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스미스(Adam Smith,1723∼1790)는 1923년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글래스고우 대학과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에딘버러 대학과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문학, 자연신학, 윤리학, 법학, 정치경제학 등을 강의했다. 1763년부터 3년 동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당시 케네 등 중농학파(농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중시함.) 경제학자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후, 여러 저작물을 남겼는데, 역시 가장 중요하고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국부론(國富論)--원래의 명칭은 "국부의 원인과 성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이다. 이 책은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이론의 효시이자, 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학사상 가장 중요한 저작의 하나로서, 1776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으로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은 첫째, 분업의 이점을 살리는 것과 둘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자유무역을 통한 각국의 이익 증진이다.
1.보이지 않는 손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라는 경제의 기본문제가 가격에 의하여 결정된다. 각 경제주체는 가격의 변동에 따라 행동을 조정한다. 소비자는 이 신호에 따라 효용(만족)이 최대가 되도록 소비하고, 생산자는 이 신호에 따라 이윤이 최대가 되도록 생산한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1723∼1790)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노력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하여 모든 경제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예정조화가 실현된다고 하는 낙관론을 폈다. 즉, 가격의 능동적인 자동조절기능에 의해 경쟁시장에서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이익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서 사화나 국가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이와 같이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스런 노력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모든 경제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예정조화가 실현된다고 하는 낙관론을 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의 자동조절기능, 가격의 매개변수적 기능을 말한다. 이 기능에 의해 경쟁시장에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방임과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을 믿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정부정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선의의 법령과 규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방임 하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이기심이라는 기름'이 '경제라는 기어(gear)'를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치자의 다스림도 필요 없습니다. 시장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발휘하도록 해주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저서 「국부론」의 핵심인 것이다. 정부는 국토를 방위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법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이 할 수 없는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그 나머지의 분야는 모두 개인에게 맡겨두라는 것이다.
2.다윈의 진화론과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
다윈에게 영향을 준 사상이나 인물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당시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아담 스미스입니다. 아담 스미스와 다윈의 이론을 비교해 보면 다윈이 1776년에 출판된 스미스의 국부론(The Wealth Nation)에서 영향을 받은 점이 얼마나 많은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윈의 생각에 우선 커다란 자극을 준 것은 노동분업론이었습니다. 노동분업론은 노동의 분업에 의하여 같은 수의 직공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업제를 이용한다면 생산고를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다윈은 이런 경제변동을 생물계의 이론에 도입시켰습니다. 사회학적으로 아무리 우수한 통찰이라 하더라도 자연과학과는 어차피 물과 기름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연과학자로서의 다윈은 출발점에서 커다란 과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다윈은 '생존경쟁은 얼핏 보기에 잔혹하고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진화하고 발전을 향해 나간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경제 시장에 있어서의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도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유 경쟁의 경제시장에는 항상 전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요와 공급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므로 그것에 맡겨 놓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없는 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적당히 유지해 준다는 이론입니다. 다윈은 무엇인가 그것을 닮은 법칙이 자연계에서도 작용하여 번영하는 자와 멸망하는 자와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과학이론을 받아들인 다윈은 자연도태에 맡겨 놓으면 모든 것이 진보한다라는 생물에 있어서의 진화론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3.경제학의 할아버지
경제학자들의 족보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 보면 스미스가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경제학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의 경제학자, 그러니까 제1세대의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신학자 혹은 철학자들이었다. 이들이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당시의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경제질서의 도덕성을 정립할 필요가 강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15세기를 전후하여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권리나 의무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행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등장과 더불어 물질적 성공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머리를 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제치고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할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심각한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으며, 이것과 세속적 성공은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을 나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경쟁에서 남을 이겨야 하는 냉혹한 현실은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었다는 데 경제사상가로서 스미스가 갖는 위대함이 있다. 그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체계로 정착된 새로운 경제윤리를 제시했으며,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대로 물질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학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면 스미스는 별로 잘생기지 못한 용모에 가끔 정신없는 행동을 일삼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잠옷차림으로 정원을 산책하다 생각에 잠겨 무심코 집밖으로 걸어나왔다. 생각에 빠진 그는 정처 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한참 만에야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은 그가 사는 마을에서 25km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니, 정말 정신이 없어도 이만저만 없었던 것이 아니다.(잠이 채 깨지도 않은 사람이 그렇게 먼 거리를 무의식중에 걸어갔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그런 기록이 남아 있다.)
스미스는 교수직을 맡고 있던 시절 한번도 경제학 강의를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주로 윤리학을 가르쳤는데, 사실 이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독립된 교과목으로서의 경제학이 존재하지 않았고, 경제문제는 철학에서 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독립된 경제학분야가 처음 개설된 것은 1903년에 이르러서였다.)
40세에는 교수직을 잠시 그만두고 어떤 부유한 귀족자제의 가정교사로서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말년에는 세관장으로서 일하기도 하는 등 요즈음의 경제학자와는 달리 비교적 다양한 삶을 경험하였다. (물리학자 뉴턴이 조폐국장으로 일한 것에 비하면 세관장의 일은 그에게 그리 큰 외도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비록 멋쟁이는 못되었다 해도, 그런대로 '경제학의 할아버지'로 추앙할 만한 사람이기는 했던 것 같다.
데이빗 리카르도
경제학자는 입을 열었다 하면 으레 돈에 관한 얘기를 하지만, 경제학자치고 자신이 큰돈을 번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새무엘슨(P.Samuelson)이 경제학 교과서를 써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하나 기껏해야 휴양지에 아담한 별장 하나 살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번 경제학자 말고도 또 한가지 드문 것이 있다. 백만장자가 열심히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다니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다. 백만장자는 자기를 부자로 만든 사회질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찬탄할 뿐이지, 거기에 뜯어고쳐야 할 측면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카도는 이 두 가지에서 모두 예외라는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사람이다. 그는 주식, 채권, 부동산 투기를 통해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단히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큰돈을 번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의회로 진출하게 된다. 의원으로서의 그는 금융개혁, 빈민구제, 관세철폐, 언론자유 등 당시의 사회분위기로 보아서는 과격하다 할 만한 개혁안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갑부 과격분자(millionaire radical)'라고 불렀다. 동서고금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어떤 한 사람에게 갑부라는 말과 과격분자라는 수식어를 동시에 붙이기는 어려운 법인데, 하여튼 재매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갑부면서 보수주의자인 것보다는 과격분자인 쪽이 훨씬 더 멋져 보인다.)
리카도는 여느 경제학자와 달리, 대학 같은 곳에서 경제학 강의를 한번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는 열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하고 금융시장의 실무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는 총명한 머리와 훌륭한 말재주로 당대의 내노라 하는 경제학자들을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인구론>을 쓴 맬서스(T.Malthus)와 불황(不況)이 존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놓고 벌인 격렬한 논쟁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뒤의 역사가 증명해 보인 바와 같이, 수요부족에 의해 불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장한 맬서스가 진실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싸움에서는 훌륭한 논쟁술을 지닌 리카도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케인즈는 그때 맬서스가 논쟁에서 이겼으면 경제학이 훨씬 더 빨리 진보했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한다.(그러나 그 두 사람은 치열한 논쟁과정에서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고 둘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생 동안 저서라고는 <정치경제와 조세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한 권밖에 쓰지 않았지만, 리카도는 경제학의 여러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자유무역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입증한 일이다. 그는 비교우위설(比較優位設)을 통해 자유로운 교역이 이에 참여하는 모든 나라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각 나라가 필요한 모든 상품을 스스로 생산하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각 나라가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상품만을 생산하여 다른 나라와 교역하게 되면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제학교들에게 이와 같은 리카도의 논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끌어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중상주의(重商主義)의 잔재가 남아 있던 당시의 풍토에서 그의 주장은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사회에는 입으로만 자유무역을 외치고 마음속으로는 '수출입국(輸出立國)'의 신화를 믿고 있는 현대판 중상주의자들이 아직 까지도 도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리카도의 명쾌한 논리가 아직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의 영국사회에서는 '곡물법(Com Laws0'의 폐지 여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시대를 대표하는 지주계급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도록 규정한 곡물법이 계속유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곡물의 판매수입이 주요 소득원 이었던 지주들로서는 신대륙의 값싼 곡물이 국내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신진세력으로 떠오르는 산업자본가들은 곡물법이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자본가는 곡물이 자유롭게 수입되어 가격이 크게 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노동자들의 식품비가 적게 들고 따라서 적은 임금만 주고서도 그들을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리카도는 감연히 산업자본가의 편을 들어 곡물법이 폐지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폈다.
물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그의 기본입장도 곡물법 폐지론에 동참케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이 예에서 보듯, 리카도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려 하는 산업자본가 계급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친기업적(親企業的)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인데,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그 면모가 더욱 두드러 진다. 그는 방임상태로 놓아둔 경제에서 성장이 극대화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정부가 기업활동에 대해 불필요한 간섭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고전파 경제학의 핵심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 laissez-faire)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 교육은 물론 그 밖의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리카도가 치밀한 논리 하나로 당대의 지식사회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는 상아탑의 창백한 지성과는 거리가 먼, 현실경제에 굳게 뿌리를 박은 뛰어난 활동가였다.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서도 앞장서서 사회개혁을 부르짖은 배경에는, 유태인의 혈통을 타고나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 여러 모로 서러움을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심리적 배경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좀더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그의 정열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모은 돈이 조금 있다고 '개혁'이란 말만 나와도 진저리를 치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그의 삶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어야 한다.
1.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설과 리카도의 비교우위설
1-1 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설
스미스는 절대우위설의 설명을 위해 2국가가 2재화만을 생산하는 경우에 각 재 화의 생산비는 각 재화 1단위를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량으로 측정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무역발생의 원인-A,B 양국 간에 존재하는 생산비의 절대적인 차이
스미스의 절대우위설에 의하면 A, B양국은 각각 절대우위를 갖는 재화를 특화해서 생산하여 서로 교역함으로써 상호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국가간 분업을 통한 무역의 결과 세계 전체의 생산량 증대,세계 전체의 후생 증대
스미스의 절대우위설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무역의 유형은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에 뒤이은 리카도의 비교우위설의 탄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절대우위설의 한계)
정리
일국이 두 재화에서 모두 절대우위에 있다면 무역은 발생하지 않는다.
애덤스미스의 절대우위설 - 일국이 타국에 비해 절대우위를 갖는 상품이 있다면 교역당사국은 무역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수 있다.
애덤 스미스 무역이론의 발생 배경은 중상주의의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하여 발생하게 된 것이다.따라서 스미스는 자유무역의 능률성과 국제분업을 주장하였다.
1-2 리카도의 비교 우위설
리카도의 비교우위설
1기본가정(불변 비용하의 A국의 생산가능곡선): 2개국(A국, B국)이 1생산요소(L ; 노동)를 가지고 2개 재화(X, Y)를 생산한다.노동가치설에 따라 생산요소는 노동만으로 유일하고 동질적이며,각 재화의 가치는 재화 1단위 생산에 소요되는 상대적 노동투입량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노동생산성(1단위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은 노동계수(1단위 X재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투입량 : aLX)의 역수로 측정된다.
즉 X재 산업의 노동생산성은 1로 나타낼 수 있다.
aLX생산함수는 규모에 대한 보수가 불변(contant returns to scale)임을 가정한다.따라서 생산가능곡전은 직선이다. 즉 Y재로 표시된 X재로 기회비용(X재 1단위를 추가로 생산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Y재의 수량 aLX/aLY ; 생산가능곡선의 부의 기울기)은 고정불변이다.
국내에서의 산업 간 이동은 자유롭다.
국가 간 노동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양국의 생산기술은 다르지만 (양국의 산업 간 노동생산성이 다르지만) 양국의 생산기술 수준은 고정되어 있다
일국(A)의 생산량은 노동총공급량의 제한을 받는다. 즉, aLXQX+aLYQY LA이다.
이는 X재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과 Y재에 투입된 노동량의 힘은 그 나라의 노동총부존량과 같거나 작을 수는 있어도 초과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T.멜더스
1766년 장자크 루소와 데이빗 흄은 그들의 친구 다니엘 멜서스의 아들 토마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를 방문하였다. 그 시대의 위대한 계몽가들이었던 그들은 당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하였다. 더 많은 인구는 더 많이 생산해내고, 더 많은 학자를 배출할 것이고, 전쟁터에도 더 많이 나갈 수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성인이 된 토마스 멜서스(1766-1834)는 그 당시 그런 지배적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것은 사회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이다'. 1798년에 발표한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그는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가 빠르면 식량생산이 그를 따라잡지 못해 점점 차이가 벌어진다는 가설을 세웠다. 농업생산이 단조증가하는 동안, 인구는 25년 만에 두배가 증가하였다.
멜서스에 의하면 결과는 이렇다: 식량에 대한 수요는 공급을 앞지르고 식량가격이 오르게 된다. 실질 소득은 그로 인해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멜서스는 가난과 배고픔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런던과 멘체스터 근교의 슬럼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30에서 40 퍼센트에 이르는 영국국민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받고 있었다. 먹을 것을 달라고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켐브리지에서 대학을 마친 멜서스는 '인구는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죽어가, 충분한 식량이 확보될 때까지 감소한다'고 신에 의한 자연의 법칙을 설파하였다. '그렇지만 별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인간의 자손 번식은 그래도 계속되어 인구과잉을 이루고 다시 이런 악순환이 계속된다.
첫번째 연구에서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멜서스는 그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사회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떠드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아담 스미스가 예기한 자유시장의 완벽성도 믿지를 않았다. 멜서스의 가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치 멜서스가 가난한 사람들은 결혼을 해서도 안되고 페스트나 각종 전염병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짐을 덜어주는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학문적 라이벌인 데이빗 리카르도는 멜서스의 생각에 대한 논란에 대해 약간의 비판을 가했다. "멜서스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 그냥 넘어가도 될 그들에게는 행복한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 후에 칼 막스도 멜서스가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구론은 인류의 발전을 향한 갈망을 무참히 짓밟은 영국 귀족들에게 환호성을 지를 만큼 환대 받았다." 그러나 케인즈에게 멜서스는 가장 위대한 고전 경제학자였다. 왜냐면 멜서스는 수요측면의 허구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19세기 경제학계에 리카르도 대신 멜서스만 있었다면, 오늘날 훨씬 더 현명하고 풍요로왔을 텐데!"
멜서스가 이렇게 인류에 대해 큰 걱정을 한 것은 발전된 경제사회에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산업국가에서는 소득이 많아졌고 그로인해 인구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로 돌아섰다. 멜서스는 농업 생산을 몇배나 향상 시킨 기술진보의 역동성을 너무 과소 평가했다.
그렇지만 수많은 저소득 국가에서 멜서스의 가설은 계속해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인구난의 해소는 그런 지역에서 아직도 소원하다. 멜서스는 피임과 교육이 인구난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멜서스는 교육수준의 향상이 출산률을 낮추는데 큰 기여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했고 그 때문에 사회의 저소득층을 교육시키는데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구과잉으로 서있을 자리까지 위협한다는 멜서스의 무시무시한 예언은 오늘날에도 그냥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80%의 인구가 아직도 저소득 국가에 살고 있다. 그러한 경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구문제는 산업국가에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문제이다. 오늘날 그들의 복지와 안정은 간접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제3세계로 부터 밀려드는 이주민의 물결이 그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과 멜서스
일반적으로 사육자는 임의로 형질이 우수한 특정 개체만을 골라 교배시켜 가면서 품종을 개량하려 한다. 이것은 사육자가 의도적으로 가축의 자손 번식에 끼어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가리켜 인위 선택(Artificial Selecit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연에서는 어떠 한가? 자연에서도 그러한 선택자가 존재할까? 만약 자연에서 선택자가 없다면, 열등한 개체들도 우수한 개체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번식할 수 있을 것이며, 생물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맬서스(Thomas Malthus)의 저서 "인구론"을 보면, "모든 종은 대단한 생식력을 갖고 있어서, 기아나 병에 의해 억제되지 않는 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연의 실제에서는 태어난 개체가 모두 생존하지는 못하고 소수의 개체만이 생존하므로, 개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 않고 평형 상태에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다윈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환경(자연)은 개체들 중에서 환경에 적합하고 우수한 개체를 선택하여 번식이 가능하게 하고, 열등한 개체들은 도태시킨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이 가설이 바로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 선택이다.
다윈(1809~1882) 의 진화론에 의하면, 모든 생물의 진화는 자연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자연 선택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변이는 대부분의 개체군에서 생겨난다.
변이 중에는 자손에게 유전되는 것도 있다.
모든 개체군은 생존에 필요한 수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낳는다.
환경에 적응하는 개체가 그렇지 못한 개체보다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고, 훨씬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자연 선택을 설명하고 있다.
생존 경쟁은 변이에 대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인위 선택의 원리가 자연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 나는 자연 선택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어떤 변이가 일어난다면, 다른 개체에 비해서 생존과 출산에서 매우 불리한 변이체는 엄격히 소멸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유리한(적합한) 변이체는 보존되고 불리한 변이체는 도태되는 것을 나는 자연 선택이라고 한다.
J.S 밀
요즈음 아이들은 '공부하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대학입시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집단 히스테리가 만연한 우리 사회인지라, 오죽하면 그런 반응이 나오겠느냐고 동정이 가기는 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밀이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안다면 부모님이 공부하라는 잔소리 정도 한다고 해서 감히 불평을 늘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은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였는데, 자식에 대한 욕심이 우리네 부모보다 한술 더 뜬 경지였던 것 같다. 그는 걸음마를 간신히 배운 정도의 어린 밀에게 장난감 대신 그리스의 고전을 주고 읽으라 할 정도로 극성 스러럽게 교육을 시켰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 극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이 세 살 되던 때부터 벌써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밀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플라톤이나 디오게네스 등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고, 이제는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할 단계에 있었다. 여덟 살에서 열두 살까지의 기간 동안 집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으며, 미적분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는 정치경제에 관한 책을 전부 독파하여 후일 경제학자가 될 기본 교육을 모두 마친 셈이었다. 리카도와 절친한 사이인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과 산보를 하며 열 네 살의 어린 아들에게 리카도의 경제학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밀은 나중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소년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고전에만 매달려야 했던 그는 자기 나이 또래의 친구를 사귀어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린 그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친구들인 학자나 사회 저명인사들뿐이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비인간적으로 혹독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서도 탈선하거나 정신쇠약에 걸리l지 않고 위대한 학자로 성장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아이들처럼 공부하라는 말 듣기 싫다고 가출하거나 시험결과가 걱정스럽다고 투신할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라면, 그런 가혹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이 다같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도 스무 살을 넘기면서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우수에 젖어들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방황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구원자가 나타났는데,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라는 여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밀은 그 여인과의 교우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고, 삶의 의미를 새로이 찾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그 여인이 아이가지 딸린 유부녀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틈만 있으면 서로 만나고, 편지를 쓰고, 같이 여행까지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정신적 사랑을 무려 20년을 넘는 기간 동안-정확히 말해 1830년부터 51년까지-계속했다는데, 이것은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남편이 죽고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함으로써 이 긴 사랑의 여정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다재다능한 밀은 경제학뿐 아니라 철학과 정치학 등 광범한 분야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경제학자로서의 밀을 평가해보자면,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윤리적 기초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는 벤담(J. Bentham)의 공리주의 철학에 심취하여 이를 경제적 문제에 적용하는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 유명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경구가 의미하듯, 공리주의 철학이란 사람들의 행복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하는 것이 바로 선(善)이라고 보는 사조를 말한다. 밀은 조세나 교육 같은 사회제도의 개혁에 이 공리주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밀에서 시작된 이 믿음은 현대의 경제학으로도 이어져, 오늘날의 경제학자는 어떤 의미에서 거의 모두가 공리주의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스미스에서 시작된 고전파 경제학(classical economics)은 리카도를 거쳐 밀에 이르러 확고한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밀이 1848년에 출판한 <정치를 집대성한 책으로서 고전파 경제학의 징수를 담고 있었다. 이 책은 출판 직후부터 놀랄 만큼 좋은 반응을 얻어 그의 생전에만도 무려 일곱 번이나 판을 바꾸어서 찍었을 정도다.
이 책의 출판과 더불어 밀은 학계로부터 리카도의 후계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워낙 여러 방면에 능통한 천재인지라 경제학에서의 공헌은 그 이전의 스미스나 리카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미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무리 천재라 한들 그렇게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다 보면 한 분야에서의 공헌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위대한 경제학자의 반열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를 완성한 그에게 '명실상부한 당대 경제학계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를 말한다면, 그토록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중간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 정신력의 승리를 높이 사주어야 한다. 그의 인간승리에 대해 우리 모두 아낌없는 박수를!
1.그의 사상
1-1 자유론
1859년 간행된 <자유론>은 밀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이다. 시민의 자유를 논한 고전적 저작으로 서설/사상과 언론의 자유/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개인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한계/원리의 적용 등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사의 필연론에 대한 자유론이 아니라, 시민의 사회적 자유를 논했다.
밀은 <자유론>에서 사회와 개인의 적절한 관계에 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밀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개인의 자아 완성과 자유의 신장에 있다고 보고, 공리의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개인의 개별성을 보존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유론>이 발간된 이래 지금까지도 밀의 자유관에 대한 해석상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자유와 공리, 그리고 개별성과 사회성이 상호 충돌하는 경우 밀이 어떠한 처방을 제시했는가에 대한 의견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론>에서 그의 관심은 "대중 여론"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개인에 대해 가하는 불법적 통제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는 지배적인 여론과 감정을 사법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강제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정치적 억압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횡포를 행사한다." 밀은 그러한 사회적 압력을 개인 발달에 대한 굴레로서, 또 지배적 관습에 대한 굴종을 강요하는 것으로서 묘사한다. 밀의 목표는 사회 내에서의 지배적 선호와 혐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위한 기초보다는 어떠한 자유가 개인들에게 허락되어야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원칙이나 규칙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것이었다.
밀의 자유 이론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사회적 개념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개인의 사회성은 밀에 의해서 가정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고 자유 이론의 의미, 설득력 그리고 필연성은 그러한 문맥에서 위치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1-2 공리주의(도덕적 공리주의)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밀은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반대해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 물론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가리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고, 그러한 해결되지 못한 문제 때문에 질적 공리주의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밀은 벤담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목적에 관한 문제는 통상적인 의미의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공리원리의 증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각 개인이 자기의 행복을 원한다는 사실로부터 행복이 바람직스러운 것이라고 추론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모든 사람은 모두의 행복을 원해야 한다고 추론하다.
밀의 논중은 심리학적 사실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먼저 심리학적 반성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러한 심리학적 사실로부터 가치판단이 도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검토 되어야 한다.
#벤담과 비교 : 밀도 벤담이 말한 제재를 인정하지만 벤담과는 상이하다. 밀은 제재를 크게 외적제재와 내적 제재로 구분하며, 개인들의 경우에 이기적 감정보다 약하지만 외적 제재와 더불어 타인들을 배려하도록 이끄는 내적제재를 강조하며 그것을 궁극적인 제재라고 말한다. 밀은 인간성 속에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감정이 존재하며 이것의 역할을 크게 평가한 것이다.
벤담이 인간을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본데 반해 밀은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인정했다.
1-3 사회 개혁론
밀의 모든 사상을 관총하고 있는 것 중의하나가 바로 개혁주의이다.밀은 공리주의자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급진적 개혁주의에 해당했다.(여기서 말하는 "급진적"이란 말은 단순히 보수주의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리카디언 사회주의자들과 구분됨-오늘날의 의미와 많은 차이가 있슴)
18, 19세기 영국사회가 발달된 사회임은 분명하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보고, 이에대한 개혁이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위한 명법에 해당한다고 말하며 개혁적 진보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밀이 주장한 사회적 진보가 말그대로 급진적이고, 전통의 와해위에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개혁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점진주의였다. 혁명이 아니었다. 그는 개혁을 고취시키는 힘이 우리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열망으로부터 나올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 실천가능성을 바탕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점진적 개혁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개혁의 내용은 무엇인가.
개혁 프로그램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자유경쟁의 원리와 특혜의 배제, 적절한 정부개입의 문제, 새로운 산업공동체의 건설등이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대의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문제들-대의 기구의 기능, 선거권의 자격과 범위, 선거 방법, 투표방식, 의원임기, 의회편제, 연방제등-을 지적한다
#비판 : 밀이 제안한 개혁방안은 몇가지 검토할 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밀의 기본적 가치원리인 공리주의가 충분한가에 관해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밀의 태도는 그가 여러 저작에서 외면상 쏟은 관심에 비해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나 그가 빈민에 대해서 지녔던 경멸적 태도와 결부시켜 볼 때 그의 세계관이 상당히 중간계급의 그것을 반영한다는 추측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부분은 지식이 어느 정도로 도덕성을 동반하는가라는 문제를 가져오며, 설령 지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엘리트가 존재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정치적 파워를 장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서 그 맹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밀의 경제체제론이 강건한 이론틀에 기초하는 세밀한 실증적 제도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철학'에 휠씬 더 가깝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가 제시한 이상향이 단순히 관념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실천적 방법들에 대한 보다 정밀한 이론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1-4 여성론
1869년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은 페미니즘의 계보에서 획기적 저작으로 꼽힌다.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시민권과 경제적 기회를 주장했던 19세기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대표적 저서로 밀은 자신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밀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해리엇 하디, 밀의 친구인 존 테일러의 부인이었다. 19세기 엄격한 사회적 인습에서 벗어난 이들의 관계는 파격적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그들이 처음 만났을때 이미 두 아들의 어머니였던 해리엇 테일러와 20여년동안 지적 동반관계, 논란이 있는 플라토닉 관계를 유지하다 존 테일러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결혼했다. 해리엇 테일러와의 지적 교류를 통해 밀은 자신의 사상을 정교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밀과 테일러는 성적 평등 내지 성별 정의를 성취하려면, 사회는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제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남성들이 즐기는 시민의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똑같이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과 테일러는 함께 여성론에 관한 그들의 견해를 세웠지만 테일러와 밀의 여성론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여성의 교육과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비록 밀은 여성이 남성들과 사실상 동배이며, 여성들이 남성과의 모든 경쟁에서 상당히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점이 어느 정도 있음을 인정했다. 밀은 남성과 여성사이에 지적, 그리고 도덕적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남성의 지적 우월성에 도전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지적 성취의 차이점은 남성들의 좀더 철저한 교육과 남성들의 특권적 위치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밀은 여성이 남성들과 사실상 동배이며, 여성들이 남성과의 모든 경쟁에서 상당히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점이 어느 정도 있음을 인정했다.
밀과 테일러의 여성론은 분명 19세기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산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가정 내의 노동의 분담에 대해 진정으로 도전하지 않은점, 무엇보다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결여되었다는 점에 그 한계가 있다.
귀국후, 여러 저작물을 남겼는데, 역시 가장 중요하고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국부론(國富論)--원래의 명칭은 "국부의 원인과 성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이다. 이 책은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이론의 효시이자, 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학사상 가장 중요한 저작의 하나로서, 1776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으로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은 첫째, 분업의 이점을 살리는 것과 둘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자유무역을 통한 각국의 이익 증진이다.
1.보이지 않는 손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라는 경제의 기본문제가 가격에 의하여 결정된다. 각 경제주체는 가격의 변동에 따라 행동을 조정한다. 소비자는 이 신호에 따라 효용(만족)이 최대가 되도록 소비하고, 생산자는 이 신호에 따라 이윤이 최대가 되도록 생산한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1723∼1790)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노력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하여 모든 경제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예정조화가 실현된다고 하는 낙관론을 폈다. 즉, 가격의 능동적인 자동조절기능에 의해 경쟁시장에서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이익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서 사화나 국가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이와 같이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스런 노력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모든 경제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예정조화가 실현된다고 하는 낙관론을 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의 자동조절기능, 가격의 매개변수적 기능을 말한다. 이 기능에 의해 경쟁시장에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방임과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을 믿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정부정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선의의 법령과 규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방임 하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이기심이라는 기름'이 '경제라는 기어(gear)'를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치자의 다스림도 필요 없습니다. 시장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발휘하도록 해주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저서 「국부론」의 핵심인 것이다. 정부는 국토를 방위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법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이 할 수 없는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그 나머지의 분야는 모두 개인에게 맡겨두라는 것이다.
2.다윈의 진화론과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
다윈에게 영향을 준 사상이나 인물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당시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아담 스미스입니다. 아담 스미스와 다윈의 이론을 비교해 보면 다윈이 1776년에 출판된 스미스의 국부론(The Wealth Nation)에서 영향을 받은 점이 얼마나 많은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윈의 생각에 우선 커다란 자극을 준 것은 노동분업론이었습니다. 노동분업론은 노동의 분업에 의하여 같은 수의 직공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업제를 이용한다면 생산고를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다윈은 이런 경제변동을 생물계의 이론에 도입시켰습니다. 사회학적으로 아무리 우수한 통찰이라 하더라도 자연과학과는 어차피 물과 기름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연과학자로서의 다윈은 출발점에서 커다란 과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다윈은 '생존경쟁은 얼핏 보기에 잔혹하고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진화하고 발전을 향해 나간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경제 시장에 있어서의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도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유 경쟁의 경제시장에는 항상 전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요와 공급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므로 그것에 맡겨 놓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없는 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적당히 유지해 준다는 이론입니다. 다윈은 무엇인가 그것을 닮은 법칙이 자연계에서도 작용하여 번영하는 자와 멸망하는 자와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과학이론을 받아들인 다윈은 자연도태에 맡겨 놓으면 모든 것이 진보한다라는 생물에 있어서의 진화론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3.경제학의 할아버지
경제학자들의 족보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 보면 스미스가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경제학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의 경제학자, 그러니까 제1세대의 경제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신학자 혹은 철학자들이었다. 이들이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당시의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경제질서의 도덕성을 정립할 필요가 강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15세기를 전후하여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권리나 의무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행동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등장과 더불어 물질적 성공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머리를 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제치고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할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심각한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으며, 이것과 세속적 성공은 양립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남을 나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경쟁에서 남을 이겨야 하는 냉혹한 현실은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었다는 데 경제사상가로서 스미스가 갖는 위대함이 있다. 그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체계로 정착된 새로운 경제윤리를 제시했으며,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대로 물질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학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면 스미스는 별로 잘생기지 못한 용모에 가끔 정신없는 행동을 일삼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잠옷차림으로 정원을 산책하다 생각에 잠겨 무심코 집밖으로 걸어나왔다. 생각에 빠진 그는 정처 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한참 만에야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은 그가 사는 마을에서 25km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니, 정말 정신이 없어도 이만저만 없었던 것이 아니다.(잠이 채 깨지도 않은 사람이 그렇게 먼 거리를 무의식중에 걸어갔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그런 기록이 남아 있다.)
스미스는 교수직을 맡고 있던 시절 한번도 경제학 강의를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주로 윤리학을 가르쳤는데, 사실 이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독립된 교과목으로서의 경제학이 존재하지 않았고, 경제문제는 철학에서 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독립된 경제학분야가 처음 개설된 것은 1903년에 이르러서였다.)
40세에는 교수직을 잠시 그만두고 어떤 부유한 귀족자제의 가정교사로서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말년에는 세관장으로서 일하기도 하는 등 요즈음의 경제학자와는 달리 비교적 다양한 삶을 경험하였다. (물리학자 뉴턴이 조폐국장으로 일한 것에 비하면 세관장의 일은 그에게 그리 큰 외도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비록 멋쟁이는 못되었다 해도, 그런대로 '경제학의 할아버지'로 추앙할 만한 사람이기는 했던 것 같다.
데이빗 리카르도
경제학자는 입을 열었다 하면 으레 돈에 관한 얘기를 하지만, 경제학자치고 자신이 큰돈을 번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새무엘슨(P.Samuelson)이 경제학 교과서를 써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하나 기껏해야 휴양지에 아담한 별장 하나 살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번 경제학자 말고도 또 한가지 드문 것이 있다. 백만장자가 열심히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다니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다. 백만장자는 자기를 부자로 만든 사회질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찬탄할 뿐이지, 거기에 뜯어고쳐야 할 측면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카도는 이 두 가지에서 모두 예외라는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사람이다. 그는 주식, 채권, 부동산 투기를 통해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단히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큰돈을 번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의회로 진출하게 된다. 의원으로서의 그는 금융개혁, 빈민구제, 관세철폐, 언론자유 등 당시의 사회분위기로 보아서는 과격하다 할 만한 개혁안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갑부 과격분자(millionaire radical)'라고 불렀다. 동서고금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어떤 한 사람에게 갑부라는 말과 과격분자라는 수식어를 동시에 붙이기는 어려운 법인데, 하여튼 재매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갑부면서 보수주의자인 것보다는 과격분자인 쪽이 훨씬 더 멋져 보인다.)
리카도는 여느 경제학자와 달리, 대학 같은 곳에서 경제학 강의를 한번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는 열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하고 금융시장의 실무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는 총명한 머리와 훌륭한 말재주로 당대의 내노라 하는 경제학자들을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인구론>을 쓴 맬서스(T.Malthus)와 불황(不況)이 존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놓고 벌인 격렬한 논쟁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뒤의 역사가 증명해 보인 바와 같이, 수요부족에 의해 불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장한 맬서스가 진실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싸움에서는 훌륭한 논쟁술을 지닌 리카도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케인즈는 그때 맬서스가 논쟁에서 이겼으면 경제학이 훨씬 더 빨리 진보했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한다.(그러나 그 두 사람은 치열한 논쟁과정에서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고 둘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생 동안 저서라고는 <정치경제와 조세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한 권밖에 쓰지 않았지만, 리카도는 경제학의 여러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자유무역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입증한 일이다. 그는 비교우위설(比較優位設)을 통해 자유로운 교역이 이에 참여하는 모든 나라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각 나라가 필요한 모든 상품을 스스로 생산하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각 나라가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상품만을 생산하여 다른 나라와 교역하게 되면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제학교들에게 이와 같은 리카도의 논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끌어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중상주의(重商主義)의 잔재가 남아 있던 당시의 풍토에서 그의 주장은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사회에는 입으로만 자유무역을 외치고 마음속으로는 '수출입국(輸出立國)'의 신화를 믿고 있는 현대판 중상주의자들이 아직 까지도 도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리카도의 명쾌한 논리가 아직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의 영국사회에서는 '곡물법(Com Laws0'의 폐지 여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시대를 대표하는 지주계급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도록 규정한 곡물법이 계속유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곡물의 판매수입이 주요 소득원 이었던 지주들로서는 신대륙의 값싼 곡물이 국내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신진세력으로 떠오르는 산업자본가들은 곡물법이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자본가는 곡물이 자유롭게 수입되어 가격이 크게 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노동자들의 식품비가 적게 들고 따라서 적은 임금만 주고서도 그들을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리카도는 감연히 산업자본가의 편을 들어 곡물법이 폐지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폈다.
물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그의 기본입장도 곡물법 폐지론에 동참케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이 예에서 보듯, 리카도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려 하는 산업자본가 계급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친기업적(親企業的)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인데,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그 면모가 더욱 두드러 진다. 그는 방임상태로 놓아둔 경제에서 성장이 극대화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정부가 기업활동에 대해 불필요한 간섭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고전파 경제학의 핵심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 laissez-faire)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 교육은 물론 그 밖의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리카도가 치밀한 논리 하나로 당대의 지식사회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는 상아탑의 창백한 지성과는 거리가 먼, 현실경제에 굳게 뿌리를 박은 뛰어난 활동가였다.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서도 앞장서서 사회개혁을 부르짖은 배경에는, 유태인의 혈통을 타고나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 여러 모로 서러움을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심리적 배경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좀더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그의 정열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모은 돈이 조금 있다고 '개혁'이란 말만 나와도 진저리를 치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그의 삶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어야 한다.
1.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설과 리카도의 비교우위설
1-1 아담 스미스의 절대우위설
스미스는 절대우위설의 설명을 위해 2국가가 2재화만을 생산하는 경우에 각 재 화의 생산비는 각 재화 1단위를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량으로 측정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무역발생의 원인-A,B 양국 간에 존재하는 생산비의 절대적인 차이
스미스의 절대우위설에 의하면 A, B양국은 각각 절대우위를 갖는 재화를 특화해서 생산하여 서로 교역함으로써 상호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국가간 분업을 통한 무역의 결과 세계 전체의 생산량 증대,세계 전체의 후생 증대
스미스의 절대우위설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무역의 유형은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에 뒤이은 리카도의 비교우위설의 탄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절대우위설의 한계)
정리
일국이 두 재화에서 모두 절대우위에 있다면 무역은 발생하지 않는다.
애덤스미스의 절대우위설 - 일국이 타국에 비해 절대우위를 갖는 상품이 있다면 교역당사국은 무역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수 있다.
애덤 스미스 무역이론의 발생 배경은 중상주의의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하여 발생하게 된 것이다.따라서 스미스는 자유무역의 능률성과 국제분업을 주장하였다.
1-2 리카도의 비교 우위설
리카도의 비교우위설
1기본가정(불변 비용하의 A국의 생산가능곡선): 2개국(A국, B국)이 1생산요소(L ; 노동)를 가지고 2개 재화(X, Y)를 생산한다.노동가치설에 따라 생산요소는 노동만으로 유일하고 동질적이며,각 재화의 가치는 재화 1단위 생산에 소요되는 상대적 노동투입량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노동생산성(1단위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은 노동계수(1단위 X재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투입량 : aLX)의 역수로 측정된다.
즉 X재 산업의 노동생산성은 1로 나타낼 수 있다.
aLX생산함수는 규모에 대한 보수가 불변(contant returns to scale)임을 가정한다.따라서 생산가능곡전은 직선이다. 즉 Y재로 표시된 X재로 기회비용(X재 1단위를 추가로 생산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Y재의 수량 aLX/aLY ; 생산가능곡선의 부의 기울기)은 고정불변이다.
국내에서의 산업 간 이동은 자유롭다.
국가 간 노동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양국의 생산기술은 다르지만 (양국의 산업 간 노동생산성이 다르지만) 양국의 생산기술 수준은 고정되어 있다
일국(A)의 생산량은 노동총공급량의 제한을 받는다. 즉, aLXQX+aLYQY LA이다.
이는 X재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과 Y재에 투입된 노동량의 힘은 그 나라의 노동총부존량과 같거나 작을 수는 있어도 초과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T.멜더스
1766년 장자크 루소와 데이빗 흄은 그들의 친구 다니엘 멜서스의 아들 토마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를 방문하였다. 그 시대의 위대한 계몽가들이었던 그들은 당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하였다. 더 많은 인구는 더 많이 생산해내고, 더 많은 학자를 배출할 것이고, 전쟁터에도 더 많이 나갈 수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성인이 된 토마스 멜서스(1766-1834)는 그 당시 그런 지배적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것은 사회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이다'. 1798년에 발표한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그는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가 빠르면 식량생산이 그를 따라잡지 못해 점점 차이가 벌어진다는 가설을 세웠다. 농업생산이 단조증가하는 동안, 인구는 25년 만에 두배가 증가하였다.
멜서스에 의하면 결과는 이렇다: 식량에 대한 수요는 공급을 앞지르고 식량가격이 오르게 된다. 실질 소득은 그로 인해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멜서스는 가난과 배고픔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런던과 멘체스터 근교의 슬럼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30에서 40 퍼센트에 이르는 영국국민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받고 있었다. 먹을 것을 달라고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켐브리지에서 대학을 마친 멜서스는 '인구는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죽어가, 충분한 식량이 확보될 때까지 감소한다'고 신에 의한 자연의 법칙을 설파하였다. '그렇지만 별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인간의 자손 번식은 그래도 계속되어 인구과잉을 이루고 다시 이런 악순환이 계속된다.
첫번째 연구에서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멜서스는 그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사회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떠드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아담 스미스가 예기한 자유시장의 완벽성도 믿지를 않았다. 멜서스의 가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치 멜서스가 가난한 사람들은 결혼을 해서도 안되고 페스트나 각종 전염병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짐을 덜어주는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학문적 라이벌인 데이빗 리카르도는 멜서스의 생각에 대한 논란에 대해 약간의 비판을 가했다. "멜서스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 그냥 넘어가도 될 그들에게는 행복한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 후에 칼 막스도 멜서스가 지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구론은 인류의 발전을 향한 갈망을 무참히 짓밟은 영국 귀족들에게 환호성을 지를 만큼 환대 받았다." 그러나 케인즈에게 멜서스는 가장 위대한 고전 경제학자였다. 왜냐면 멜서스는 수요측면의 허구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19세기 경제학계에 리카르도 대신 멜서스만 있었다면, 오늘날 훨씬 더 현명하고 풍요로왔을 텐데!"
멜서스가 이렇게 인류에 대해 큰 걱정을 한 것은 발전된 경제사회에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산업국가에서는 소득이 많아졌고 그로인해 인구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로 돌아섰다. 멜서스는 농업 생산을 몇배나 향상 시킨 기술진보의 역동성을 너무 과소 평가했다.
그렇지만 수많은 저소득 국가에서 멜서스의 가설은 계속해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인구난의 해소는 그런 지역에서 아직도 소원하다. 멜서스는 피임과 교육이 인구난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멜서스는 교육수준의 향상이 출산률을 낮추는데 큰 기여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했고 그 때문에 사회의 저소득층을 교육시키는데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구과잉으로 서있을 자리까지 위협한다는 멜서스의 무시무시한 예언은 오늘날에도 그냥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80%의 인구가 아직도 저소득 국가에 살고 있다. 그러한 경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구문제는 산업국가에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문제이다. 오늘날 그들의 복지와 안정은 간접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제3세계로 부터 밀려드는 이주민의 물결이 그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과 멜서스
일반적으로 사육자는 임의로 형질이 우수한 특정 개체만을 골라 교배시켜 가면서 품종을 개량하려 한다. 이것은 사육자가 의도적으로 가축의 자손 번식에 끼어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가리켜 인위 선택(Artificial Selecit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연에서는 어떠 한가? 자연에서도 그러한 선택자가 존재할까? 만약 자연에서 선택자가 없다면, 열등한 개체들도 우수한 개체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번식할 수 있을 것이며, 생물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맬서스(Thomas Malthus)의 저서 "인구론"을 보면, "모든 종은 대단한 생식력을 갖고 있어서, 기아나 병에 의해 억제되지 않는 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연의 실제에서는 태어난 개체가 모두 생존하지는 못하고 소수의 개체만이 생존하므로, 개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 않고 평형 상태에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다윈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환경(자연)은 개체들 중에서 환경에 적합하고 우수한 개체를 선택하여 번식이 가능하게 하고, 열등한 개체들은 도태시킨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이 가설이 바로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 선택이다.
다윈(1809~1882) 의 진화론에 의하면, 모든 생물의 진화는 자연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자연 선택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변이는 대부분의 개체군에서 생겨난다.
변이 중에는 자손에게 유전되는 것도 있다.
모든 개체군은 생존에 필요한 수보다 훨씬 많은 자손을 낳는다.
환경에 적응하는 개체가 그렇지 못한 개체보다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고, 훨씬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자연 선택을 설명하고 있다.
생존 경쟁은 변이에 대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인위 선택의 원리가 자연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 나는 자연 선택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어떤 변이가 일어난다면, 다른 개체에 비해서 생존과 출산에서 매우 불리한 변이체는 엄격히 소멸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유리한(적합한) 변이체는 보존되고 불리한 변이체는 도태되는 것을 나는 자연 선택이라고 한다.
J.S 밀
요즈음 아이들은 '공부하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대학입시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집단 히스테리가 만연한 우리 사회인지라, 오죽하면 그런 반응이 나오겠느냐고 동정이 가기는 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밀이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안다면 부모님이 공부하라는 잔소리 정도 한다고 해서 감히 불평을 늘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James Mill)은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였는데, 자식에 대한 욕심이 우리네 부모보다 한술 더 뜬 경지였던 것 같다. 그는 걸음마를 간신히 배운 정도의 어린 밀에게 장난감 대신 그리스의 고전을 주고 읽으라 할 정도로 극성 스러럽게 교육을 시켰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 극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이 세 살 되던 때부터 벌써 그리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밀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플라톤이나 디오게네스 등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고, 이제는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할 단계에 있었다. 여덟 살에서 열두 살까지의 기간 동안 집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으며, 미적분학과 기하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는 정치경제에 관한 책을 전부 독파하여 후일 경제학자가 될 기본 교육을 모두 마친 셈이었다. 리카도와 절친한 사이인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과 산보를 하며 열 네 살의 어린 아들에게 리카도의 경제학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밀은 나중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소년인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고전에만 매달려야 했던 그는 자기 나이 또래의 친구를 사귀어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린 그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친구들인 학자나 사회 저명인사들뿐이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비인간적으로 혹독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서도 탈선하거나 정신쇠약에 걸리l지 않고 위대한 학자로 성장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아이들처럼 공부하라는 말 듣기 싫다고 가출하거나 시험결과가 걱정스럽다고 투신할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라면, 그런 가혹한 환경에서 몸과 마음이 다같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도 스무 살을 넘기면서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우수에 젖어들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방황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구원자가 나타났는데,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라는 여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밀은 그 여인과의 교우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고, 삶의 의미를 새로이 찾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그 여인이 아이가지 딸린 유부녀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틈만 있으면 서로 만나고, 편지를 쓰고, 같이 여행까지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정신적 사랑을 무려 20년을 넘는 기간 동안-정확히 말해 1830년부터 51년까지-계속했다는데, 이것은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남편이 죽고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함으로써 이 긴 사랑의 여정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다재다능한 밀은 경제학뿐 아니라 철학과 정치학 등 광범한 분야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경제학자로서의 밀을 평가해보자면,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윤리적 기초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는 벤담(J. Bentham)의 공리주의 철학에 심취하여 이를 경제적 문제에 적용하는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 유명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경구가 의미하듯, 공리주의 철학이란 사람들의 행복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하는 것이 바로 선(善)이라고 보는 사조를 말한다. 밀은 조세나 교육 같은 사회제도의 개혁에 이 공리주의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밀에서 시작된 이 믿음은 현대의 경제학으로도 이어져, 오늘날의 경제학자는 어떤 의미에서 거의 모두가 공리주의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스미스에서 시작된 고전파 경제학(classical economics)은 리카도를 거쳐 밀에 이르러 확고한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밀이 1848년에 출판한 <정치를 집대성한 책으로서 고전파 경제학의 징수를 담고 있었다. 이 책은 출판 직후부터 놀랄 만큼 좋은 반응을 얻어 그의 생전에만도 무려 일곱 번이나 판을 바꾸어서 찍었을 정도다.
이 책의 출판과 더불어 밀은 학계로부터 리카도의 후계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워낙 여러 방면에 능통한 천재인지라 경제학에서의 공헌은 그 이전의 스미스나 리카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미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무리 천재라 한들 그렇게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다 보면 한 분야에서의 공헌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위대한 경제학자의 반열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를 완성한 그에게 '명실상부한 당대 경제학계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를 말한다면, 그토록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중간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 정신력의 승리를 높이 사주어야 한다. 그의 인간승리에 대해 우리 모두 아낌없는 박수를!
1.그의 사상
1-1 자유론
1859년 간행된 <자유론>은 밀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이다. 시민의 자유를 논한 고전적 저작으로 서설/사상과 언론의 자유/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개인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한계/원리의 적용 등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사의 필연론에 대한 자유론이 아니라, 시민의 사회적 자유를 논했다.
밀은 <자유론>에서 사회와 개인의 적절한 관계에 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밀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개인의 자아 완성과 자유의 신장에 있다고 보고, 공리의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개인의 개별성을 보존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유론>이 발간된 이래 지금까지도 밀의 자유관에 대한 해석상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자유와 공리, 그리고 개별성과 사회성이 상호 충돌하는 경우 밀이 어떠한 처방을 제시했는가에 대한 의견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론>에서 그의 관심은 "대중 여론"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개인에 대해 가하는 불법적 통제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는 지배적인 여론과 감정을 사법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강제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정치적 억압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횡포를 행사한다." 밀은 그러한 사회적 압력을 개인 발달에 대한 굴레로서, 또 지배적 관습에 대한 굴종을 강요하는 것으로서 묘사한다. 밀의 목표는 사회 내에서의 지배적 선호와 혐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위한 기초보다는 어떠한 자유가 개인들에게 허락되어야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원칙이나 규칙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것이었다.
밀의 자유 이론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사회적 개념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개인의 사회성은 밀에 의해서 가정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고 자유 이론의 의미, 설득력 그리고 필연성은 그러한 문맥에서 위치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1-2 공리주의(도덕적 공리주의)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밀은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반대해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 물론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가리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고, 그러한 해결되지 못한 문제 때문에 질적 공리주의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밀은 벤담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목적에 관한 문제는 통상적인 의미의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공리원리의 증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각 개인이 자기의 행복을 원한다는 사실로부터 행복이 바람직스러운 것이라고 추론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모든 사람은 모두의 행복을 원해야 한다고 추론하다.
밀의 논중은 심리학적 사실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먼저 심리학적 반성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러한 심리학적 사실로부터 가치판단이 도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검토 되어야 한다.
#벤담과 비교 : 밀도 벤담이 말한 제재를 인정하지만 벤담과는 상이하다. 밀은 제재를 크게 외적제재와 내적 제재로 구분하며, 개인들의 경우에 이기적 감정보다 약하지만 외적 제재와 더불어 타인들을 배려하도록 이끄는 내적제재를 강조하며 그것을 궁극적인 제재라고 말한다. 밀은 인간성 속에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감정이 존재하며 이것의 역할을 크게 평가한 것이다.
벤담이 인간을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본데 반해 밀은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인정했다.
1-3 사회 개혁론
밀의 모든 사상을 관총하고 있는 것 중의하나가 바로 개혁주의이다.밀은 공리주의자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급진적 개혁주의에 해당했다.(여기서 말하는 "급진적"이란 말은 단순히 보수주의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리카디언 사회주의자들과 구분됨-오늘날의 의미와 많은 차이가 있슴)
18, 19세기 영국사회가 발달된 사회임은 분명하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보고, 이에대한 개혁이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위한 명법에 해당한다고 말하며 개혁적 진보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밀이 주장한 사회적 진보가 말그대로 급진적이고, 전통의 와해위에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개혁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점진주의였다. 혁명이 아니었다. 그는 개혁을 고취시키는 힘이 우리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열망으로부터 나올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 실천가능성을 바탕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점진적 개혁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개혁의 내용은 무엇인가.
개혁 프로그램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자유경쟁의 원리와 특혜의 배제, 적절한 정부개입의 문제, 새로운 산업공동체의 건설등이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대의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문제들-대의 기구의 기능, 선거권의 자격과 범위, 선거 방법, 투표방식, 의원임기, 의회편제, 연방제등-을 지적한다
#비판 : 밀이 제안한 개혁방안은 몇가지 검토할 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밀의 기본적 가치원리인 공리주의가 충분한가에 관해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밀의 태도는 그가 여러 저작에서 외면상 쏟은 관심에 비해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나 그가 빈민에 대해서 지녔던 경멸적 태도와 결부시켜 볼 때 그의 세계관이 상당히 중간계급의 그것을 반영한다는 추측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부분은 지식이 어느 정도로 도덕성을 동반하는가라는 문제를 가져오며, 설령 지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엘리트가 존재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정치적 파워를 장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서 그 맹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밀의 경제체제론이 강건한 이론틀에 기초하는 세밀한 실증적 제도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철학'에 휠씬 더 가깝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가 제시한 이상향이 단순히 관념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실천적 방법들에 대한 보다 정밀한 이론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1-4 여성론
1869년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은 페미니즘의 계보에서 획기적 저작으로 꼽힌다.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시민권과 경제적 기회를 주장했던 19세기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대표적 저서로 밀은 자신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밀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해리엇 하디, 밀의 친구인 존 테일러의 부인이었다. 19세기 엄격한 사회적 인습에서 벗어난 이들의 관계는 파격적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그들이 처음 만났을때 이미 두 아들의 어머니였던 해리엇 테일러와 20여년동안 지적 동반관계, 논란이 있는 플라토닉 관계를 유지하다 존 테일러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결혼했다. 해리엇 테일러와의 지적 교류를 통해 밀은 자신의 사상을 정교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밀과 테일러는 성적 평등 내지 성별 정의를 성취하려면, 사회는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제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남성들이 즐기는 시민의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똑같이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과 테일러는 함께 여성론에 관한 그들의 견해를 세웠지만 테일러와 밀의 여성론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여성의 교육과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비록 밀은 여성이 남성들과 사실상 동배이며, 여성들이 남성과의 모든 경쟁에서 상당히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점이 어느 정도 있음을 인정했다. 밀은 남성과 여성사이에 지적, 그리고 도덕적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남성의 지적 우월성에 도전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지적 성취의 차이점은 남성들의 좀더 철저한 교육과 남성들의 특권적 위치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밀은 여성이 남성들과 사실상 동배이며, 여성들이 남성과의 모든 경쟁에서 상당히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차이점이 어느 정도 있음을 인정했다.
밀과 테일러의 여성론은 분명 19세기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산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가정 내의 노동의 분담에 대해 진정으로 도전하지 않은점, 무엇보다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결여되었다는 점에 그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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