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형설지공/경제경영

호모에코노미쿠스와 인식론적 가설들

< 해체시대의 경제철학 에세이 : 제 1강 >

제 1부. 표준 모델과 그 가정들

표준모델은 신고전학파(neo-classic)이라고 불리는 경제학 한 분파의 기본 모델인 왈라스 균형을 둘러싼 일련의 설명틀을 애기한다. 흔히 주류경제학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근대경제학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80년대 후반 동구의 붕괴 이후로 이러한 경제학은 표준모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동안 비주류 경제학의 한 축을 형성했던 맑스주의 경제학이 붕괴한 것이 신고전학파가 표준모델로 불리게 된 한 사회적 배경이 아닐까 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비단 맑스주의 경제학만이 아니라 제도학파 경제학, 복잡성의 경제학, 진화주의 경제학, 조절학파 등 80년대 이후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여러가지 다양한 시도들이 실상한 왈라스의 일반균형에 기초를 둔 신고전학파 모델의 여러가지 가설들을 변화시키며 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경제학 내의 논쟁 구도가 기존의 주류/비주류 구도에서 표준모델/비표준모델의 논쟁축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표준모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경제학 내에서의 모든 새로운 시도의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
제 I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되도록이면 표준모델의 기본적 가설들을 정확하게 살펴보고 그러한 가설들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경제적 인간(homo-oeconomicus)로부터 출발하여 소비자와 생산자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 그리고 그러한 기반과는 또한 일정하게 격리되어 있는 왈라스의 일반균형 모델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경제학적 사색을 위한 필요 조건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제 1강.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인식론적 가설들

1) 學의 始原
경제학은 形而上學이 아닌 形而下學이라고 서문에 적혀있는 경제학원론 교과서들이 있다. 누가 먼저 이러한 말을 썼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어쨌든 형이하학이라는 표현 자체도 서로들 베낀 것이 분명한 이러한 표현은 한국 현대사상의 현주소를 슬프게도 나타내주는 한 단면이다. 형이상학은 Metaphysics에 대한 한문식 번역이다. 그리고 미안하게도 Metaphysics의 반대말은 Science 즉 과학이다. 형이상학과 과학과의 구분은 칼 포퍼의 데뷰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발견의 논리의 주제이기도 하다. 과학철학 내에서도 과학과 형이상학과의 구분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선을 긋고 있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형이상학은 입증할 수 없는 가설 혹은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신의 존재에 의한 종교적 설명틀과 같이 과학은 입증할 수 있는 가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 방식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론이든지 전제가 필요하고 또한 그러한 전제를 그 전제로부터 유도된 결과가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철학 진영에서 카르납(Carnap)의 입증주의식 입장을 송두리째 깨어버린 고델(G del)이 이미 입증한 바이다. 고델의 정리라고 불리는 이 특별한 가설은 수학과 과학 그리고 형이상학에 대한 차이가 논리적으로 없음을 역으로 보여준다. 예컨데 점을 정의하고 다시 이 점들 사이의 연결에 의해서 선을 그리고 다시 면을 정의하는 유크리드 기하학의 여러가지 결론과 공리들에 의해서 점을 증명할 수는 없다. 삼각형의 세변의 합은 180도라는 정의도 혹은 원주율에 대한 여러가지 공식도 점에 대해서 설명하여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어떤 논리이든지 출발점에 있어서는 하나 이상의 외부적 요소를 필요로 하고 있고, 또 이 요소는 그 논리들의 조합에 의해서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이 고델의 정리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 요소이다.
이러한 논리적 문제는 결국 형이상학이든 과학이든 始原的 假說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중세적 형이상학이 신의 존재이든 혹은 태초적 출발이든 필요로 했다면 과학은 또 다른 의미의 출발을 필요로 한다. 물리학은 물질이 존재함으로부터 출발하며 생물학은 생명의 존재 즉 생명현상의 존재로부터 출발을 하게 된다. 존재론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들은 존재의 양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가능성이며 생물학이 궁극적으로 풀고자하는 문제는 자신들의 출발점이 생명 현상 그 자체이다. 이러한 논리적 측면에서 형이상학과 과학은 그렇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앞부분은 學의 始原이라고 이름붙여진 기나긴 서문에 의하여 장식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교과서로 읽는 정신현상학은 헤겔 자신의 서문 60페이지에 서문에 대한 해설, 그리고 영어본 번역 역자 서문에 또 불어본 역자 서문, 그리고 한글 역자 서문까지 하여, 제 1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길고도 긴 200여 페이지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 부분은 철학사 내에서도 난해하기로 소문난 부분이다. 물론 후에 비엔나 학파로 이름붙여질 마하와 카르납, 헴펠, 그리고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헤겔은 죽었다라는 비엔나 선언을 하면서 이 부분을 거부하는 것이 과학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근대정신의 총아로서 헤겔은 學 즉 Science의 출발을 매우 섬세하고 공들여 디자인을 한다. 모든 학문의 출발로서의 철학 즉 학은 다른 학문을 그 출발점으로 삼을 수 없으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출발을 정의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모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존재로부터 존재 그리고 인식으로 이전하여 나가는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은 다른 어느 학문보다도 학의 시원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학의 출발점을 찾는 데 있어서의 고통은 헤겔의 정신현상학과의 관계에 있어서 종종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 大論理學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정신현상학이 최초의 인식인 느낌 즉 직관으로부터 오성을 거쳐 이성단계로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의 그 출발점에 관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면, 대논리학에서는 존재 자체의 출발점에 관한 부분이 다시 고통스럽게 정의되어 있다. 절대존재는 아무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무와 동일하며, 이러한 절대무와 절대존재의 운동에 의해서 현존재와 무, 그리고 다시 이 두 가지 계기의 운동에 의하여 현존재를 도출하는 데까지의 초기 과정에 있어서의 헤겔 논리의 난해성은 한편으로는 독일 관념론의 한 특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완벽한 논리체계를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이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이러한 고통은 거대이론(Grand Th ories)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어떤 상황이든지 설명할 수 있는 거대이론은 더 이상 현대학문 체계와 잘 맞지 않는 면이 있다. 특히 포스트-모던으로 규정되는 일련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의 회의론 속에서 거의 절대론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거대이론들이 설 자리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이론이 아직도 우리에게 던져주는 매력은 엄청나다. 무엇보다도 설명과 이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든가 혹은 사후적 설명과 동시에 예측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대이론은 아무래도 근대 및 현대 사회를 건설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소위 건설시대의 산물들일 수도 있다.
표준모델은 이러한 거대이론 중에 대표적인 한 유형일 것이지만, 경제학에는 표준모델 외에도 몇가지 거대이론이 더 존재한다. 현재의 신고전학파 표준모델과는 일정하게 괴리를 가지고 있는 스미스의 國富論 체계는 分業論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노동의 사회적 분업이 가져다 주는 엄청난 생산력의 증가가 스미스의 세상이 그 전세계 즉 중상주의의 제로섬 게임의 사회와 다른 것이다. 그 자신의 대상과 방법론을 동시에 정의해주는 스미스의 사회적 분업은 어쩌면 새로운 시래의 도래를 알리는 그의 학문적 세계에 있어서 잘 선택된 출발점일 수 있다.
맑스의 資本論 체계는 價値論으로부터 출발한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일종의 不等價 交換인 착취현상으로부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맑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출발점 선택은 20여년간의 고통 속에서 조심스럽게 선택된 부분이다. 가치라는 개념을 끌어내고 그로부터 자본과 경쟁 그리고 이윤율 저하의 법칙들을 설명하기 위한 맑스의 이러한 논리적 시원에 대한 설정은 다소 극적인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극적인 성격은 헤겔로부터 배운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맑스 시대의 거대이론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 즉 시대적 상황 자체일 수도 있다. 혹은 주어진 시대를 거부하려는 맑스의 치밀함이 낳은 새로운 논리전개의 한 방식일 수도 있다.
거시경제학을 만들어낸 죤 메이아드 케인즈의 출발은 보다 극적이다. 長期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결국 단기적 불균형과 장기적 균형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론에 있어서의 최소한의 입지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정부에 의한 개입을 정당화시키고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 전개들을 가능하게 하여준다. 케인즈의 이러한 단기와 장기의 구분은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의 합리성과 전체 시스템의 괴리고 자연스럽게 그를 전체주의적(holistic) 차원으로 안내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케인즈는 거시경제학의 창시자가 된다.

이러한 경제학의 대가들이 시원의 문제를 나름대로의 방법대로 해결을 하듯이 표준모델도 그 시원을 가지고 있다. 사실 표준모델은 다른 어느 학문보다도 많은 전제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전제들은 나름대로의 결합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용한다.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모델 자체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일만큼 서로 잘 결합되어 있고, 이들은 때로 은폐되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시원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가설들 중 가장 드라마틱하고 결정적인 요소는 소위 경제적 인간이라고 번역되는 homo-oeconomicus의 존재이다. 언제부터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세기 말경의 문헌에는 이미 이러한 용어가 보편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한계혁명 이후에는 이러한 가설들에 대해서 당대의 학자들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적 인간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경제학의 이해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제적 인간이라는 가설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전제들을 같이 갖고 있을 뿐더러 이후의 논리 전개에 필수적인 인식론적 선택들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선택은 매우 자주 지적되고는 하지만, 그러한 인식론적 전제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되어서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2) Homo oeconomicus versus Homo sociologicus :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방법론적 전체주의
학문의 출발에 있어서 여러가지 원칙들이 결정되어야 한다. 예컨데 물질중심으로 볼 것인가 혹은 관념중심으로 볼 것인가 하는 유물론과 관념론에 관한 선택이 그런 것이다. 혹은 사물을 운동 속에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고정된 상태에서 포착할 것인가 하는 오래된 소피스트들의 질문도 전혀 인식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동양적인 의미에서는 성선설과 성악설에 관한 여러가지 선택들도 중요한 인식론적인 선택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세상을 희망적으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궁극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도 단순한 궁극의 순간에만이 아니라 개념을 발생시키는 매순간 그리고 그러한 개념을 현실과 충돌시키는 매 계기마다 중요한 잣대이며 이정표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근본적인 인식론적 선택들은 우주관과도 연결되며 향후의 시각 자체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여러가지 인식론적인 문제들은 결국은 결정의 문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다른 것보다 더욱 나은 대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들은 시대에 따라 보다 나아보이는 정답이 있기도 하지만 긴 역사의 흐름은 결국 어느 하나도 우월한 대답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사와 철학사는 이러한 면에서 종종 비교되는 두 가지 다른 발전양상으로 종종 비유된다. 물론 파라다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제기한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에게 있어서는 과학사 자체도 끝없는 파라다임의 교체에 다름 아니므로 과학사라 해서지식의 축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끝없는 방법론적 개선 즉 증명의 기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견해는 적어도 과학에 있어서의 일정한 지식의 축적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식의 축적이 절대적인 지식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런지에 관해서는 상대적 진리의 축적과 절대적 진리의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할 수 있다. 어쨌든 과학사가 축적이 가능한 역사라고 한다면 철학사는 몇 가지 원칙이 끝없이 순환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과학사는 단선론적 진행 혹은 용수철식 진행을 하는 데 반하여 과학사는 원형의 운동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경제학의 이론사를 방법론 발전의 역사로 본 죠셉 슘페터에게 있어서 경제학의 역사는 단선론적 축적구조에 가까울 것이다. 혹은 사회주의적 지식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및 사적유물론을 파악한 맑스에게 있어서도 경제학의 발전과정은 축적의 역사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경제인식론자들 특히 뒤 루자(Di Ruza)나 판 파리지스(van Parijs)처럼 유럽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 경제학 역사는 오히려 철학사와 더욱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 이전에 활동하던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자들은 아무래도 국가개입주의적 입장을 취하였고 또한 무역에 있어서는 보호무역주의의 신봉자들이었다. 반면에 그 뒤를 이어 경제학의 전면에 등장한 고전학파들은 국가불간섭을 믿고 있던 자유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유무역주의를 주창하였다. 고전학파의 이론을 비판하는 것을 자신 존재의 이유로 생각했던 리스트를 위시한 독일역사학파들은 고전학파와는 정반대로 국가별 역사적 단계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다시금 보호무역주의를 경제학의 전면에 복권시켰다. 그뒤에도 경제학의 다양한 학파들은 국가와 무역에 관해서 나름대로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었으며 80년대 후반의 GATT체계의 재정비와 그에 따른 UR 과정에서도 우리가 익히 보았듯이 보호무역주의와 자유무역주의, 그리고 국가간섭주의와 국가불간섭주의는 마치 유령이 다시 나타나듯이 언제나 다시 나타나고는 한다. 아마 이러한 대립관계는 국가 그리고 무역 자체가 사라지기 전에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 및 방법론적 선호에 대한 갈등을 좀 더 사회과학 혹은 과학 자체로 넓힌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가장 유명한 논쟁으로서 방법론적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과 방법론적 전체주의(methodological holism) 사이의 갈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 논쟁은 그러나 종종 혼동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혹은 그 중요성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갈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회과학 방법론의 절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다는 것과 같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과학으 큰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학과 사회학의 근본적인 차이라는 것도 이러한 두 가지 인식론적 축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것일 뿐더러 문화주의나 규율에 관한 여러가지 이론틀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때로 원자주의(atomism)으로 불리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방법론적 전체주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개념들이 즉각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하고 세밀한 규정들이 필요하겠지만, 이론화 시작의 첫 계기의 인식론적 선택이라는 면에서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경제학이 되었든 사회학이 되었든 혹은 물리학이든 어떤 사물을 고찰할 때 그 첫 순간에는 개체부터 관찰을 할 것인지 혹은 전체적 모습으로부터 출발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선택을 하여야 한다. 불행히도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선택할 수 없다는 데에서 이 유명한 인식론적 갈등이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관한 문제를 접근할 때 개별 주체를 중심으로 파악하는가 혹은 전체적 형상 그리고 그 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理論化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지적이다.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확실히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논리에 충실한 논리이다. 개인들은 나름대로의 경제적 특징에 의하여 정의되어 있으며, 이러한 개인들의 행동의 총합에 의하여 사회 및 경제적 관계, 즉 시장 구조가 이해된다. 개인의 행복(즉 효용)의 합이 전체의 행복(사회적 후생)과 일치한다고 가정되는 면에서 벤담의 공리주의적 정식을 충실히 따르는 편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원자론 하에서 전체의 논리 및 특징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환원될 수 밖에 없으며, 전체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개인들을 이해하고 그 특징들을 합산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적인 원자를 제외한 전체를 그 자체로 이해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후생경제학이나 조세 모델 등에는 개인 대신 家計(family)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 때 가계는 아마도 부모와 자식들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에서는 이러한 가족 구성원들의 총합에 의한 가계가 마치 하나의 사람처럼 잘 조화되고 언제나 만장일치적인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單一人인 것처럼 간주한다. 이는 가계와 기업 그리고 정부라는 세 가지 경제적 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이론화하기 위한 추상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사물의 기본요소로 설정된 원자들을 또 다른 하부 단위로 구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 의해서 일반적인 미시경제학은 기업을 하나의 사람과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마치 소비자들이 하나의 소비함수에 의해서 행동이 결정되는 것처럼 기업들도 이윤함수 혹은 생산함수라는 하나의 함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마치 1인 기업과 같은 형태로 이론화를 시키고 있다) 좀 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기업이론은 Black box이론이라고 상당한 비판을 받게 된다. 제도적 측면이 되었든 혹은 정보와 관련된 시스템 이론이 되었든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일련의 새로운 시도들은 이러한 방법론적 개인주의 때문에 포기한 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 좀 더 이론화 작업을 진행시키려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전체를 개인에 환원시켜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좀 더 극적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국제경제학 특히 응용된 국제경제학인 자원시장론이나 혹은 국제기구론 등의 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계나 기업 등의 조직만이 하나의 개인 즉 원자화된 구성원소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도 국제적 시장에서는 하나의 합리성을 가진 단일화된 개인인 것처럼 간주된다. 국가가 하나의 개인이라는 것은 방법론적 편의를 떠나 매우 심각한 논리적 비약들을 발생시키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은 일단 개인주의적 접근법을 선택한 후에는 다분히 피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다.

개인의 총합이 전체인가에 관한 질문은 사회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에밀 뒤르케임에 가면 좀 더 드라마틱해진다. 개인에 대한 환원주의적 속성이 강한 경제학적 방법론에 불만이 많았던 그는 자살론, 사회분업론 등의 잇단 저작을 통하여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다라는 새로운 작업가설을 제안하게 된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정반대의 접근방식을 택한 그는 먼저 유기적 연대와 기계론적 연대 등 사회와 같은 전체적 범주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분석한 뒤 특정 사회가 가진 특징들로부터 다시 개인에 관한 설명으로 진행하는 접근방식을 취하게 된다. 뒤르케임의 설명틀 안에서 개인은 구조에 의하여 규정되는 개인이며, 개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원자론적 특징 보다는 그 개인을 둘러싼 구조적 특징과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지워진 인간을 Homo sociologicus 즉 사회적 인간으로 불리게 된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든 혹은 방법론적 전체주의든 개인과 전체 즉 구성원과 시스템을 설명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한 경우의 사회에 대한 설명과 사회로부터 출발한 경우의 개인에 대한 설명이 다르다는 점에 중요한 인식론적 선택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좀 더 드라마틱하게 이러한 특징들을 구분하자면 경제학이 전제하는 개인과 사회학이 이해한 개인 그리고 사회학이 자신 학문의 대상으로 상정한 사회와 경제학이 개인들을 사회화시키는 場으로 설정한 시장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 개인:구조 사이의 인식론적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이다.

Homo oeconomicus ≠ Homo sociologicus
시장 ≠ 사회

개인으로부터 전체로 나아가는 방식이 전체를 개인에 환원시키는 환원론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일탈 즉 기회주의자의 존재 자체를 배제할 수 없다는 약점 등을 가지고 있다. 흔히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문제점은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칙들이 전체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 경우 흔히 사용되는 예가 경기장의 군중 모델이다. 운동경기에서 사람들은 더 잘 보기 위하여 종종 일어서는 예가 있는데, 이 때 한 개인이 일어설 때에는 일어서는 것이 유효한 방법이지만 모두가 일어선다면 처음과 같은 상태가 되며, 오히려 서서 보게 된다는 점만이 변하였으므로, 전체적으로는 처음보다 나쁜 상태가 된다. 이렇게 개인에게 있어서 적용되는 법칙이 전체에 있어서는 오류가 되거나, 혹은 그 역의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일은 종종 있다.

사실 이러한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통합시키려는 시도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러한 두 가지 이론 출발의 방식을 기계적으로 접합시켜 동시에 두 가지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2500년 전 이데아를 전제하고 모든 사물은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생각한 플라톤은 전체주의적 접근방식을 취한데 반하여, 동일률과 모순률로 모든 논리의 기초를 형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주의적 입장을 취한 셈이다. 결국 희랍철학의 태동기에서부터 등장한 이러한 문제점들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남는 셈이다.

개인과 전체 사이의 갈등은 경제학 내에서도 종종 발생하는데, 특히 국가를 그 자체로 고려하려고 하는 경우에 이러한 문제점들은 더욱 극심해진다. 미시경제학에는 개인들, 즉 소비자와 기업만이 등장하며 이러한 직접적인 경제적 주체가 아닌 제 3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시경제학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갑자기 국가라는, 기업도 소비자에도 환원되지 않는 제 3의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오게 된다. 혹은 왈라스 일반균형 모델에 등장하는 경매자(commissaire-priseur)의 성격에 관한 부분은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경제학 내에서 아직까지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을 연결시켜 주는 부분은 매끄럽지 않으며, 왈라스의 일반균형, 즉 개별 경제적 주체를 시장이라는 특별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통합한 일종의 사회이론과 거시경제학이 논리적 연관관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많은 경제학자들에게 아직도 논리적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신거시경제학 혹은 신산업경제학이라고 불리는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시도되는 거시경제학의 미시적 기초의 건립이라는 문제의식도 결국 개인과 전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발생하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를 흔히 다리의 부재(absence of bridge)라고 한다. 개인으로부터 출발한 구조, 그리고 구조로부터 출발한 개인을 동일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이런 연금술과 같은 방법을 찾기 위하여 수많은 인식론적 및 새로운 이론의 구성자들은 숱한 밤을 지새며 도전을 해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개인과 구조를 이어줄 수 있는 만족스러운 다리는 아직까지 찾아지지 않았다. 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호모 소시올로지쿠스가 끝끝내 인식론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는 비극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본능의 지시대로 행동하는 경제적 인간도 인간본성의 극단적인 한 면이지만 사회라는 구조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결정자로서의 인간도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 속성의 극단적인 모습일 뿐이다. 때로 결정되고 때로 결정되어 지지 않은 인간, 때로 자유롭고 때로 전혀 자유롭지 않은 인간의 본원적 속성을 경제학이든 혹은 사회학이든 온전히 인식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3) 분류( classification)와 변화(evolution) : 보편주의와 시간의 문제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방법론적 전체주의는 그 자체로서 나름대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개인주의 입장에 서든 혹은 전체주의적 입장에 서든 완벽하게 개인적이며 전체적인 일관된 설명틀을 만들기는 어렵다.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개인과 전체를 오가며 부분적인 설명들을 추가할 수밖에 없다는 실제적인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1차적으로 설명을 위한 개념들을 발생시킬 때도 존재하지만, 일단 이론이 성립된 후에 그러한 개념들의 연결에 의하여 일정한 설명을 만들어 낼 때도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존재의 시간에 따른 변화에 대한 문제에서 이러한 방법론은 인식론적 특징 및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일반문법(grammaire g n rale), 생물학 그리고 경제학이 시대에 따라 가졌던 인식틀의 묘한 공통점들에 대해 지적을 하며 각 시대마다 특유한 인식기반 ( pist m )가 존재한다는 지적을 한다. 이 때 주된 특징으로 지적된 것이 분류체계를 선호하던 17세기와 변화 즉 시간을 도입하게 되던 18세기의 특징을 주로 지적하였다. 물론 여기에서 경제학과 생물학에 대한 푸코의 제안 및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생산을 시간이 도입된 것으로 간주하는 푸코의 해석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석 혹은 비판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류와 변화라는 문제의식은 사실 인식론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경제학이 선택하고 있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원칙적으로 보편주의(universalism)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으로서 경제적 인간이 상정되는 것이다. 이기주의적이고 계산을 할 줄 아는, 즉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의 속성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장소가 변한다 해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인간의 특징은 경제학 내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순간에 이미 선택된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원시인이 되었든 미래인이 되었든 행동양식은 동일한 것으로 설정이 된다. 한동안 경제학에서 출발한 인류학자들이 당시의 소득수준 즉 GNP에 대한 평가를 하고, 그 당시의 경제규모를 추정하던 것들은 이러한 보편주의적 접근방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문제는 시간의 문제, 즉 역사성(historicity)에 대해서 표준모델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론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저개발국가와 선진국가의 경제 주체 사이 행동양식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주어진 제약조건 즉 예산제약 조건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시간의 문제는 다시 공간의 문제로 드러난다. 서로 다른 공간이 서로 다른 시간 대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러한 차이점들을 어떻게 고려하여야 할 것인가? 고전학파 경제학의 경우는 축적양상의 차이 혹은 맑스적 의미에서의 생산력의 차이라는 것은 시간에 대한 또 다른 고려의 양상일 뿐이다. 표준모델에서 시간의 의미는 소득수준의 차이 즉 사회적 부가가치 생산의 차이로만 표상된다. 이를테면 스케일의 문제 즉 크기의 문제 차이만이 시간을 고려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인 것이며, 이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단선적인 성장의 궤적으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경제시스템을 구성하는 개개인에 관한 행위 모델은 동일한 상태에서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진 시스템들이 다른 크기 즉 스케일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 표준 모델이 제공하는 역사성이다.
이러한 면에서 표준모델이 가지고 있는 보편주의는 탈역사적(a-historic) 이론이라는 비판을 자주 받게 된다.

개인주의와는 또 다른 반대편에 서 있는 방법론적 전체주의가 제시된 것은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케임을 통하여서이지만, 실제적으로 구조주의적 방법론이 꽃을 피게 된 것은 언어학과 인류학을 통하여서이다. 소쉬르(Saussure)가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이라는 소위 형식과 내용이라는 요소들을 통해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언어학을 발달시킨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어쨌든 개인과 구조와의 관계에서 언어영역 만큼 구조의 先在性(pr -existence)을 극명히 보여주는 경우도 별로 없다. 사실 구조가 개인에 대해서 선재한다는 것은 뒤르케임이 사용했던 개인의 합이 전체가 아니다라는 다소 무리한 조건없이도 구조주의의 정식을 사용할 수 있게 하여준다. 구조가 개인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할 때에는 당연히 분석의 첫출발이 구조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언어현상의 사회적 측면은 이러한 속성을 잘 만족시켜준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태어난 한 아이가 있다고 하자. 불필요하게 명사의 성과 수를 나누고 또 시제에 따른 동사변화들이 비효율적이라고 아이가 생각해서 영어나 혹은 아시아게열의 어느 언어를 사용한다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 아이의 부모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가르칠 것인가? 언어는 일종의 사회화의 수단이며 또한 인식의 수단이다. 이 때 언어는 동일한 언어일 때 유용한 것이며, 서로 통하지 않는 다른 언어의 경우는 구조에 적합지 않는 구성요소로 표현될 수 있다. 결국 한 아이는 자기가 어느 사회에 태어났는가에 따라서 어느 언어를 배워야할 것인가가 이미 선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모델은 구조에 의하여 구조지워진 존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에 따른 개별적 개체들의 특징화에 대한 또 다른 극적인 예는 우리에게 청바지 이름 및 청바지 모델로 더욱 잘 알려진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에게서 나타난다. 실상 인류학의 대중적 성공은 레비-스트로스라는 걸출한 인물의 존재와도 맥을 같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류학 현장연구(field study)에 있어서 작업가설로 사용한 가정은 인간의 뇌를 포함한 신체적 조건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인종의 차이와 지역적 차이 등 자연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들이 자리하게 되는(situated)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황 등의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다른 사유양식 및 선호관계 그리고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이러한 가정에 의하면 인류학이 주된 연구대상은 각 개인의 개인적·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다른 양상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에 의하여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antholopology)은 인종학 또는 민속학(ethnology)와 결별하게 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세계에서 개별 주체는 철저하게 구조에 의하여 구조지워진, 즉 구조에 의하여 행위된 (agi) 존재이다. 구조는 언제나 개인에 대해서 선재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이러한 구조를 벗어난 개인이라는 특별하며 특수한 존재는 그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극단적 구조주의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자유는 통계허용범위 안의 오차와도 같은 의미 정도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서 미국의 사회학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탈콧 파슨스(Talcott Parsons)의 사회시스템 이론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미국식 사회학의 주요한 뿌리를 형성하는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의 중요한 근간을 형성하는 것은 아무래도 파슨스의 사회시스템이론일 것이다. 그는 모든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요소들에 대한 영역구분을 한다. 사회적 영역, 경제적 영역, 정치적 영역, 종교적 영역의 4가지 요소들은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구성적 요소들인 셈이다. 이 4가지의 서로 다른 조합에 의하여 파슨스는 로마시대의 국가구조로부터 현대 사회까지의 다양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유형화를 시도한다. 예컨데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기능은 교회 및 사찰 등의 다양한 종교기관에서, 그리고 경제적 기능은 기업에서 이루어진다고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는 정당을 통하여, 그리고 사회적 기능은 여러 가지 모임이나 사교계 혹은 친분구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구조주의는 다양한 구조형태를 유형화시켜 수평적으로 비교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방법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유형의 사회이든지 핵심적 요소의 추상화를 통하여 상호비교하는 데에 있어서 구조주의적 접근은 매우 효과적이며 유리한 측면을 보여준다. 흔히 사용하는 용어로 인구구조에 있어서 피라미드형 구조와 逆피라미드 구조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어느 사회가 되었든 연령에 따른 그 사회의 인구분포구조를 매우 쉽고 간결한 방식을 통하여 추상화시키고 비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로 민주적 정치구조와 비민주적 정치구조를 비교할 때, 이 두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파악함에 따라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특징은 프랑스 내에서는 신구조주의자 그리고 영어권에서는 포스트-모던주의 철학자로 구분되는 푸코가 린네의 생물학에 대해서 내렸던 분류(classification)의 전형적 문제를 보여준다. 린네의 자연경제학(Economie naturelle) 체계에서 모든 생물은 신의 섭리에 따라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생리적 유형의 특징에 따라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종속강목 등의 체계에 의하여 각 종을 분류하여 내는 린네의 종분류체계는 이러한 18세기의의 에피스떼메( pist m 한 시대의 사유양식의 개괄적 특징을 결정하는 소유 사유틀의 의미로서 푸코가 사용한 용어. 쿤의 파라다임이 특정 논리의 접근방식에 대한 사유틀을 얘기한다면 푸코의 에피스떼메는 한 시대 전체를 규정하는 사유양식의 중요한 기준에 대한 부분을 가르키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보다 작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시대라는 슈마허의 small is beautiful이라는 명제는 푸코에게 있어서 하나의 에피스떼메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분류에 대한 강박관념과도 같은 집착을 잘 보여준다. 꽃잎의 모습이나 꽃받침의 생김새 그리고 줄기의 모습등은 다양한 식물을 효과적으로 분류해 그러한 분류 체계 내에서 나름대로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하여줄 것이다.
경제학에 있어서의 분류는 富(richesse)를 측정하는 방식 즉 價値(value)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양식의 이론화인 정치경제학의 등장이라고 푸코는 지적한다. 어쨌든 현대경제학 특히 경제발전론에 관하여서는 이러한 구조주의적 유형화 및 분류가 나름대로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사실이다. 남미식 경제와 동아시아식 경제발전모델 혹은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의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일본 등의 수입대체형 산업화에 관한 분류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어쨌든 표준경제학 내에서도 산업시스템 및 금융시스템 혹은 발전체계 등에 대한 유형별 분류에 관한 논의가 필요할 때는 알게 모르게 구조주의적 관점을 채택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주의적 접근방식이 결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시간의 개념이 설명틀에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다. A형, B형, C형의 유형이 존재한다고 설명할 때의 구조주의적 접근방식의 강점은 A형 B형 C형의 변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오히려 방법론적 결함으로 지적될 수 있다. 다른 유형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러한 유형 사이의 변환 혹은 이전을 내부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또한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하나의 구조가 다른 구조로 이전하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외부적 요소에 의한 설명과 내부적 요소에 의한 설명이 각각 동원될 수 있다. 그런데 외부적 요소가 우연적인 설명이며 본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에 의한 설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보다 내재적이며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의하여 변화하게 된다는 설명틀을 선호한다. 그런데 구조주의는 이러한 식의 변환(transformation) 그리고 변천(evolution) 즉 歷史性이 개입하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조금 전에 예로 들었던 린네의 분류표가 이러한 구조주의적 약점을 어떤 식으로 보여줬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여러 가지 種의 유형적 특징에 의하여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하나씩의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는 데에 성공한 린네 시대의 생물학자들에게 있어 화석의 존재는 인류의 기억 너머에 얼어붙어 있던 과거 세계로 통하는 창문이었다. 그들은 화석의 존재를 통하여 이제는 멸종된 생명체가 지구 내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존재하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존재했었던 생명체에도 나름대로의 종분류를 시도하였다. 이 시대의 생물학자들은 진화론이 존재하기 이전 소위 자연경제학 체계에서 神의 조화로운 섭리에 의한 질서지워진 세상을 인정했던 마지막 세대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화석은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산과 들로 화석을 찾으러 떠난 이 신의 시대의 생물학자들에게 있어서 인간, 즉 모든 종의 으뜸종인 고대인류의 유골을 이제는 사라진 공룡과 고식물들 사이에서 발견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왜냐하면 시간의 존재에 따라 펼쳐진 화석들 사이에 인간의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사람, 즉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로 부르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증거로 등장한 이러한 인간의 시원의 문제에 대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종교전쟁을 치루러 떠나는 것처럼 인간의 화석을 찾으러 떠났지만, 증거는 오히려 인간은 그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쪽에 더욱 가까웠다. 다윈이나 스펜서의 등장은 이러한 舊時代의 마지막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인간은 진화의 결과이며, 진화론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존재했단 영물체가 아니라 다른 어떤 종으로부터 진화해 온, 다른 여느 생명체와 마찬가지인 유기물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론적 변화는 결국 분류의 에피스떼메( pist m )에서 변화 즉 시간의 에피스떼메로 사람들을 움직여왔다.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와 분류체계 사이에 어떠한 방식의 연관 즉 변환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는 이만큼 중요한 설명방식의 차이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시간 즉 역사성(historicity)의 도입은 구조주의에 중대한 한계를 갖게한다.
분류체계적인 구조주의가 변화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모든 것의 출발지 즉 기원을 설명하기 어렵다.

경제학의 표준모델은 이렇게 구조주의가 변화 및 기원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있을 때 역사성이 있을 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버린다 (물론 이것이 해결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반론이 존재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결정된 존재( tre d termin dans le temps et dans lespace)라는 데리다의 구호는 경제학의 보편주의(universalism)라는 일종의 탈역사적(a-historic) 접근 방법에 의하여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린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인간의 본성 즉 이기적 본성으로부터 행동양식 및 사유양식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보편주의적 속성을 가지게 된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쉽사리 이렇게 보편주의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러한 인간의 원천적인 합리성으로부터 교환을 하게 되고, 이 교환이 시장으로 이해될 때 단지 인간만이 보편적인 존재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일종의 합리성으로 역사성을 탈피하게 된다. 칼 폴라니 이전의 경제인류학자들은 경제학의 정식을 많이 원용하여 원시사회에서의 시장, 즉 보편적인 합리성에 근거하여 문제를 풀려고 하였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보편주의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관점에 대한 한 편향을 잘 보여주는데, 결국 모든 사회와 모든 경제시스템은 동일한 원칙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 된다. 이러한 견해 속에서 시장은 제도나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이며 원천적인 본질적 특성 자체가 되며, 서구사회든 발전단계의 국가들이든 혹은 사회주의 국가들이든 동일한 틀, 즉 개인적 합리성이라는 눈을 통하여 해석되게 된다.
한국 사회가 이즈음 맞닥거리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경제학이 해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러한 시간의 추이에 따른 구조적 변화에 대하여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전제하는 보편주의가 잘 준비되어 있는 인식론적 틀이 아니라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시장의 존재 및 기능이 잘 정의되어 있는 상태가 아닌 사회들, 즉 앞으로 시장을 만들어야 하거나 혹은 보다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 정부 혹은 특별한 기구들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보편주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보편주의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오류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 보편주의적 견해는 언제나 명확하고 간결한 해답을 내어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해답이 현실과 역사성 속에서 진실과 조응하는지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4) 다리 부재의 문제 (The problem of absence of bridge)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방법론적 전체주의는 앞에서 얘기된 것처럼 어쨌든 중요한 인식론적 대척점으로서 기능을 한다. 시간의 문제와 함께 예견의 문제, 개인과 구조의 관계 등 두 가지 방법론은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개인주의적 접근도 어떤 식으로든지 전체를 설명해야 하고 전체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접근방식도 개인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 있고, 이러한 양 접근에 의한 서로간의 결론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에 이러한 방법론적 갈등의 원천이 등장하게 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이 충돌하던 그 시기부터 이러한 두 가지 설명방식의 차이점은 쉽사리 화해되지 않은 상태로 여전히 대립하고 있다.
경제학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점은 흔히 애기되는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연계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으로 주로 드러난다. 일반적인 미시체계는 마샬의 부분균형으로부터 출발하여 일종의 사회모델인 왈라스의 일반균형 모델로 마감을 한다. 왈라스의 일반균형은 모든 사회적 주체와 모든 재화가 동시에 등장하는 모델로서 일종의 경제학의 사회에 대한 시각, 즉 시장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우주관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부분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으로부터 사회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 경제학의 표준적 체계는 케인즈 이후의 경제학과 부드럽게 연계되지 않는다. 케인즈는 뒤르케임이 개인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명제로부터 방법론적 전체주의의 설명틀을 이어나간 것처럼 개인들은 자신의 계산을 믿지 않기 때문에 결국 집단적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는 또 다른 명제를 통하여 거시경제학의 길을 열게 된다. 거시경제학에 등장하는 소비자들과 기업들, 그리고 왈라스 균형에는 존재하지 않던 국가의 존재는 개인에 대한 기반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소위 거시적 경제주체들이다. 이러한 면에서 미시와 거시는 하나의 논리틀 속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두 다른 연구의 계기로서 어정쩡하게 봉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신산업경제학 등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신거시주의자들은 이러한 케인즈적 비약이 논리적으로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미시적 기반을 가진 새로운 거시이론을 만들고자 수십년 전부터 다양한 학문적 시도를 가져왔다. 합리적기대가설로 유명한 루카스의 여러 가지 이론들도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거시경제학의 미시적 기초를 갖고자 했던 시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구조와 개인이 어정쩡하게 갖자 나름대로 방법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소위 다리의 不在(absence of bridge) 문제라고 한다.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갈등으로부터 도래한 다리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두 방법론을 적절하게 통합하는 방법에 대하여 무단히 고민을 하였는데, 결국 최초의 선택이 마지막까지 극복하기 어렵다는, 소위 인식론적 결함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인을 근거로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구조에 대한 요소들을 삽입하던가 혹은 역의 경우 모두 논리적 일관성을 잃게 되며, 특히 사회과학적 접근이 가장 중요시여기는 논리적 일관성을 잃게 되는 것은 오히려 학문적 기반 자체를 위협받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보다 새로운 발상들은 아예 다리로부터 출발하는 이론들을 만드는 것이다. 즉 개인과 구조 사이에 존재하며 개인에 환원되지도 않고 구조에 환원되지도 않는 다리, 그 다리로부터 출발하는 방법론적 선택은 개인과 구조를 동시에 이해하여 두 가지 인식론적 축을 화해시키는 방법으로 인식되었다. 결과부터 말을 하자면 이러한 다리로부터의 출발은 매우 흥미로운 이론틀들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학문 요소로서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본래 의도했던 두 가지 인식론적 대축점을 해결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리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일 먼저 실천한 것은 미국의 인류학자들 혹은 사회학자들이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는 20세기 들어와 일종의 pax-Americana 체계에서 초강국으로 등장을 하였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접근은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소위 민족국가(Etat-Nation)라는 유럽사회의 새로운 국가 즉 공화국을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개념들은 미국을 설명하는 데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원래의 민족은 인디안이라는 이름 아래 철저히 붕괴되었고 그렇다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이 절대적 권력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도 아니었다. 해방된 흑인노예와 노무자로 진출해 자리를 잡은 아시아계열의 민족들 그리고 스폐인과 이탈리아 등의 라틴계열이 거대한 용광로처럼 하나의 사회를 형성한 미국은 인종과 혈통 혹은 언어관계로 그 통합성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사회이다. 개인은 철저히 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특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라는 사회의 독특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아프리카 사회도 아닌 미국은 미국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미국을 하나의 국가 즉 조화된 하나의 사회구조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문화일 것이다. 식민지 시절과 서부개척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은 그 어느 곳에도 환원되지 않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게 되었고 물론 그 문화의 깊이에 관한 얘기는 차지하고라도 그러한 문화를 통하여 서로 다른 인종과 서로 다른 언어권 출신의 미국국민들은 거대한 미국이라는, 소위 신대륙이라는 사회를 용광로처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조, 개인 그리고 그 사이의 다리라는 세 가지 범주는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구조로서의 미국, 구성원으로서의 미국국민, 그리고 그 중간적 매개체로서의 문화를 설명해 내었다. 이렇게 시작된 문화주의는 인식론적 전제로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제는 문화주의적 설명방식은 우리 일상생활의 한 사유양식으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데 그런 것은 원래 그들의 문화니까라는 방식의 설명양식은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의사소통양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인종적·민족적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는 주요한 사유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마치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미국문화라는 중간 매개체, 즉 다리를 통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듯이, 세계 문화라는 보편타당하며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문화만 도출이 된다면 인류의 많은 갈등 요인은 자연히 해결될 수 있는 듯하였다.
이렇게 대성공을 거두었던 문화주의가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몰락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내재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문화주의가 기능주의(functionalism)과 결합하게 된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위 문화기능주의라고 불리는 독특한 사유양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의 기능과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설명양식과 결합한 문화주의이다. 예컨데 우리와 다른 행동양식을 가진 또 다른 집단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들을 문화의 차이로 돌리는 것은 가장 손쉽고 덜 폭력적인 설명방식이다. 만약에 그것을 문화로 인정하지 못한다면 두 다른 행동양식 중에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르다는 결론을 잠정적이나마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데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하는 사람들과 젓가락과 수저를 사용하여 밥을 먹는 민족 사이에 본질적인 문제가 단순히 식사상의 문화적 차이밖에 없다는 것은 전형적인 문화주의적 설명방식이다. 그 어느 것 사이에도 원칙론적인 우열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만약 이렇게 문화주의적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진화론적 의미, 특히 목적론(determinism)과 결합된 진화론적 사유방식만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한다면 세상은 상당한 2분법적 흑백논리의 싸움에 항상적으로 빠져들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우세한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역사적 궤적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불거져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수저와 젓가락의 식사습관이 서로 다른 문화라고 이해되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어차피 그것은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식사문화의 문제일 뿐이다. 만약 포크와 나이프가 수저보다 우수하다면 문화강요에서부터 문화식민지에 이르기까지 지리한 문화논쟁을 모든 민족들은 서로간에 벌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문화주의 이후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문화를 그것도 그들의 문화라고 이해해주는 포용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보신탕을 먹는다던가 하는 등의 문화적 포용력 밖에, 즉 문화주의의 제도권에 편입되지 못한 문화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화주의의 약점은 바로 이 넓은 포용력 자체에서부터 불거지게 되었다. 모든 존재하는 문화는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방식 즉 다른 형태일 뿐이라고 하였을 때 결국은 모든 문화는 나름대로의 문화로서 동등한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이 경우,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이전하게 된다거나 혹은 문화끼리 접목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우등과 열등 혹은 보다 나은 것에 대한 판단 자체를 문화주의가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재하는 모든 문화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문화주의의 대전제는 쉽게 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 즉 status quo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게 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조화와 존재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므로, 전통적인 문화를 파괴 혹은 변형시킨다는 것은 잘못한 시도라고 주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문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 중에 저항문화와 같이 기존 문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를 거부하게 되는, 혹은 반동적 입장을 보이게 되는 그러한 문화기능주의의 병폐가 등장할 여지가 생긴다. 재즈와 클래식의 갈등, 사이키델릭락과 팻분과 같은 소프트락 사이에는 단순히 문화양식의 차이만이 아니라 新舊의 갈등이 자연스럽게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군대와 같이 옛 것을 지키려는 속성이 강한 집단에서 이러한 음악에 대한 해석 및 고집 등이 갈등을 만들어내게 된다. 로빈 윌리암스의 주연의 Good morning, Vietnam에서 보여주듯이 폴카를 주장하는 특무상사와 보다 자유롭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믹 재거를 틀려는 하사와의 갈등은 문화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편향일 수 있다. 즉 문화주의는 또 다른 한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라는 극단적인 포용력에서부터 보다 나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문화를 고집하려는 극단적인 폐쇄주의에 동시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문화주의가 봉착한 어려움은 소위 나비 논쟁이라고 불리는, 즉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구조의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나비가 자연 속에서 보호색을 갖추어 생존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색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다양한 색과 다양한 무늬를 가질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은 문화주의의 전제를 갑자기 궁색하게 만든다. 즉 존재하는 모든 문화가 나름대로의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느냐 했을 때 전혀 존재의 이유는 없지만 우연히 존재하게 된 문화들도 상당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화분석론에서는 많은 신화들에서 실질적인 메시지를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면 단군의 신화에서 육지민족 즉 기마민족의 대표인 호랑이와 산악민족 즉 정착민족의 대표인 곰과의 전쟁에서 곰이 승리하게 되었다고 나름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읽으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성경의 많은 신화들로부터 그 시대의 삶의 지혜를 읽으려는 시도도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정말이지 순수한 우연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면? 정말 아무런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문화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문제들과 부딛힐 때 문화주의의 성급한 판단은 오해를 더욱 증폭시킬 여지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다리로부터 출발하려는 접근법을 연 문화주의는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지고 한동안 사회과학을 풍미하였지만, 결국 문화라는 개념은 개인과 구조 사이에서 개인에게 더욱 가까운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순간, 즉 판단의 마지막 순간에는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보유할 수밖에 없다는, 결정적인 문제를 떠안게 된다. 구조주의가 변화의 시원의 문제에서 결정적인 벽에 봉착하듯이 문화주의 역시 문화와 문화 사이의 변환에 관한 문제, 그리고 하나의 문화가 어떠한 기원을 가지고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시원의 문제에 봉착하면 결국 자신의 원류인 구조주의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그대로 표출하게 된다.

다소간 길게 문화주의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었는데, 문화주의가 보여준 방법론적 참신성과 함께 그 한계는 경제학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일단은 표준모델이 개인주의 측면에 있다면 표준모델에 편입되기 이전의 케인즈주의 이론의 일부, 그리고 산업시스템이론 등 주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 프로그램들을 구조주의적 이론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표준모델이 개인주의적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는 異論이 없지만 경제학 내의 구조주의적 접근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주장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알려주고 싶다.
어쨌든 구조와 개인 사이에서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경제학자들로서 우리는 일단 제도주의 학파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베블렌을 태두로 하는 미국의 제도주의학파는 사회도 그리고 개인도 아닌 또 다른 중간 다리의 제도로부터 출발을 하고자 했고, 이러한 시도는 유한계급론이나 경제제도론 등 일반적인 경제학이 잘 취급하지 않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들을 다루고자 시도하였지만 결국은 구조주의적 편향에 빠져들게 될 수밖에 없던 한계들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에 등장한 규율(rule), 계약(convention), 혹은 거래비용 등의 다양한 선도개념들은 다리로부터 출발하려는 주요한 노력들이라고 일단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절학파의 조절양식에 관한 개념은 여전히 구조주의의 문제점들, 즉 조절양식은 어떻게 변화하여 나가고 혹은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혹은 파브로(O. Favereau)나 부와이에(R. Boyer) 등의 협약주의자들은 개인의 합리성이 가지고 있는 보편주의의 함점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
*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어느 하나의 방법론적 출발을 전제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기도 하지만, 쉽게 이러한 방법론 사이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또 다른 절망일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미 하나의 방법론으로 등장하게 된, 소위 표준모델과도 같은 이론들은 대안을 주로 강요하는 학문적 폭력을 쉽게 휘두르게 된다. 예를 들면 현재 존재하는 이론 혹은 프로그램보다 나은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현재의 이론을 그냥 사용하거나 혹은 기꺼이 인정하라는 보다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그리고 방법론적 충돌이 다양하게 존재함으로 인하여 선뜻 대안이 될 수 있는 이론을 만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적 고찰은 이론 자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결함들을 또한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이론틀이 다른 방법론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믿는 것 또한 교만 이상은 아닐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고 또한 재생산할 수 있는, 즉 우리의 현상에 가장 잘 맞을 수 있는 우리의 이론을 언젠가는 가지게 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