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후, 우리 경제는 공황에 가까운 세번의 큰 경기후퇴를 겪었습니다. 70년대 초반의 제1차 석유파동 전후와 80년대 초반의 제2차 석유파동 직후, 그리고 최근의 환란 직후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올려진 <나는 불만입니다>라는 글은, 이런 세차례의 대규모 경기후퇴가 석유파동이나 환란이라는 우발적 사건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경제변수 상호간의 계기적 인과관계에 의해서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는 주장을 전개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통계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기를 권고한 바 있습니다. 아무도 확인해보지 않았지요?
◈ 그럴 것입니다. 그런 귀찮은 일을 누가 합니까? 나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시키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통계수치 확인을 아무도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권유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좀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고 싶었던 주제여서, 잠시 뒤로 미루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 아무리 혹독했던 경험이더라도 지나간 다음에는 아름다운 추억일 수가 있고, 그 경험을 되살리면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미리 내다보고 예방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하기조차 괴로운 일만은 아니며, 훌륭한 자산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책 당국자나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더더욱 이런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이제 통계수치를 한번 들여다볼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내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1차 석유파동은 73년 10월에 발생했었는데, 경기순환은 이 사건과는 크게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통계로 쉽게 확인될 수 있는데, 특히 통계청이 95년 5월에 발간한 <경제일지>라는 자료의 앞부분은 나의 주장에 대해 확실한 입증자료가 되어줍니다.
◈ 이 자료에 따르면, 우리 경제가 경기저점을 지난 것은 석유파동이 발생하기 1년반 전인 72년 3월이었고, 경기정점에 오른 것은 석유파동이 발생한지 4개월이 지난 74년 2월이었습니다. 경제성장률로 보자면, 72년에는 4.8%를 기록하다가 73년에는 12.8%, 74년에도 비교적 높은 8.1%를 기록했었습니다. 석유파동을 거치는 과정에서 경기가 오히려 확장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왜 당시의 경기후퇴가 석유파동에 의해 발생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정권 또는 정책당국이 책임을 호도하기 위해 우리를 대중세뇌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도, 유신독재가 막을 올리고 있던 당시로서는 그럴 필요성이 절실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잠깐 쉬었다가 갈까요? 대중세뇌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60년대 후반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의 추억입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선생의 키가 6척 장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김구선생의 키가 작다고 기억되는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아무래도 그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이런 일을 그냥 지나칠 내가 아니지요. 그래서 과거의 기록물들을 점검해보았습니다.
◈ 세상에! 김구선생의 사진들은 한결같이 새까맣고 멀리서 찍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범죄자 수배사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진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밝고 가깝게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아하, 이래서 내 머리속에는 김구선생은 작고 이대통령이 크다고 잘못 새겨져 있었구나!
◈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대통령의 키를 확인했더니, 세상에, 5척 단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하여 김구선생과 이대통령이 함께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는데, 나무에 매미가 매달려 있는 꼴이더군요. 김구 선생은 엄청난 체구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너무 왜소했습니다. 미군정이 이처럼 치밀한 대중세뇌를 전수한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어서, 갑자기 소름이 끼치더군요.
◈ 이승만 치하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글쎄, 나와 똑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대중세뇌라는 것이 이렇게도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구나 라고 생각되어서, 야릇한 기분이 들고 입맛이 썼습니다.
◈ 당시 경기후퇴의 원인이 우리에게 잘못 인식되어 있는 것은 대중세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석유파동이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경기후퇴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74년에 경기정점을 지난 우리 경제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려서 75년 6월에 경기저점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기후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했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무리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심각한 과잉설비의 문제를 야기시킨 것인데, 당시의 경제적 충격이 몹시 컸던 것으로 인식됩니다.
◈ 제2차 석유파동 당시는 제1차 때와 달리 미묘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제2차 석유파동이 발발한 것은 79년 7월인데, 경기가 78년말까지 절정을 보이다가 경기후퇴는 79년에 본격화되었습니다. 경기후퇴가 석유파동과 거의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만 보면, 당시의 경제난국은 석유파동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정밀한 분석을 해보면 사정은 많이 달라집니다.
◈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이라는 홍역을 치룬 우리 경제는 75년 6월에 경기저점을 기록한 다음,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75년의 성장률 6.6%를 바닥으로 하여, 76년에는 11.8%를 기록한 다음, 77년의 10.3%와 78년 9.4%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고도성장이 비교적 장기간 지속되면서 경기의 비교적 큰 후퇴를 이미 예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경기가 정점을 지난 것은 석유파동 5개월전인 79년 2월이었고, 석유파동 이전에도 경기후퇴는 이미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경기선행지수중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인 투자를 보면, 77년 4/4분기부터 78년 1/4분기까지 47.5%의 증가율을 기록한 것을 정점으로, 78년 2/4분기부터 3/4분기까지는 38.2%, 78년 4/4분기부터 79년 1/4분기까지는 22.7% 등으로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79년 상반기에는 20.2%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 이제는 아시겠지요? 흑점(Sunspot)이론이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위험한 이론인가를요. 그리고 신군부 등장이나 광주학살사건과 같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당시에도 대중세뇌가 절실했다는 사실도요. 다시는 속지 맙시다. 경기순환을 결정하는 것은 태양의 흑점과 같은 우발적인 사건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흑점(우발적인 사건)은 계기적 인과관계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경기순환을 그 폭만 약간씩 키워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 경기후퇴뿐 아니라, 경기팽창도 한번 볼까요?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이었다는 80년대 후반의 호경기를 엉터리 같은 경제학자들은 3저호황이라고 부르더군요. 저유가, 저금리, 원화저평가 등의 3저변수가 경기호황을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웃기는 사람들, 통계수치나 확인하고 그런 엉터리 분석들을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경제란 하루아침에 나빠지고 좋아지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의 누적치가 경기로 나타난다는 것이 <나의 경제학>의 가르침입니다. 기존 경제학자나 경제전문가들도 각종 시계열분석을 열심히 하던데, 경제정책이나 경제변수의 작용이 현실적 효과를 나타내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경기순환분석에서는 왜 무시하려는 것일까요?
◈ 86년부터 88년까지 3년 동안은 경제성장률이 11%를 넘어섰었는데, 이런 기록이 3저현상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는 3저현상이 없었어도 11%선에는 못 미치더라도 고도성장을 장기간 구가할 수 있는 터전을 이미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 일반적으로, 경기호황이 저지받는 것은, 경기부양정책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물가와 국제수지에 의해서 입니다. 총수요의 과다상승으로 물가불안이 야기되거나 국제수지 적자가 커지면서, 안정화시책을 펴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안정화시책을 취하지 않으면 환란과 같은 막다른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 위에서 언급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70년대 이래 여섯번의 경기순환국면을 거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제1순환기는 72년 3월을 저점으로 출발하여, 74년 2월에 정점을 오른 뒤 75년 6월에 새로운 저점을 기록하고, 이 저점을 지난 제2순환기는 79년 2월에 정점을 지나 80년 9월에 다시 저점을 지납니다. 제3순환기는 84년 2월의 정점까지 상승했다가 85년 9월에 저점을 기록, 제4순환기는 88년 1월의 정점과 89년 7월의 저점, 제5순환기는 91년 1월의 정점과 93년 1월의 저점을 기록하며, 이후에는 제6순환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상과 같은 각 순환국면마다 확장기 말쯤에는 대부분의 경우에 물가불안이 시작되되면서 수축국면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제1순환기의 확장국면 마지막 두분기 동안에는 소비자 물가가 8.1%로 오르기 시작하여, 수축기로 돌아선 처음 두분기 동안에 21.0%까지 등귀한 뒤, 이후 각각 27.4%와 22.9% 등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합니다.
◈ 호경기 때는 물가가 오르고 불경기 때는 떨어진다는 기존 경제학의 가르침과는 많이 다른 현상이지요? 그래서 경제학자라면 통계를 확인하는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론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열심히 탐구하면 큰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본론으로 돌아와서, 국제수지도 물가상승률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경상수지 적자가 두분기에 4.2억달러를 기록하면서 경기가 정점을 지나 수축국면으로 전환했으며, 이후 각각 8.7억달러, 11.5억달러, 15.7억 달러 등으로 적자규모를 확대했습니다.
◈ 제2순환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라 2분기씩 나누어서 보면, 확장국면 마지막에 16.2%까지 올랐던 물가는 수축국면에 각각 18.0%, 18.8%, 27.6% 등을 기록합니다. 국제수지 적자도 16.6억달러로 급증한 이후 각각 22.7억달러, 18.7억달러, 40억달러 등을 기록합니다.
◈ 그런데 제3국면은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물가불안이나 국제수지보다는 정부의 강력한 경제안정화시책에 의해서 경기상승이 저지당하게 됩니다. 82년 12월과 83년 2월의 주택 및 부동산 투기억제대책, 85년 2월의 부동산종합대책 등의 특별대책은 물론이고, <환란원인은 무엇이고 주가전망은 어떠한가>라는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 강력한 재정긴축정책을 당시의 전두환 정부가 계속 시행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안정화시책이 경기후퇴를 불러왔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80년대 후반 호황의 초석이 이 때부터 다져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나의 경제학>은 가르칩니다.
◈ 제4순환기에도 제3순환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물가불안이나 국제수지가 약간만 악화될 기미를 보여도, 매우 강력한 긴축정책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안정화시책이 국가경쟁력을 장기간에 걸쳐서 강화시킴으로써, 사상 초유의 국제수지 흑자를 시현할 수 있게 합니다. 이제 아셨지요? 80년대 후반의 고도성장이 3저호황에 의해서만 이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경제정책이 현실에서 효과를 나타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게 됩니다. 특히 국제경쟁력 강화시책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장기간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어야 하고, 장기간 금리가 안정되어가도록 해야 하며, 국제수지도 계속 안정적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산업고도화도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쟁력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80년대 후반의 장기호황은 전두환 정부의 긴축정책이 장기간 지속된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3저호황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나쁘고 미워도 그렇지, 그 사람의 업적까지 도매금으로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세조의 치적을 폄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는 5공 청문회와 백담사 유배등 5공과 6공의 권력다툼이 치열하던 때로서, 전두환 정부의 공적을 3저호황으로 호도해야 했을 것입니다.
◈ 이런 잘못된 작태가 90년대의 경제정책을 나쁜 방향으로, 나쁜 방향으로만 이끌어가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가안정과 국제수지 안정에 최선을 다해서, 국가경쟁력을 키우지는 못할망정 유지라도 해야 했는데, 반대방향의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경제를 악화일로에 몰아넣고 말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입니다. 노태우정부와 김영삼정부 둘 모두가 말입니다.
◈ 특히 김영삼 정부는 "부실기업을 인수한 것 같다"고 선언하면서 초기에는 다소 긴축적인 정책기조를 보이다가, 정치적 인기에 연연하게 되면서 환란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만 비난하지는 맙시다. 우리 경제의 경쟁력과 자생력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켜버린 것은 노태우정부 때였으니까요. 전두환 정부가 아끼고 아껴서 비축해놓은 경쟁력이라는 재산을 흥청망청 써버린 진짜 원흉은 노태우 정부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제5순환기의 경제실적으로도 증명됩니다.
◈ 제5순환기에는 확장기 마지막 두분기에 소비자 물가가 급등하여 9.2%의 상승률을 기록했고 이후 각각 9.3%와 9.4%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80년대에는 석유파동 직후를 제외하고는, 88년의 2.7%가 생산자물가의 최고기록이고 소비자 물가도 2-3%를 오르내리는 등 물가가 안정을 이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국제수지 적자도 제5순환기 확장국면 마지막 두분기에 43.8억 달러로 악화된 이후 수축기의 각 두분기에 55.1억 달러, 32.2억 달러, 44.6억 달러 등을 기록했습니다. 과거와 같은 바람직하지 않은 양상이 다시금 반복되게 된 것입니다.
◈ 한마디로 말해서, 전두환 정부시절에는 경기가 팽창할 때나 수축할 때도 물가와 국제수지가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아니, 안정되도록 최대한의 정책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경기순환의 진폭을 줄이고 장기호황을 예비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퍼주기식 팽창정책을 지속함으로써 다시금 경기순환의 진폭을 크게 하였고, 이같은 나쁜 전통이 김영삼정부에까지 연결되어 환란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 제6순환기는 최근에 진행된 상황이므로 훗날의 평가에 맡기려 합니다. 통계청에서 자료를 준비해주면 보다 손쉽게 평가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요. 너무 얌체짓만 하려드는 것 아닌가? 아무튼 통계청에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실권이 없고 이권도 없는 이런 부처 사람들은 남이 보지 않아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할 일을 찾아서, 참 열심히 일하는 것 같더군요.
◈ 그럴 것입니다. 그런 귀찮은 일을 누가 합니까? 나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시키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통계수치 확인을 아무도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권유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좀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고 싶었던 주제여서, 잠시 뒤로 미루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 아무리 혹독했던 경험이더라도 지나간 다음에는 아름다운 추억일 수가 있고, 그 경험을 되살리면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미리 내다보고 예방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하기조차 괴로운 일만은 아니며, 훌륭한 자산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책 당국자나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더더욱 이런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이제 통계수치를 한번 들여다볼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내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1차 석유파동은 73년 10월에 발생했었는데, 경기순환은 이 사건과는 크게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통계로 쉽게 확인될 수 있는데, 특히 통계청이 95년 5월에 발간한 <경제일지>라는 자료의 앞부분은 나의 주장에 대해 확실한 입증자료가 되어줍니다.
◈ 이 자료에 따르면, 우리 경제가 경기저점을 지난 것은 석유파동이 발생하기 1년반 전인 72년 3월이었고, 경기정점에 오른 것은 석유파동이 발생한지 4개월이 지난 74년 2월이었습니다. 경제성장률로 보자면, 72년에는 4.8%를 기록하다가 73년에는 12.8%, 74년에도 비교적 높은 8.1%를 기록했었습니다. 석유파동을 거치는 과정에서 경기가 오히려 확장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왜 당시의 경기후퇴가 석유파동에 의해 발생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정권 또는 정책당국이 책임을 호도하기 위해 우리를 대중세뇌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도, 유신독재가 막을 올리고 있던 당시로서는 그럴 필요성이 절실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잠깐 쉬었다가 갈까요? 대중세뇌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60년대 후반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의 추억입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선생의 키가 6척 장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김구선생의 키가 작다고 기억되는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아무래도 그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이런 일을 그냥 지나칠 내가 아니지요. 그래서 과거의 기록물들을 점검해보았습니다.
◈ 세상에! 김구선생의 사진들은 한결같이 새까맣고 멀리서 찍은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범죄자 수배사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진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밝고 가깝게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아하, 이래서 내 머리속에는 김구선생은 작고 이대통령이 크다고 잘못 새겨져 있었구나!
◈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대통령의 키를 확인했더니, 세상에, 5척 단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어찌하여 김구선생과 이대통령이 함께 찍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는데, 나무에 매미가 매달려 있는 꼴이더군요. 김구 선생은 엄청난 체구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너무 왜소했습니다. 미군정이 이처럼 치밀한 대중세뇌를 전수한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어서, 갑자기 소름이 끼치더군요.
◈ 이승만 치하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글쎄, 나와 똑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대중세뇌라는 것이 이렇게도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구나 라고 생각되어서, 야릇한 기분이 들고 입맛이 썼습니다.
◈ 당시 경기후퇴의 원인이 우리에게 잘못 인식되어 있는 것은 대중세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석유파동이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경기후퇴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74년에 경기정점을 지난 우리 경제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려서 75년 6월에 경기저점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기후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했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무리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심각한 과잉설비의 문제를 야기시킨 것인데, 당시의 경제적 충격이 몹시 컸던 것으로 인식됩니다.
◈ 제2차 석유파동 당시는 제1차 때와 달리 미묘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제2차 석유파동이 발발한 것은 79년 7월인데, 경기가 78년말까지 절정을 보이다가 경기후퇴는 79년에 본격화되었습니다. 경기후퇴가 석유파동과 거의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만 보면, 당시의 경제난국은 석유파동이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정밀한 분석을 해보면 사정은 많이 달라집니다.
◈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이라는 홍역을 치룬 우리 경제는 75년 6월에 경기저점을 기록한 다음,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75년의 성장률 6.6%를 바닥으로 하여, 76년에는 11.8%를 기록한 다음, 77년의 10.3%와 78년 9.4%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고도성장이 비교적 장기간 지속되면서 경기의 비교적 큰 후퇴를 이미 예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경기가 정점을 지난 것은 석유파동 5개월전인 79년 2월이었고, 석유파동 이전에도 경기후퇴는 이미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경기선행지수중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인 투자를 보면, 77년 4/4분기부터 78년 1/4분기까지 47.5%의 증가율을 기록한 것을 정점으로, 78년 2/4분기부터 3/4분기까지는 38.2%, 78년 4/4분기부터 79년 1/4분기까지는 22.7% 등으로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79년 상반기에는 20.2%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 이제는 아시겠지요? 흑점(Sunspot)이론이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위험한 이론인가를요. 그리고 신군부 등장이나 광주학살사건과 같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당시에도 대중세뇌가 절실했다는 사실도요. 다시는 속지 맙시다. 경기순환을 결정하는 것은 태양의 흑점과 같은 우발적인 사건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흑점(우발적인 사건)은 계기적 인과관계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경기순환을 그 폭만 약간씩 키워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 경기후퇴뿐 아니라, 경기팽창도 한번 볼까요?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이었다는 80년대 후반의 호경기를 엉터리 같은 경제학자들은 3저호황이라고 부르더군요. 저유가, 저금리, 원화저평가 등의 3저변수가 경기호황을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웃기는 사람들, 통계수치나 확인하고 그런 엉터리 분석들을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경제란 하루아침에 나빠지고 좋아지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상당히 오랜 세월동안의 누적치가 경기로 나타난다는 것이 <나의 경제학>의 가르침입니다. 기존 경제학자나 경제전문가들도 각종 시계열분석을 열심히 하던데, 경제정책이나 경제변수의 작용이 현실적 효과를 나타내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경기순환분석에서는 왜 무시하려는 것일까요?
◈ 86년부터 88년까지 3년 동안은 경제성장률이 11%를 넘어섰었는데, 이런 기록이 3저현상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는 3저현상이 없었어도 11%선에는 못 미치더라도 고도성장을 장기간 구가할 수 있는 터전을 이미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 일반적으로, 경기호황이 저지받는 것은, 경기부양정책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물가와 국제수지에 의해서 입니다. 총수요의 과다상승으로 물가불안이 야기되거나 국제수지 적자가 커지면서, 안정화시책을 펴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안정화시책을 취하지 않으면 환란과 같은 막다른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 위에서 언급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70년대 이래 여섯번의 경기순환국면을 거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제1순환기는 72년 3월을 저점으로 출발하여, 74년 2월에 정점을 오른 뒤 75년 6월에 새로운 저점을 기록하고, 이 저점을 지난 제2순환기는 79년 2월에 정점을 지나 80년 9월에 다시 저점을 지납니다. 제3순환기는 84년 2월의 정점까지 상승했다가 85년 9월에 저점을 기록, 제4순환기는 88년 1월의 정점과 89년 7월의 저점, 제5순환기는 91년 1월의 정점과 93년 1월의 저점을 기록하며, 이후에는 제6순환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상과 같은 각 순환국면마다 확장기 말쯤에는 대부분의 경우에 물가불안이 시작되되면서 수축국면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제1순환기의 확장국면 마지막 두분기 동안에는 소비자 물가가 8.1%로 오르기 시작하여, 수축기로 돌아선 처음 두분기 동안에 21.0%까지 등귀한 뒤, 이후 각각 27.4%와 22.9% 등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합니다.
◈ 호경기 때는 물가가 오르고 불경기 때는 떨어진다는 기존 경제학의 가르침과는 많이 다른 현상이지요? 그래서 경제학자라면 통계를 확인하는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론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열심히 탐구하면 큰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본론으로 돌아와서, 국제수지도 물가상승률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경상수지 적자가 두분기에 4.2억달러를 기록하면서 경기가 정점을 지나 수축국면으로 전환했으며, 이후 각각 8.7억달러, 11.5억달러, 15.7억 달러 등으로 적자규모를 확대했습니다.
◈ 제2순환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라 2분기씩 나누어서 보면, 확장국면 마지막에 16.2%까지 올랐던 물가는 수축국면에 각각 18.0%, 18.8%, 27.6% 등을 기록합니다. 국제수지 적자도 16.6억달러로 급증한 이후 각각 22.7억달러, 18.7억달러, 40억달러 등을 기록합니다.
◈ 그런데 제3국면은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물가불안이나 국제수지보다는 정부의 강력한 경제안정화시책에 의해서 경기상승이 저지당하게 됩니다. 82년 12월과 83년 2월의 주택 및 부동산 투기억제대책, 85년 2월의 부동산종합대책 등의 특별대책은 물론이고, <환란원인은 무엇이고 주가전망은 어떠한가>라는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 강력한 재정긴축정책을 당시의 전두환 정부가 계속 시행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안정화시책이 경기후퇴를 불러왔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80년대 후반 호황의 초석이 이 때부터 다져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나의 경제학>은 가르칩니다.
◈ 제4순환기에도 제3순환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물가불안이나 국제수지가 약간만 악화될 기미를 보여도, 매우 강력한 긴축정책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안정화시책이 국가경쟁력을 장기간에 걸쳐서 강화시킴으로써, 사상 초유의 국제수지 흑자를 시현할 수 있게 합니다. 이제 아셨지요? 80년대 후반의 고도성장이 3저호황에 의해서만 이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 경제정책이 현실에서 효과를 나타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게 됩니다. 특히 국제경쟁력 강화시책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장기간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어야 하고, 장기간 금리가 안정되어가도록 해야 하며, 국제수지도 계속 안정적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산업고도화도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쟁력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80년대 후반의 장기호황은 전두환 정부의 긴축정책이 장기간 지속된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3저호황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나쁘고 미워도 그렇지, 그 사람의 업적까지 도매금으로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세조의 치적을 폄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는 5공 청문회와 백담사 유배등 5공과 6공의 권력다툼이 치열하던 때로서, 전두환 정부의 공적을 3저호황으로 호도해야 했을 것입니다.
◈ 이런 잘못된 작태가 90년대의 경제정책을 나쁜 방향으로, 나쁜 방향으로만 이끌어가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가안정과 국제수지 안정에 최선을 다해서, 국가경쟁력을 키우지는 못할망정 유지라도 해야 했는데, 반대방향의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경제를 악화일로에 몰아넣고 말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입니다. 노태우정부와 김영삼정부 둘 모두가 말입니다.
◈ 특히 김영삼 정부는 "부실기업을 인수한 것 같다"고 선언하면서 초기에는 다소 긴축적인 정책기조를 보이다가, 정치적 인기에 연연하게 되면서 환란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만 비난하지는 맙시다. 우리 경제의 경쟁력과 자생력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켜버린 것은 노태우정부 때였으니까요. 전두환 정부가 아끼고 아껴서 비축해놓은 경쟁력이라는 재산을 흥청망청 써버린 진짜 원흉은 노태우 정부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제5순환기의 경제실적으로도 증명됩니다.
◈ 제5순환기에는 확장기 마지막 두분기에 소비자 물가가 급등하여 9.2%의 상승률을 기록했고 이후 각각 9.3%와 9.4%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80년대에는 석유파동 직후를 제외하고는, 88년의 2.7%가 생산자물가의 최고기록이고 소비자 물가도 2-3%를 오르내리는 등 물가가 안정을 이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국제수지 적자도 제5순환기 확장국면 마지막 두분기에 43.8억 달러로 악화된 이후 수축기의 각 두분기에 55.1억 달러, 32.2억 달러, 44.6억 달러 등을 기록했습니다. 과거와 같은 바람직하지 않은 양상이 다시금 반복되게 된 것입니다.
◈ 한마디로 말해서, 전두환 정부시절에는 경기가 팽창할 때나 수축할 때도 물가와 국제수지가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아니, 안정되도록 최대한의 정책적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경기순환의 진폭을 줄이고 장기호황을 예비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퍼주기식 팽창정책을 지속함으로써 다시금 경기순환의 진폭을 크게 하였고, 이같은 나쁜 전통이 김영삼정부에까지 연결되어 환란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 제6순환기는 최근에 진행된 상황이므로 훗날의 평가에 맡기려 합니다. 통계청에서 자료를 준비해주면 보다 손쉽게 평가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요. 너무 얌체짓만 하려드는 것 아닌가? 아무튼 통계청에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실권이 없고 이권도 없는 이런 부처 사람들은 남이 보지 않아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할 일을 찾아서, 참 열심히 일하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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