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과정에서 여성의 정치적, 경제적 역할
윤 정 숙
여성민우회 사무처장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지난 10년간 지속가능한 사회경제적 발전과 여성의 지위및 역할의 상관성은 국제적으로 주요한 담론이고 아젠다였다. 즉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여성에게 더욱 투자하고, 여성을 사회 모든 부분에서 주류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신정부 출범이후 발전과정에 여성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젠더주류화정책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이전의 발전과정에의 여성'통합'(integration) 관점에서, 그리고 여성을 수혜집단으로 설정한 복지적 관점에서 보면 일단 한단계 진전한 것이다.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경제위기 직전까지 지난 10여년간 우리나라에서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상당한 향상을 이루었다. 가족법개정을 비롯하여 남녀고용평등법, 영유아보호법, 성폭력방지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등의 제정을 통해 공적, 사적 영역에서 남녀평등과 여성인권의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진전은 정부의 체계적인 여성정책의 결과라기보다는 19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여성운동의 폭발적인 성장과 발전에 따른 성과라 할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성장 중심의 발전모델이 주류를 이루면서 남녀의 평등한 지위및 여성인권을 위한 체계적인 젠더정책은 거의 없거나 또는 늘 맨나중에 고려되어졌다. 이로 인한 결과는 1998년 UNDP보고서가 말해주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HDI)가 30위인 반면 여성의 정치, 경제적 진출의 정도를 기준으로한 여성세력화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 GEM)는 174개국 중에서 83위에 머물고 있다.
50년만의 정권교체를 통해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남녀참여사회의 구축'을 주요정책과제의 하나로 채택한 신정부의 출범은 여성계에 무언가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다. 이는 이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한단계 질적인 발전을 이루고, 법과 제도를 넘어서는 '사실상의 평등'을 추구하는 단계로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우리는 단 1년이라는 짧은 순간에 지난 10여년간의 여성운동의 성과가 후퇴해버렸음을 경험하였고, 이로 인해 여성들은 또다른 강한 위기감마저 갖게 되었다. 특히 경제위기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증가와 함께 여성들에게 남성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기존의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을 재평가하고, 이제는 새로운 대안적 발전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이 글에서는 현재 여성의 정치, 경제적 위치와 새로운 사회발전틀을 위한 전제및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1. 여성의 경제적 주변화와 민주적 시장질서
지난 1년간 여성이 위기를 느끼는 것의 중요한 것은 여성노동의 급속한 주변화이다. 고용조정을 통한 구조조정은 1998년 8월 현재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97년의 49.5%에서 47.6%로 1.9% 저하시켰다. 이는 남자감소율 0.1%에 비교할 때 큰 폭의 차이를 보인다. 여성취업자 수도 같은 기간 남자의 5.7%감소에 비해 8.3%라는 높은 감소율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취업자는 수적인 감소뿐 아니라 고용형태 역시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중 여성은 35%정도에 머물고 있으며, 나아가 여성노동자중 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은 32.9%, 나머지는 임시직, 일용직등으로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남성노동자의 63.4%이 상용직으로 근무하고 있음과 비교하면 여성은 그 반에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 여성비정규직은 대부분 노조가입의 자격이 없어 미조직 상태에 있어서 노동권의 보장정도가 매우 불안정하다.
이같은 여성의 급속한 고용불안정화는 남성은 가족의 생계책임자, 여성은 피부양자라는 성별노동분업의 뿌리깊은 가치가 경제위기시에 보다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인 생활수단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어난 여성우선해고, 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우선 임시직화, 사내 맞벌이부부중 여성해고, 여성집중부서의 우선 퇴출과 용역회사를 통한 이들의 재고용 등은 여성의 경제적 주변화로 귀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남녀고용평등법도 여성을 방어해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고, 노동조합 역시 여성해고자를 위한 아무런 저항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위기 직후 맨처음 우리 사회 전체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은 '남편기살리기' (Women are supposed to help and cheer up their depressed husband)였다. 남성에게 일자리를 양보하고, 실직한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역할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조금씩이나마 완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한국적인 가부장가치관이 한순간에 급속히 부활하고 있음을 경험하였다.
지난 일년간 여성운동의 최대 이슈는 '무너지는 여성노동권' 그리고 여성실업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시행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가구주는 전체의 약 17%인 80만 가구에 달하고, 특히 실직한 여성가장들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할 만큼 생활이 어려워져 긴급구호와 일자리가 절실함을 알았다. 이를 여성계는 '빈곤의 여성화', '여성의 빈곤화'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문제는 아직 여성정책은 기존의 사고와 정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이 문제이다. 정부실업정책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주변화되어 있다. 99년 실업대책 예산 중 여성훈련 및 취업지원강화 차원에서 계획된 여성실업대책 예산은 실업대책예산 전체의 0.3%에 불과하다. 여성실업대책은 일부 직업훈련과 실직여성가장을 위한 지원책 정도인데, 여성의 직업훈련프로그램을 보면 그 기간이 남성보다 짧은 데다가 직종도 적고, 그마저 전통적 여성직종에 몰려있으며 저연령, 신규고학력실업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또한 적다. 이러한 결과는 우선은 여성실업대책 관련한 정책결정 및 집행과정에서 여성의 참여기회는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으로 본다. 올해 들어 두 개의 여성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은 여성들이 스스로 노동권을 지키려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적 자구책이라 할 수 있다. 즉 '여성의 이해는 여성에 의해서만 대변될 수 있다'는 자명한 전제의 확인이라 하겠다.
여성들은 아직도 '민주적 시장질서'로의 이행논의와 정책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여성이 충분히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책임있는 행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조건에 있다. 이는 새로운 발전질서의 형성과정에 여성이 역할과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점이 개선되지 않으면 여성들은 경기회복 후에도 자신들이 여전히 노동시장의 주변에 머물게 될 것이며, 향후 여성의 경제세력화의 전망이 불투명하리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2. 새로운 정치룰의 형성과 여성의 역할
우리나라 여성의 낮은 정치적 참여와 지위는 차별적인 노동시장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정치는 남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남성이 만든 정치적 룰은 여전히 강고하고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은 정책적으로 진지한 고려사항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정치룰은 대부분 돈과 학연, 지연, 인맥의 단단한 고리 속에서 형성되어왔다. 정당이 여성정치참여 방안에 대해 오랫동안 무관심한 것도 한 원인이다. 이러한 정치행태가 많은 여성들에게 정치를 혐오하고, 무관심 또는 기피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다.
떠라서 여성의 대표성 증진방안에 대한 여성계의 상당한 논의와 대안이 제기되었음에도 정치분야에서의 여성지위는 아직도 늘 그 자리이다. 현재 여성국회의원은 전체의 3.6%로 아시아에서 하위권임은 물론 세계평균 12.3%에 훨씬 못미치고 있다. 또한 지난해 지방자치선거에서 여성의원은 기초단위 지자체에서 1.6%, 광역에서 5.9%로 95년 선거와 비교해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실상 지난 지자체선거 과정에서 주부, 노동자, 지역운동가출신의 여성후보들 대부분이 남성과 비교해 능력이나 활동경험에서 월등하였다. 그들은 돈과 인맥의 열세를 극복하고 여성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지지와 선거캠페인에의 참여를 기반으로 당선되었다. 소수이지만 그들의 당선은 여성들이 세운 정치룰에 의한 새로운 선거문화모델의 승리이며, 대안적 지역정치의 가능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성들은 정치세력화, 주류화를 원한다. 고비용의 정치구조의 변화, 정당명부식비례대표제의 도입 및 30% 여성할당제 도입, 공무원채용시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각 위원회에 여성에게 30%의 자리를 보장할 것 등은 수년간 반복되어온 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정치적 룰에 수동적으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정치적 주류화는 여성참여 그 자체를 넘어서 기존의 정치룰과 구조를 동시에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의 정치적 역할이고, 올바른 젠더주류화의 전제인 것이다. 즉 여성들은 정치의 구조조정을 함께 요구하고 있으며,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참여하기 원한다. 최근 정부가 정부위원회와 공직에서의 여성참여 30%의 목표를 앞당겨 시행키로 한 것은 일단 바람직한 정책적 노력이며 의지라고 본다. 그러나 명실상부하게 여성의 대표성이 제고되고, 가시화되도록 하는 정치적 의지는 현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라 하겠다.
3. 여성의 기회와 역할
정부는 여성정책의 주류화, 국가발전에 남녀동등한 참여를 위한 여성의 대표성 제고, 여성의 경쟁력 제고 그리고 여성계와의 협조체제의 강화를 여성정책의 추진기조로 하고 있다. 특히 이전과 비교해 다른 것의 하나는 정부가 정책결정과정에서의 여성참여를 제고하는 노력으로 여성NGOs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이는 정부가 시민사회단체와 파트너쉽관계를 강조해온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전과 비교해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질서의 확립을 통합 발전전략 속에서 전문 여성인력과 여성운동이 정부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은 '참여와 비판'을 기조로 하여 이러한 안과 밖의 기회공간을 극대화하는 것을 여성운동의 중요한 전략과 역할로 설정하고 있다.
(1) 민주주의 그리고 여성참여관점의 재정립 역할
모든 수준의 정책에서 젠더관점이 통합되도록 정책결정의 과정, 집행 그리고 평가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토크니즘(tokenism)을 넘어서 여성의 요구를 가시화하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사회질서를 구조화하는 데에 주된 하나의 접근방법임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참여는 여성이 기존 구조의 '한 부분'이 됨을 말하지 않는다. 기존구조의 비민주성과 관료성 그리고 가부장성에 대한 도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발전패러다임형성에 대한 여성들의 전망이 수립되어야 하고, 동시에 기존구조에 대한 개혁요구를 담은 참여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젠더주류화이며, 진정한 여성대표성의 발휘라고 본다. 여기서 젠더관점은 투명하고 개방적인 민주사회를 위한 새롭고 지속발전 가능한 선택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는 여성의 주류화는 남녀차별을 없애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특히 뿌리깊게 사회전반에 녹아있는 한국적 가부장성에 대한 여성들의 근본적인 도전이 바로 민주주의를 재구조화하는 하나의 토대이다. 이것은 개혁의 요소이다. 따라서 젠더주류화는 '기술적'인 것일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를 통한 사회의 재구조화이며, 자원재분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사회변화의 한 지렛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여성대중 요구를 수렴및 정책적 반영의 역할
시민사회내 여성운동체들의 역할은 시민사회가 초보적인 발전단계에 있는 현재수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들은 여성대중의 현실과 요구를 알아 낼 수 있는 현장속에 있다. 여성대중 자신들의 이해를 주장할 조직과 통로를 갖지 못한 현실에서 여성운동은 여성대중에 대한 책임성(accountability)와 조기경보(early warning)의 기능을 더욱 강화시켜야 하는데, 이 점은 정부정책의 재고와 수정을 요구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동태적인 요소가 된다. 또한 여성운동은 상담과 교육, 그리고 여성대중 조직화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여성운동은 아래로부터의 올라오는 여성들의 힘으로 스스로 세력화할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발전패러다임을 형성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3) 협력과 감시의 역할 그리고 자율성
정책형성과 집행과정의 감시는 사회 전반의 운영에 참여하는 또다른 방식의 여성역할이다. 최근 여성의 고용창출과 실업정책, 그리고 폭력에 대한 방지는 정부여성정책의 주요한 흐름인데, 그 정책집행의 현장을 감시하고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여성NGO의 주요 역할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젠더주류화 정책의 제대로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중요하게 견지해야할 것은 여성운동과 NGO의 독립성이다.
최근 정부와 시민단체의 파트너쉽의 강조와 더불어 민관협력체계가 강조되면서 시민단체-정부간 협력사업의 범위도 상당히 증가하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시민,사회운동과 정부가 '긴장관계'를 가졌던 이전과는 다른 현상으로 여성운동에게도 역시 새로운 관계의 경험이 되고 있다. 이 관계에서 여성운동은 정부로부터의 자율성과 독자적 역할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정부도 두 관계는 협력, 감시와 비판 그리고 독자성의 '동태적' 관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성조직의 독자성과 자율성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 자체가 새로운 민주질서의 주요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대안적 사회발전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 출발점은 그동안 경제성장의 척도로만 발전이 가늠되고, 정치 및 사회전반의 균형및 평등하고 민주적인 발전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없는 가운데 오래동안 익숙해졌던 틀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성의 역할은 바로 오랜틀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고, 새로운 사회발전의 밑그림 형성과정에 주체적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편 그 과정 전반에 젠더관점의 통합요구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여성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해야할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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