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병, 신드롬, 연극성 그리고 기호의 정치경제학
I. 들어가는 말
1. 너는 네 세상의 주인인가?
왜 세상을 사는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목소리가, 해묵은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이다. 왜 세상을 사는가? 왜 이런 세상을 기꺼이 죽어버리지 못하느냐고 질문하는 쇼편하우어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고, 자살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란 뒤르케임이 질문이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녘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하기도 하다.
치료의 가망없는 암에 대해서 저항하지 말고 기꺼히 죽으라는 - 혹은 그만큼 주어진 시간을 기꺼이 즐기라는 - 어느 일본의 의사의 목사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삶에 대한 의학의 진보를 무시하는 전혀 비과학적인 발상이라고 질책하는 의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왜 세상을 사는가?
나의 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목소리와, 인간의 이름이라는 것은 모래 위에 써넣은 글귀일 뿐이라 파도가 지나가면 사라질 개념일 뿐이라는 푸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그리고 인간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존재라는 베블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다.
왜 세상을 사는가?
아직도 귀에 잔잔한 이 고민은 사실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 나의 벗들과 나누었던 많은 고민들의 한 구절일 뿐이다. 그 시절, 등나무가 들려져있던 학교의 유일한 벤치에서, 일찍 등교한 아침 시간이나, 점심을 먹고 흐믓하게 그나마 남아있는 고등학교의 유일한 자유 시간이라도 음미하고자 했던 그 시간이나, 이제는 집에 가도 좋은 방과 후의 그 시간에, 그 등마무 아래에서 제일 많이 얘기했던 고민은... 왜 세상을 사는가? 왜 나는 안중근 처럼 세상을 향하여 일순간에 몸을 던져 버리지 못하고, 왜 이승복처럼 채 피어버리지도 못한 몸을 살르며 한마디 담론을 만들지도 못하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왜 김구처럼 한방울 총알에 모든 아쉬움을 싣고 모든 것을 던져보리지도 못하고 나는 살고 있는가... 그러한 고민 방울방울 던져넣었던 질문, 그 고민 구석구석 찔러넣었던 질문, 나는 왜 사는가?
이런 길고도 긴 고민에 하나의 답을 던져주는 담론이 있었다. 그것은 "주인 의식" 혹은 자신이 삶이 주인이 되라는, 전두환 시절에 사회가 만들어준 답이 있었다. 아니, 그 뿌리는 유신 시절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 너는 너의 주인이 되어라.
그것은 확실히 살것인지 말것인지의 질문과 확연히 괘를 달리하는 또 다른 질문의 축이었다.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끌어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끌려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공부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매일매일 살것인지 말것인지를 고민하던 그 시절의 나에게 던져지던 그 질문의 답은, 너는 너의 주인의 될지어다라, 일종의 교리와도 같은, 도그마처럼 살아오던, 그리고 학력고사를 앞둔 나에게 공부는 일단 하고 볼지라고 살아오던 그 진리는, 너는 네 세상의 주인이 될지어라.
2. 나는 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정말이지 대학을 들어오면 모든 것을 얻을 줄 알았다. 그 시대의 사회가 나에게 만들어 준 꿈은, 대학만 들어가면 너에게도 계획을 만들 수 있는 - planning - 할 수 있는 힘과, 너의 삶을 꾸릴 수 있는 추진력의 힘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획득의 권리"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들은 말은... 너희들은 기득권이다... "기득권"이라는 단어, 그렇게도 내가 주인이고자 했던 세상에서, 그렇게도 내가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면서 도달한 그 사회에서 최초로 나에게 던져준 말은 "기득권"이라는 단어였다. 나의 삶,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가고싶은 것, 그리고 내가 사는 이유들, 그런 단어들과 뭉뚱거리듯이 움직인 그 단어는, 바로 기득권이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꾸려나갈 수 있어 그나마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해도 좋은 것을 "조화"롭게 꾸려나갈 수 있다고 사회가 인정해주는 순간이었다. 그순간, 그런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던 그 순간, 세상이 나에게 던져준 이름은, 적어도 너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바로 "기득권"이라는 그 단어였다.
1996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이름붙여진 일련의 과정을 개근한 사람이 바로 그 시절의 나였다. 뭔지 세상에서 나에게 준비시켜준 것이 있다면 해야한다고 믿었던 것이 바로 그 시절의 나였다. 학점과도 무관하고 진로와도 무관하며, 학교 측에서 명목을 맞추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그러니까 왜 내가 그 장소에 나가야할지도 전혀 모르면서도 그냥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이, 바로 삼일간 계속된 오리엔테이션을 개근한 그 시절의 내가 그곳에 나간 이유이다. 그러나 기득권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들은 곳도 바로 그곳이다. "당신들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라..."
나는 그 얘기들은 들으면서 왜 세상을 사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연세대학교 구 경영관 강당에서 기득권을 가진 연세 상경인이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할 일들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운전도 배우고 증권 투자도 하고 세상도 경영하면서, 그 일련의 얘기들은, 뿌리깊이 세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골똘히 고민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이제 세상의 주인이 되었는가? 이젠 기득권을 가지었던 말은, 즉 이제 취직할 고민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일은, 당신이 등록금만 착실히 내면, 당신이 사고만 치지않으면, 당신 밖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대학 졸업장을 갖게 되었다는, 그러한 일련의 담론... 나는 그 순간 문득 나는 남의 잔치에 와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남들의 세상, 남들의 가치, 남들의 정의 속으로 문득 깊이 들어와 버렸다는 세상을 하게 되었다.
3. 썰렁함에서 공주병으로
긴 공백을 뒤로 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 나의 오리엔테이션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순간이다. 86학년도에 대학을 입학한 이후 거의 10년이 흐른 96학년도에 나는 서울로 돌아왔고, 이젠 더 이상 내가 신촌의 감자국집들을 전전하며 소주를 퍼붓던 시절의 학생도 아니며,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한테 용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기도 어려운 어른 (그야말로 "으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들이 "썰렁하다", "뜨다" 등의 단어들과 함께 신종 흑사병이라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공주병"이라는 단어였다. 물론 이 말의 성적 단린들을 씻어내기 위해서 왕자병이라는 말이나 혹은 백마병이라는 말이 맛뵈기로 붙여다녔던 것들도 사실이다. 뭔가 나의 전공에 관한 말들을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게슴치레한 눈으로 떠들면 사람들은 나에게 "썰렁하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때 내게 들었던 생각이 어려운 애기는 썰렁하다고 서울의 사람들이 표현하는구나... 4년만에 서울로 돌아온 나는 내가 처음으로 일상 용어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그 단어를 그렇게 이해하였다. 향후에도 썰렁하다는 말은 어렵다는 말과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때로 텔레비젼을 보면서 근근히 썰렁하다는 표현을 보면서 나는 때로 내가 이해하는 "썰렁하다" = difficult의 공식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썰렁하다" = 지겹다. 썰렁하다 = 듣기싫다. 썰랑하다 =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썰렁하다 = 잘난 척 하지마라. 일련의 의미, 즉 사회적으로 정의된 활용법들이 "썰렁하다"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근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내가 썰렁하다라는 단어의 사회적 용법을 이해한 것은 masse, 즉 대중이라는 범주의 움직임을 이해한 것과 동일한 과정이다. 썰렁하다는 대타적 관계 중에 특정한 일대일의 관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즉 1:1의 관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용법이다. 적어도 썰렁하다는 단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1대 다수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고, masse 앞에 서있는 어느 주체가 무엇인가 전체 분위기의 흐름을 거스리는 순간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 앞에서 아무리 잘난 척을 하고 떠들어봐야 그는 나에게 "썰렁하다"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건 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 청자, 즉 듣는 사람이 다수일 때 또다른 화자에게 그 청자 중의 누군가가 직접 화자가 되어 그 다수의 의견을 표명할 때 "썰렁하다"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썰렁하다는 단어의 사용법은 1:1의 대화가 아니라 다수와 한명의 대화 속에서 그 다수 중의 누군가가 다수, 즉 masse의 의견을 담보하여 던질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썰렁하다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사회성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청중이 웅변자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요, 다수가 개인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요, 다수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다. 즉 저 앞에 있는 웅변자에게, 혹은 저 앞의 리더에게, 그 뒤에 그들의 이름으로 묶여져있는 그들의 우리의 이름으로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이 "썰렁하다"라는 말인 것이다. 한마디로 침묵의 그들이 그듥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하는 개인에게 던질 수 있는 거부의 단어가 "썰렁하다"라는 말인 것이다. 청중 중의 일인이 청중의 이름으로 화자에게 던지는 거부의 단어, "선생님, 썰렁한데요!"
오랫동안 우리는 한 개인에게 묶여있던 사회이다. 우리의 아버지라고 기꺼이 이름받고 싶었던 - 혹은 국부라고 이름불리고 싶었던 - 이승만의 사회로부터 박정희, 전두환... 우리는 단 한명의 개인과 나머지 그들, 즉 masse라는 사회 양식을 끌고나갔던 사람이다. 물론 이 대중에게 얼마만한 선택권이 있는지는 차지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인들이 단 한명의 인간, 즉 "고정점"에 대하여 느끼는 감명은 남다를 법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90년대, 이제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70년대, 유신 시대에 했다면, 정말이지 물고를 치를 일이다. "저 푸른 하늘에..."의 아침 이슬이나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의 친구가 금지곡이라는 것은 시대적 흐름과 메시지의 상징성을 고민해보면 알만도 하겠지만,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의 고래사냥이나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의 미인마저도 금지곡이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자, 그 시절에 누군가 썰렁하다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보자. "잘 살아 보세"라는 아침마저 귀전을 울리던 새마을 주제가나 혹은 "근면 자조 협동"으로 대표되던 새날의 논리에 대해서 썰렁하다는 말을 했다고 해보자. 그야말로 물고를 치를 일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썰렁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 "몸조심 입조심 보약보다 낫다"라는 것을 철썩같이 밑으면서 20년동안 떠나버린 내 님에 대해서 울부짓으며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어른들이다. 그들은 아침이면 눈을 뜨면 보이는 시대의 버젓함에 대해서 잠잠히 침묵하고 "이미 가 버린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젖은 손이 애처로운" 사람을 위하여, 닫힌 문을 바라보며 젓가락도 두드리고 애간장도 태우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썰렁하다"라는 말은, 혁명이다.
다수가 개인에 대한 혁명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담론에 박수쳐주지는 않겠다는 - 민은 박수부대가 아니다 - 혁명의 선언이다. 이제 다수는 일 개인의 폭력에 대하여 할 얘기를 가지고 있다. "썰렁하구만..."
썰렁함의 얘기는 또 다른 해법이 있다. 그것은 "떴다"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제기하는 해석이다. 보다 현실적인 얘기이다.
여기에 다수가 있다고 하자. 그는 무엇인가 다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즉 그는 무엇인가 그들이 아닌 또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고 하자. 이런 상황을 표현할 때 "뜨고 싶어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하고" 그 무엇인가가 대중이 원하는 기대하는 혹은 박수칠만한 요소가 있을 때 그는 뜰만한 필요조건을 가진 셈이다. 노래를 잘한다면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셈이고 춤을 잘춘다면 부수조건을 갖춘 셈이며 재미진 얘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그나마 봐줄만한 구석이라도 있는 셈이다. 하여간 떠야 한다. masse, 대중이라고 얘기되는 그들에게서 나오려고 한다면 말이다. "달라야 산다"라는 책의 제목들은 경제적인 기업 운영과정을 얘기한 책이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르다는 뉴앙스만을 챙긴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은 떴다. 하여간 다르고자 하는 개인은 뭔가 다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이러한 과정에서 다름을 인정받은 사람은 뜬다. 대중이 인정해서 떴건, 대학생이 인정해서 떴건, 고등학생이 인정해서 떴건, 혹은 아줌마들이 인정해서 떴건, 현실적인 뜸의 조건은 판매로 연결되고 중학생이 사든 많이만 팔리면 우리는 떴다고 인정해준다. 물론 뜰려고 했던 개인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데 실패했을 때 개인은 주저없이 대중의 용어로 한마디 평가를 해준다. "썰렁했어."
자, 드디어 김자옥의 얘기로 들어가보자. 김자옥은 한마디로 맛간 배우였다. 이제는 나이도 먹어 그야말로 아이돌 스타도 아니고, 이제는 시대도 지나서 남진과 나훈아의 한판 승부가 벌어지던 그 시대도 아니고, 얼터너티프 락과 7음계 9음계, 이도저도 아니면 랩이라도 맛갈지게 해야 뜨는 시대이다. 그 시간에 김자옥은 그야말로 공주병을 들고 나와서 떴다. 한마디로 떴다. 썰렁함과 뜸의 경계에서 그녀는 화려하게 떴다. 김자옥이 뜬 것인지 공주병이 뜬 것인지 모르겠지만 - 이는 좀 더 논의를 한 후에 얘기하자 - 하여간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 김자옥은 정말이지 떴다. 아울러 태진아 아저씨도 떴고 - 매니저이니까 - 김자옥을 섭외하는 데 성공은 대부분의 방송이 다 떴다. 대중은 그에게 "썰렁했다"는 평가 대신에 "언니"라는 환호를 기꺼이 던져주었고, 이제 공주병은 "병"이라는 단어가 주는 음침함을 떨쳐내고 한마디로 떠버렸다. 하긴, 지금 같은 시간에 공주병이 썰렁하다고 말하면 그 말은 하는 사람을 썰렁하다고 볼 만한 시간이다.
4. 그러나 나는
하여간 나는 세상을 texte, 즉 뭔가 읽은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박정희 시대도, 전두환 시대도, 그리고 이후의 시대도... 뭔가 읽은 만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알렌이 바라본 맨하탄도 혹은 아라공이 바라본 움울한 파리도 모두 읽은 만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면에서 나는 하여간 떠야한다는 시기의 세상도, 그리고 공주병이 뜨는 1996년의 서울도 모두 읽을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996년 11월 17일 저녁 9시, 나는 부천에 살고 있는 - 전세로 살고 있는 - 박상순이라는 인천대학교 불문학과 강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짧게 설명한 후 얘기는 된다는 대답을 받았다. 전화를 끊고 5분 후에 나는 부천행 택시에 몸을 싫었다. 순대국 한 그릇과 머리고리 한 접시, 그리고 대학 노트 한 권을 놓고 한동안 애기를 한 두사람은 뭔가 써보기로 결정을 했다. 경제학도인 내가 생각한 세상 읽기와 연극을 기호학으로 읽는 것을 업삼은 두 사람이 뭔가 써보기로 결정한 셈이다. "공주병"에 대해서 한마디 하기로 결정을 그렇게 쉽게도 보았다. 아마도 "썰랑한 해프닝"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쓰고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하지만, 하여간, 허지만, 한데도... 그래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그래도... 역접을 할만한 한국말은 풍부하다. But, anyway의 영어나, mais, cependant, pourtant의 불어. 그 어느 언어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단어만큼은 풍부한 것이 우리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말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는 인색한 것이 우리 나라의 상황이다.
나와 박상순씨가 합의한 것은 공주병에 대해서 "그러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주병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기꺼히 웃는 그들에게 대해서 "그러나"라는 질물을 한 번 던져보고 싶은 것이다. 이 뒤의 글은 주로 직접 초고를 담당한 "우석훈"의 시점에서 쓰여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은 공유되어 쓰여질 것이다. 두사람 한몸...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II. 연극성과 무대 : 주인공과 조연 그리고 관객
1. 80년대의 연극들
진리가 존재하던 시대
세상에는 확고한 진리가 존재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유일한 존재일 것인가? 만약 그것이 유일하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해묵은 질문들로 일기장 한구석을 가득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꺼이 생각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있는지 없는지, 하나인지 여럿인지, 변하든지 변하지 않든지, 이제는 나의 관심 밖의 문제일 뿐이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그런 질문들을 세월의 흐름 속에 묻어버리듯이 나도 그런 문제들을 쉽게 묻어버릴 수 있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진리가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침에 오는 조간신문이 겨울이 되면서 조금씩 늦게 오기에 짜증이 난다는 현실보다도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한 면에서 나는 내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진리를 둘러싼 존재론적인 고민도, 진리의 현상태에 등장하는 의무론적인 고민들도, 그리고 변하지 않을 진리와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표상 간에 발생하는 긴장들에 대해서 고민할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내가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민들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 혹은 자기기만에 해당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그러한 의무를 상기시킬만한 존재도, 그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20세기말을 헤쳐나가는 한 군상 중의 한 명일 뿐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의 인생 시나리오는 철학자의 인생 시나리오와 확연히 다른 궤적을 갖게 되었다. 뭔가 알아야 한다던 내 안의 명령은 어느덧 뭔가 알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로 바뀌었고, 그동안에 내 인생의 시나리오도 엄청나게 변해버렸다. 시나리오가 변하면서 바뀐 일은 엄청나게 많다. 이제는 내 안의 세계에서 엄청나게 정의로울 수도 있다, 알고자 하는 고통을 저당잡힌 이후에, 그래도 이렇게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해서 때때로 회의하고 때때로 비판할만한 일말의 자세라도 유지하는 것이 어디냐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웃음을 지어주는 것이 전보다 훨씬 쉬어졌고 나를 괴롭히지 않으려는 사람을 나도 괴롭히지 않겠다는 피동적인 자기 안정의 구조도 갖추게 되었고, 나와 무관한 사람은 무관한 사람일 뿐이라고 내 안의 세계에 침잠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이제 곰곰히 생각하면 대학시절 나를 끊임없이 따라 다니는 "정의"와 혹은 "자유"니 하는 단어들은 그 당시에 나에게 주어졌던 시나리오였다. 어쩌면 그러한 시나리오는 시대가 나에게 던져준 것이었다. 하여간 대학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익숙해져야 했던 것은 폭죽터지는 소리를 내며 - 제대로된 불꽃놀이 구경을 당시까지는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 매케하게 코와 눈을 자극하던 소위 SY44와 지랄탄에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또한 그보다 보다 현실적인 일은, 아침에 가방을 열어보여주면서 학교 정문을 통과하고 저녘에는 다시 그 가방을 열어보여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마치 내 머리 속은 이렇게 비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몇 개의 수학식이 적혀있는 경제원론과 회계계정들이 어지럽게 널려져있는 회계원론이니 하는 책들, 그리고 영어 어휘 공부책들, 그런 것들을 나는 정문의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열어보여주었다. 꼭 그때마다 빤히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머리 속을 열어보여주듯이 가방 속을 열어보여주면서 딱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머리를 뒤지듯이 책갈피에 끼어놓은 "찌라시"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광경을 피해서 먼곳을 바라보기에도, 그렇다고 그 가방의 "검색"을 정면으로 쳐다보기에도... 하여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한편으로는 증오를 그리고 그 증오마저도 감추는 멍한 눈으로 그들의 눈과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내 안의 반발을 삭이는 유일한 길이었다. 매일 저녘 500원짜리 생두부와 500원짜리 막걸리를 마시러 신촌을 헤매던 것은, 그 자그마한 비밀이라도 찾아내려는 통과오례와, 그리고 그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고 - 사실은 있지도 않은 비밀인데 - 책을 가방에 넣지 않은 모든 것을 삭이려는, 또 다른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 시절의 무엇인지 그들이 나에게서 찾으려는,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찾으려던 그것은 나에게 진리라는 이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진리는 그렇게 은밀한 것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하는 그 무엇인가는, 그러나 매일매일 아침이나 저녁이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다. 그러니까 그들은 나에게 철학을 처음으로 가르켜 준 사람인 셈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철학원론"이니 "철학사"니 공부하기도 전에 미리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 시절, 세상, 아니 그들은 매일매일 나에게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켜주었고, 그러한 진리는 비밀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은밀한 향내를 풍기는, 그리고 속내 깊숙이 감추어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조그마한 단서라도 그들에게 제공하는 날에는... 그렇게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의 전개과정"이니 "세계철학사"니, 한경전이나 세철이라고 불르던 그런 책이 어쩌다 가방에 끼어들어가는 날에는 이건 교재라는 둥, 되지도 않는 변명을 정말이지 간절히 욾어야했다. 하여간 막스 베버를 공부하겠다던 친구가 며칠 후 등교길에서 줄경을 치루었던 시절이다. 텔레비젼에서는 원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여대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캠퍼스 드라마가 오공의 서슬퍼런 시절에 방영되던 그 시간, 나는 성년의식 대신에 감추는 법을 먼저 배웠다. 있지도 않은 진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진리를, 그리고 알 수는 더더군다나 없는 그 진리를 감추는 법을 나는 아는 법보다도 먼저 배워버린 셈이다. 하여간 80년대의 진리는, 그래도 엄연히 존재했던 시대의 진리는, 내가 알고 싶든 모르고 싶든 개의치 않고 그렇게 감추는 법으로 먼저 다가와버렸다. 광주니 5공이니 하는 나와는 멀고도 멀었던 사실들, 그렇게 추상적이고 멀고도 먼 사건들과 상관없이 내가 배운 것은 감추는 법이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감추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 우리네 속내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절에 회의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배부른 지식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었다. 너무도 확고하게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각인당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그토록 찾아내고자 하고 있었으므로...
감춤의 연극
그 대학의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우리 모두는 연극을 하였던 셈이다. 누구도 자기 얼굴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Mask... 희랍 연극의 시작은 가면극이라고 연극공부하는 사람이 얘기해준 것같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는, 적어도 두 개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는 대학을 졸업할 수도, 사업을 할 수도, 그리고 만만한 월급장이도 될 수없던 시절, 그 시대에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얼굴들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멀쩡하게 대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검문에 응할 때 보여야 하는 얼굴, 왜 수업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수업을 하던 선생님들에게 보여야 하던 얼굴 - 자는 얼굴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 , 집에 돌아와서 부모에게 보여야 하는 얼굴, 그리고 또 미팅이니 연애니 하는 순간에 꺼내보여야 하는 얼굴들... 그것들은 모두 마스크이다. 각개의 마스크를 가슴 속에 품고 있다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적절히 꺼내쓰는 것이 80년대라는 시간을 넘어서면서 사람들이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꺼내도 꺼내도 또 아직 숨겨놓은 마스크가 존재하는 시간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지우고 싶다"는 구절들은 어쩌면 그 80년대의 마스크의 행렬들을 위하여 준비된 언어들인지도 모른다.
각개의 가면은 각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겪어보지 않은 사건을 위하여 미리 마스크를 준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 셈이다. 또한 각개의 가면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름대로 숨기기 위한 기능을 마스크마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의 가면을 꺼내드는 순간, 시작되는 것은 새로운 "역할 게임" (role playing)이 시작되게 된다. 각각의 마스크는 각각의 상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각 순간의 인격을 대표한다. 교문 앞의 그들 앞에서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순박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적어도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만한 주변머리도, 그리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표상을 읽어낼만한 지혜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비교적 성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해 내었다. 적어도 그들 앞에서 나는 그런대로 수준급의 배우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몇 번 시비가 붙던 예외를 잊어준다면 상당히 수준급의 연기를 한 셈이다. 그러한 연기가 더욱 더 빛을(?) 발휘한 것은 학교 앞이 아닌 시내나 혹은 다른 학교 앞에서이다. 많은 경우 내 주위의 학생들이 검문을 당하는 경우에도 나는 상당히 많은 순간들을 무사히 통과한 적이 많다. 어디든 지나가기만 하면 꼭꼭 학생증을 제시당하고 가방을 열어보인다고 불편하던 친구들에 비하면 나의 마스크는 적어도 그런대로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고 배웠던 어린 시절의 진리는 그렇게 신촌 어느 한 구석에 종이에 꼭꼭 싸버리듯이 묻어버렸다.
그러나 그 마스크는 내 가슴 깊은 곳의 내 얼굴에는 쓰여지지 못하였다. 잠깐 잠깐 쓰던 그 마스크는 내 안의 얼굴에는 쓰여지지 못하였고, 내 안의 내 얼굴은 그들이 그렇게 감추어내고 싶었던 "진리"를 찾는 쪽에 더욱 가까워있었다. 감추는 마스크와 감추어진 얼굴 사이에는 늘상 참기어려운 긴장들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때로는 고성방가나 혹은 만취를 틈타 튀어나오기도 하고 혹은 쓸데없는 고집으로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술권하는 사회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얼굴의 마스크보다 더욱 더 큰 감춤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렸을 때 일기를 부모가 몰래 읽은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는 친구를 알고 있다. 일기는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혹은 편지도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험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시용 수업과 취업용 수업 속에서 내 안에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진리에 대한 "찬미"는 더욱 감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경제적 인간" - 이것이 homo oeconomicus라고 특별히 정의된 개념이라는 것은 그후 아주 뒤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 이라는 이름 하에 이기주의적 인간이며 합리주의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경제학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마 경제학을 한 번이라도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은 경제학을 향한 첫발에서 배우게 되는 일이다. 나는 도통 이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팔다리 끊고 머리도 끊고 몸통만 남은 사람을 갖다놓고 자, 이게 인간의 몸이다라고 강변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소리로만 들렸다. 대학 생활은 - 좀 더 정확히는 수업은 - 온통 감추는 생활의 확대재생산일 뿐이었다. 시험용으로 나는 일련의 노트 필기를 외으면 되었다. 내지는 일련의 공식들을 한 번 풀어보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높은 학점을 기대한 적이 없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내 안의 생각과 시험 답안지에 쓰고 나오는 내 생각은, 그야말로 이렇게 다른 지식의 체계가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긴장을 형성하였다. 마치 교문앞 그들에게 무엇인가 끊임없이 감추는 연극을 하여야 했던 것처럼, 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내 생각이 아닌 것들을 답안지에 적어내려가야 했다. 물론 결론도 나의 생각은 아닌,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구의 목소리였을 뿐이었다. 글에다 마스크를 씌우는 작업은, 그러나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충은 외우는 게 통하는 수업이 많았기 때문이다.
얼굴에도, 글에도 마스크를 씌우면서 감추던 시절, 혹은 그렇게 감추는 방법을 배우던 시절, 그 시간이 바로 내가 대학생활이라고 이름붙여놓은 시간들이다.
글에도 마스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러나 사실은 중대한 자기 분열을 암시하고 있다.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즉 진짜 나를 감추어줄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내 안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에는 진짜로 나의 역할을 하던 그 내가, 시험 시간에는 또 다른 나, 내가 아닌 그 나에게 펜과 기록의 권리를 내어주고, 내 몸과 함께 뇌의 일부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실상, 이렇게 내가 아닌 내가 생겨나는 동안, 진짜 나는 그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또 다른 나의 존재에 썩이나 만족을 하고 안심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교문 앞의 그들 앞의 연극에 익숙해져있는 그 내 안의 마스크와 함께 또 다른 마스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자신과 타협과 협상을 하면서 점점 내 안에 깊은 뿌리를 내려가고 있던 셈이다.
드러냄의 연극 : 자아의 분열
대학 2학년은 한열이와 함께 지나간 시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경영학과 재건모임에 C반 대표로 이한열이라는 친구가 뽑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그날이 오기 전에 한 두번 인사를 할만한 상황이기도 하였다. 하여간 그러한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 이는 어쩌면 내 안의 죄의식을 줄일 수 있다는 면에서 내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 6월 화창한 어느 날 한열이는 SY44의 조그만 파편 하나를 머리에 담고 우리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날 나는 대열의 거의 끝에 있다가 한열이가 쓰러지던 그 최류탄 타임에 좀 더 멀리 있는 상경대 잔디밭까지 뛰어가 누워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 타임에는 평상시보다 좀 더 많은 최류탄들이 좀 더 멀리까지 날라온 듯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상대까지 뛰어온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없었던 듯하다.
6월 한달을 한열이 시신을 지키느라 세브란스 병동에 있었고 두 번 정도는 한열이 아버지를 지키는 일을 맡기도 했었다. 산책을 나가신다고 하셔서 세브란스 중간에 있는 벤치에 따라나가는 일을 했고, "학생은 서울 사나?" "네". 광주에 있는 학교에만 다녔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말을 하실 때는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였었고, 내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정말이지 야릇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살아있음이 감사하다는 생각도, 그렇다고 참을 수 없는 분노도 아닌, 다만 미친 듯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야릇한 기분만이 나를 감싸돌았다.
그해에는 예의 마스크에 눌려있던 내 안의 목소리들이 좀 더 내 삶의 전면으로 나올 수가 있었고 나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들과 하고 싶은 글들을 좀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음악을 하는 한 여학생을 짝사랑 하였는데, 얼굴을 가끔이나마 보는 것보다는 편지를 쓰는 데에 좀 더 열중한 셈이다. 언어들은 그래도 충실히 내 마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도 그 안에서 행복하였다. 하여간 술과 짝사랑과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혐오는 나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고, 나를 사랑하라는 얘기는 정말이지 그 시절의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연말에는 대선이 있었고 5.5정권이라고 부르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선거날은 영등포 구청에 선거 감시하러 가기로 했었지만 그 전날 쓰러질 정도로 술마시고 모든 것이 싫어져서 집에서 하루 종일 잤다. 선거권도 없어서 선거도 못했다. 선거 다음 날은 과토론회가 있었고 시험거부를 결의했다. 사실 기분이 나빠서 시험을 안친 셈이다. 그 시험 거부 때는 일학기 때와는 달리 시험을 본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한과목도 시험을 치루지 않았고, 선생님들도 기분이 안좋았던지 나는 대학의 최저 학점을 그 학기에 받았다. 애써 나를 지키던 마스크, 아니 마스크들은 이제 굳이 감추는 연극의 상징으로 기능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일년을 지나면서 생겨난 좌절은 내 삶의 원동력을 만들어내는 모터들을 뿌리부터 부셔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망가진 채로 겨울을 맞았다. 기타와 몇권의 철학책들이 그 시간에 남아있던 내 삶의 전부였던 듯하다.
국악원에서 국악 강습을 받고 돌아오던 날, 눈은 정말이지 많이도 내렸다. 어깨 위로 가뜩 쌓인 눈을 맞으면서 신림동에서 영등포를 거쳐 화곡동까지 걸었다. 생물이라고는 도통 살 것같지 않은 안양천 위에다 하나 가득 토하면서 나는 잘못해서 내 안의 진리까지 토해버렸다. 오목교 위에서 바라본 서울은, 늘상 지나다니던 성산대교, 나트륨 등에서 비치던 그 서울도 아니었고 잠실 선착장에서 바라다보던 그 마천루의 서울도 아니었다. 똥물과도 같은 오염과 판자촌들, 그리고 예비군 교육에 사용하느라고 갖다놓은 과녁판들, 그런 칙칙한 서울이었다. 그곳에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고시공부를 시작하였다. 며칠 후 집을 나와 무작정 신촌의 소망 독서실로 거처를 옮긴 나는 그렇게 해서 헌법개론이니 민법원칙, 그리고 한국사니 하는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크, 가면인 줄 알고 있던 것들, 그것들은 사실 연극을 위한 가면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 줄도 모르는 것들은 그렇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나를 유지하던 그 내가 나를 더 이상 끌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 순간에, 그렇게 주인으로 내 안을 치고 나왔다. 더 이상 나는 학교 앞의 그들에게 주눅들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헌법에 대한 책들은 순간적으로 위력을 발휘했고, 나는 좀 더 당당히 교문을 들어오고 나갈 수가 있었다. 이제 내 안의 주인의 내가 아니라 내 안의 마스크들이 되었다. 2년간 숨어서 숨어서 연극이 필요한 순간에나 움직이며 숨죽여 살던 내 안의 그들은 이제 당당한 나의 주인이 되어 마스크가 아닌, 연극이 아닌, 자신의 삶을 내 몸을 빌리어 살아가고 있었다. 선배들을 만나서 고시에 대해서 묻고 고시에 붙은 이후의 진로에 대해서 물어볼 때 나는 전혀 꺼리김이 없었다. 88년, 올림픽이 준비되고 박세직이 올림픽 위원장이 되었던 그 봄, 나는 4시간씩 학교앞 독서실에서 꼬불잠을 자면서 그렇게 내 만개하여 살았다. 의욕이 돌아왔고 학교 생활은 좀 더 즐거웠다. 학점도 대학 최고의 학점을 받았다. 선배의 권유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이란" 책을 읽기도 했다. 역설적이지만 고시를 붙은 사람들이 써놓은 책들은, 사실 내 안의 마스크들에게는 실패의 전략이었다. 도서관의 사회과학 열람실에 비치되어 있던 그 책들은, 내 길은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 봄이 지나면서 내 안에 숨어있던 나는 마스크의 역할을 하였다. 선배들과 사람들을 만날 때 사실은 나는 고시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아니며 나는 세상이 변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고 내 안의 나는 강변하였다. 그러니까 역으로 보면 고시를 보던 그 내 안에 그 이전의 내가 숨어서 마스크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고시 준비를 하던 그 시절의 진짜 나를 숨겨주던 그 이전의 내가 변해서 된 그 시절의 마스크, 그것들은 나를 바라보던 내 벗들에게 내가 고시에 영혼을 판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또 다른 의미의 마스크였다. 무엇인가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감출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남의 눈이 중요한가? 전경의 눈은 중요하다. 그 눈으로부터 숨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친구의 눈은 중요하지 않은가? 적어도 전경보다 친구가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또한 그 눈으로부터 숨을 필요가 있었다.
두 개의 마스크는 이렇게 두 개의 나를 상징했다. 혹은 두세개 혹은 수십개에 달할 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는 마스크의 숫자는 말이다. 이 마스크들은 각각의 연극을 상징하며, 각각의 연극은 각각의 인생을 상징했다. 그들은 저마다 화려함으로 내 안의 심판자를 유혹하려 하였다. 내 안의 나를 가장 잘 설득한 마스크는, 실상 "나"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페이에라벤드의 "인식론의 민주주의" 처럼 내 안에는 마스크의 민주주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한 마스크도 나를 독점할 수는 없었다. 대학생이라는 입장은, 그러니까 그 시절의 대학생은 일관될 수가 없었다. 교문 앞의 그들로 대표되는 하나의 세계에 조금 더 친숙하든지, 혹은 학회와 감자국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세계에 좀 더 친숙하든지, 아니면 부모와 형제로 대표되는 가족의 세계에 좀 더 대표되든지 선택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일관될 수는 없었다. 애국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기도 했지만 문무대 교육과 전방입소를 거치면서 군은 지옥과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자아는 두 개, 세 개... 급격하게 분열되어 나갔다. 정신분열증, psychozr nie, 그렇게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고, 시대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정신분열증 시대의 연애
6월의 행정고시 일차 시험을 끝으로 나의 고시 시절은 마감을 했다. 삶에도 일정한 의욕을 다시 찾기 시작하였고 부모들도 내가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조금은 이해했다. 큰 이모부가 나의 고시시절을 가장 환영했던 상황이지만, 실상 가장 흡족해했던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언제 고시공부를 했던 사람인가 싶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마스크 생활을 하던 나는 다시 나의 주인으로 들어왔고 6개월 동안 나의 주인 역할을 하던 그 무엇인가는 다시 마스크로 돌아갔다. 자민투라고 이름을 달고 있던 학생운동 그룹은 주사파로 이론적 변경을 끝내고 학교는 통일을 얘기하는 사람이 부척 늘어났다. 아울러 교문 앞의 그들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안의 마크스는 여전히 필요했던 존재였다. 어쩌면 내가 그 마스크를 그들이 아니라면 완전히 떼어내버릴 수 있지도 않았을까? 이드 속의 기억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그런 면에서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생겨난 마스크들은 상황이 어렵다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 것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러하였다.
하여간 고시 생활을 청산하고난 나는 자본론 세권을 샀고 헤겔의 정신현상학 3권도 샀다. 영문판으로도 사고 한글판으로도 샀다. 에밀 뒤르케임도 읽고 막스 베버도 읽었다. 정말이지 미친 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스크의 모멸(?)을 당했던 내 안의 나는 그렇듯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수학 공부도 열심히 해서 실해석이니 위상수학이니 하는 책들을 읽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선배들을 만나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던 것도 그 시절이다. 결국 공부 쪽으로 진로를 잡은 것은 바로 그 시절이다. 공부 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던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특히나 선배들은 공부한다는 것의 함정이나 생활의 어려움들을 얘기하면서 대부분이 말렸다. 그 시절, 그렇게 내가 공부를 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있던 시절, 시대는 미치도록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정권을 지켜야 했던, 즉 "보통 사람"의 역할을 하면서도 수천억의 비자금의 챙겨야만 했던 그 사람에게도 있었고,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 로비도 해야 하며 또한 중소기업도 쳐야했던 사람들에게나, 그리고 밖에서는 끊임없이 부도의 위험에 시달리면서도 집에 들어오면 사장 아버지 및 사장 남편의 역할을 해야했던 사람들에게서나, 그리고 집안의 돈을 가져다 쓰면서 공부하면서도 시대의 젊은이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서나... 역설적이지만 그 시대에 정신분열증을 앓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더는 잃을래야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뿐이었다. 최저생계비와 지역 의료보험, 그리고 최소한의 주거권 및 생존권을 지켜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늘 차갑고 자신은 늘 초라할 뿐이었다. 80년대는 그렇게 모두가 같이 일종의 광기 현상으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지막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마스크의 반란을 속으로 겪어야 했던 여인들...
80년대는 정말이지 연애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애술이 발달하던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고팅이니 소개팅이니 하는 용어부터 킹카니 졸카니 혹은 혹은 일련의 용어들이 등장한 것은 바로 그 시절이었다. 재건 시대의 재건 데이트에서부터 미팅이라는 말을 "캠퍼스"란 말과 쌍을 지어서 쓰던 생맥주의 70년대까지, 연애는 은밀한 냄새가 풍겨나는 밀어의 범주에 해당한다. 이런 말들을 화려하게 만개시켜낸 시절은 바로 80년대였다. 그렇지만 연애술의 발달은 좀 다른 방향에서였다. 대학에 들어와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연애를 하려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 남자들은 "끊을래야 끊을 게 없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보다 복잡한 2중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은 물론이고 나머지 인생도 재미지게 꾸려갈 관계를 만들든지, 아니면 정말이지 끊을래야 끊을 것이 없는 "은밀한 상황"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네들의 상당 수는 연애를 할 마음의 준비가 진정으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남자들이 마음의 준비가 더 되어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대의 의식에 비교하여서는 말이다.
신소설이 얘기되던 시절, 그야말로 신세대가 한반도를 치고 지나가면서 우울했던 왜정 시절의 젊은이들은 고래(古來)를 반동(反動)으로 여겼고, 그들은 "중매결혼"이라는 제도부터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을 깨고 나간 여성들은 신여성으로 불렸지만 그들의 남성 파트너들은 유학생 혹은 동경유학생이라고 불렸다. 신여성의 파트너가 신남성의 파트너가 아니라는 것은, 향후로도 몇십년간은 더 지속될 남녀간의 세상 의식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에 의한 축적적 관계를 예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 유학생들은 신여성을 연애의 상대로 삼았지만 그들은 결국 곤지찍고 연지찍고 정경 마님, 혹은 안방 마님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본부인에게로 돌아가든지, 혹은 뒤늦게라도 본부인을 만들든지 하였고, 하여간 신남성과 신여성의 동반 관계는 시대의 벽을 깨지 못했다. 샤넬 넘버 파이브로 대표되는 미국식 고급문화의 수용자 및 찬미자로 그 시절의 신여성들은 해방 공간에서 일종의 언더 그라운드 문화를 형성하였다. 물론 시대의 틀에 수용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언더 그라운드였지, 그들이 누리는 현실관계는 일종의 유한계급 (leisure class)의 지위였다. 어쨌든 간에 고래의 중매 결혼을 깨려고 했던 그 신여성들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만신창의 패배로 끝났던 왜정시대, 그리고 다시 친일과 친미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자칫 신남성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시절의 "인텔리" 남성들의 배반, 그것의 업보였던가, 80년대의 대학생들이 겪어야 했던 연애의 황폐함이란.
대학교 2학년 그리고 삼학년 시절, 여학생들은 취직과 선을 기다리고 있었고, 남학생들은 군입대와 감옥 중에 한가지를 선택했어야 했다. 양심을 지키고 사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양심을 드러내고 꽃을 피운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것은 "빵잡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언더 그라운드의 삶을 결심해야만 했다. 시대가 그랬다. 조금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하는 순간에 여기저기 감투가 붙어버리고 몸을 사릴 줄 아는 몇 명을 제외하면 졸업은 곧 감옥으로 가는 순간이라는 등식이 80년대 중분의 졸업생들에게는 시대와 진리의 명령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싫다면 입대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리 매력이 가는 "씨뿌림"의 파트너는 아닌 셈이다. 그 시절의 남학생이라는 존재는 말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것은 대학원에 진학한 후 "석장"이라고 불르던 석사장교의 길이었다. 그속에서 공부는 더욱 더 신성한 매력을 세상에 흩뿌리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여학생들이 걷는 길은 조금 더 빨라 선을 보고 세상에 들어가는 방식이 하나의 선택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렇게 계산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허탈한 방식만이 아니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자면 많은 여학생들은 가정,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표되는 하나의 생활방식과 학점과 "캠퍼스"로 대표되는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을 통일시키고 있었다. 연애의 상대와 결혼의 상대를 구분한다는 말은, 그러므로 신세대적 가치관이 아니라 - 즉 손을 한 번 잡히면 결혼을 해야한다는 구시대의 가치관을 타개했다는 의미에서 - 학교와 가정, 혹은 사회와 식구가 제공하는 이중의 잣대를 그런대로 한 몸에서 모순없이 통일시키고자 하는 호구지책이었던 셈이다. 집안의 뜻과 자신의 뜻은 이렇게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으며, 미팅이니 연애니 하는 것들도 이 양자 사이에서, 혹은 이러한 분열증 증세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그야말로 대양의 한 점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연애를 해서 결혼도 하겠다고 생각하는 모종의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는 남학생들과 연애는 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좋은 경우가 아니면 선을 봐서 부모와 나머지 생활들을 화해시키겠다고 생각했던 여학생들의 작전의식이 충돌하는 것이 어쩌면 80년 시대의 전형적인 연애 양상이었던지도 모른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구시대의 삶의 방식은 이렇게 딸을 끊임없는 정신분열증의 상황으로 몰고 나가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고 배웠던 딸은 이렇게 첫미팅을 하는 순간에 끊임없는 거짓말장이로 변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딸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공작의 꼬리 치장이라든가 산양의 뿔은 "Le Meilleur", 최고를 기다리는 여성측의 입장정리가 끝난 다음에야 가능했던 연애 게임이며, 80년대의 연애는 이보다는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갔다. 그러니까 그나마 최적자라고 받아들여진 편에야 연애게임을 펼쳐볼 기회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보다 더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적자의 전략도 조금 더 복잡해진다. 결혼을 반드시 하겠다고 여자의 마음을 잡는 "매"의 전략과 그래도 나는 너를 최고로 위해주며 끝없이 기다리겠다는 "비들기" 전략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했다. 적자라봐야 대학생 군 중에서 적자라는 의미이지, 선이라는 또 다른 군상 중에서 적자가 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여학생은 조금 더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았던 셈이다. 연애를 해서 적자를 찾아나서는 길과 그것이 불편해진다면 언제라도 "선시장"에 나서는 길이 있었다.
의외로 많은 여학생들은 선을 봐서 부모와 자신의 세계의 충돌을 피하고 경제와 권력을 화해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자유와 신조류로 상징되던 연애와 고래와 전통으로 상징되던 중매결혼의 신세대적 충돌은 이렇게 수십년을 뛰어넘어 80년대에 슬픈 연애술을 만개시키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다소 빠른 여학생들 - 그러니까 유학을 생각하던 사람들은 - 2학년 말에 선을 보기 시작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4학년 때에는 곧잘 선을 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킹카니 하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짠짠" 문화를 만개하는 그들의 뒤에는, 그러니까 가족을 위하여라는 또 하나의 얼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 두 개의 얼굴들이 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통합되고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신분열증, 그런 시대의 정신분열증은 그렇게 80년대를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서도 눈물나는 순애보의 사랑들은 존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첫사랑"이라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눈물짓던 소녀의 감상이 아직 남아있음에 의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첫미팅이니 첫사랑이니 첫만남이니, 그러한 최초의 단상들은 또한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를 발생시키며, 슬픈 연애술과 선시장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두 개로 분열되는 인격들에 또 다른 분열만을 남길 뿐이다. 혹은 애인과 남편의 격리를 고착시킬 뿐이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이미 물건너간 첫사랑 앞에서 계산 - 혹은 분열 - 은 좀 더 현실적이 되어버릴 뿐이었다. 하여간 선이라는 결혼의 양식을 시대 저편으로 밀어버리기까지는 좀 더 많은 연인들이 이런 정신분열증적인 상태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2. 씬(scene)과 씨나리오 (sc nario)
80년대의 삶은 결국 자기 안의 수많은 마스크들의 경쟁에 다름아니었을 뿐이다. 때로는 양심과 진리의 목소리로 나타난 자기가, 때로는 교문 앞의 그들을 피하기 위한 자기가, 때로는 나라와 민족으로 대표되는 자기가, 그리고 때로는 그 어느 것과도 상관없는 그저 재미있기 위하여 모든 음모를 꾸미는 그 자기가 경쟁적으로 "자아"의 자리에 등극하기 위한 갈등 과정에 다름아니었다. 수많은 자기들은 자아를 끊임없이 분열시켜 나가며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의 시대를 살아간 것, 그것은 사실은 광주로 문을 열었던 80년대의 출발점에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누구도 그 곳에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시대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누구도 그러한 정신분열증으로부터 면제받을 수가 없었다.
그 자기들 중에는 일정한 마스크를 형성해서 언제든지 자아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전면으로 나올 수 없는, 그러므로 단순히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자아마저도 그 존재를 알 수 없던 그런 것들도 존재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의 깊은 곳을 형성한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혹은 왜 있는지, 도래의 경로도 운동의 경로도 그리고 미래의 경로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프로이드가 그것들을 Id라고 이름붙은 것은 그러한 인식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어의 이드는 그것이라는 뜻만을 가지고 있다. 불어의 a가 불특정 타자를 지칭하는 그것으로 번역되듯이 말이다. "그것", 혹은 좀 더 뉴앙스를 살린다면 "거시기"라고 표현하는 이드는 존재를 자신의 목적으로 끊임없이 유도하고 끌고 나간다. 그러한 이드를 성의 문제로 국한시켜 해석하였다고 비판한 융의 정신분석학은, 그러나 사실은 프로이드의 이론보다는 생산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프로이드는 끊임없이 "근원" 혹은 "시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적 리비도와 함께 문화적 리비도 등을 나눈 융의 이론틀은 직접적으로 분석을 한다는 면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변화를 설명하는 순간에 와서, 즉 시간을 도입하는 순간에 어려움을 낳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프로이드는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다. topique라고 표현되는 뇌의 국피에 관한 이론, 즉 자아-초자아-이드로 이어지는 구조적인 자아의 구성요소의 설명에 프로이드는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근원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자아는 어디로부터 오는지, 이드는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리고 초자아는 어디로부터 오는지의 근원의 문제에 프로이드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은 낭만적인 구조주의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순간에 구조주의가 어떠한 황폐함의 길을 걷게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프로이드를 구조주의로 국한시킨 모든 프로이드의 제자들은 프로이드의 배반자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근원의 문제들을 옆으로 밀고 80년대의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1. 태극기의 시나리오
마스크는 구체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것은, 그 일관성을 위해서이다. 추상적이지 않다면 매 순간순간 또 다른 마스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몇 개의 마스크로 족한 것은 사실은 마스크는 추상적인 일련의 존재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국가와 애국심을 상징하듯이... 각각의 상황에서 태극기는 다른 행위들을 요구한다. 흔히 바라보는 올림픽의 금메달의 태극기들은 좀 더 빨리 엎어치기를, 점 더 세게 때리기를, 좀 더 고통을 참기를 각각 명령한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하오의 태극기의 하강식은 제자리에 서서 어디론가 방향을 잡고 정지, immobile을 명령한다. 때로는 이러한 정지는 좀 더 극적이다.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알기 이전에 나는 국기 하강식마다 정말이지 경건하게 서있었고 그래도 움직이는 짜장면 배달부를 애국심이 없다고 욕하기도 하였다. 일련의 immobile들, 그것은 실상은 오르가즘이었다. 물론 나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만한 진한 애국심의 오르가즘을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경건한 의식의 수행이었으며 그 안에서 국기의 추상성은 또한 구체성으로 살아왔다. (실제로 오르가즘은 immobile을 명령한다. 이는 분명히 생물학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광주의 시민군들도 태극기를 가슴에 두르고 있었고 트럭 뒤에 올라타 카빈을 휘두르던 그들은 원 키보다 3-4음 높은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애국가와 태극기로 immobile의 오르가즘을 느끼던 광주의 그들은 또 다른 의미의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국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물론 소설 "깃발"이나 하는 곳에서 광주의 그들은 태극기의 그들보다는 반미를 상징으로 삼은 그들이었다. 아니면 광주의 코뮨적 성격, 즉 시민군 한에서의 질서정연함과 치안유지를 주제로 삼는 광주분석가들에게는 파리가 맑스에게 주었던 느낌처럼 일종의 코뮨의 가능성, 즉 해방구의 존재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어느 것이 독점적으로 옳지는 않은 것이, 사실은 그 어느 것도 틀리지 않은 것이, 그것은 광주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분열증적 구도 때문이다. 태극기의 군인과 태극기의 시민의 대결, 그것은 처음부터 왼팔과 오른팔의 싸움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내에 계급적 갈등이라든가 혹은 한반도 자체의 모순이라든가 하는 덩치 커다란 문제들이 무한히 개입되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광주는 기본적으로 뇌의 "탈골증" 혹은 명령구조에 생겨난 고장이다. 물론 그러한 고장들은 사실은 몸에 존재하는 고장에서부터 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정신분열증적 정권의 시작에 놓여있는 존재적 모순이라고 부르고 싶다.
Scence, 광주라고 이름붙여진 무대는 최소한 두 개의 시나리오, 그리고 최소한 두 개의 프레임이 부딛히는 장소였다. 시민군이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는 최소한 광주의 진압군의 지휘자들이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는 극단적인 배척점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씬의 두다른 일련의 배우들의 상징은 동일하였다. 예비군복과 개구리복이라고 부르는 공수부대 유니폼의 충돌, 그것은 태극기의 구체적 현상태, 즉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태극기가 구체적으로 분열해나간 두가지 모습이었다. 현역 군인은 언젠가 예비군이 되고 공수부대원도 돌아가면 시민이 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은, 그러한 태극기의 변증법은 광주라는 장소에서는 운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석화되고 고정되어 자신의 역사를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태극기에 대한 다른 해석이 존재할 뿐이었다. 태극기에 대한 두 개의 다른 해석, 그것은 실상은 오랜 근원을 가지고 있다. 일장기와 부딛히던 왜정시절, 혹은 6.25라는 또 다른 형제와의 싸움 이후로 태극기는 비록 추상성의 구체화라는 과정을 거칠 지라도 광주만큼 극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건의 길고도 긴 독재 과정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지키는 쪽의 애국심과 얻으려는 쪽의 애국심으로 분할하여 부렸다. 그러니까 따지고 들어가면 80년대에 겪을 수밖에 없던 정신분열증의 근원은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자기들이 일정한 메카니즘을 거쳐 하나의 자아가 되는 민주주의 장치의 결여는, 위로부터 던져진 태극기에 자신일 맞추고 적응해나가는 양상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여간 이렇게 분할되어 버린 태극기는 더 이상 애국심을 상징하지도 단합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를 덜 사랑하여서도가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상징에 대한 권위에 더욱 더 저항적이어서도 아니다. 두 개의 태극기가 만들어낸 비극, 그 속에서 죽어버린 것은 사실은 우리를 한 나라라고 만들어주는 무엇인가의 "통합적 권위"가 찟어져버린 것에 다름아니다. 태극기는 더 이상 마스크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태극기를 숨겨두고 사는 사람이 없어진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게 태극기가 찢어진 자리에 지역감정이 움직이는 것은, 실상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광주라는 장소는 그렇게 모든 통합을 불살라없앤, 그야말로 정신분열의 근원을 형성한 장소로서 80년대를 움직여나갔다. 그후로는 태극기와 태극기가 부딛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노동자 혹은 농민들은 태극기 대신에 만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군인 대신 현장으로 출동한 전경들은 "공권력"이라는 말을 국가라는 말대신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광주 이후로 태극기의 오르가즘 대신에 만장의 오르가즘이 빈공간들을 매우기 시작하였다.
2. 만장의 시나리오
태극기의 태극과 건곤이감은 확실히 시험에 나올만한 주제들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던 상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하여 급조된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태극기라는 상징성을 획득한 것은 왜정과 전쟁, 그리고 계속되는 외국과의 대타(對他) 관계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태극기가 그 상징성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태극과 건곤이감이 상징성을 의미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그러니까 태극기에서 나라와 민족,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을 읽어내는 것들은 이제는 자연스러운 얘기이며, 태극기를 보면서 유관순 누나니 이승복 어린이니 혹은 황영조까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태극 자체를 보면서 나라를 떠올리는 것은 멀고도 먼 일이다. 건곤이감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 궤들은 내게는 나라보다는 주역을 상징한다. 혹은 미팅을 나갈 때마다 궤를 짚어 보고 "해석 주역"을 가방에서 뒤 Ь咀만?운세를 생각하던 광주 친구의 얼굴을 상징한다. 그러한 면에서 태극의 상징은 죽은 상징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위하여 해마다 소나무를 심고 활엽수들을 뽑아준 조선 시대의 선비들만큼이나 말이다.
광주 이후로 더 이상은 갈등의 상징으로 등장하지 않게된 태극기를 대체하며 80년대 중반 이후로 피어오른 만장은,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이며 확실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죽은 자를 보내기 위해 사용되었던 만장은 깃발과 걸게그림, 혹은 판화와 벽화 등으로 자신을 운동시키며 구체적인 상징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부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만장 한 장은 명확히 보여주고 나타내어주고 있었다. 태극기가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던 데에 배해서 만장은 이미 해석된 상징들이다. 아이젠베르크 감독이 "전함 포템킨 호"에서 사용하였던 것같은 모자이크 기법은 찬란히 꽃을 피워, 굵은 팔뚝이나 질끈 동여맨 머리띄, 그리고 해석을 배제하는 몇가지 문구들로 구성된 만장은 태극기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시나리오이다. 대학교 정문이나 명동 성동이나 각 작업장, 그런 곳이 만장과 함께 일순간에 해방구로 바뀌어나가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만장은 구체적인 장소를 의미하고 있었으며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하고 있었다. 만장을 그리는 사람이나 만장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들은 맛揚繭遮?상징체에 의해서 한 몸으로 통합되고 통일되었다.
그러니까 80년대의 이 사회구성원들은 유신 시대처럼 하나로 묶일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만장을 보고 오르가즘을 느끼는 일련의 군상과 만장을 보며 불쾌함을 느끼는 일련의 군상으로 갈려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안에도 해석의 어려움들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 안에서 민족의 모순을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똑같은 만장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계급을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도 또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중소기업을 매판자본에 대항하는 "민족 자본"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독점 자본 하에서 허덕이는 "중소 자본"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을 "민족 애국자"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지식인 계층"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해석의 다양성을 주지못하는 상징은 일단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태극기로 대표되던 "단일"의 유신식 상징태는 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그 속에서 여러 가지 만장들은 끊임없이 분열된 자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만장은 미래를 여는 문으로 나타났으며, 만장의 문을 통하여 사람들은 문득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미 만장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군상들은 해방된 곳이나 혹은 적어도 이보다는 나은 어떤 상황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보와 반동은 확연하게 구분되어 버린다. 만장은 그렇게 구분하며 자신의 시나리오들을 창출해 내었다. 그리고 그 만장을 들었던 사람들을 "재야 지식인"이라고 시대는 불렀다.
하여간 만장이든 태극기이든 그런 것들은 거대한 상징체이며 언제나 masse, 대중을 상정한다. 혼자 있든 여럿이 있든 그들은 항상 대중이었으며, 그것은 민중일 수도, 시민일 수도, 그리고 반란군일 수도, 혹은 난의 폭동군들일 수도 있다. 혼자 있을 때는 독서하고 여럿이 있을 때는 투쟁하였다. 그것이 만장의 시나리오이다. 사색하는 개인의 존재는 어느 곳에도 있을 수 없었지만, 사색한 개인은 기회주의가 되던지 우을증에 걸리던지 아니면 정말 정신분열증에 걸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3. 군화의 시나리오
이정재니 임화수니 하는 사람들은 꽤 무서웠던 사람들이었던 것같다. 정치와 폭력을 결합시키는 데 나름대로 성공하였던 사람이고 부를 축적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썬그라스로 대표되는 박정희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격이 낮은 축이었지만 하여간 80년대의 군화도 그렇게 깡패 청소부터 시작을 하였다. 민간인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이었지만 정화라는 열풍 앞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싹쓸이 앞에서는 그들도 힘없는 민간인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든든하였던 그들의 조직도 그들을 군화발 앞에서 지켜주지는 못하였다. 하여간 광주를 시발로 그렇게 문을 열은 80년대는 그야말로 군화발의 10년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화 - 걸음을 걷기 위한, 군인이 걸음을 걷기 위한 그 상징들은 그러나 폭력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군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시대는 너무나 살벌하였다. 이미 옷을 벗은 군인들은 "공권력"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었다.
Pouvoir publique, public power라고 정의되는 공권력이라는 단어의 역사는 사실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위로 올라간다. 불란서 혁명을 치른 직후 "공화국" (R publique)라고 이름붙인 체계는 보다 굳건한 권력의 기반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왕당파로부터 공화국 체계 자체를 지켜내야 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짐은 곧 국가"라는 근세국가의 체계를 씻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시민" (Citoyen)이라고 불렀다. 삼부회의 각 위원들은 서로를 시민이라고 부르며 적어도 상징적인 평 등을 만들어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의회는 이러한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내어 "공적의 의사"를 만들어내었다. 로베르삐에르의 폭권 정치도 이러한 의회의 표결, 즉 다수결을 등에 업고 이루어진 일들이다. 이 속에서 개寬?전체의 관계는 상당히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와 홉스에 의하여 시작된 일종의 현대성들은 초기에는 왕의 이해 (l'Int r t) 즉 추상 명사로서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과 동일한 것으로 설정하였다. 그렇지만 시민 시대에는 이해는 이익들 (les int r ts) 즉 복수로서의 이익들과 일치하지 않는 면이 존재하였다. 평등은 이내 원칙적인 평등의 전제 하에서 형평성으로 변질하여 나갔고, 가난과 질병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초기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여인과 아이들은 임금 인하에 의한 이윤율 보전을 위하여 지금의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노동을 수행하였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교육과 공건보건을 통하여 최소한 노동자 계급이나마 재생산해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는 공권력의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제공하였다. 맹세컨데 공권력이라는 단어는 천사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도움의 손으로 존재하였던 것이 서양 근대사의 역사이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현실에 그나마 최소한의 생계마저 유지하는 공공 장치가 움직여나갈 때, 이는 공권력이 개입하였다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여성의 선거참여를 그렇게나 미루어왔던 나라들이건만 공권력은 사회보장 제도들로 변하여 나갔다. 연극이 영화에 밀리며 사라져갈 때 가난한 연극인을 도운 것도 공권력이었으며 - 물론 한편으로는 연극 자체의 정신을 변질시키는 면이 없지도 않다 - 누구든 부의 불균등에 의하여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며 공공학교를 설립하던 것도 공권력의 힘이다.
이러한 공권력은 80년대에 공폭력과 비슷한 단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저기 학교에서 학생을 끌어갈 때도,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을 해산시킬 때도, 심지어는 정당의 농성이라든가 전교조의 선생님을 끌어갈 때도 개입한 것은 공권력이라는 전혀 공적이지 않은 폭력이었다. 실제로 군화발이 상징한 것은 이러한 폭력이다. 겹으로 형성된 이러한 폭력 구조는 어쩌면 정신분열 시대의 유일한 진리였을지도 모른다. 숨기고 감추지 않으면 폭력이 개입하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왜정 시대로까지 올라가는 뿌리 깊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면서 사람들은 쉽게 적응을 해나갔다. 두 개든 세 개이든 마스크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은, 이러한 공권력의 존재하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었다. 하긴, 공권력이 사람의 생각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아니었다. 생각이야 어떻게 하든간에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건드리지는 않겠다는 것이 80년대 정권의 기본 속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속으로 속으로 공포를 내재화시켜 나갔다. 한편으로는 광주와 또 한편으로는 80년대 내낸 계속되었던 조작 학생운동 사건이나 최류탄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2중 혹은 다중적 인격을 끊임없이 강요하였다.
4. 국가보안법의 시나리오
그렇지만 80년대 군화발의 근저에 있었던, 진짜 아버지는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그것은 모든 법을 초월하여, 실정법으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군림하고 있었다. 잡범과 사상범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국보법을 위반하였는지 아닌가였다. 국가보안법은 사실은 형제 간의 갈등을 근거로 하여 움직이는 법이다. 북한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형제는 분명 배다른 형제는 아닌, 같은 부모 하의 형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북으로 규정하는 아버지 아닌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가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의 정식에서 처음으로 생겨나듯, 우리에게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는 국가보안법을 기준으로 해서 생겨나고 유지되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하지 않아야 할 일은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라든가 집회와 결사의 자유라든가, 다 좋지만 일단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사상은 가져서는 안된다. 그것을 공공연하게 떠든다든가 하는 일은 더욱 곤란하다. 동시에 금서를 소지하거나 읽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붓아버지보다 더한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여 고통을 주는 아버지, 혹은 프로이드 식으로 감정의 양면성이라고는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아버지는 괴롭히고 학대하는 아버지였다. 그러한 면에서 국가보안법은 전형적인 "가학자" (pers cuteur)에 해당한다. 아, 그렇지만 어쩌랴. 가학자-피가학자 (pers cuteur-pers cut )의 관계는 전도된 사랑을 발생시키는 정식이니 말이다. 가학이 심하면 심할수록 피가학자는 가학자를 사랑하게 되어있는, sado-masochism의 정식이 그곳에 움직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국『맘획萱?약속을 만들어내었다. 나라를 지켜주겠다는 것은 곧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국가보안법의 대상이 될 때에는 처절하게 증오하던 법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중의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첫째로는 일단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들이다. 두 번째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이 면제되었다는 것들이다. 끊임없이 북한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났으며 북한이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국가보안법은 더욱 더 약속의 존재로 다가왔다.
분열증과 함께 피가학성 변태, 이런 복합체들은 시대의 조류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그 퍼짐은 또 다른 퍼짐을 만들어내었다. 한으로 승화될 수도 없고 혁명으로 실현될 수도 없는, 이러한 리비도의 집중은 안으로 안으로만 집중되어 오갈 데 없는 암세포처럼 커지기만 하였다.
I. 들어가는 말
1. 너는 네 세상의 주인인가?
왜 세상을 사는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목소리가, 해묵은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이다. 왜 세상을 사는가? 왜 이런 세상을 기꺼이 죽어버리지 못하느냐고 질문하는 쇼편하우어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고, 자살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란 뒤르케임이 질문이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녘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듯하기도 하다.
치료의 가망없는 암에 대해서 저항하지 말고 기꺼히 죽으라는 - 혹은 그만큼 주어진 시간을 기꺼이 즐기라는 - 어느 일본의 의사의 목사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삶에 대한 의학의 진보를 무시하는 전혀 비과학적인 발상이라고 질책하는 의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왜 세상을 사는가?
나의 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목소리와, 인간의 이름이라는 것은 모래 위에 써넣은 글귀일 뿐이라 파도가 지나가면 사라질 개념일 뿐이라는 푸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그리고 인간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존재라는 베블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다.
왜 세상을 사는가?
아직도 귀에 잔잔한 이 고민은 사실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 나의 벗들과 나누었던 많은 고민들의 한 구절일 뿐이다. 그 시절, 등나무가 들려져있던 학교의 유일한 벤치에서, 일찍 등교한 아침 시간이나, 점심을 먹고 흐믓하게 그나마 남아있는 고등학교의 유일한 자유 시간이라도 음미하고자 했던 그 시간이나, 이제는 집에 가도 좋은 방과 후의 그 시간에, 그 등마무 아래에서 제일 많이 얘기했던 고민은... 왜 세상을 사는가? 왜 나는 안중근 처럼 세상을 향하여 일순간에 몸을 던져 버리지 못하고, 왜 이승복처럼 채 피어버리지도 못한 몸을 살르며 한마디 담론을 만들지도 못하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왜 김구처럼 한방울 총알에 모든 아쉬움을 싣고 모든 것을 던져보리지도 못하고 나는 살고 있는가... 그러한 고민 방울방울 던져넣었던 질문, 그 고민 구석구석 찔러넣었던 질문, 나는 왜 사는가?
이런 길고도 긴 고민에 하나의 답을 던져주는 담론이 있었다. 그것은 "주인 의식" 혹은 자신이 삶이 주인이 되라는, 전두환 시절에 사회가 만들어준 답이 있었다. 아니, 그 뿌리는 유신 시절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 너는 너의 주인이 되어라.
그것은 확실히 살것인지 말것인지의 질문과 확연히 괘를 달리하는 또 다른 질문의 축이었다.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끌어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끌려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공부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매일매일 살것인지 말것인지를 고민하던 그 시절의 나에게 던져지던 그 질문의 답은, 너는 너의 주인의 될지어다라, 일종의 교리와도 같은, 도그마처럼 살아오던, 그리고 학력고사를 앞둔 나에게 공부는 일단 하고 볼지라고 살아오던 그 진리는, 너는 네 세상의 주인이 될지어라.
2. 나는 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정말이지 대학을 들어오면 모든 것을 얻을 줄 알았다. 그 시대의 사회가 나에게 만들어 준 꿈은, 대학만 들어가면 너에게도 계획을 만들 수 있는 - planning - 할 수 있는 힘과, 너의 삶을 꾸릴 수 있는 추진력의 힘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획득의 권리"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들은 말은... 너희들은 기득권이다... "기득권"이라는 단어, 그렇게도 내가 주인이고자 했던 세상에서, 그렇게도 내가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면서 도달한 그 사회에서 최초로 나에게 던져준 말은 "기득권"이라는 단어였다. 나의 삶,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가고싶은 것, 그리고 내가 사는 이유들, 그런 단어들과 뭉뚱거리듯이 움직인 그 단어는, 바로 기득권이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꾸려나갈 수 있어 그나마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해도 좋은 것을 "조화"롭게 꾸려나갈 수 있다고 사회가 인정해주는 순간이었다. 그순간, 그런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던 그 순간, 세상이 나에게 던져준 이름은, 적어도 너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바로 "기득권"이라는 그 단어였다.
1996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이름붙여진 일련의 과정을 개근한 사람이 바로 그 시절의 나였다. 뭔지 세상에서 나에게 준비시켜준 것이 있다면 해야한다고 믿었던 것이 바로 그 시절의 나였다. 학점과도 무관하고 진로와도 무관하며, 학교 측에서 명목을 맞추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그러니까 왜 내가 그 장소에 나가야할지도 전혀 모르면서도 그냥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이, 바로 삼일간 계속된 오리엔테이션을 개근한 그 시절의 내가 그곳에 나간 이유이다. 그러나 기득권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들은 곳도 바로 그곳이다. "당신들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라..."
나는 그 얘기들은 들으면서 왜 세상을 사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연세대학교 구 경영관 강당에서 기득권을 가진 연세 상경인이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할 일들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운전도 배우고 증권 투자도 하고 세상도 경영하면서, 그 일련의 얘기들은, 뿌리깊이 세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골똘히 고민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이제 세상의 주인이 되었는가? 이젠 기득권을 가지었던 말은, 즉 이제 취직할 고민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일은, 당신이 등록금만 착실히 내면, 당신이 사고만 치지않으면, 당신 밖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대학 졸업장을 갖게 되었다는, 그러한 일련의 담론... 나는 그 순간 문득 나는 남의 잔치에 와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남들의 세상, 남들의 가치, 남들의 정의 속으로 문득 깊이 들어와 버렸다는 세상을 하게 되었다.
3. 썰렁함에서 공주병으로
긴 공백을 뒤로 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 나의 오리엔테이션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순간이다. 86학년도에 대학을 입학한 이후 거의 10년이 흐른 96학년도에 나는 서울로 돌아왔고, 이젠 더 이상 내가 신촌의 감자국집들을 전전하며 소주를 퍼붓던 시절의 학생도 아니며,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한테 용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기도 어려운 어른 (그야말로 "으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들이 "썰렁하다", "뜨다" 등의 단어들과 함께 신종 흑사병이라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공주병"이라는 단어였다. 물론 이 말의 성적 단린들을 씻어내기 위해서 왕자병이라는 말이나 혹은 백마병이라는 말이 맛뵈기로 붙여다녔던 것들도 사실이다. 뭔가 나의 전공에 관한 말들을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게슴치레한 눈으로 떠들면 사람들은 나에게 "썰렁하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때 내게 들었던 생각이 어려운 애기는 썰렁하다고 서울의 사람들이 표현하는구나... 4년만에 서울로 돌아온 나는 내가 처음으로 일상 용어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그 단어를 그렇게 이해하였다. 향후에도 썰렁하다는 말은 어렵다는 말과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때로 텔레비젼을 보면서 근근히 썰렁하다는 표현을 보면서 나는 때로 내가 이해하는 "썰렁하다" = difficult의 공식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썰렁하다" = 지겹다. 썰렁하다 = 듣기싫다. 썰랑하다 =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썰렁하다 = 잘난 척 하지마라. 일련의 의미, 즉 사회적으로 정의된 활용법들이 "썰렁하다"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렇게 근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내가 썰렁하다라는 단어의 사회적 용법을 이해한 것은 masse, 즉 대중이라는 범주의 움직임을 이해한 것과 동일한 과정이다. 썰렁하다는 대타적 관계 중에 특정한 일대일의 관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즉 1:1의 관계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용법이다. 적어도 썰렁하다는 단어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1대 다수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고, masse 앞에 서있는 어느 주체가 무엇인가 전체 분위기의 흐름을 거스리는 순간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 앞에서 아무리 잘난 척을 하고 떠들어봐야 그는 나에게 "썰렁하다"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건 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 청자, 즉 듣는 사람이 다수일 때 또다른 화자에게 그 청자 중의 누군가가 직접 화자가 되어 그 다수의 의견을 표명할 때 "썰렁하다"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썰렁하다는 단어의 사용법은 1:1의 대화가 아니라 다수와 한명의 대화 속에서 그 다수 중의 누군가가 다수, 즉 masse의 의견을 담보하여 던질 수 있는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썰렁하다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사회성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청중이 웅변자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요, 다수가 개인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요, 다수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던질 수 있는 말이다. 즉 저 앞에 있는 웅변자에게, 혹은 저 앞의 리더에게, 그 뒤에 그들의 이름으로 묶여져있는 그들의 우리의 이름으로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이 "썰렁하다"라는 말인 것이다. 한마디로 침묵의 그들이 그듥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하는 개인에게 던질 수 있는 거부의 단어가 "썰렁하다"라는 말인 것이다. 청중 중의 일인이 청중의 이름으로 화자에게 던지는 거부의 단어, "선생님, 썰렁한데요!"
오랫동안 우리는 한 개인에게 묶여있던 사회이다. 우리의 아버지라고 기꺼이 이름받고 싶었던 - 혹은 국부라고 이름불리고 싶었던 - 이승만의 사회로부터 박정희, 전두환... 우리는 단 한명의 개인과 나머지 그들, 즉 masse라는 사회 양식을 끌고나갔던 사람이다. 물론 이 대중에게 얼마만한 선택권이 있는지는 차지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인들이 단 한명의 인간, 즉 "고정점"에 대하여 느끼는 감명은 남다를 법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90년대, 이제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70년대, 유신 시대에 했다면, 정말이지 물고를 치를 일이다. "저 푸른 하늘에..."의 아침 이슬이나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의 친구가 금지곡이라는 것은 시대적 흐름과 메시지의 상징성을 고민해보면 알만도 하겠지만,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의 고래사냥이나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의 미인마저도 금지곡이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자, 그 시절에 누군가 썰렁하다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보자. "잘 살아 보세"라는 아침마저 귀전을 울리던 새마을 주제가나 혹은 "근면 자조 협동"으로 대표되던 새날의 논리에 대해서 썰렁하다는 말을 했다고 해보자. 그야말로 물고를 치를 일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썰렁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 "몸조심 입조심 보약보다 낫다"라는 것을 철썩같이 밑으면서 20년동안 떠나버린 내 님에 대해서 울부짓으며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어른들이다. 그들은 아침이면 눈을 뜨면 보이는 시대의 버젓함에 대해서 잠잠히 침묵하고 "이미 가 버린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젖은 손이 애처로운" 사람을 위하여, 닫힌 문을 바라보며 젓가락도 두드리고 애간장도 태우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썰렁하다"라는 말은, 혁명이다.
다수가 개인에 대한 혁명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담론에 박수쳐주지는 않겠다는 - 민은 박수부대가 아니다 - 혁명의 선언이다. 이제 다수는 일 개인의 폭력에 대하여 할 얘기를 가지고 있다. "썰렁하구만..."
썰렁함의 얘기는 또 다른 해법이 있다. 그것은 "떴다"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제기하는 해석이다. 보다 현실적인 얘기이다.
여기에 다수가 있다고 하자. 그는 무엇인가 다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즉 그는 무엇인가 그들이 아닌 또다른 어떤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고 하자. 이런 상황을 표현할 때 "뜨고 싶어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하고" 그 무엇인가가 대중이 원하는 기대하는 혹은 박수칠만한 요소가 있을 때 그는 뜰만한 필요조건을 가진 셈이다. 노래를 잘한다면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셈이고 춤을 잘춘다면 부수조건을 갖춘 셈이며 재미진 얘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그나마 봐줄만한 구석이라도 있는 셈이다. 하여간 떠야 한다. masse, 대중이라고 얘기되는 그들에게서 나오려고 한다면 말이다. "달라야 산다"라는 책의 제목들은 경제적인 기업 운영과정을 얘기한 책이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다르다는 뉴앙스만을 챙긴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은 떴다. 하여간 다르고자 하는 개인은 뭔가 다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이러한 과정에서 다름을 인정받은 사람은 뜬다. 대중이 인정해서 떴건, 대학생이 인정해서 떴건, 고등학생이 인정해서 떴건, 혹은 아줌마들이 인정해서 떴건, 현실적인 뜸의 조건은 판매로 연결되고 중학생이 사든 많이만 팔리면 우리는 떴다고 인정해준다. 물론 뜰려고 했던 개인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데 실패했을 때 개인은 주저없이 대중의 용어로 한마디 평가를 해준다. "썰렁했어."
자, 드디어 김자옥의 얘기로 들어가보자. 김자옥은 한마디로 맛간 배우였다. 이제는 나이도 먹어 그야말로 아이돌 스타도 아니고, 이제는 시대도 지나서 남진과 나훈아의 한판 승부가 벌어지던 그 시대도 아니고, 얼터너티프 락과 7음계 9음계, 이도저도 아니면 랩이라도 맛갈지게 해야 뜨는 시대이다. 그 시간에 김자옥은 그야말로 공주병을 들고 나와서 떴다. 한마디로 떴다. 썰렁함과 뜸의 경계에서 그녀는 화려하게 떴다. 김자옥이 뜬 것인지 공주병이 뜬 것인지 모르겠지만 - 이는 좀 더 논의를 한 후에 얘기하자 - 하여간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 김자옥은 정말이지 떴다. 아울러 태진아 아저씨도 떴고 - 매니저이니까 - 김자옥을 섭외하는 데 성공은 대부분의 방송이 다 떴다. 대중은 그에게 "썰렁했다"는 평가 대신에 "언니"라는 환호를 기꺼이 던져주었고, 이제 공주병은 "병"이라는 단어가 주는 음침함을 떨쳐내고 한마디로 떠버렸다. 하긴, 지금 같은 시간에 공주병이 썰렁하다고 말하면 그 말은 하는 사람을 썰렁하다고 볼 만한 시간이다.
4. 그러나 나는
하여간 나는 세상을 texte, 즉 뭔가 읽은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박정희 시대도, 전두환 시대도, 그리고 이후의 시대도... 뭔가 읽은 만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알렌이 바라본 맨하탄도 혹은 아라공이 바라본 움울한 파리도 모두 읽은 만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면에서 나는 하여간 떠야한다는 시기의 세상도, 그리고 공주병이 뜨는 1996년의 서울도 모두 읽을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996년 11월 17일 저녁 9시, 나는 부천에 살고 있는 - 전세로 살고 있는 - 박상순이라는 인천대학교 불문학과 강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짧게 설명한 후 얘기는 된다는 대답을 받았다. 전화를 끊고 5분 후에 나는 부천행 택시에 몸을 싫었다. 순대국 한 그릇과 머리고리 한 접시, 그리고 대학 노트 한 권을 놓고 한동안 애기를 한 두사람은 뭔가 써보기로 결정을 했다. 경제학도인 내가 생각한 세상 읽기와 연극을 기호학으로 읽는 것을 업삼은 두 사람이 뭔가 써보기로 결정한 셈이다. "공주병"에 대해서 한마디 하기로 결정을 그렇게 쉽게도 보았다. 아마도 "썰랑한 해프닝"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쓰고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하지만, 하여간, 허지만, 한데도... 그래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그래도... 역접을 할만한 한국말은 풍부하다. But, anyway의 영어나, mais, cependant, pourtant의 불어. 그 어느 언어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단어만큼은 풍부한 것이 우리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말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는 인색한 것이 우리 나라의 상황이다.
나와 박상순씨가 합의한 것은 공주병에 대해서 "그러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주병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기꺼히 웃는 그들에게 대해서 "그러나"라는 질물을 한 번 던져보고 싶은 것이다. 이 뒤의 글은 주로 직접 초고를 담당한 "우석훈"의 시점에서 쓰여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은 공유되어 쓰여질 것이다. 두사람 한몸...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II. 연극성과 무대 : 주인공과 조연 그리고 관객
1. 80년대의 연극들
진리가 존재하던 시대
세상에는 확고한 진리가 존재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유일한 존재일 것인가? 만약 그것이 유일하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해묵은 질문들로 일기장 한구석을 가득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꺼이 생각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있는지 없는지, 하나인지 여럿인지, 변하든지 변하지 않든지, 이제는 나의 관심 밖의 문제일 뿐이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그런 질문들을 세월의 흐름 속에 묻어버리듯이 나도 그런 문제들을 쉽게 묻어버릴 수 있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진리가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아침에 오는 조간신문이 겨울이 되면서 조금씩 늦게 오기에 짜증이 난다는 현실보다도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한 면에서 나는 내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진리를 둘러싼 존재론적인 고민도, 진리의 현상태에 등장하는 의무론적인 고민들도, 그리고 변하지 않을 진리와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표상 간에 발생하는 긴장들에 대해서 고민할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내가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민들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 혹은 자기기만에 해당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그러한 의무를 상기시킬만한 존재도, 그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20세기말을 헤쳐나가는 한 군상 중의 한 명일 뿐이다. 이러한 면에서 나의 인생 시나리오는 철학자의 인생 시나리오와 확연히 다른 궤적을 갖게 되었다. 뭔가 알아야 한다던 내 안의 명령은 어느덧 뭔가 알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로 바뀌었고, 그동안에 내 인생의 시나리오도 엄청나게 변해버렸다. 시나리오가 변하면서 바뀐 일은 엄청나게 많다. 이제는 내 안의 세계에서 엄청나게 정의로울 수도 있다, 알고자 하는 고통을 저당잡힌 이후에, 그래도 이렇게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해서 때때로 회의하고 때때로 비판할만한 일말의 자세라도 유지하는 것이 어디냐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웃음을 지어주는 것이 전보다 훨씬 쉬어졌고 나를 괴롭히지 않으려는 사람을 나도 괴롭히지 않겠다는 피동적인 자기 안정의 구조도 갖추게 되었고, 나와 무관한 사람은 무관한 사람일 뿐이라고 내 안의 세계에 침잠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이제 곰곰히 생각하면 대학시절 나를 끊임없이 따라 다니는 "정의"와 혹은 "자유"니 하는 단어들은 그 당시에 나에게 주어졌던 시나리오였다. 어쩌면 그러한 시나리오는 시대가 나에게 던져준 것이었다. 하여간 대학에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익숙해져야 했던 것은 폭죽터지는 소리를 내며 - 제대로된 불꽃놀이 구경을 당시까지는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 매케하게 코와 눈을 자극하던 소위 SY44와 지랄탄에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또한 그보다 보다 현실적인 일은, 아침에 가방을 열어보여주면서 학교 정문을 통과하고 저녘에는 다시 그 가방을 열어보여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마치 내 머리 속은 이렇게 비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몇 개의 수학식이 적혀있는 경제원론과 회계계정들이 어지럽게 널려져있는 회계원론이니 하는 책들, 그리고 영어 어휘 공부책들, 그런 것들을 나는 정문의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열어보여주었다. 꼭 그때마다 빤히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머리 속을 열어보여주듯이 가방 속을 열어보여주면서 딱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머리를 뒤지듯이 책갈피에 끼어놓은 "찌라시"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광경을 피해서 먼곳을 바라보기에도, 그렇다고 그 가방의 "검색"을 정면으로 쳐다보기에도... 하여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한편으로는 증오를 그리고 그 증오마저도 감추는 멍한 눈으로 그들의 눈과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내 안의 반발을 삭이는 유일한 길이었다. 매일 저녘 500원짜리 생두부와 500원짜리 막걸리를 마시러 신촌을 헤매던 것은, 그 자그마한 비밀이라도 찾아내려는 통과오례와, 그리고 그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고 - 사실은 있지도 않은 비밀인데 - 책을 가방에 넣지 않은 모든 것을 삭이려는, 또 다른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 시절의 무엇인지 그들이 나에게서 찾으려는,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찾으려던 그것은 나에게 진리라는 이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진리는 그렇게 은밀한 것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하는 그 무엇인가는, 그러나 매일매일 아침이나 저녁이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다. 그러니까 그들은 나에게 철학을 처음으로 가르켜 준 사람인 셈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철학원론"이니 "철학사"니 공부하기도 전에 미리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 시절, 세상, 아니 그들은 매일매일 나에게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켜주었고, 그러한 진리는 비밀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은밀한 향내를 풍기는, 그리고 속내 깊숙이 감추어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조그마한 단서라도 그들에게 제공하는 날에는... 그렇게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의 전개과정"이니 "세계철학사"니, 한경전이나 세철이라고 불르던 그런 책이 어쩌다 가방에 끼어들어가는 날에는 이건 교재라는 둥, 되지도 않는 변명을 정말이지 간절히 욾어야했다. 하여간 막스 베버를 공부하겠다던 친구가 며칠 후 등교길에서 줄경을 치루었던 시절이다. 텔레비젼에서는 원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여대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캠퍼스 드라마가 오공의 서슬퍼런 시절에 방영되던 그 시간, 나는 성년의식 대신에 감추는 법을 먼저 배웠다. 있지도 않은 진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 진리를, 그리고 알 수는 더더군다나 없는 그 진리를 감추는 법을 나는 아는 법보다도 먼저 배워버린 셈이다. 하여간 80년대의 진리는, 그래도 엄연히 존재했던 시대의 진리는, 내가 알고 싶든 모르고 싶든 개의치 않고 그렇게 감추는 법으로 먼저 다가와버렸다. 광주니 5공이니 하는 나와는 멀고도 멀었던 사실들, 그렇게 추상적이고 멀고도 먼 사건들과 상관없이 내가 배운 것은 감추는 법이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감추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 우리네 속내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절에 회의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배부른 지식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었다. 너무도 확고하게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각인당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그토록 찾아내고자 하고 있었으므로...
감춤의 연극
그 대학의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우리 모두는 연극을 하였던 셈이다. 누구도 자기 얼굴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Mask... 희랍 연극의 시작은 가면극이라고 연극공부하는 사람이 얘기해준 것같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는, 적어도 두 개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는 대학을 졸업할 수도, 사업을 할 수도, 그리고 만만한 월급장이도 될 수없던 시절, 그 시대에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얼굴들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멀쩡하게 대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검문에 응할 때 보여야 하는 얼굴, 왜 수업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수업을 하던 선생님들에게 보여야 하던 얼굴 - 자는 얼굴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 , 집에 돌아와서 부모에게 보여야 하는 얼굴, 그리고 또 미팅이니 연애니 하는 순간에 꺼내보여야 하는 얼굴들... 그것들은 모두 마스크이다. 각개의 마스크를 가슴 속에 품고 있다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적절히 꺼내쓰는 것이 80년대라는 시간을 넘어서면서 사람들이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꺼내도 꺼내도 또 아직 숨겨놓은 마스크가 존재하는 시간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지우고 싶다"는 구절들은 어쩌면 그 80년대의 마스크의 행렬들을 위하여 준비된 언어들인지도 모른다.
각개의 가면은 각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겪어보지 않은 사건을 위하여 미리 마스크를 준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 셈이다. 또한 각개의 가면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름대로 숨기기 위한 기능을 마스크마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의 가면을 꺼내드는 순간, 시작되는 것은 새로운 "역할 게임" (role playing)이 시작되게 된다. 각각의 마스크는 각각의 상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각 순간의 인격을 대표한다. 교문 앞의 그들 앞에서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순박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적어도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만한 주변머리도, 그리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표상을 읽어낼만한 지혜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비교적 성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해 내었다. 적어도 그들 앞에서 나는 그런대로 수준급의 배우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몇 번 시비가 붙던 예외를 잊어준다면 상당히 수준급의 연기를 한 셈이다. 그러한 연기가 더욱 더 빛을(?) 발휘한 것은 학교 앞이 아닌 시내나 혹은 다른 학교 앞에서이다. 많은 경우 내 주위의 학생들이 검문을 당하는 경우에도 나는 상당히 많은 순간들을 무사히 통과한 적이 많다. 어디든 지나가기만 하면 꼭꼭 학생증을 제시당하고 가방을 열어보인다고 불편하던 친구들에 비하면 나의 마스크는 적어도 그런대로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고 배웠던 어린 시절의 진리는 그렇게 신촌 어느 한 구석에 종이에 꼭꼭 싸버리듯이 묻어버렸다.
그러나 그 마스크는 내 가슴 깊은 곳의 내 얼굴에는 쓰여지지 못하였다. 잠깐 잠깐 쓰던 그 마스크는 내 안의 얼굴에는 쓰여지지 못하였고, 내 안의 내 얼굴은 그들이 그렇게 감추어내고 싶었던 "진리"를 찾는 쪽에 더욱 가까워있었다. 감추는 마스크와 감추어진 얼굴 사이에는 늘상 참기어려운 긴장들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때로는 고성방가나 혹은 만취를 틈타 튀어나오기도 하고 혹은 쓸데없는 고집으로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술권하는 사회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얼굴의 마스크보다 더욱 더 큰 감춤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렸을 때 일기를 부모가 몰래 읽은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는 친구를 알고 있다. 일기는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혹은 편지도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험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시용 수업과 취업용 수업 속에서 내 안에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진리에 대한 "찬미"는 더욱 감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경제적 인간" - 이것이 homo oeconomicus라고 특별히 정의된 개념이라는 것은 그후 아주 뒤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 이라는 이름 하에 이기주의적 인간이며 합리주의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경제학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마 경제학을 한 번이라도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은 경제학을 향한 첫발에서 배우게 되는 일이다. 나는 도통 이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팔다리 끊고 머리도 끊고 몸통만 남은 사람을 갖다놓고 자, 이게 인간의 몸이다라고 강변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소리로만 들렸다. 대학 생활은 - 좀 더 정확히는 수업은 - 온통 감추는 생활의 확대재생산일 뿐이었다. 시험용으로 나는 일련의 노트 필기를 외으면 되었다. 내지는 일련의 공식들을 한 번 풀어보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높은 학점을 기대한 적이 없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내 안의 생각과 시험 답안지에 쓰고 나오는 내 생각은, 그야말로 이렇게 다른 지식의 체계가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긴장을 형성하였다. 마치 교문앞 그들에게 무엇인가 끊임없이 감추는 연극을 하여야 했던 것처럼, 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내 생각이 아닌 것들을 답안지에 적어내려가야 했다. 물론 결론도 나의 생각은 아닌,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구의 목소리였을 뿐이었다. 글에다 마스크를 씌우는 작업은, 그러나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충은 외우는 게 통하는 수업이 많았기 때문이다.
얼굴에도, 글에도 마스크를 씌우면서 감추던 시절, 혹은 그렇게 감추는 방법을 배우던 시절, 그 시간이 바로 내가 대학생활이라고 이름붙여놓은 시간들이다.
글에도 마스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러나 사실은 중대한 자기 분열을 암시하고 있다.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즉 진짜 나를 감추어줄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내 안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에는 진짜로 나의 역할을 하던 그 내가, 시험 시간에는 또 다른 나, 내가 아닌 그 나에게 펜과 기록의 권리를 내어주고, 내 몸과 함께 뇌의 일부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실상, 이렇게 내가 아닌 내가 생겨나는 동안, 진짜 나는 그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또 다른 나의 존재에 썩이나 만족을 하고 안심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교문 앞의 그들 앞의 연극에 익숙해져있는 그 내 안의 마스크와 함께 또 다른 마스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자신과 타협과 협상을 하면서 점점 내 안에 깊은 뿌리를 내려가고 있던 셈이다.
드러냄의 연극 : 자아의 분열
대학 2학년은 한열이와 함께 지나간 시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경영학과 재건모임에 C반 대표로 이한열이라는 친구가 뽑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그날이 오기 전에 한 두번 인사를 할만한 상황이기도 하였다. 하여간 그러한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 이는 어쩌면 내 안의 죄의식을 줄일 수 있다는 면에서 내게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 6월 화창한 어느 날 한열이는 SY44의 조그만 파편 하나를 머리에 담고 우리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날 나는 대열의 거의 끝에 있다가 한열이가 쓰러지던 그 최류탄 타임에 좀 더 멀리 있는 상경대 잔디밭까지 뛰어가 누워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 타임에는 평상시보다 좀 더 많은 최류탄들이 좀 더 멀리까지 날라온 듯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상대까지 뛰어온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없었던 듯하다.
6월 한달을 한열이 시신을 지키느라 세브란스 병동에 있었고 두 번 정도는 한열이 아버지를 지키는 일을 맡기도 했었다. 산책을 나가신다고 하셔서 세브란스 중간에 있는 벤치에 따라나가는 일을 했고, "학생은 서울 사나?" "네". 광주에 있는 학교에만 다녔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말을 하실 때는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였었고, 내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정말이지 야릇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살아있음이 감사하다는 생각도, 그렇다고 참을 수 없는 분노도 아닌, 다만 미친 듯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야릇한 기분만이 나를 감싸돌았다.
그해에는 예의 마스크에 눌려있던 내 안의 목소리들이 좀 더 내 삶의 전면으로 나올 수가 있었고 나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들과 하고 싶은 글들을 좀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음악을 하는 한 여학생을 짝사랑 하였는데, 얼굴을 가끔이나마 보는 것보다는 편지를 쓰는 데에 좀 더 열중한 셈이다. 언어들은 그래도 충실히 내 마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도 그 안에서 행복하였다. 하여간 술과 짝사랑과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혐오는 나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고, 나를 사랑하라는 얘기는 정말이지 그 시절의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연말에는 대선이 있었고 5.5정권이라고 부르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선거날은 영등포 구청에 선거 감시하러 가기로 했었지만 그 전날 쓰러질 정도로 술마시고 모든 것이 싫어져서 집에서 하루 종일 잤다. 선거권도 없어서 선거도 못했다. 선거 다음 날은 과토론회가 있었고 시험거부를 결의했다. 사실 기분이 나빠서 시험을 안친 셈이다. 그 시험 거부 때는 일학기 때와는 달리 시험을 본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한과목도 시험을 치루지 않았고, 선생님들도 기분이 안좋았던지 나는 대학의 최저 학점을 그 학기에 받았다. 애써 나를 지키던 마스크, 아니 마스크들은 이제 굳이 감추는 연극의 상징으로 기능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일년을 지나면서 생겨난 좌절은 내 삶의 원동력을 만들어내는 모터들을 뿌리부터 부셔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망가진 채로 겨울을 맞았다. 기타와 몇권의 철학책들이 그 시간에 남아있던 내 삶의 전부였던 듯하다.
국악원에서 국악 강습을 받고 돌아오던 날, 눈은 정말이지 많이도 내렸다. 어깨 위로 가뜩 쌓인 눈을 맞으면서 신림동에서 영등포를 거쳐 화곡동까지 걸었다. 생물이라고는 도통 살 것같지 않은 안양천 위에다 하나 가득 토하면서 나는 잘못해서 내 안의 진리까지 토해버렸다. 오목교 위에서 바라본 서울은, 늘상 지나다니던 성산대교, 나트륨 등에서 비치던 그 서울도 아니었고 잠실 선착장에서 바라다보던 그 마천루의 서울도 아니었다. 똥물과도 같은 오염과 판자촌들, 그리고 예비군 교육에 사용하느라고 갖다놓은 과녁판들, 그런 칙칙한 서울이었다. 그곳에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고시공부를 시작하였다. 며칠 후 집을 나와 무작정 신촌의 소망 독서실로 거처를 옮긴 나는 그렇게 해서 헌법개론이니 민법원칙, 그리고 한국사니 하는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마스크, 가면인 줄 알고 있던 것들, 그것들은 사실 연극을 위한 가면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 줄도 모르는 것들은 그렇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가 나를 유지하던 그 내가 나를 더 이상 끌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 순간에, 그렇게 주인으로 내 안을 치고 나왔다. 더 이상 나는 학교 앞의 그들에게 주눅들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헌법에 대한 책들은 순간적으로 위력을 발휘했고, 나는 좀 더 당당히 교문을 들어오고 나갈 수가 있었다. 이제 내 안의 주인의 내가 아니라 내 안의 마스크들이 되었다. 2년간 숨어서 숨어서 연극이 필요한 순간에나 움직이며 숨죽여 살던 내 안의 그들은 이제 당당한 나의 주인이 되어 마스크가 아닌, 연극이 아닌, 자신의 삶을 내 몸을 빌리어 살아가고 있었다. 선배들을 만나서 고시에 대해서 묻고 고시에 붙은 이후의 진로에 대해서 물어볼 때 나는 전혀 꺼리김이 없었다. 88년, 올림픽이 준비되고 박세직이 올림픽 위원장이 되었던 그 봄, 나는 4시간씩 학교앞 독서실에서 꼬불잠을 자면서 그렇게 내 만개하여 살았다. 의욕이 돌아왔고 학교 생활은 좀 더 즐거웠다. 학점도 대학 최고의 학점을 받았다. 선배의 권유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이란" 책을 읽기도 했다. 역설적이지만 고시를 붙은 사람들이 써놓은 책들은, 사실 내 안의 마스크들에게는 실패의 전략이었다. 도서관의 사회과학 열람실에 비치되어 있던 그 책들은, 내 길은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 봄이 지나면서 내 안에 숨어있던 나는 마스크의 역할을 하였다. 선배들과 사람들을 만날 때 사실은 나는 고시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아니며 나는 세상이 변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고 내 안의 나는 강변하였다. 그러니까 역으로 보면 고시를 보던 그 내 안에 그 이전의 내가 숨어서 마스크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고시 준비를 하던 그 시절의 진짜 나를 숨겨주던 그 이전의 내가 변해서 된 그 시절의 마스크, 그것들은 나를 바라보던 내 벗들에게 내가 고시에 영혼을 판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또 다른 의미의 마스크였다. 무엇인가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감출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남의 눈이 중요한가? 전경의 눈은 중요하다. 그 눈으로부터 숨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친구의 눈은 중요하지 않은가? 적어도 전경보다 친구가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또한 그 눈으로부터 숨을 필요가 있었다.
두 개의 마스크는 이렇게 두 개의 나를 상징했다. 혹은 두세개 혹은 수십개에 달할 지도 모른다. 내 안에 있는 마스크의 숫자는 말이다. 이 마스크들은 각각의 연극을 상징하며, 각각의 연극은 각각의 인생을 상징했다. 그들은 저마다 화려함으로 내 안의 심판자를 유혹하려 하였다. 내 안의 나를 가장 잘 설득한 마스크는, 실상 "나"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페이에라벤드의 "인식론의 민주주의" 처럼 내 안에는 마스크의 민주주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한 마스크도 나를 독점할 수는 없었다. 대학생이라는 입장은, 그러니까 그 시절의 대학생은 일관될 수가 없었다. 교문 앞의 그들로 대표되는 하나의 세계에 조금 더 친숙하든지, 혹은 학회와 감자국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세계에 좀 더 친숙하든지, 아니면 부모와 형제로 대표되는 가족의 세계에 좀 더 대표되든지 선택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일관될 수는 없었다. 애국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기도 했지만 문무대 교육과 전방입소를 거치면서 군은 지옥과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자아는 두 개, 세 개... 급격하게 분열되어 나갔다. 정신분열증, psychozr nie, 그렇게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고, 시대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정신분열증 시대의 연애
6월의 행정고시 일차 시험을 끝으로 나의 고시 시절은 마감을 했다. 삶에도 일정한 의욕을 다시 찾기 시작하였고 부모들도 내가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조금은 이해했다. 큰 이모부가 나의 고시시절을 가장 환영했던 상황이지만, 실상 가장 흡족해했던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언제 고시공부를 했던 사람인가 싶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마스크 생활을 하던 나는 다시 나의 주인으로 들어왔고 6개월 동안 나의 주인 역할을 하던 그 무엇인가는 다시 마스크로 돌아갔다. 자민투라고 이름을 달고 있던 학생운동 그룹은 주사파로 이론적 변경을 끝내고 학교는 통일을 얘기하는 사람이 부척 늘어났다. 아울러 교문 앞의 그들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안의 마크스는 여전히 필요했던 존재였다. 어쩌면 내가 그 마스크를 그들이 아니라면 완전히 떼어내버릴 수 있지도 않았을까? 이드 속의 기억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그런 면에서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생겨난 마스크들은 상황이 어렵다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 것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러하였다.
하여간 고시 생활을 청산하고난 나는 자본론 세권을 샀고 헤겔의 정신현상학 3권도 샀다. 영문판으로도 사고 한글판으로도 샀다. 에밀 뒤르케임도 읽고 막스 베버도 읽었다. 정말이지 미친 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스크의 모멸(?)을 당했던 내 안의 나는 그렇듯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수학 공부도 열심히 해서 실해석이니 위상수학이니 하는 책들을 읽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선배들을 만나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던 것도 그 시절이다. 결국 공부 쪽으로 진로를 잡은 것은 바로 그 시절이다. 공부 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던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특히나 선배들은 공부한다는 것의 함정이나 생활의 어려움들을 얘기하면서 대부분이 말렸다. 그 시절, 그렇게 내가 공부를 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있던 시절, 시대는 미치도록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정권을 지켜야 했던, 즉 "보통 사람"의 역할을 하면서도 수천억의 비자금의 챙겨야만 했던 그 사람에게도 있었고,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 로비도 해야 하며 또한 중소기업도 쳐야했던 사람들에게나, 그리고 밖에서는 끊임없이 부도의 위험에 시달리면서도 집에 들어오면 사장 아버지 및 사장 남편의 역할을 해야했던 사람들에게서나, 그리고 집안의 돈을 가져다 쓰면서 공부하면서도 시대의 젊은이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서나... 역설적이지만 그 시대에 정신분열증을 앓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더는 잃을래야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뿐이었다. 최저생계비와 지역 의료보험, 그리고 최소한의 주거권 및 생존권을 지켜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늘 차갑고 자신은 늘 초라할 뿐이었다. 80년대는 그렇게 모두가 같이 일종의 광기 현상으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지막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마스크의 반란을 속으로 겪어야 했던 여인들...
80년대는 정말이지 연애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애술이 발달하던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고팅이니 소개팅이니 하는 용어부터 킹카니 졸카니 혹은 혹은 일련의 용어들이 등장한 것은 바로 그 시절이었다. 재건 시대의 재건 데이트에서부터 미팅이라는 말을 "캠퍼스"란 말과 쌍을 지어서 쓰던 생맥주의 70년대까지, 연애는 은밀한 냄새가 풍겨나는 밀어의 범주에 해당한다. 이런 말들을 화려하게 만개시켜낸 시절은 바로 80년대였다. 그렇지만 연애술의 발달은 좀 다른 방향에서였다. 대학에 들어와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연애를 하려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 남자들은 "끊을래야 끊을 게 없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보다 복잡한 2중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은 물론이고 나머지 인생도 재미지게 꾸려갈 관계를 만들든지, 아니면 정말이지 끊을래야 끊을 것이 없는 "은밀한 상황"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네들의 상당 수는 연애를 할 마음의 준비가 진정으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남자들이 마음의 준비가 더 되어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대의 의식에 비교하여서는 말이다.
신소설이 얘기되던 시절, 그야말로 신세대가 한반도를 치고 지나가면서 우울했던 왜정 시절의 젊은이들은 고래(古來)를 반동(反動)으로 여겼고, 그들은 "중매결혼"이라는 제도부터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을 깨고 나간 여성들은 신여성으로 불렸지만 그들의 남성 파트너들은 유학생 혹은 동경유학생이라고 불렸다. 신여성의 파트너가 신남성의 파트너가 아니라는 것은, 향후로도 몇십년간은 더 지속될 남녀간의 세상 의식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에 의한 축적적 관계를 예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 유학생들은 신여성을 연애의 상대로 삼았지만 그들은 결국 곤지찍고 연지찍고 정경 마님, 혹은 안방 마님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본부인에게로 돌아가든지, 혹은 뒤늦게라도 본부인을 만들든지 하였고, 하여간 신남성과 신여성의 동반 관계는 시대의 벽을 깨지 못했다. 샤넬 넘버 파이브로 대표되는 미국식 고급문화의 수용자 및 찬미자로 그 시절의 신여성들은 해방 공간에서 일종의 언더 그라운드 문화를 형성하였다. 물론 시대의 틀에 수용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언더 그라운드였지, 그들이 누리는 현실관계는 일종의 유한계급 (leisure class)의 지위였다. 어쨌든 간에 고래의 중매 결혼을 깨려고 했던 그 신여성들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만신창의 패배로 끝났던 왜정시대, 그리고 다시 친일과 친미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자칫 신남성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시절의 "인텔리" 남성들의 배반, 그것의 업보였던가, 80년대의 대학생들이 겪어야 했던 연애의 황폐함이란.
대학교 2학년 그리고 삼학년 시절, 여학생들은 취직과 선을 기다리고 있었고, 남학생들은 군입대와 감옥 중에 한가지를 선택했어야 했다. 양심을 지키고 사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양심을 드러내고 꽃을 피운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것은 "빵잡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언더 그라운드의 삶을 결심해야만 했다. 시대가 그랬다. 조금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하는 순간에 여기저기 감투가 붙어버리고 몸을 사릴 줄 아는 몇 명을 제외하면 졸업은 곧 감옥으로 가는 순간이라는 등식이 80년대 중분의 졸업생들에게는 시대와 진리의 명령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싫다면 입대를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리 매력이 가는 "씨뿌림"의 파트너는 아닌 셈이다. 그 시절의 남학생이라는 존재는 말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던 것은 대학원에 진학한 후 "석장"이라고 불르던 석사장교의 길이었다. 그속에서 공부는 더욱 더 신성한 매력을 세상에 흩뿌리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여학생들이 걷는 길은 조금 더 빨라 선을 보고 세상에 들어가는 방식이 하나의 선택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렇게 계산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허탈한 방식만이 아니었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자면 많은 여학생들은 가정,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표되는 하나의 생활방식과 학점과 "캠퍼스"로 대표되는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을 통일시키고 있었다. 연애의 상대와 결혼의 상대를 구분한다는 말은, 그러므로 신세대적 가치관이 아니라 - 즉 손을 한 번 잡히면 결혼을 해야한다는 구시대의 가치관을 타개했다는 의미에서 - 학교와 가정, 혹은 사회와 식구가 제공하는 이중의 잣대를 그런대로 한 몸에서 모순없이 통일시키고자 하는 호구지책이었던 셈이다. 집안의 뜻과 자신의 뜻은 이렇게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으며, 미팅이니 연애니 하는 것들도 이 양자 사이에서, 혹은 이러한 분열증 증세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그야말로 대양의 한 점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연애를 해서 결혼도 하겠다고 생각하는 모종의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는 남학생들과 연애는 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좋은 경우가 아니면 선을 봐서 부모와 나머지 생활들을 화해시키겠다고 생각했던 여학생들의 작전의식이 충돌하는 것이 어쩌면 80년 시대의 전형적인 연애 양상이었던지도 모른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구시대의 삶의 방식은 이렇게 딸을 끊임없는 정신분열증의 상황으로 몰고 나가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고 배웠던 딸은 이렇게 첫미팅을 하는 순간에 끊임없는 거짓말장이로 변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딸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공작의 꼬리 치장이라든가 산양의 뿔은 "Le Meilleur", 최고를 기다리는 여성측의 입장정리가 끝난 다음에야 가능했던 연애 게임이며, 80년대의 연애는 이보다는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갔다. 그러니까 그나마 최적자라고 받아들여진 편에야 연애게임을 펼쳐볼 기회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보다 더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적자의 전략도 조금 더 복잡해진다. 결혼을 반드시 하겠다고 여자의 마음을 잡는 "매"의 전략과 그래도 나는 너를 최고로 위해주며 끝없이 기다리겠다는 "비들기" 전략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했다. 적자라봐야 대학생 군 중에서 적자라는 의미이지, 선이라는 또 다른 군상 중에서 적자가 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여학생은 조금 더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았던 셈이다. 연애를 해서 적자를 찾아나서는 길과 그것이 불편해진다면 언제라도 "선시장"에 나서는 길이 있었다.
의외로 많은 여학생들은 선을 봐서 부모와 자신의 세계의 충돌을 피하고 경제와 권력을 화해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자유와 신조류로 상징되던 연애와 고래와 전통으로 상징되던 중매결혼의 신세대적 충돌은 이렇게 수십년을 뛰어넘어 80년대에 슬픈 연애술을 만개시키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다소 빠른 여학생들 - 그러니까 유학을 생각하던 사람들은 - 2학년 말에 선을 보기 시작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4학년 때에는 곧잘 선을 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킹카니 하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짠짠" 문화를 만개하는 그들의 뒤에는, 그러니까 가족을 위하여라는 또 하나의 얼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 두 개의 얼굴들이 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통합되고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신분열증, 그런 시대의 정신분열증은 그렇게 80년대를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서도 눈물나는 순애보의 사랑들은 존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첫사랑"이라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눈물짓던 소녀의 감상이 아직 남아있음에 의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첫미팅이니 첫사랑이니 첫만남이니, 그러한 최초의 단상들은 또한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를 발생시키며, 슬픈 연애술과 선시장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두 개로 분열되는 인격들에 또 다른 분열만을 남길 뿐이다. 혹은 애인과 남편의 격리를 고착시킬 뿐이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이미 물건너간 첫사랑 앞에서 계산 - 혹은 분열 - 은 좀 더 현실적이 되어버릴 뿐이었다. 하여간 선이라는 결혼의 양식을 시대 저편으로 밀어버리기까지는 좀 더 많은 연인들이 이런 정신분열증적인 상태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2. 씬(scene)과 씨나리오 (sc nario)
80년대의 삶은 결국 자기 안의 수많은 마스크들의 경쟁에 다름아니었을 뿐이다. 때로는 양심과 진리의 목소리로 나타난 자기가, 때로는 교문 앞의 그들을 피하기 위한 자기가, 때로는 나라와 민족으로 대표되는 자기가, 그리고 때로는 그 어느 것과도 상관없는 그저 재미있기 위하여 모든 음모를 꾸미는 그 자기가 경쟁적으로 "자아"의 자리에 등극하기 위한 갈등 과정에 다름아니었다. 수많은 자기들은 자아를 끊임없이 분열시켜 나가며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의 시대를 살아간 것, 그것은 사실은 광주로 문을 열었던 80년대의 출발점에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누구도 그 곳에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시대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누구도 그러한 정신분열증으로부터 면제받을 수가 없었다.
그 자기들 중에는 일정한 마스크를 형성해서 언제든지 자아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전면으로 나올 수 없는, 그러므로 단순히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자아마저도 그 존재를 알 수 없던 그런 것들도 존재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의 깊은 곳을 형성한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혹은 왜 있는지, 도래의 경로도 운동의 경로도 그리고 미래의 경로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프로이드가 그것들을 Id라고 이름붙은 것은 그러한 인식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어의 이드는 그것이라는 뜻만을 가지고 있다. 불어의 a가 불특정 타자를 지칭하는 그것으로 번역되듯이 말이다. "그것", 혹은 좀 더 뉴앙스를 살린다면 "거시기"라고 표현하는 이드는 존재를 자신의 목적으로 끊임없이 유도하고 끌고 나간다. 그러한 이드를 성의 문제로 국한시켜 해석하였다고 비판한 융의 정신분석학은, 그러나 사실은 프로이드의 이론보다는 생산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프로이드는 끊임없이 "근원" 혹은 "시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적 리비도와 함께 문화적 리비도 등을 나눈 융의 이론틀은 직접적으로 분석을 한다는 면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변화를 설명하는 순간에 와서, 즉 시간을 도입하는 순간에 어려움을 낳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프로이드는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다. topique라고 표현되는 뇌의 국피에 관한 이론, 즉 자아-초자아-이드로 이어지는 구조적인 자아의 구성요소의 설명에 프로이드는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근원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자아는 어디로부터 오는지, 이드는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리고 초자아는 어디로부터 오는지의 근원의 문제에 프로이드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은 낭만적인 구조주의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순간에 구조주의가 어떠한 황폐함의 길을 걷게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프로이드를 구조주의로 국한시킨 모든 프로이드의 제자들은 프로이드의 배반자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근원의 문제들을 옆으로 밀고 80년대의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1. 태극기의 시나리오
마스크는 구체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것은, 그 일관성을 위해서이다. 추상적이지 않다면 매 순간순간 또 다른 마스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몇 개의 마스크로 족한 것은 사실은 마스크는 추상적인 일련의 존재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국가와 애국심을 상징하듯이... 각각의 상황에서 태극기는 다른 행위들을 요구한다. 흔히 바라보는 올림픽의 금메달의 태극기들은 좀 더 빨리 엎어치기를, 점 더 세게 때리기를, 좀 더 고통을 참기를 각각 명령한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하오의 태극기의 하강식은 제자리에 서서 어디론가 방향을 잡고 정지, immobile을 명령한다. 때로는 이러한 정지는 좀 더 극적이다.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알기 이전에 나는 국기 하강식마다 정말이지 경건하게 서있었고 그래도 움직이는 짜장면 배달부를 애국심이 없다고 욕하기도 하였다. 일련의 immobile들, 그것은 실상은 오르가즘이었다. 물론 나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만한 진한 애국심의 오르가즘을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경건한 의식의 수행이었으며 그 안에서 국기의 추상성은 또한 구체성으로 살아왔다. (실제로 오르가즘은 immobile을 명령한다. 이는 분명히 생물학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광주의 시민군들도 태극기를 가슴에 두르고 있었고 트럭 뒤에 올라타 카빈을 휘두르던 그들은 원 키보다 3-4음 높은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애국가와 태극기로 immobile의 오르가즘을 느끼던 광주의 그들은 또 다른 의미의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국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물론 소설 "깃발"이나 하는 곳에서 광주의 그들은 태극기의 그들보다는 반미를 상징으로 삼은 그들이었다. 아니면 광주의 코뮨적 성격, 즉 시민군 한에서의 질서정연함과 치안유지를 주제로 삼는 광주분석가들에게는 파리가 맑스에게 주었던 느낌처럼 일종의 코뮨의 가능성, 즉 해방구의 존재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어느 것이 독점적으로 옳지는 않은 것이, 사실은 그 어느 것도 틀리지 않은 것이, 그것은 광주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분열증적 구도 때문이다. 태극기의 군인과 태극기의 시민의 대결, 그것은 처음부터 왼팔과 오른팔의 싸움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내에 계급적 갈등이라든가 혹은 한반도 자체의 모순이라든가 하는 덩치 커다란 문제들이 무한히 개입되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광주는 기본적으로 뇌의 "탈골증" 혹은 명령구조에 생겨난 고장이다. 물론 그러한 고장들은 사실은 몸에 존재하는 고장에서부터 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정신분열증적 정권의 시작에 놓여있는 존재적 모순이라고 부르고 싶다.
Scence, 광주라고 이름붙여진 무대는 최소한 두 개의 시나리오, 그리고 최소한 두 개의 프레임이 부딛히는 장소였다. 시민군이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는 최소한 광주의 진압군의 지휘자들이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는 극단적인 배척점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씬의 두다른 일련의 배우들의 상징은 동일하였다. 예비군복과 개구리복이라고 부르는 공수부대 유니폼의 충돌, 그것은 태극기의 구체적 현상태, 즉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태극기가 구체적으로 분열해나간 두가지 모습이었다. 현역 군인은 언젠가 예비군이 되고 공수부대원도 돌아가면 시민이 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은, 그러한 태극기의 변증법은 광주라는 장소에서는 운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석화되고 고정되어 자신의 역사를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태극기에 대한 다른 해석이 존재할 뿐이었다. 태극기에 대한 두 개의 다른 해석, 그것은 실상은 오랜 근원을 가지고 있다. 일장기와 부딛히던 왜정시절, 혹은 6.25라는 또 다른 형제와의 싸움 이후로 태극기는 비록 추상성의 구체화라는 과정을 거칠 지라도 광주만큼 극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건의 길고도 긴 독재 과정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지키는 쪽의 애국심과 얻으려는 쪽의 애국심으로 분할하여 부렸다. 그러니까 따지고 들어가면 80년대에 겪을 수밖에 없던 정신분열증의 근원은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자기들이 일정한 메카니즘을 거쳐 하나의 자아가 되는 민주주의 장치의 결여는, 위로부터 던져진 태극기에 자신일 맞추고 적응해나가는 양상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하여간 이렇게 분할되어 버린 태극기는 더 이상 애국심을 상징하지도 단합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를 덜 사랑하여서도가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상징에 대한 권위에 더욱 더 저항적이어서도 아니다. 두 개의 태극기가 만들어낸 비극, 그 속에서 죽어버린 것은 사실은 우리를 한 나라라고 만들어주는 무엇인가의 "통합적 권위"가 찟어져버린 것에 다름아니다. 태극기는 더 이상 마스크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태극기를 숨겨두고 사는 사람이 없어진 것에 다름아니다. 그렇게 태극기가 찢어진 자리에 지역감정이 움직이는 것은, 실상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광주라는 장소는 그렇게 모든 통합을 불살라없앤, 그야말로 정신분열의 근원을 형성한 장소로서 80년대를 움직여나갔다. 그후로는 태극기와 태극기가 부딛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학생들과 노동자 혹은 농민들은 태극기 대신에 만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군인 대신 현장으로 출동한 전경들은 "공권력"이라는 말을 국가라는 말대신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광주 이후로 태극기의 오르가즘 대신에 만장의 오르가즘이 빈공간들을 매우기 시작하였다.
2. 만장의 시나리오
태극기의 태극과 건곤이감은 확실히 시험에 나올만한 주제들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던 상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하여 급조된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태극기라는 상징성을 획득한 것은 왜정과 전쟁, 그리고 계속되는 외국과의 대타(對他) 관계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태극기가 그 상징성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태극과 건곤이감이 상징성을 의미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그러니까 태극기에서 나라와 민족,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을 읽어내는 것들은 이제는 자연스러운 얘기이며, 태극기를 보면서 유관순 누나니 이승복 어린이니 혹은 황영조까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태극 자체를 보면서 나라를 떠올리는 것은 멀고도 먼 일이다. 건곤이감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 궤들은 내게는 나라보다는 주역을 상징한다. 혹은 미팅을 나갈 때마다 궤를 짚어 보고 "해석 주역"을 가방에서 뒤 Ь咀만?운세를 생각하던 광주 친구의 얼굴을 상징한다. 그러한 면에서 태극의 상징은 죽은 상징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위하여 해마다 소나무를 심고 활엽수들을 뽑아준 조선 시대의 선비들만큼이나 말이다.
광주 이후로 더 이상은 갈등의 상징으로 등장하지 않게된 태극기를 대체하며 80년대 중반 이후로 피어오른 만장은,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이며 확실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죽은 자를 보내기 위해 사용되었던 만장은 깃발과 걸게그림, 혹은 판화와 벽화 등으로 자신을 운동시키며 구체적인 상징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부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만장 한 장은 명확히 보여주고 나타내어주고 있었다. 태극기가 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던 데에 배해서 만장은 이미 해석된 상징들이다. 아이젠베르크 감독이 "전함 포템킨 호"에서 사용하였던 것같은 모자이크 기법은 찬란히 꽃을 피워, 굵은 팔뚝이나 질끈 동여맨 머리띄, 그리고 해석을 배제하는 몇가지 문구들로 구성된 만장은 태극기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시나리오이다. 대학교 정문이나 명동 성동이나 각 작업장, 그런 곳이 만장과 함께 일순간에 해방구로 바뀌어나가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만장은 구체적인 장소를 의미하고 있었으며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하고 있었다. 만장을 그리는 사람이나 만장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들은 맛揚繭遮?상징체에 의해서 한 몸으로 통합되고 통일되었다.
그러니까 80년대의 이 사회구성원들은 유신 시대처럼 하나로 묶일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만장을 보고 오르가즘을 느끼는 일련의 군상과 만장을 보며 불쾌함을 느끼는 일련의 군상으로 갈려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안에도 해석의 어려움들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 안에서 민족의 모순을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똑같은 만장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계급을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도 또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중소기업을 매판자본에 대항하는 "민족 자본"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독점 자본 하에서 허덕이는 "중소 자본"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을 "민족 애국자"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지식인 계층"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해석의 다양성을 주지못하는 상징은 일단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태극기로 대표되던 "단일"의 유신식 상징태는 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그 속에서 여러 가지 만장들은 끊임없이 분열된 자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만장은 미래를 여는 문으로 나타났으며, 만장의 문을 통하여 사람들은 문득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미 만장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군상들은 해방된 곳이나 혹은 적어도 이보다는 나은 어떤 상황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보와 반동은 확연하게 구분되어 버린다. 만장은 그렇게 구분하며 자신의 시나리오들을 창출해 내었다. 그리고 그 만장을 들었던 사람들을 "재야 지식인"이라고 시대는 불렀다.
하여간 만장이든 태극기이든 그런 것들은 거대한 상징체이며 언제나 masse, 대중을 상정한다. 혼자 있든 여럿이 있든 그들은 항상 대중이었으며, 그것은 민중일 수도, 시민일 수도, 그리고 반란군일 수도, 혹은 난의 폭동군들일 수도 있다. 혼자 있을 때는 독서하고 여럿이 있을 때는 투쟁하였다. 그것이 만장의 시나리오이다. 사색하는 개인의 존재는 어느 곳에도 있을 수 없었지만, 사색한 개인은 기회주의가 되던지 우을증에 걸리던지 아니면 정말 정신분열증에 걸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3. 군화의 시나리오
이정재니 임화수니 하는 사람들은 꽤 무서웠던 사람들이었던 것같다. 정치와 폭력을 결합시키는 데 나름대로 성공하였던 사람이고 부를 축적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썬그라스로 대표되는 박정희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격이 낮은 축이었지만 하여간 80년대의 군화도 그렇게 깡패 청소부터 시작을 하였다. 민간인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이었지만 정화라는 열풍 앞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싹쓸이 앞에서는 그들도 힘없는 민간인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든든하였던 그들의 조직도 그들을 군화발 앞에서 지켜주지는 못하였다. 하여간 광주를 시발로 그렇게 문을 열은 80년대는 그야말로 군화발의 10년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화 - 걸음을 걷기 위한, 군인이 걸음을 걷기 위한 그 상징들은 그러나 폭력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군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시대는 너무나 살벌하였다. 이미 옷을 벗은 군인들은 "공권력"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었다.
Pouvoir publique, public power라고 정의되는 공권력이라는 단어의 역사는 사실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위로 올라간다. 불란서 혁명을 치른 직후 "공화국" (R publique)라고 이름붙인 체계는 보다 굳건한 권력의 기반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왕당파로부터 공화국 체계 자체를 지켜내야 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짐은 곧 국가"라는 근세국가의 체계를 씻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시민" (Citoyen)이라고 불렀다. 삼부회의 각 위원들은 서로를 시민이라고 부르며 적어도 상징적인 평 등을 만들어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의회는 이러한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내어 "공적의 의사"를 만들어내었다. 로베르삐에르의 폭권 정치도 이러한 의회의 표결, 즉 다수결을 등에 업고 이루어진 일들이다. 이 속에서 개寬?전체의 관계는 상당히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와 홉스에 의하여 시작된 일종의 현대성들은 초기에는 왕의 이해 (l'Int r t) 즉 추상 명사로서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과 동일한 것으로 설정하였다. 그렇지만 시민 시대에는 이해는 이익들 (les int r ts) 즉 복수로서의 이익들과 일치하지 않는 면이 존재하였다. 평등은 이내 원칙적인 평등의 전제 하에서 형평성으로 변질하여 나갔고, 가난과 질병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초기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여인과 아이들은 임금 인하에 의한 이윤율 보전을 위하여 지금의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노동을 수행하였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교육과 공건보건을 통하여 최소한 노동자 계급이나마 재생산해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는 공권력의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제공하였다. 맹세컨데 공권력이라는 단어는 천사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도움의 손으로 존재하였던 것이 서양 근대사의 역사이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현실에 그나마 최소한의 생계마저 유지하는 공공 장치가 움직여나갈 때, 이는 공권력이 개입하였다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여성의 선거참여를 그렇게나 미루어왔던 나라들이건만 공권력은 사회보장 제도들로 변하여 나갔다. 연극이 영화에 밀리며 사라져갈 때 가난한 연극인을 도운 것도 공권력이었으며 - 물론 한편으로는 연극 자체의 정신을 변질시키는 면이 없지도 않다 - 누구든 부의 불균등에 의하여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며 공공학교를 설립하던 것도 공권력의 힘이다.
이러한 공권력은 80년대에 공폭력과 비슷한 단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저기 학교에서 학생을 끌어갈 때도,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을 해산시킬 때도, 심지어는 정당의 농성이라든가 전교조의 선생님을 끌어갈 때도 개입한 것은 공권력이라는 전혀 공적이지 않은 폭력이었다. 실제로 군화발이 상징한 것은 이러한 폭력이다. 겹으로 형성된 이러한 폭력 구조는 어쩌면 정신분열 시대의 유일한 진리였을지도 모른다. 숨기고 감추지 않으면 폭력이 개입하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왜정 시대로까지 올라가는 뿌리 깊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면서 사람들은 쉽게 적응을 해나갔다. 두 개든 세 개이든 마스크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은, 이러한 공권력의 존재하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었다. 하긴, 공권력이 사람의 생각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아니었다. 생각이야 어떻게 하든간에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건드리지는 않겠다는 것이 80년대 정권의 기본 속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속으로 속으로 공포를 내재화시켜 나갔다. 한편으로는 광주와 또 한편으로는 80년대 내낸 계속되었던 조작 학생운동 사건이나 최류탄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2중 혹은 다중적 인격을 끊임없이 강요하였다.
4. 국가보안법의 시나리오
그렇지만 80년대 군화발의 근저에 있었던, 진짜 아버지는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그것은 모든 법을 초월하여, 실정법으로서는 최고의 위치에 군림하고 있었다. 잡범과 사상범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국보법을 위반하였는지 아닌가였다. 국가보안법은 사실은 형제 간의 갈등을 근거로 하여 움직이는 법이다. 북한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형제는 분명 배다른 형제는 아닌, 같은 부모 하의 형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북으로 규정하는 아버지 아닌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가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의 정식에서 처음으로 생겨나듯, 우리에게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는 국가보안법을 기준으로 해서 생겨나고 유지되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하지 않아야 할 일은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라든가 집회와 결사의 자유라든가, 다 좋지만 일단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사상은 가져서는 안된다. 그것을 공공연하게 떠든다든가 하는 일은 더욱 곤란하다. 동시에 금서를 소지하거나 읽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붓아버지보다 더한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여 고통을 주는 아버지, 혹은 프로이드 식으로 감정의 양면성이라고는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아버지는 괴롭히고 학대하는 아버지였다. 그러한 면에서 국가보안법은 전형적인 "가학자" (pers cuteur)에 해당한다. 아, 그렇지만 어쩌랴. 가학자-피가학자 (pers cuteur-pers cut )의 관계는 전도된 사랑을 발생시키는 정식이니 말이다. 가학이 심하면 심할수록 피가학자는 가학자를 사랑하게 되어있는, sado-masochism의 정식이 그곳에 움직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국『맘획萱?약속을 만들어내었다. 나라를 지켜주겠다는 것은 곧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국가보안법의 대상이 될 때에는 처절하게 증오하던 법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이중의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첫째로는 일단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들이다. 두 번째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이 면제되었다는 것들이다. 끊임없이 북한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났으며 북한이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국가보안법은 더욱 더 약속의 존재로 다가왔다.
분열증과 함께 피가학성 변태, 이런 복합체들은 시대의 조류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갔고, 그 퍼짐은 또 다른 퍼짐을 만들어내었다. 한으로 승화될 수도 없고 혁명으로 실현될 수도 없는, 이러한 리비도의 집중은 안으로 안으로만 집중되어 오갈 데 없는 암세포처럼 커지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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