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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제 2 절 더불어 사는 사회

제 2 절 더불어 사는 사회


1.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


21세기는 불로소득이 설 땅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경제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분배정의가 꽃처럼 만발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공평한 분배가 확고히 뿌리를 내려 누구나 '일한만큼 대접받고 사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공평한 분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산의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시킬 것이다. 첫째, 공평분배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도록 하는 유인을 제공한다. 열심히 일하면 그에 대한 보답이 정확하게 지불되므로 누구나 열심히 일하게 될 것이다.

둘째, 돈이나 사람이 비생산적인 부문에 흘러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생산적인 부문에 투입되는 돈과 사람의 양을 증대시킬 것이다. 비생산적인 활동으로부터는 수입이 발생할 수 없도록 하면,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흘러간 돈과 사람이 생산적인 부문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평한 분배, 즉 분배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은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갖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부정부패나 부동산투기 또는 탈세를 막음으로써, 이런 행위로부터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근절하여 노동자나 기업가·농민 등과 같은 생산적 계층의 근로의욕을 북돋우고 소득을 증대시키자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경제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2. 자전거경제와 자동차경제


앞으로의 성장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 과거 우리 경제의 성장전략은 오직 '성장을 위한 성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성은 상실된 채 물질성만이 추구되었다. 질보다는 양 위주의 성장이었으며,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시되는 성장이었다. 그저 쉴새 없이 허겁지겁 앞으로만 달려간 시간이었다.

이제는 '자전거경제'에서 '자동차경제'로 인식을 전환해야 할 때다. 자전거식 경제는 앞으로만 내달려야 하는 것으로 안다. 멈추기라도 하는 날에는 넘어져서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쉴새도 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식 경제는 그와 다르다. 경제에 항상 탄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다 보면 진흙탕도 있고 각종 장애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때는 속도를 줄여 천천히 갈 필요가 있다. 때로는 과열되지 않게 쉬었다 가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자동차경제이다. 자전거경제는 경제성장에 대한 후진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자동차경제는 경제성장에 대한 선진적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3.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세기에 들어와 각국의 경제성장은 무척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의 생활은 눈에 띠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윤택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성장에 따른 급격한 자연환경의 훼손은 인류의 삶 자체를 위협하게 되었다. 누구를 위한 성장이며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를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umacher)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라는 책에서 인간주의가 아닌 물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서구경제학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무엇이 인간을 위해 좋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성장을 위해 좋으냐"하는 관점에서 세워진 서구의 경제사회구조는 인간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천연자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을 강조한다. 인간이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인간과 자연을 중시하는 경제를 추구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자연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하다. 잘 알다 시피 인도는 소를 신성시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소를 잡아먹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의 수가 늘어나야 할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도에서 소가 늘지 않는 이유는 풀의 양이 거의 일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목하는 소의 마리수가 크게 늘어나면 먹을 풀이 부족하다. 굶주린 소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병으로 죽는다. 이렇게 하여 소의 수가 줄어들게 되면, 이번에는 풀이 남아 돌아 소들의 발육이 양호해진다. 번식은 촉진되고 다시 소의 수는 증가한다. 결국 장기적으로 소의 수와 풀의 양은 일정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어울리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게 되었다. 지구는 개발과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파헤쳐졌다. 그리고 한번 파괴된 자연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4. 로마클럽 보고서


세계적인 지식인들의 모임인 로마클럽에서는 1972년에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지구상에 사는 꽃중에 그 수가 매일 두 배씩 늘어나는 꽃이 있다고 하자. 오늘 한 송이가 내일 두 송이, 모레 네 송이, 글피 여덟 송이, 그 다음 날은 열여섯 송이 식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그 꽃이 자라는 자유중국 만한 연못이 있다고 하자. 그 연못의 반이 꽃으로 가득 차는 데에는 364일이 걸린다면, 나머지 절반이 꽃으로 가득 차는 데에는 며칠이 더 걸리겠는가. 물론 하루면 된다. 즉, 365일 째가 되면 연못은 온통 꽃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날은 어떻게 될까. 꽃들이 정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자유중국 만한 연못 하나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꽃이 불어나는 속도만큼 연못의 수가 늘어날 수는 없다. 꽃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연못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 내용의 핵심이다.

만일 꽃을 한국의 경제성장에, 연못을 한국의 천연자원에 비유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경제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려면 그에 따르는 자원의 양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원은 도저히 그렇게 공급될 수 없는 것이다.

성장은 필연적으로 자원의 사용을 동반한다. 그리고 급속한 성장은 자원의 고갈과 자연환경의 파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건강을 해치고 난 다음에 돈이 아무리 많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환경이 파괴되고 나면 경제성장이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선(先)개발 후(後)환경'이라고 하는 낡은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매연을 내뿜는 공장굴뚝의 숲이 선진국의 상징이 아니다. 출퇴근 시간에 시가지가 온통 자가용으로 메워진다고 해서 국제적인 도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점심 시간이면 푸른 숲이 있는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도처에 있고, 편리하고 안락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출퇴근을 할 수 있는 여유 속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나라가 21세기의 선진국이 될 것이다. 환경이 바로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환경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지금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5. 개인비용과 사회비용


자녀가 여럿인 가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한번은 빵을 먹을 때 한 자리에서 같이 먹도록 했다. 그랬더니 자녀들끼리 서로 경쟁심이 생겨 빨리 먹고 많이 먹는 것이었다. 다음 번에는 자녀들에게 빵을 각각 몇 개씩 나누어 주었다. 그 결과 먹는 속도도 느려지고 먹는 양도 적어 지더라는 것이다.

사유물과 공유물의 소비가 그러하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끼고 절약하려 한다. 그러나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은 헤프게 써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 것'은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우리 것'에 대해서는 소중함을 모르고 낭비한다. 내 집에 있는 수도물은 아끼면서 대중 목욕탕에 가면 펑펑 마구 쓴다. 내 집의 전기는 끔찍이도 절약하면서 회사의 전기는 마음 놓고 사용한다.

경제생활에서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편익을 얻는다. 일상의 모든 거래가 다 그렇다. 값을 치루고 편리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비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개인이 지불하는 것이 개인비용(private cost)이요, 개인이 아닌 사회가 지불하는 비용이 사회비용(social cost)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비용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환경오염만 해도 그렇다. 한강 상류지역에 어떤 사람이 공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폐수를 정화하려면 돈이 들어간다. 개인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밤이 되면 몰래 폐수를 한강에 방류한다. 어쩌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하루 종일 한강에 폐수를 마구 떠내려 보낸다.

그렇게 되면 정화시설을 갖추지 않은 만큼 거기에 들어갈 비용이 고스란히 자신의 이득으로 남는다. 게다가 한강이 오염되어 피해를 볼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인이고 피해의 정도 또한 불확실하다. 반면에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은 확실하고 크다. 사회적 불이익과는 관계 없이 개인의 편익은 엄청나게 큰 것이다. 그래서 공장주인은 폐수를 한강에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소치이다. 물론 이 경우 개인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 반면 개인편익은 대단히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 지불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그보다 훨씬 크다. 개인비용의 몇 배를 사회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회비용이 큰 만큼 사회편익도 증대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고통만이 가중될 뿐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결국에 가서 자신에게도 돌아간다. 한강에 방류한 폐수를 집에 가서 마시게 되는 것이다.


6. 외부경제와 외부비경제


경제학에 외부효과(externalities)라는 것이 있다. 이는 어떤 일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이 그 일로 인해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를 말한다. 먼저 이익이 발생하는 경우를 보자. 사과·배 등의 과일과 딸기·오이 등의 채소는 꽃들의 짝짓기를 통하여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이들의 짝짓기를 적극 도와주는 중매장이가 벌이다.

과수원과 딸기밭 주인들은 이들 벌 덕분에 성가신 인공수정의 노고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열매를 수확한다. 그것은 분명 저절로 생긴 경제적 이득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오이를 보자.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수정해야 오이가 열리지 않던가. 벌은 참으로 고마운 일을 한다.

이처럼 본인이 직접 노력하거나 비용을 치루지 않고 이득을 보는 경우를 외부경제(external economy)라고 한다. 봄철 제주도의 유채밭은 신혼부부들에게 달콤한 입맞춤의 보금자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신혼여행객들이 유채꽃을 피우게 하는데 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유채밭 주인에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제주도의 유채밭은 허니문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외부경제를 가져다 주는 셈이다.

그러나 외부효과의 보다 중요한 측면은 어떤 일과 직접 관련도 없으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이다. 이것을 외부비경제(external diseconomy)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폐수의 방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외부비경제가 발생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찾아 피서를 떠난다. 올 여름에도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도의 피서지들은 수많은 인파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그냥 내버리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은 인간에게 휴식과 여유를 선사하는데, 인간이 자연을 위해 고작 하는 일이란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남겨 놓고 오는 것이다.

쓰레기로 인한 국토의 오염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배출되는 쓰레기 가운데 90% 이상은 그대로 땅에 매립되고 있다. 전국의 쓰레기 매립장은 점점 포화상태에 이르러 새로운 매립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새로운 매립지의 선정을 둘러 싸고 '내집 뒤뜰은 안돼'라는 소위 '님비(NIMBY)현상'으로 인해 이해당사자들 간에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쓰레기 처리방법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쓰레기로 인한 토양오염은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다.

외부비경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러한 환경오염의 문제이다. 오염원을 제공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엄청난 사회비용을 초래하는지 알지 못한다. 불법적인 산업폐기물의 방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등산, 낚시, 해수욕 등 서민들의 일상적인 레저생활에서도 자연을 오염시키고 국토를 황폐화시키는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일어난다.


7. 모기이야기


여름밤을 더욱 짜증스럽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모기이다. 물리면 가렵고 아플 뿐만 아니라, 뇌염이나 말라리아와 같은 무서운 질병을 옮기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모기와 한바탕 전쟁을 치루곤 한다.

모기를 박멸하려는 보건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특히 벼농사를 짓는 농촌에서는 극성스런 모기떼의 습격으로 여간 어려움이 많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 요즘 농촌의 모기들은 훤한 대낮에도 기승을 부려 농사일을 못할 지경이라고 한다.

이처럼 모기들이 극성을 부리는 것은 농약 때문이다. 원래 모기의 유충은 논에서 자란다. 그런데 이들의 천적이 있다. 논거미이다. 논거미들의 왕성한 식욕은 모기의 수를 상당히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들녁에는 논거미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농약 때문이다. 마구 뿌려진 맹독성 농약은 논거미를 비롯해 송사리 등 해충을 잡아먹고 사는 이로운 생물들을 모조리 죽였다. 농약은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변화를 가져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에게 큰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농약에 견디어 냄으로써 내성이 길러진 모기들은 더욱 독하게 인간을 괴롭힌다. 급기야는 원래 한 해 살이인 모기들 가운데 일부 변종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택의 따뜻한 지하실 등에서 겨울을 난다. 아직은 많지 않지서 다행이지만 앞으로는 모를 일이다. 언젠가는 겨울에도 모기떼의 공격에 밤잠을 설쳐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농약의 남용으로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파괴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면, 이 또한 외부비경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자연의 혜택이야말로 가장 큰 외부경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연을 오염시키고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는 당연히 심각한 외부비경제를 초래할 뿐이다.


8. 아낌없이 주는 나무


자연을 오염시키기는 쉽다. 그러나 한 번 오염된 자연을 다시 회복시키기란 대단히 어렵고 많은 시간이 걸린다. 또 거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한히 많은 것을 베풀어 준다. 그런데 인간은 받을 줄만 알았지 자연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모르고 살아 왔다.

가치의 소중함이란 곁에 가까이 있을 때는 잘 알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그 고마움을 깨닫는다. 부모님의 소중함은 그 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뼈저리게 가슴에 와닿는다. 조국의 소중함은 낮선 타국땅에서 생활할 때 절절히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연이 파괴되었을 때 비로소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다. 그러나 일단 병든 자연은 인간에게 더 이상 베풀어 주지 못한다. 그 때야 비로소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아 봤자 이미 때는 늦고 만다.

쉘 실버스타인(S.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가 있다. 옛날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에게는 그가 무척 아끼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매일 나무에게 와서 놀았다. 나뭇기둥을 타고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사과 열매를 따먹기도 했다. 놀다 지치면 나무 그늘에서 낮잠도 잤다. 소년도 나무를 몹시 좋아했다. 그래서 나무는 마냥 행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만 흘러 갔고 소년이 커가면서 나무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아 왔다. 나무는 몹시 반가왔다. "어서 와. 올라 와서 그네도 타고 사과도 따먹고 그늘에서 재미있게 놀자꾸나." "아니야, 난 이제 너와 놀기에는 너무 컸어. 돈이 좀 필요한데, 내게 돈을 좀 줄 수 있겠니?"

"돈은 없으니, 대신 사과를 따다가 팔면 어떻겠니." 소년은 나무에 올라가 사과를 따가지고는 훌쩍 떠나 버렸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하기만 했다.

떠나간 소년은 오랫동안 돌아올 줄을 몰랐다. 나무는 슬펐다. 어느 날 드디어 소년이 다시 돌아왔다. "내게 집이 필요한데 집 한 채 마련해 줄 수 있겠니?" "내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지으면 될거야." 소년은 나뭇가지들을 몽땅 잘라 가지고 가버렸다. 그래도 나무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 후 소년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이 다시 돌아온 것은 노인이 다 되어서였다. "먼 곳으로 항해할 수 있는 배 한 척만 있었으면 해." "그럼 내 나뭇기둥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렴." 나무가 말했다. 소년은 나뭇기둥을 베어서 배를 만들어 먼 항해길에 올랐다.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행복했다.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소년이 돌아왔다. "여보게, 미안하게 됐네 그려. 자네에게 줄 것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으니 말야." 나무가 힘없이 말했다. "이제 나는 너무 늙어서 필요한 게 별로 없어. 그저 앉아서 편히 쉴 자리나 있었으면 좋겠어." 소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 나무 밑둥에 앉아서 쉬게나." 나무는 구부정한 몸체를 안간힘을 다해 똑바로 펴면서 말했다. 늙은 소년은 밑둥만 남은 나무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행복하기만 했다.

자연은 인간에게 끊임 없이 무엇인가를 베풀어 주어 왔다. 인간은 자연의 넉넉한 그늘 아래서 늘 풍요와 안식을 누려 왔다. 그러나 자연을 학대하고 오염시키는 인간의 만용 앞에서 자연은 더 이상 무한정 베풀어 주지만은 않는다.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자연에게도 이제는 휴식이 필요하다. 지금은 인간이 자연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이다. 그것은 자연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놔두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연에게 보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9. 죄와 벌


유명한 경제학자 피구(A. Pigou)는 외부경제를 초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보조금)을 주고, 외부비경제를 초래하는 사람들에게는 벌(추징금)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피구의 '황금 룰'(golden rule)이라고 한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은 외부비경제를 초래했기 때문에 오염을 제거하는데 드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정화시설을 갖추지 않은 기업가는 물론이거니와 정화시설을 갖추어 놓고도 공장폐수를 마구 버리는 기업가들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정화시설을 가동할 때 드는 비용보다 정화시설을 가동하지 않았다가 발각되어 내는 벌금이 더 적게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인이 있는 한 공장폐수는 불법적으로 방류된다. 그러므로 폐수를 몰래 방출하는 악덕 기업들에 대해서는 정화시설 가동에 드는 비용보다 훨씬 무거운 벌금을 추징해야 한다. 이는 오염원의 제공에 대해 마땅히 내야 할 세금인 것이다.

저지른 죄의 무게에 비해서 부과되는 벌의 무게가 가벼우면 범죄행위는 그치지 않는다. 환경범죄는 그 피해자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중벌에 처해져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의도적으로 또는 무심코 행해지는 환경오염원의 제공에 자연은 병들고 사회는 많은 비용을 들여서 이를 치료해야 하는 악순환이 거듭될 것이다.


10. 고슴도치 이야기


쇼펜하워(A. Schopenhauer)의 '고슴도치 이야기'가 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밤이었다. 고슴도치 두 마리는 추위를 붸기 위해 서로 다가선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가자 바늘이 서로의 몸을 찔렀다. 아픈 통증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서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다시 추위가 몰려 왔다.

고슴도치들은 서로 다가섰다가 아픔을 느끼며 다시 멀어진다. 떨어졌다가는 다가서고, 다가섰다가는 떨어지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고슴도치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춥지도 아프지도 않은 거리를 찾아냈다. 추운 겨울밤 두 마리의 고슴도치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따뜻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행복한 잠을 잤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 우리는 이것을 '3간'(三間)이라고 한다. '간'이란 문자 그대로 '사이'를 말한다. 낮만 계속되거나 밤만 있다면 시간이 있을 수 없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이가 있다는 뜻이다. 해가 뜨고 지는 사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사이, 젊음과 늙음 사이..... 그 영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잠시 왔다 떠나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에 사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하늘과 땅이 맞붙으면 공간이 사라진다. 모든 생명은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숨쉰다는 것, 그것은 바로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탁트인 바다를 보면 사람들은 영원한 고향의 노스탈지아를 느낀다. 거기에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철지난 바닷가의 백사장, 채워지지 않은 빈 술잔, 추수가 끝난 가을의 빈 들녘. 이들을 떠올리며 가슴 저리게 긴 한숨을 내쉬는 것은 빈 공간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바로 공간이 있기에, 빈 자리가 있기에, 사람들은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인간,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이다. 부부 사이, 친구 사이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공간을 호흡하며 사랑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다. 미움도 사랑의 한 표현이라면 세상에 사랑 아닌 것은 없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오른다. 사랑이란 사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봄날의 아지랭이이다.

시간·공간 그리고 인간. 우리는 이 3간 사이에서 고슴도치의 행복한 잠을 찾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 그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인간은 혼자서만 살 수 없다. 때로는 기대고 의지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거기에는 희생과 양보와 사랑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11.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


주어진 예산으로 양로원과 유치원 중 하나만 지어야 한다면 어디를 먼저 지어야 할까. 유치원은 희망의 샘터이다. 양로원은 고독의 바다이다. 그러니 유치원을 먼저 짓자고 말하지는 말자. 양로원을 먼저 만들자. 거기에는 인간소외의 그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참된 가치'란 무엇일까. 밝은 곳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다. 그늘진 곳을 비추는 것이 바로 참된 가치이다. 사회의 구석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어두운 응달에도 따뜻한 태양의 빛을 내려야 한다. 선진사회로 가는 길은 거기에 있다.

경제에도 밝음과 어둠은 있게 마련이다. 성장의 나무가 크면 클수록 불평등의 그늘도 깊게 드리워지기 쉽다. 성장이라는 나무는 눈에 잘 보이지만, 불평등의 그늘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평등의 소외를 보지 못한다. 경제학의 참뜻은 무엇일까. 숨어있는 경제적 불평등의 그늘을 찾아내는 것이다. 눈에 잘 보이는 것만을 분석하면 안된다. 물질성과 함께 인간성의 문제에도 똑같은 비중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참된 경제학의 모습이다. 참다운 경제학의 빛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 불평등의 그늘에 빛을 주는 것이다.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져라."(cool head, and warm heart) 이 말은 경제학자 마샬(A. Marshall)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행한 연설 가운데 나오는 구절로서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차가운 두뇌와 함께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와 가족의 부귀영화도 중요하지만, 이웃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 넉넉한 마음이 오고 가는 사회. 그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샘물로 타는 목마름을 적셔야 한다. 따뜻하고 편안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고슴도치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