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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환율방어의 명암

'늑대와 소년'식 경제정책: 환율방어

장용성(매경 금융부장)

외국인들이 한국을 도망가다시피 떠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신뢰성을 상실하고 장래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우선 기아를 비롯한 부실기업처리문제와 환율정책에서 외국투자가들을 많이 실망시켰다. 기아자동차에 대한 최종 처리방침이 확정됐던 지난 22일 국내주가가 무려 34포인트나 뛰었던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다.
국내투자가들이 안도감을 나타내며 주식시장에서 엄청난 물량의 사자 주문을 냈던 그 당시에도 외국인들은 무자비하게 팔아치우고 한국시장을 떠났던 것이다.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이틀 뒤인 24일 한국의 장단기 국가신인도를 한등급씩 낮추고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부정적(네가티브)'판정을 내렸다. 향후 12개월 이내에 한국 신인도를 다시 낮출 수 있다는 경고가 덧붙여진 것이다.

S&P는 이런 판정의 이유로 제일은행에 대한 한은특융과 기아그룹에 대한 국유화를 으뜸으로 꼽았다. 국가가 사기업의 채무를 떠맡은 만큼 한국이라는 국가의 신인도도 낮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일은행은 한은특융 등의 조치로 자체적인 신용등급 하락위험을 벗어났지만 한국정부가 그 덤터기를 쓴 것이다.
S&P에이어 무디스사도 28일 한국의 신용등급을 한 등급 낮추고 장기 전망 역시 네가티브로 판정했다.지방자치단체,일반시중은행,기업등으로 악영향이 확산될 게 분명하다.
세계적인 유수경제지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도 23일자 사설에서 기아처리에 대해 한국이 결국 `나쁜 옛날 습관'으로 되돌아갔다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한국이 그 동안 한보철강과 삼미가 망하도록 하고 은행들이 손실을 뒤집어쓰도록 방치함으로써 고통스럽지만 `중앙계획인 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해왔었다고 지적했다.
결국 외국전문가들은 우리 국내사람들이 `우선 먹기엔 곶감이 달다'는 식으로 반겼던 부실기업·부실은행 국유화조치를 잘못된 정책결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는 시각인가. 외국인인가 아니면 강경식 경제팀인가 국내 투자가들인가. 강부총리를 수장으로 한 현 경제팀은 그동안 시장경제론을 주창했지만 외국인들은 거꾸로 가는 시장경제론이요 후진국적인 경제정책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장경제 잣대로 기아문제를 접근했다면 말 그대로 시장에 처리를 맡겼어야 했다.
정부가 부도유예협약이라는 어정쩡한 수단을 동원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을 끌면서 `현정권내의 M&A(인수합병) 불허'`김선홍기아회장 우선 사퇴'등의 주문을 내며 수렴청정했던 것은 결코 시장경제정책이 아니었다.
경제팀이 그런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은 대선을 앞둔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에다 여론의 압력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기아자동차문제는 이미 M&A라는 자동적인 산업구조조정장치에의해 해결이 됐을 것이다. 우리정부는 또 환율정책에서 실수를 거듭했다.
지난 7월 2일 태국 바트화 폭락을 시발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필리핀 등으로 통화위기가 확산되는 동안 우리 외환당국은 먼 산 불구경하다 시피 했다.
재경원과 한은은 `한국은 자본시장이 그들처럼 개방돼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국제투기자본의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고 지적해왔다. 그러면서도 원화환율 방어선을 900원,915원 920원 930원 등으로 계속 후퇴하다가 28·29일에는 아예 손을 떼버린 것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를 비롯한 외국전문가들은 한국도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수 차례 경고했다. 외국투자가들은 국내은행과 기업들에게 협박(?)하다시피 환율안정협조를 당부해왔던 외환당국을 이미지나 버릴 뿐 태국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장담해 왔다. 외환보유고가 겨우 3백억달러도 안된데다 단기외채비중이 67%이상에 이르는 허약 체질로는 결코 환율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외환당국은 수 십 차례 `강력한 방어'를 선언하다가 결국 늑대와 소년의 얘기를 연출하며 신뢰성을 상실하게 됐다. 외국인들은 이밖에도 내년에도 한국경제전망이 호전될 가능성이 별로 없고 특히 그런 상황을 극복할 만한 주체가 없다는 불확실성에 실망하고 있다. 대통령책임제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레임덕 현상을 맞고 있는 현정부나 차기정권의 생태적 약체성에대한 불신감이다.
우리 정부는 수출증가로 내년에는 6%이상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S&P나 SBC워벅 같은 기관은 5%이하 성장가능성을 점쳤다.3%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외국전문가들도 있다. 불황이 내년까지 이어질 경우 한국의 신용등급은 또 다시 하락하고 더 많은 연쇄부도의 고통이 몰려올 수밖에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 선거도 좋지만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한 범정치권·범국민적 내각구성과 같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 투명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하면서 대외신뢰성도 확보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자료: 매일경제신문 1997.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