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리워지는 마르크스주의와 구분시키기 위해 마르크스 이전의 근대 사회주의의 이론과 개념들을 포괄적으로 공상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로 일컫고있으며,좁은의미로는 생 시몬(saint-simmon),오웬(Owen,Robert),페리어(Ferrier,Francois)와 그 직계의 사회주의 사상을 말한다.
근대 초기의 유토피아론
근대 초기에는 모어(More,Thomas)의 유토피아(utopia,1516),베이컨(Bacon Francis)의 뉴 아틀란티스(new atlantis,1626),캄파네라(Campanella,Tommaso)의 시비타스 솔리스(civitas solis,1623)등을 대표로하는 다양한 유토피아론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은 종교적 신비주의의 색체가 강하였고,원시사회(원시 공산주의적인)에로의 복귀를 내포하고 있었다.모어의 경우,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종교적 지배가 엄격히 유지되고 있고,사유재산의 부정은 생산력의 상승과 연계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생활의 단순화(생활 수준의 저하)에 의해 지탱되어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그의 유명한 엔클로져 비판은 이러한 반생산력적 입장을 취함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생산력론'의 입장을 취했던 베이컨의 경우는 유토피아 구상에 의한 현실적 비판이 불가능하게 되어 작품은 미완성의 단계에서 방치되고 말았다.생산력과 현실 비판의 이 대립은 형성과정에 있던 자본주의(및 해체과정에 있으면서도 수탈이 강화되고 있던 봉건주의)에 대한 비판이 생산력을 장악하고 있던 계급에서가 아니라 권력면에서도 생산력면에서도 단절되었던 계층에서 밖에 진행되어지지 않았다.이들은 단순한 자본주의 비판에 불과하고 사회주의의 선구적 요소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로 불리어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계몽기의 유토피아론
기본적 성격은 위에서 설명한것과 그리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18세기로 접어들면서 영국,프랑스등의 선진국에서는 계급 분화가 확실해지고 유토피아의 계급적 성격도 또한 명확해진다.특히 이 시기에는 '부르조아'의 역사적 전망이 점차 밝아짐에 따라,계몽적 이성(부르조아적 이성)에 의한 인간사회의 무한진보가 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순수 부르조아 사회'가 그들의 목표로서 그려지고 있었다.콘도르세(Condorcet Marquis)로 대표되는 '진보의 사상'이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방향으로 유토피아를 구상하는 일은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되어 불가능하다.이유는 우선,자본주의는 현실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으며,다음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을 부르조아들이 막는일은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기의 유토피아론
산업혁명이 특히 영국에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을때,오웬은 산업 자본가의 관점에서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위하여(우수한 노동력과 고임금=구매력의 확보),다른 한편으론 노동자를 위하여 생산력의 상승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을 결합시키는 구상을 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계급과 생상력간의 문제를 그 사회의 테두리를 초월해 해결책을 모색하려하지만,오웬에게는 아직 노동자를 해방의 주체로 보려하는 능력도 객관적 조건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프랑스의 생 시몬의 경우는 생상력 중심의 유토피아를 주장하며 국가권력을 생산의 관리자로 전화시키자는 것이 그의 이론의 핵심을 이루었다.페리어의 경우는 '천재인가 광인인가?'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광분한 공상력과 애매한 이론전개를 하지만,인간의 자발적인 결합을 기초로하는 '인간성의 전면적 개화'가 그의 주장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현실분석면에서도,사회주의에로의 이행 과정 분석면에서도 마르크스르의 과학성에는 그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그러나,자본주의 사회에 내재되어있는 문제점들 속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로 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근대 초기의 유토피아론
근대 초기에는 모어(More,Thomas)의 유토피아(utopia,1516),베이컨(Bacon Francis)의 뉴 아틀란티스(new atlantis,1626),캄파네라(Campanella,Tommaso)의 시비타스 솔리스(civitas solis,1623)등을 대표로하는 다양한 유토피아론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은 종교적 신비주의의 색체가 강하였고,원시사회(원시 공산주의적인)에로의 복귀를 내포하고 있었다.모어의 경우,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종교적 지배가 엄격히 유지되고 있고,사유재산의 부정은 생산력의 상승과 연계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생활의 단순화(생활 수준의 저하)에 의해 지탱되어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그의 유명한 엔클로져 비판은 이러한 반생산력적 입장을 취함으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생산력론'의 입장을 취했던 베이컨의 경우는 유토피아 구상에 의한 현실적 비판이 불가능하게 되어 작품은 미완성의 단계에서 방치되고 말았다.생산력과 현실 비판의 이 대립은 형성과정에 있던 자본주의(및 해체과정에 있으면서도 수탈이 강화되고 있던 봉건주의)에 대한 비판이 생산력을 장악하고 있던 계급에서가 아니라 권력면에서도 생산력면에서도 단절되었던 계층에서 밖에 진행되어지지 않았다.이들은 단순한 자본주의 비판에 불과하고 사회주의의 선구적 요소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로 불리어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계몽기의 유토피아론
기본적 성격은 위에서 설명한것과 그리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18세기로 접어들면서 영국,프랑스등의 선진국에서는 계급 분화가 확실해지고 유토피아의 계급적 성격도 또한 명확해진다.특히 이 시기에는 '부르조아'의 역사적 전망이 점차 밝아짐에 따라,계몽적 이성(부르조아적 이성)에 의한 인간사회의 무한진보가 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순수 부르조아 사회'가 그들의 목표로서 그려지고 있었다.콘도르세(Condorcet Marquis)로 대표되는 '진보의 사상'이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방향으로 유토피아를 구상하는 일은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되어 불가능하다.이유는 우선,자본주의는 현실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으며,다음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을 부르조아들이 막는일은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기의 유토피아론
산업혁명이 특히 영국에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을때,오웬은 산업 자본가의 관점에서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위하여(우수한 노동력과 고임금=구매력의 확보),다른 한편으론 노동자를 위하여 생산력의 상승과 노동자의 생활향상을 결합시키는 구상을 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계급과 생상력간의 문제를 그 사회의 테두리를 초월해 해결책을 모색하려하지만,오웬에게는 아직 노동자를 해방의 주체로 보려하는 능력도 객관적 조건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프랑스의 생 시몬의 경우는 생상력 중심의 유토피아를 주장하며 국가권력을 생산의 관리자로 전화시키자는 것이 그의 이론의 핵심을 이루었다.페리어의 경우는 '천재인가 광인인가?'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광분한 공상력과 애매한 이론전개를 하지만,인간의 자발적인 결합을 기초로하는 '인간성의 전면적 개화'가 그의 주장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현실분석면에서도,사회주의에로의 이행 과정 분석면에서도 마르크스르의 과학성에는 그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그러나,자본주의 사회에 내재되어있는 문제점들 속에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로 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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