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체시대의 경제철학 에세이 : 제 2강 >
제 2강. 합리적 개인 : 행위와 판단
앞 장에서 우리는 소위 경제적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둘러싼 몇 가지 인식론적 전제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대부분의 경제학도들은 이 개인에 대한 경제학의 잘 짜여진 듯하며서도 숨막히는 가설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면서 경제학에 대한 학습을 시작하게 된다. 실제로 표준모델이 제시하는 가설 하의 인간은 실제로 움직이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이론적 전제를 위하여 마치 물리학의 분자와도 같은, 혹은 당구대의 당구알처럼, 자신의 의사라기 보다는 객관적 정합성에 의해서 어떠한 행위를 하게 될 지 잘 정의되어 있는, 소위 기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표준모델의 개인에 대한 이론을 기계론으로 평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수술대 위에서 팔다리를 모두 끊어내고 몸통만을 갖고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관점이라고 비판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답답하게 정의된 인간에 대한 가정을 그 출발점으로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것은, 홉스 이후의 개인에 대한 현대적 정의, 즉 치사하며 변덕스럽고, 또한 자신만을 생각하는 현대적 인간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뿌리깊은 불신과 다르지 않다. 종교를 생각하면서도 또한 권력을 탐하고, 도덕을 얘기하면서도 실속을 차리고, 덕을 얘기하면서도 불륜을 생각하는, 그러한 이면적이며 다면적인 현대적 인간에 대한 포기는, 오히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나 창의력 혹은 도덕적 감성이 아닌, 철저하게 이기주의적 속성에만 근거한 경제학적 인간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제 2강에서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보다 공식적인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함유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1) 연역적 접근과 귀납적 접근 : 논리와 경험
인간에게 있어서 富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경제학자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질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 혹은 화폐와 같은 개념들은 교환과 가치, 혹은 가격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이 모두 설정된 이후,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예금, 혹은 물질적 자산에 대한 저량(stock) 혹은 축적량이 정의된 다음에야 논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자가 된다던가,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산다든가 하는 것들도 매우 정의하기 복잡한 개념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인간은 부를 늘리기 위하여 산다라는 암묵적인 결론에 대해서 동의하는 편일 것이다. 어쨌든 아담 스미스를 잉태시킨 스코틀랜드 철학자들은 利他主義 마저도 利己主義의 논리적 결합에 의해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부를 추구한다든가 혹은 욕망을 추구한다든가 하는 보다 감성적이며 혹은 이데올로기 냄새를 풍기는 담론들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동의하든 아니든 경제학자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히려 사회과학을 떠나 보다 튼튼한 가설체게 및 입증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스스로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학, 즉 硬性科學(hard science)에 가까워지고 싶어한다. 이러한 욕망은 경제학 프로그램을 보다 논리적인 체계에 가깝게 만들도록 한다.
연역과 귀납이라는 두 가지 방법은 인식론자들이 그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이다. 자본론의 방법에 대한 상향법과 하향법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들, 혹은 서술의 순서와 연구의 순서에 대한 알뛰세의 여러가지 지적들도 실상 그 논리적 출처는 연역과 귀납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접근의 연장 이상은 아닐 수 있다. 혹은 헤겔은 죽었다라며 새롭게 과학철학을 만들어낸 비엔나학파의 여러 학자들, 즉 실증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 혹은 비판적 논리실증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가지 논의들도 귀납과 연역에 대한 다른 견해 및 그 조합으로 불거진 것이라고 다소 무리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진 카르납에서 포퍼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용되던 흰 백조의 명제가 있다.
백조는 희다라는 하나의 명제가 존재한다고 하자. 입증(verification)이라는 개념으로 실증주의에 근거한 과학철학의 문을 열었던 카르납은 하나하나의 표본을 통하여 결국은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를 이론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여기에서 명제는 증명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입증의 대상이며, 모든 표본에 있어서 동일하게 옳다라고 검증된다면 그 명제는 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카르납의 현대적 사유는 가설(hypothesis) 혹은 가정(assumption)에 대한 명제 발생의 자유와 함께 이러한 명제를 입증해나가는 여러가지 실험방식들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박한 카르납의 희망은 곧 거대한 배반에 부딛히게 된다. 무엇보다도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실제로는 모든 백조는 희다와 동일한 진리값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희지 않은 백조가 등장한다면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거부되게 되며, 그렇기에 어떤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흰 백조가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전적으로 동일한 진리값을 갖는다. 처음의 백조는 희다가 얘기해줄 수 있는 설명범위를 100이라고 한다면, 흰 백조와 검은 백조가 존재한다고 할 때 흰 백조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줄 수 있는 설명범위는 50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회색백조가 존재한다고 할 때는 다시 33.3333%로, 그리고 백조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더욱 더 처음의 명제의 설명범위는 줄어든다. 이러한 식으로 설명범위가 줄어든다면 이것은 더 이상 이론이라고 얘기할 수 없고, 다만 몇 가지 경험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를 입증하고 싶다면, 결국 그 연구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백조를 찾아나설 수 밖에 없을 것이며,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모든 백조가 희다라는 것을 입증하였을 때, 비로서 지금 존재하는 백조는 아직까지는 모두 희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마리라도 희지 않은 백조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순식간에 거짓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열린 사회와 적들이라는, 다소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서로 더욱 유명해진 포퍼의 고민은 카르납의 실패에 존재한다. 만약 입증을 통한 과학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론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포퍼가 제시한 방법은, 모든 이론은 제한적이며 한시적이고, 따라서 반례(counter-example)이 존재할 때까지 임시로 사용하는 작업가설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포퍼의 방법은 반증법(Method of falsification)이라고 불린다. 실패하기 전까지만 옳은 이론이라는 면에서 포퍼의 생각은 도그마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증오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카르납이 우리에게 보여준 희망적 과학철학은 포퍼에서 이미 그 신화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제 우리는 옳은 것을 찾기위하여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틀릴 날을 기다리며 이론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포퍼의 고민은 이론의 핵심과 보호장치라는 라카토스의 역설이나, 결국 이론사는 파라다임의 지속적인 교체에 다름아니다는 쿤을 만나면서 더욱 고민에 빠져든다. 물론 이 과학철학의 논쟁사를 가장 극적으로 만든 것은 인식틀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이론의 아나키즘을 역설한 페이에라벤트(Feyerabend)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경험에 근거한 입증적 과학을 만들고자 했던 현대의 과학철학은 다시 죽은 헤겔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정도의 실패에 빠져들었다. 현대과학이 만들어낸 놀라운 지식의 창출 및 축적에도 불구하고 인식론 자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스텔레스 이후 촌보도 진척하지 못한 셈이다.
경제학자들에게 이러한 과학철학의 문제는 강건너 불같은 얘기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카르납에게 철학을 전수받은 밀턴 프리드만이 실증주의적 경제학에 대한 주장으로, 그리고 경제학설사의 마크 블로우 등이 종종 과학철학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표준모델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험과 논리의 문제는 아직도 요원한 논쟁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표준모델에 있어서의 핵심부는 철저하게 논리적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정의에서부터 왈라스의 일반균형에 이르기까지의 경제학 논리는 철저하게 연역적 방법을 따른다. 물론 마샬의 부분균형이나 또한 많은 응용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경험적 학문이며,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학문으로 이해하고 싶어하지만, 아직도 경제학의 심장부에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경제학이 연역적이라는 사실은 경제학을 처음 접하는 학생이나 혹은 타학문에서 경제적 안목을 넓히기 위해서 경제원론을 듣는 학생들을 꽤나 혼동시킨다. 가격현상이니 기업의 행동, 혹은 소비자의 행위 등 매우 경험적이며, 강의실이나 원론에 오기 전에 신문이나 실생활에서 먼저 배운 사실들을 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모델이 경험적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경제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은 동어반복(tautology)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논리적인 결론을 발생시켜 낸다. 수없는 공리와 공준, 혹은 정리는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으며 또한 증명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이론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다. 수많은 경제학도들은 지금도 경제학의 여러가지 균형에 대한 정의를 학습하고 또한 관련된 이론들의 정의를 풀어나간다. 적어도 표준모델이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이라기 보다는 논리적 훈련 및 도출의 연속이라는 사실만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왈라스의 일반균형이 사실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마치 왈라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경제학이 발생시키는 많은 이론들이 실제로 세상이 그렇기에 세상으로부터 귀납된 것인가 혹은 그 이론의 전제들이 그러하게 배치되었으므로 논리적으로 유도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표준모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갈림길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배우는 기하학은 점을 정의하고 그 점의 이동으로서 선, 그리고 직선을 정의한다. 그 선의 이동으로서 다시 면을 정의하며 특히 직선 이동의 연장성인 평면으로부터 차원을 정의하게 된다. 삼각형의 세면의 합이 180도라는 정리는 이전의 점에 대한 정의로부터 한참을 진행한 다음에 나올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인 셈이다. 이러한 기하학의 논리구조에서 우리는 처음의 점에 대한 정의인 공준, 그리고 그 공준으로부터 도출된 공리들 및 그 보다 진리값이 떨어지는 다양한 정리들의 구조를 배울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논리의 진행, 즉 동어반복을 통하여 다양한 정리들을 발생시키는 연역적 이론만들기의 한 전형을 보는 셈이다.
경제학 특히 미시경제학을 불리는 표준경제학의 핵심은 철저하게 이런 연역적 방식에 의한 방식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호모에코노미쿠스에 대한 논리적 정의, 즉 인간은 이기적이며 계산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기하학에서 점에 대하여 정의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즉 최초의 증명될 수 없는 명제라는 의미에서의 시원적 공리는 바로 이러한 특별한 개인에 대한 정의의 형태로 경제학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소위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정의,
제 2강. 합리적 개인 : 행위와 판단
앞 장에서 우리는 소위 경제적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둘러싼 몇 가지 인식론적 전제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대부분의 경제학도들은 이 개인에 대한 경제학의 잘 짜여진 듯하며서도 숨막히는 가설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면서 경제학에 대한 학습을 시작하게 된다. 실제로 표준모델이 제시하는 가설 하의 인간은 실제로 움직이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이론적 전제를 위하여 마치 물리학의 분자와도 같은, 혹은 당구대의 당구알처럼, 자신의 의사라기 보다는 객관적 정합성에 의해서 어떠한 행위를 하게 될 지 잘 정의되어 있는, 소위 기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표준모델의 개인에 대한 이론을 기계론으로 평가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수술대 위에서 팔다리를 모두 끊어내고 몸통만을 갖고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관점이라고 비판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답답하게 정의된 인간에 대한 가정을 그 출발점으로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것은, 홉스 이후의 개인에 대한 현대적 정의, 즉 치사하며 변덕스럽고, 또한 자신만을 생각하는 현대적 인간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뿌리깊은 불신과 다르지 않다. 종교를 생각하면서도 또한 권력을 탐하고, 도덕을 얘기하면서도 실속을 차리고, 덕을 얘기하면서도 불륜을 생각하는, 그러한 이면적이며 다면적인 현대적 인간에 대한 포기는, 오히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나 창의력 혹은 도덕적 감성이 아닌, 철저하게 이기주의적 속성에만 근거한 경제학적 인간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제 2강에서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보다 공식적인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함유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1) 연역적 접근과 귀납적 접근 : 논리와 경험
인간에게 있어서 富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경제학자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질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 혹은 화폐와 같은 개념들은 교환과 가치, 혹은 가격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이 모두 설정된 이후,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예금, 혹은 물질적 자산에 대한 저량(stock) 혹은 축적량이 정의된 다음에야 논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자가 된다던가,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산다든가 하는 것들도 매우 정의하기 복잡한 개념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인간은 부를 늘리기 위하여 산다라는 암묵적인 결론에 대해서 동의하는 편일 것이다. 어쨌든 아담 스미스를 잉태시킨 스코틀랜드 철학자들은 利他主義 마저도 利己主義의 논리적 결합에 의해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부를 추구한다든가 혹은 욕망을 추구한다든가 하는 보다 감성적이며 혹은 이데올로기 냄새를 풍기는 담론들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동의하든 아니든 경제학자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히려 사회과학을 떠나 보다 튼튼한 가설체게 및 입증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스스로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학, 즉 硬性科學(hard science)에 가까워지고 싶어한다. 이러한 욕망은 경제학 프로그램을 보다 논리적인 체계에 가깝게 만들도록 한다.
연역과 귀납이라는 두 가지 방법은 인식론자들이 그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이다. 자본론의 방법에 대한 상향법과 하향법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들, 혹은 서술의 순서와 연구의 순서에 대한 알뛰세의 여러가지 지적들도 실상 그 논리적 출처는 연역과 귀납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접근의 연장 이상은 아닐 수 있다. 혹은 헤겔은 죽었다라며 새롭게 과학철학을 만들어낸 비엔나학파의 여러 학자들, 즉 실증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 혹은 비판적 논리실증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가지 논의들도 귀납과 연역에 대한 다른 견해 및 그 조합으로 불거진 것이라고 다소 무리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진 카르납에서 포퍼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용되던 흰 백조의 명제가 있다.
백조는 희다라는 하나의 명제가 존재한다고 하자. 입증(verification)이라는 개념으로 실증주의에 근거한 과학철학의 문을 열었던 카르납은 하나하나의 표본을 통하여 결국은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를 이론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여기에서 명제는 증명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입증의 대상이며, 모든 표본에 있어서 동일하게 옳다라고 검증된다면 그 명제는 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카르납의 현대적 사유는 가설(hypothesis) 혹은 가정(assumption)에 대한 명제 발생의 자유와 함께 이러한 명제를 입증해나가는 여러가지 실험방식들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박한 카르납의 희망은 곧 거대한 배반에 부딛히게 된다. 무엇보다도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실제로는 모든 백조는 희다와 동일한 진리값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희지 않은 백조가 등장한다면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거부되게 되며, 그렇기에 어떤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흰 백조가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전적으로 동일한 진리값을 갖는다. 처음의 백조는 희다가 얘기해줄 수 있는 설명범위를 100이라고 한다면, 흰 백조와 검은 백조가 존재한다고 할 때 흰 백조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줄 수 있는 설명범위는 50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회색백조가 존재한다고 할 때는 다시 33.3333%로, 그리고 백조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더욱 더 처음의 명제의 설명범위는 줄어든다. 이러한 식으로 설명범위가 줄어든다면 이것은 더 이상 이론이라고 얘기할 수 없고, 다만 몇 가지 경험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를 입증하고 싶다면, 결국 그 연구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백조를 찾아나설 수 밖에 없을 것이며,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모든 백조가 희다라는 것을 입증하였을 때, 비로서 지금 존재하는 백조는 아직까지는 모두 희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마리라도 희지 않은 백조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순식간에 거짓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열린 사회와 적들이라는, 다소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서로 더욱 유명해진 포퍼의 고민은 카르납의 실패에 존재한다. 만약 입증을 통한 과학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론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포퍼가 제시한 방법은, 모든 이론은 제한적이며 한시적이고, 따라서 반례(counter-example)이 존재할 때까지 임시로 사용하는 작업가설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포퍼의 방법은 반증법(Method of falsification)이라고 불린다. 실패하기 전까지만 옳은 이론이라는 면에서 포퍼의 생각은 도그마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증오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카르납이 우리에게 보여준 희망적 과학철학은 포퍼에서 이미 그 신화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제 우리는 옳은 것을 찾기위하여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틀릴 날을 기다리며 이론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포퍼의 고민은 이론의 핵심과 보호장치라는 라카토스의 역설이나, 결국 이론사는 파라다임의 지속적인 교체에 다름아니다는 쿤을 만나면서 더욱 고민에 빠져든다. 물론 이 과학철학의 논쟁사를 가장 극적으로 만든 것은 인식틀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이론의 아나키즘을 역설한 페이에라벤트(Feyerabend)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경험에 근거한 입증적 과학을 만들고자 했던 현대의 과학철학은 다시 죽은 헤겔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정도의 실패에 빠져들었다. 현대과학이 만들어낸 놀라운 지식의 창출 및 축적에도 불구하고 인식론 자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스텔레스 이후 촌보도 진척하지 못한 셈이다.
경제학자들에게 이러한 과학철학의 문제는 강건너 불같은 얘기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카르납에게 철학을 전수받은 밀턴 프리드만이 실증주의적 경제학에 대한 주장으로, 그리고 경제학설사의 마크 블로우 등이 종종 과학철학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표준모델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험과 논리의 문제는 아직도 요원한 논쟁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표준모델에 있어서의 핵심부는 철저하게 논리적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정의에서부터 왈라스의 일반균형에 이르기까지의 경제학 논리는 철저하게 연역적 방법을 따른다. 물론 마샬의 부분균형이나 또한 많은 응용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경험적 학문이며,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학문으로 이해하고 싶어하지만, 아직도 경제학의 심장부에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경제학이 연역적이라는 사실은 경제학을 처음 접하는 학생이나 혹은 타학문에서 경제적 안목을 넓히기 위해서 경제원론을 듣는 학생들을 꽤나 혼동시킨다. 가격현상이니 기업의 행동, 혹은 소비자의 행위 등 매우 경험적이며, 강의실이나 원론에 오기 전에 신문이나 실생활에서 먼저 배운 사실들을 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모델이 경험적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경제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은 동어반복(tautology)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논리적인 결론을 발생시켜 낸다. 수없는 공리와 공준, 혹은 정리는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으며 또한 증명될 수 있는 경우에만 이론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다. 수많은 경제학도들은 지금도 경제학의 여러가지 균형에 대한 정의를 학습하고 또한 관련된 이론들의 정의를 풀어나간다. 적어도 표준모델이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이라기 보다는 논리적 훈련 및 도출의 연속이라는 사실만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왈라스의 일반균형이 사실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믿는다면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마치 왈라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경제학이 발생시키는 많은 이론들이 실제로 세상이 그렇기에 세상으로부터 귀납된 것인가 혹은 그 이론의 전제들이 그러하게 배치되었으므로 논리적으로 유도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표준모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갈림길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배우는 기하학은 점을 정의하고 그 점의 이동으로서 선, 그리고 직선을 정의한다. 그 선의 이동으로서 다시 면을 정의하며 특히 직선 이동의 연장성인 평면으로부터 차원을 정의하게 된다. 삼각형의 세면의 합이 180도라는 정리는 이전의 점에 대한 정의로부터 한참을 진행한 다음에 나올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인 셈이다. 이러한 기하학의 논리구조에서 우리는 처음의 점에 대한 정의인 공준, 그리고 그 공준으로부터 도출된 공리들 및 그 보다 진리값이 떨어지는 다양한 정리들의 구조를 배울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논리의 진행, 즉 동어반복을 통하여 다양한 정리들을 발생시키는 연역적 이론만들기의 한 전형을 보는 셈이다.
경제학 특히 미시경제학을 불리는 표준경제학의 핵심은 철저하게 이런 연역적 방식에 의한 방식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호모에코노미쿠스에 대한 논리적 정의, 즉 인간은 이기적이며 계산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기하학에서 점에 대하여 정의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즉 최초의 증명될 수 없는 명제라는 의미에서의 시원적 공리는 바로 이러한 특별한 개인에 대한 정의의 형태로 경제학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소위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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