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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도덕적 해이

남이 못보는 곳에서 약속을...
고급 외제차는 비싼 반면 안전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고를 당해도 치명적인
상해를 피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여유있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그렇다면 과연 고급차의 사고율이 사람들의 기대만큼 낮은가. 이와 관련된 흥미있는 조사결과가 있다.

미국의 한 방송사는 워싱턴 교외의 교차로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차량을 조사해 제조회사와 모델명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안전을 중시하는 운전자들에게 가장 인기 좋은 볼보가 신호를 가장 많이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지역 전체의 보유대수와 비교한 상대적비율도 높게 나타났다.

다음 순위에 해당되는 차량 역시 벤츠나 BMW 등 안전중시형 고급차들 이었다. 이들 차량의 주고객이 어린아이가 있는 중류층의 부부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조사결과는 더욱 아이러니컬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이에 관해 다음 두 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비싼 고급차는 안전을 담보로 한 보험과 같은 것이므로, 운전자는 차의 안전성을 과신해 조심스럽게 운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운전하는 습관이 좋지 않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그런 차를 선택 한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자가 더 설득력 있는 것 같다.

즉, 차의 안전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지신호를 무시하는 위험을 쉽게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안전한 차라는 좋은 보험(?)을 들고 있는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합리적인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그 보험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가 되는 셈이다. 어떤 경우에도 안전하게 운전해야 한다는 ‘암묵적 약속’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행동은 자신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잠재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행동은 양자가 구체적인 계약을 체결한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A와 B가 어떤 내용으로 협약을 체결했는데, A가 B의 행동을 제대로 감시할 능력이 없다면 B는 어떻게 행동할까. B의 도덕적 기준이 매우 높지 않다면, 협약서의 내용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좇아 마음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행동을 B자신은‘합리적’이라고 판단할지 모르지만, A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하는 법적 의무나 도덕적 책임을 파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를 경제학에서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한다. 도덕적 해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지난 주 소개한 대리인인 ‘장미의 기사’가 주인의 애인을 뺏어간 것이나,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것도 모두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다.

도덕적 해이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것을 정보의 비대칭성이라고 한다. B가 A보다 더 완전한 정보를 갖고 있다면 B는 그 정보를 활용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킨다.

이로 인해 A가 피해를 입는 것이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의 사례다. 금융기관의 임직원이 예금자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자금을 운용하거나, 공무원이 국민의 후생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좇아 행동하는 것, 교수가 계약에 명시된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도 모두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다.

과거의 기록에 따라 우량고객으로 보험료를 할인해 주었는데, 좋은 보험을 믿고 함부로 운전하는 것도 도덕적 해이 현상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을 일일이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거나 감시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신뢰기반이 취약한 우리 문화에서는 도덕적 해이가 모든 분야에 만연돼 있다. 새 천년, 내가 아무리 좋은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암묵적 약속을 지키는’문화를 만들어 보자. 그 기반이 없이는 경제의 선진화가 이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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