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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재벌개혁과 정치개혁

재벌 때리기가 한창이다.재벌의 잘못된 경영행태와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해 재벌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그러나 비난과 처벌만으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에서는 기업을 생존과 성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변신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이것은 모든 생물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원리에 의해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한다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따라서 한 나라에서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기업 행태나 구조는 그것이 좋든 나쁘든 그 나라 기업환경의 산물로 볼 수 있다.기업환경은 물론 그 나라의 정치사회 문화와 정부정책이 결정한다.

재벌이라는 조직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기이한 기업구조라면,그것은 우리나라의 기업환경이 다른 나라와는 매우 다른 기이한 환경이기 때문이다.지금 우리 나라 재벌들의 행태와 구조가 기형적이어서 문제라면,그런 기업구조를 초래한 한국의 기형적 기업환경부터 고쳐야 한다.

오징어가 발이 10개이고,문어가 발이 8개인 것은 그래야만 하는 환경요인이 있어 그렇게 된 것이다.오징어가 문어보다 발이 많다고 발을 억지로 잘라낸다면,그 오징어는 문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죽게 될 것이다.마찬가지로 한국의 기업환경을 그냥 둔 채로 새로운 기업 행태와 구조를 강요한다면,그 기업들은 결국 모두 죽고 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재벌 책임론이나 정부의 직접 개입에 의한 외과적 수술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이유이다.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기업의 잘못된 관행과 구조를 나무라고 비난하기보다는 기업이 변할 수밖에 없도록 기업환경을 바꾸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다.

지금 재벌 때리기와 마찬가지로 정치인 때리기가 한창이다.한국정치의 잘못된 행태와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권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그러나 지금처럼 정치인에 대한 비난과 사정만으로 정치개혁이 달성될 수 있을까?

우리 나라라고 비전을 가지고 올바르게 정치를 해보겠다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정정당당한 정책 대결로 국민의 심판을 받아보고 싶은 지도자가 우리 나라라고 왜 없었겠는가.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도 우리 나라 정치 풍토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과거 정치권에 뛰어들었던 인사 중에도 나름대로 올바른 뜻과 이상을 펴보고자 결심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고매한 인격과 순수한 이상만으로는 국민들의 표를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표 얻는 일도 전문성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기술이다.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표 얻는 능력과 국가경영능력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비리폭로나 상대방 흠집내기 식의 정쟁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런 전술전략이 약효가 있기 때문이다.정치 판에서의 약효란 물론 국민여론과 투표의 향방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약효가 있는 한 누군가는 그 약을 쓰고자 할 것이다.고고한 척하다가는 혼자 오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우리 나라 정치에 돈이 많이 들어 정경유착과 비리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돈을 쓰지 않고 말과 정책으로만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 뻔하다.돈 안 쓰는 정치를 해보겠다고 정치 판에 뛰어든 순진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그들 대부분이 제대로 정치인 대접도 못 받고 도태되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정치인들이야말로 우리 나라 정치사회 문화와 국민정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응해 살아남은 신토불이 토종들이다.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낙후된 정치문화는 수준 낮은 정치인들 때문이 아니라,낮은 수준의 정치인밖에 살아남을 수 없는 정치토양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그런 토양은 놓아둔 채 정치인의 자질을 탓하는 것은 마치 잡초밖에 자랄 수 없는 땅에 잡초가 무성하다고 잡초를 나무라는 것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정치인들과 재벌 총수들의 잘못된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비난 이전에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치풍토와 기업풍토부터 바꾸어야 한다.그리고 그것은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이지,사람 물갈이나 의식개혁의 문제가 아니다.새 사람 몇 명 정치권에 끌어들이고,재벌 총수 몇 사람 처벌한다고 해결될 일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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