동일한 언어, 역사, 문화 그리고 심지어는 경제적 수준까지도 동질적인 국가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집단의 성장이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특혜와 비리 속에 이루어진 사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정부 규제가 많은 개발경제에서는 모든 기업활동이 정부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정부와 대기업은 특혜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고운 시선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밖에도 계열기업간 불공정한 거래행태나 탈법적인 행태는 모두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재벌개혁의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전개돼야 하는가. 개혁의 목표는 항상 글로벌 경제에서 초일류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공정거래와 정경유착, 소수 대주주의 전근대적인 행태 등은 당연히 개혁돼야 한다.
재벌의 행태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적합하게 변화돼야만 한다. 그러나 대기업이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하거나 규제하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한 기업의 매출액이 한국의 총수출액보다 더 큰 외국기업이 즐비하지 않은가. 문제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기업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쟁력을 향상 시킨다는 실증적 증거가 미약한 제도를 개혁의 목표로 삼아서도 안된다. 선단식 경영이나 지배구조의 문제도 불확실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우리 제도를 모색하여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경제적 논리로 선별해 부당한 행태를 교정해야 한다. 한편으로 열린 세계를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야누스의 또 다른 얼굴도 잊어서는 안된다.
매경ECONOMY1999.09.15
[정갑영의 풀어 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 (3)
삼각구조는 항상 복잡하고 미묘한 것일까. 안정성이 상징인 삼각형은 약간만 구도가 달라져도 불안정한 모습으로 변한다. 삼각형이 5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개의 중선(中線)이 만나는 무게중심, 안쪽과 바깥쪽에 내접하는 원의 중심인 내심과 외심, 그리고 수심(垂心)과 방심(傍心)이 그것이다. 간단한 삼각형 속에 그렇게 많은 마음(心)이 있으니, 복잡하고 안정을 찾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가 보다. 그래서 사람관계도 둘은 적고, 셋은 많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업도 역시 미묘한 삼각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삼각형의 세 꼭지점은 소유와 지배, 경영구조다. 이름하여 기업구조의 삼각형이라고 부른다. 소유구조는 기업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own), 경영구조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경영(manage)되는가, 그리고 지배구조는 기업이 실제 누구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control)되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소유구조는 기업의 대주주와 소액주주를 포함한 소유분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한다.
경영구조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영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즉 생산과 마케팅, 투자, 노사관계 등의 경영실태를 나타낸다. 지배구조는 기업의 의사결정과 최고경영자 및 임원의 임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설명한다. 소유구조에서는 주주, 지배구조에서는 최고결정권자인 이사회, 그리고 경영구조에서는 최고경영자가 각각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기업이 가족중심의 자기자본으로 운영될 경우에는 소유주와 경영자, 지배자가 모두 한 사람이기 때문에 기업구조의 삼각형은 사실상 한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업이 점차 성장하면서 주식을 공개하고, 전문경영인이 등장하고, 종업원이 증가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면 기업구조의 내용은 복잡한 삼각형으로 변한다. 우선 기업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주식분포가 다양하게 되고, 대주주의 지분율이 점차 감소하게 된다. 전문경영인이 경영구조에 들어서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다. 소액주주도 목소리를 높이려 하고 금융기관은 채권자로서, 근로자는 경영성과의 배분에 각각의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다.
또한 소유주는 효과적으로 전문경영인을 감시하고 싶어하고, 소액주주는 대주주의 횡포를 막으려 하며, 채권자도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모두 지배구조 속에 참여하여 기업을 통제할 수있는 영향력을 갖고 싶어한다. 문제는 삼각형이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그 힘이 어떻게 배분돼야 하는가이다.
선진화된 기업구조의 특징은 소유의 분산과 전문경영, 이해당사자간의 균형있는 지배이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에는 정답이 없다. 사후적으로 보면 경쟁력을 갖춘 초일류기업의 모델이 가장 바람직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소유가 분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소수 대주주가 전권을 장악한다면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이해관계자의 몫으로 사외이사를 참여시켜 투명성을 높이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참여해야 균형을 갖출 수 있는가. 효율성과 투명성이 대립될 경우에는 우선 제도적으로 요구되는 투명성을 먼저 충족시켜야 한다. 그 이후에 삼각형의 무게중심이 효율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지배구조가 이해관계가 큰 대주주나 경영자보다도 외부이사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효율성이 크게 저하될 수밖에 없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투명성을 전제로 하는 공공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기업구조의 삼각형에서 경영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변수를 정부가 규제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세대경제학교수]매경ECONOMY1999.09.21
[정갑영의 풀어 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4)
발명왕 에디슨(T. Edison)은 저명도만큼이나 많은 일화를 남겼다. 초등학교를 3개월만에 퇴학당하고, 어머니로부터 거의 모든 교육을 받은 그가 일생동안 무려 1000개가 넘는 특허를 받아냈으니, 누가 이 대기록을 깰 수 있겠는가. 가난 때문에 겪어야 했던 그의 고달픈 역경은 “나는 발명을 계속하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해 언제나 발명을 한다”는 고백 속에 모두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에디슨의 저명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명한 전등이 GE 설립의 불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878년 그의 특허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에디슨 회사’가 창립됐고, 조명장치를 비롯한 많은 발명품들을 생산하는 여러 계열사들도 연이어 설립됐다.
1892년 에는 계열사들이 사업확장을 위해 톰슨 휴스턴사와 합병, 오늘의 GE를 탄생시켰다. 설립 이후 GE는 승승장구하여 20세기 최고의 기업으로, 1981년부터 현재까지 GE 회장을 맡고 있는 웰치(J.F.Welch)는 최고의 경영자로 손꼽히고 있다. 96년 웰치는 다우존스 인덱스 100주년을 기념하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개장 벨을 울렸는데, 그것은 100년 동안이나 상장된 기업이 오로지 GE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GE는 한마디로 성공적인 다각화의 신화다. 실제로 GE의 다각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설립의 원천이 됐던 조명부문에서부터 항공기 엔진, 가전, 금융 보험, 발전설비, 의료, 기계, 화학, 운수장비, 정보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20개가 넘는 산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NBC를 인수해 방송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전자상거래로 대표되는 e비즈니스에도 진출했다.
GE는 80년대 획기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신규사업을 확장하는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100억달러의 한계사업을 정리하면서 무려 190억달러에 달하는 새 사업을 인수, 여타 기업이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과감한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GE는 오히려 적극적인 다각화 전략으로 지난 100여년간 불확실한 시장위험을 극복하면서 연 100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Financial Times)으로 성장한 것이다. GE의 성공사례는 소수산업에 집중투자해 핵심역량을 구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를 무색케 한다(100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일본의 히타치도 같은 사례다).
물론 한 우물로 성공한 사례도 많다. GE이 다각화로 성공한 예라면 햄버거 집 맥도날드는 전문화된 기업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1940년대 후반 맥도날드 형제가 시작한 조그만 음식점은 크록(R. Kroc)과 합작(55년)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는 남들이 정년을 준비하는 53세에 맥도날드에 뛰어들어 사내대학을 설립하고 기술훈련을 강화시킨 후,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체인망을 확장했다.
단 9개 종류의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로 사업을 시작한 맥도날드. 아직도 그품목에는 변함이 없지만 2만3000여개의 체인점에서 연 310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3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디선가 5시간마다 새로운 맥도날드가 들어서면서 인류의 음식문화를 표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재벌에는 어떤 모델이 이상적인가. 오히려 가장 전문화가 잘 됐던 기아와 한보그룹이 제일 먼저 부실화되는 비운을 맞았다. 또한 다각화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대우도 어려운 처지에 있지 않은가. 획일적으로 소수 업종에 전문화를 유도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최고의 모형은 시장의 불확실한 미래에 가장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업구조일 뿐, 그것을 어떻게 성공시키느냐는 시장환경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경제학 교수] 매경ECONOMY1999.10.05
[정갑영의 풀어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 (5)
파바로티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녹아내린다. ‘라보엠’에서 로돌프역을 노래하는 천부적인 목소리의 탁월함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 멈추게 한다. 감동을 주는 목소리는 물론 파바로티 뿐이 아니다.
어느 자동차 광고로 널리 알려진‘white as lilies’를 부른 안드레아스 숄과 같은 중성(中性)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카운터테너인 그는‘파리넬리' 영화 속의 카스트라토(Castrato)처럼 여성의 음역을 개발해 부드럽고 풍요로운 메조 소프라노의 음색과 남성적인 다이나미즘이 조화된 감미로움을 더해준다.
목소리 자체를 악기로 갖고 태어나는 성악가들은 그 악기 하나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카라얀은 지휘봉으로, 정경화는 바이올린으로 세계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음악적 감동은 물론 한 사람의 재능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개개인의 능력이 합쳐진 합창이나 오케스트라에서도 파토스의 심연을 움직이는 감흥을 느낄 수 있다. 헨델의 메시아처럼 합창은 한 사람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웅장한 스케일을 갖고 있지 않은가.
기업의 전문화와 다각화의 논리도 이와 비슷하다. 파바로티가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 것처럼 기업도 한 제품으로 전문화하여 세계를 제패 할 수도 있고, 오케스트라처럼 다양한 사업의 복합된 응집력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는 한 제품의 생산을 전문화하여 규모를 늘릴수록 비용이 절감되는 것을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라고 한다. 반면 다양한 제품을 동시에 생산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효율성의 제고를 ‘범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라고 한다. 자동차 하나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전자제품을 동시에 생산하는 것이 두 산업에서 모두 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논리다.
이것은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기술과 정보, 판매망과 상표, 조직 등의 생산적 자원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범용자원이 많아질수록 다각화의 인센티브는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처럼 자본시장이 불완전하면 다각화된 기업일수록 외부자금의 융통이 수월하고, 내부에서 창출된 현금흐름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다.
사회적 신뢰기반이 약한 문화도 다각화를 유발한다. 사회적 신뢰가 약하면 소비자나 투자자들은 독립된 한 기업보다는 다른 계열사를 많이 갖고 있는 기업집단을 더 믿게 된다. 한 계열기업이 잘못돼도 다른 계열기업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자동차의 부채를 계열 기업에 분담시키거나, 재벌의 증권과 투자신탁회사에 자금이 몰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규모 투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시키려는 정책환경도 다각화를 촉진시킨다. 비전문화된 무명의 기업보다는 재벌의 계열기업이 성공의 안전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각화는 범위의 경제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재벌의 다각화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다각화된 재벌은 산업간의 상호보조와 상호구매가 가능하므로 복합적인 ‘힘’이 생기고 그것이 곧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영향력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재벌 총수가 과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다른 전문기업을 도태시킬 수도 있다.
만약 다각화의 비효율이 범위의 경제보다 크다면 전문화로 가야 한다. 그러나 전문화는 특정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코러스보다는 파바로티와 같은 솔리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파바로티가 몇세기만에 등장하고, 18세기 거세당한 4000여명의 카스트라토 가운데 겨우 한 사람, ‘파리넬리’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 기여보다 폐해가 더 많은 사회의 공적(公敵)인가. 글로벌 시대에는 없어져야 할 기업형태인가. 앞으로 몇회는 재벌의 경제학에 대해 음미해보기로 하자.
재벌은 출자나 혈연관계를 통해 상호 계열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군(群)을 일컫는다. 공정거래법에서는 일본에서 유래한 재벌이라는 말대신에 기업집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 선단식이나 문어발식이라고 불릴 만큼 서비스 산업에서 제조업,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우리 재벌의 현실이다. 흔히 30대 재벌이라고 하지만, 재벌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 5대 재벌의 지배력이 훨씬 막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재벌이라는 기업형태가 등장했는가. 혹자는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정책이 빚어낸 부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경제적 논리는 이보다 더 포괄적인 설명을 한다. 기업조직에도 진화론, 즉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재벌이라는 조직도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조직의 하나로 탄생된 것이다. 이것을 ‘최상의 현실적응’(best practice)모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여러 업종에 계열기업을 거느리게 되면 사업의 안전성이 강화된다. 계열기업이 많으면 서로 사주고(상호구매), 서로 도와주어(상호보조) 불황을 겪는 계열기업을 회생시킬 수도 있다. 모험적인 사업에 신규 투자하거나 투자성과가
불확실한 연구개발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 특히 첨단산업에 신규 진출 할 경우에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안전장치로서의 기능이 중요하다.
정치경제학적인 논리로도 설명될 수 있다. 금융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개발도상국에서는 큰 재벌이 작은 기업보다 신용도를 높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삼성자동차에서 금융기관들이 부채를 회수하는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정경유착이 심하고,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많은 경제에서는 재벌과 같은 조직이 있어야 모든 일을 원만하게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정부 또한 일단 신규산업에 진출하면 독과점적인 지위로 프리미엄(Entry Premium)을 보장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글로벌 환경하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제적인 신인도가 약한 초기단계에서는 대기업집단이 신뢰도 구축에 유리하고, 여러 업종을 기반으로 패키지 딜(Package Deal)을 할 수 있으며, 브랜드 이미지(Brand Image)를 쉽게 구축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다.
세계시장에서 개도국 기업이 맞닥뜨리는 높은 진입장벽을 대기업집단이 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재벌해체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경제환경에서 대기업집단이 탄생한 것은 적자생존을 위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업집단의 기반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 경제의 성장과 세계적 위상을 갖는 기업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시장이 경쟁적 환경으로 바뀌면 기업은 또다시 새로운 조직으로 생존을 위한 변신을 시도할 것이다. 환경과 제도는 그대로 둔 채 기업조직만 바꾸라고 강요한다면 경쟁력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재벌을 왜 개혁하라고 하는가. 다음 호에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연세대 경제학 교수]
매경ECONOMY1999.09.07
[정갑영의 풀어 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2)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Janus)’는 두 얼굴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 신전에 세워진 그의 모습을 보면 한쪽 얼굴은 아침의 일출을, 또 다른 얼굴은 저녁의 석양을 쳐다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처연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재벌의 모습도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이미지와 같다. 재벌이 경제발전에 공헌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다음 문장에서는 항상 그에 따른 병폐를 지적한다. 재벌의 발전과
부(富)의 축적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력 집중과 사회적 형평, 정경유착과 불공정거래 등으로 얼룩진 행태를 비난한다.
일부에서는 “그렇기 때문에(because of)” 해체돼야 할 조직이라고 비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긍정적 측면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에 대한 기여를 내세워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비난도 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개혁이 도마 위에 오르고, 총수들이 법정에 드나들기도 한다. 과연 재벌이라는 조직은 밝고 어두운 모습을 모두 가진 야누스의 두 얼굴인가.
기업집단이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당연히 높아진다. 이 결과 대기업집단으로 국가의 경제력이 집중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경제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
우선 경제적 안정이 저해될 수 있다. 대재벌이 부실화되면 나라경제가 휘청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는 가급적 대기업을 살리려 한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업측에서 보면 재벌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생존의 안전성이 강화된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경제논리이다.
또한 경제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면 부(富)의 불균등한 분배가 심화돼 사회적 형평이 왜곡된다. 이것은 물론 사회적 안정을 저해하게 된다.
특히 동질성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좀처럼 부의 상대적 격차를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처럼 모든 국민이 동일한 언어, 역사, 문화 그리고 심지어는 경제적 수준까지도 동질적인 국가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집단의 성장이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특혜와 비리 속에 이루어진 사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정부 규제가 많은 개발경제에서는 모든 기업활동이 정부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정부와 대기업은 특혜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고운 시선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밖에도 계열기업간 불공정한 거래행태나 탈법적인 행태는 모두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재벌개혁의 정치경제학은 어떻게 전개돼야 하는가. 개혁의 목표는 항상 글로벌 경제에서 초일류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공정거래와 정경유착, 소수 대주주의 전근대적인 행태 등은 당연히 개혁돼야 한다.
재벌의 행태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적합하게 변화돼야만 한다. 그러나 대기업이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하거나 규제하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한 기업의 매출액이 한국의 총수출액보다 더 큰 외국기업이 즐비하지 않은가. 문제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기업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쟁력을 향상 시킨다는 실증적 증거가 미약한 제도를 개혁의 목표로 삼아서도 안된다. 선단식 경영이나 지배구조의 문제도 불확실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우리 제도를 모색하여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경제적 논리로 선별해 부당한 행태를 교정해야 한다. 한편으로 열린 세계를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야누스의 또 다른 얼굴도 잊어서는 안된다.
매경ECONOMY1999.09.15
[정갑영의 풀어 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 (3)
삼각구조는 항상 복잡하고 미묘한 것일까. 안정성이 상징인 삼각형은 약간만 구도가 달라져도 불안정한 모습으로 변한다. 삼각형이 5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개의 중선(中線)이 만나는 무게중심, 안쪽과 바깥쪽에 내접하는 원의 중심인 내심과 외심, 그리고 수심(垂心)과 방심(傍心)이 그것이다. 간단한 삼각형 속에 그렇게 많은 마음(心)이 있으니, 복잡하고 안정을 찾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가 보다. 그래서 사람관계도 둘은 적고, 셋은 많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업도 역시 미묘한 삼각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삼각형의 세 꼭지점은 소유와 지배, 경영구조다. 이름하여 기업구조의 삼각형이라고 부른다. 소유구조는 기업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own), 경영구조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경영(manage)되는가, 그리고 지배구조는 기업이 실제 누구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control)되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소유구조는 기업의 대주주와 소액주주를 포함한 소유분포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한다.
경영구조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영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즉 생산과 마케팅, 투자, 노사관계 등의 경영실태를 나타낸다. 지배구조는 기업의 의사결정과 최고경영자 및 임원의 임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설명한다. 소유구조에서는 주주, 지배구조에서는 최고결정권자인 이사회, 그리고 경영구조에서는 최고경영자가 각각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기업이 가족중심의 자기자본으로 운영될 경우에는 소유주와 경영자, 지배자가 모두 한 사람이기 때문에 기업구조의 삼각형은 사실상 한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업이 점차 성장하면서 주식을 공개하고, 전문경영인이 등장하고, 종업원이 증가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면 기업구조의 내용은 복잡한 삼각형으로 변한다. 우선 기업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주식분포가 다양하게 되고, 대주주의 지분율이 점차 감소하게 된다. 전문경영인이 경영구조에 들어서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다. 소액주주도 목소리를 높이려 하고 금융기관은 채권자로서, 근로자는 경영성과의 배분에 각각의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다.
또한 소유주는 효과적으로 전문경영인을 감시하고 싶어하고, 소액주주는 대주주의 횡포를 막으려 하며, 채권자도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모두 지배구조 속에 참여하여 기업을 통제할 수있는 영향력을 갖고 싶어한다. 문제는 삼각형이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그 힘이 어떻게 배분돼야 하는가이다.
선진화된 기업구조의 특징은 소유의 분산과 전문경영, 이해당사자간의 균형있는 지배이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에는 정답이 없다. 사후적으로 보면 경쟁력을 갖춘 초일류기업의 모델이 가장 바람직한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소유가 분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소수 대주주가 전권을 장악한다면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이해관계자의 몫으로 사외이사를 참여시켜 투명성을 높이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참여해야 균형을 갖출 수 있는가. 효율성과 투명성이 대립될 경우에는 우선 제도적으로 요구되는 투명성을 먼저 충족시켜야 한다. 그 이후에 삼각형의 무게중심이 효율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지배구조가 이해관계가 큰 대주주나 경영자보다도 외부이사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효율성이 크게 저하될 수밖에 없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투명성을 전제로 하는 공공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기업구조의 삼각형에서 경영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변수를 정부가 규제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세대경제학교수]매경ECONOMY1999.09.21
[정갑영의 풀어 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4)
발명왕 에디슨(T. Edison)은 저명도만큼이나 많은 일화를 남겼다. 초등학교를 3개월만에 퇴학당하고, 어머니로부터 거의 모든 교육을 받은 그가 일생동안 무려 1000개가 넘는 특허를 받아냈으니, 누가 이 대기록을 깰 수 있겠는가. 가난 때문에 겪어야 했던 그의 고달픈 역경은 “나는 발명을 계속하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해 언제나 발명을 한다”는 고백 속에 모두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에디슨의 저명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명한 전등이 GE 설립의 불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878년 그의 특허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에디슨 회사’가 창립됐고, 조명장치를 비롯한 많은 발명품들을 생산하는 여러 계열사들도 연이어 설립됐다.
1892년 에는 계열사들이 사업확장을 위해 톰슨 휴스턴사와 합병, 오늘의 GE를 탄생시켰다. 설립 이후 GE는 승승장구하여 20세기 최고의 기업으로, 1981년부터 현재까지 GE 회장을 맡고 있는 웰치(J.F.Welch)는 최고의 경영자로 손꼽히고 있다. 96년 웰치는 다우존스 인덱스 100주년을 기념하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개장 벨을 울렸는데, 그것은 100년 동안이나 상장된 기업이 오로지 GE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GE는 한마디로 성공적인 다각화의 신화다. 실제로 GE의 다각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설립의 원천이 됐던 조명부문에서부터 항공기 엔진, 가전, 금융 보험, 발전설비, 의료, 기계, 화학, 운수장비, 정보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20개가 넘는 산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NBC를 인수해 방송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전자상거래로 대표되는 e비즈니스에도 진출했다.
GE는 80년대 획기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신규사업을 확장하는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100억달러의 한계사업을 정리하면서 무려 190억달러에 달하는 새 사업을 인수, 여타 기업이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과감한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GE는 오히려 적극적인 다각화 전략으로 지난 100여년간 불확실한 시장위험을 극복하면서 연 100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Financial Times)으로 성장한 것이다. GE의 성공사례는 소수산업에 집중투자해 핵심역량을 구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를 무색케 한다(100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일본의 히타치도 같은 사례다).
물론 한 우물로 성공한 사례도 많다. GE이 다각화로 성공한 예라면 햄버거 집 맥도날드는 전문화된 기업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1940년대 후반 맥도날드 형제가 시작한 조그만 음식점은 크록(R. Kroc)과 합작(55년)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는 남들이 정년을 준비하는 53세에 맥도날드에 뛰어들어 사내대학을 설립하고 기술훈련을 강화시킨 후,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체인망을 확장했다.
단 9개 종류의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로 사업을 시작한 맥도날드. 아직도 그품목에는 변함이 없지만 2만3000여개의 체인점에서 연 310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3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디선가 5시간마다 새로운 맥도날드가 들어서면서 인류의 음식문화를 표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 재벌에는 어떤 모델이 이상적인가. 오히려 가장 전문화가 잘 됐던 기아와 한보그룹이 제일 먼저 부실화되는 비운을 맞았다. 또한 다각화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대우도 어려운 처지에 있지 않은가. 획일적으로 소수 업종에 전문화를 유도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다.
최고의 모형은 시장의 불확실한 미래에 가장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업구조일 뿐, 그것을 어떻게 성공시키느냐는 시장환경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경제학 교수] 매경ECONOMY1999.10.05
[정갑영의 풀어쓰는 경제학] 재벌이야기 (5)
파바로티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녹아내린다. ‘라보엠’에서 로돌프역을 노래하는 천부적인 목소리의 탁월함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 멈추게 한다. 감동을 주는 목소리는 물론 파바로티 뿐이 아니다.
어느 자동차 광고로 널리 알려진‘white as lilies’를 부른 안드레아스 숄과 같은 중성(中性)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카운터테너인 그는‘파리넬리' 영화 속의 카스트라토(Castrato)처럼 여성의 음역을 개발해 부드럽고 풍요로운 메조 소프라노의 음색과 남성적인 다이나미즘이 조화된 감미로움을 더해준다.
목소리 자체를 악기로 갖고 태어나는 성악가들은 그 악기 하나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카라얀은 지휘봉으로, 정경화는 바이올린으로 세계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음악적 감동은 물론 한 사람의 재능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개개인의 능력이 합쳐진 합창이나 오케스트라에서도 파토스의 심연을 움직이는 감흥을 느낄 수 있다. 헨델의 메시아처럼 합창은 한 사람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웅장한 스케일을 갖고 있지 않은가.
기업의 전문화와 다각화의 논리도 이와 비슷하다. 파바로티가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 것처럼 기업도 한 제품으로 전문화하여 세계를 제패 할 수도 있고, 오케스트라처럼 다양한 사업의 복합된 응집력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는 한 제품의 생산을 전문화하여 규모를 늘릴수록 비용이 절감되는 것을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라고 한다. 반면 다양한 제품을 동시에 생산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효율성의 제고를 ‘범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라고 한다. 자동차 하나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전자제품을 동시에 생산하는 것이 두 산업에서 모두 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논리다.
이것은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기술과 정보, 판매망과 상표, 조직 등의 생산적 자원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범용자원이 많아질수록 다각화의 인센티브는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처럼 자본시장이 불완전하면 다각화된 기업일수록 외부자금의 융통이 수월하고, 내부에서 창출된 현금흐름을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다.
사회적 신뢰기반이 약한 문화도 다각화를 유발한다. 사회적 신뢰가 약하면 소비자나 투자자들은 독립된 한 기업보다는 다른 계열사를 많이 갖고 있는 기업집단을 더 믿게 된다. 한 계열기업이 잘못돼도 다른 계열기업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자동차의 부채를 계열 기업에 분담시키거나, 재벌의 증권과 투자신탁회사에 자금이 몰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규모 투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시키려는 정책환경도 다각화를 촉진시킨다. 비전문화된 무명의 기업보다는 재벌의 계열기업이 성공의 안전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각화는 범위의 경제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재벌의 다각화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다각화된 재벌은 산업간의 상호보조와 상호구매가 가능하므로 복합적인 ‘힘’이 생기고 그것이 곧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영향력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재벌 총수가 과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다른 전문기업을 도태시킬 수도 있다.
만약 다각화의 비효율이 범위의 경제보다 크다면 전문화로 가야 한다. 그러나 전문화는 특정산업에서 세계적 경쟁력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코러스보다는 파바로티와 같은 솔리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파바로티가 몇세기만에 등장하고, 18세기 거세당한 4000여명의 카스트라토 가운데 겨우 한 사람, ‘파리넬리’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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