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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그래도 자랑스러운 꼴찌인가?

수년전 스위스 경영개발연구원(IMD)이 한국의 94년 국제경쟁력순위를 41개국 중 24위라고 발표하여 경제정책당국이 실망과 당혹으로 어수선할 때, 어느 석학은 문화적 폐쇄성 부문 등에서 꼴찌를 한 것을 두고, "꼴찌에게 박수를"이라는 제하에 안도와 축하의 논리를 편 적이 있다. 문화의 생명은 개방이 아니라 보호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19일 위의 연구원이 98년 한국의 경쟁력순위가 더욱 추락하여 47개국 중 38위라고 발표하였지만, IMF 시대에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는지 이전만큼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주목할만한 것은 부문별 평가내용으로, 우리 나라가 시장규제, 정부개입, 문화적 폐쇄성에서 공히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규제와 정부개입의 정도가 꼴찌로 평가되어도, 또 경실련의 추계처럼 공공부문의 비중이 GNP의 60%를 넘어도, 시장자율을 줄이고 정부개입을 더욱 늘려야 된다는 학계와 권력의 정서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리의 관심은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IMF시대에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듯 싶은, 문화적 폐쇄성이다.
문화적 폐쇄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우리 문화가 충분한 잠재력은 가지고 있으나 자생력,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국 50년으로 모자라다면, 얼마나 더 보호가 필요한지? 다른 논리는 우리 문화의 종속 또는 흡수를 면하려면 영원히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역시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온 유구한 역사를 회고하면 설득력을 잃는다.
문화적 보호주의의 이면에는 우리 국민이 외국의 저급문화에 빠질 수 있으므로, 문화 엘리트들이 여과하고 계도하여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개입논리가 있다. 그들의 온정은 고맙지만, 국민은 선택을 위탁해야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기실 에리트들만이 외국문화를 접함으로써 독점적 지위를 계속 누리자는 것은 아닌지?
결국 문화적 폐쇄성을 유지 강화하느냐, 점진적으로 완화하느냐하는 것은 엘리트가 아니라 국민일반의 실천적인 득실을 비교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문화보호주의의 득이라면 국민일반이 민족적 긍지를 도전 없이 이어갈 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이 눈가리고 귀막고 자기최면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민족 문화에 대한 긍지는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외국문화의 완전한 폐쇄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보통신수단의 발전이 없다해도, 문화는 밀수입될 수 있으며, 이는 저급문화이기 십상이다. 더욱이, 그 저급문화의 주 희생자들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층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를 두고, 우리 청소년이 저급문화를 선호하고, 그래서 더욱 빗장을 닫아걸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화적 폐쇄성의 직접적인 폐해는 우리가 국제감각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협상에서의 손실은 물론, 고부가가치제품의 수출경쟁력 약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더욱 염려되는 것은 외국의 시행착오과정으로부터 배우는 기회를 박탈하고, 또 개인 사고의 경직성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상이한 문화에 접하여, "아, 이럴 수도 있었구나!"하고 놀라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경이의 기회를 박탈하고 어떻게 창의성이 발전하기를 기대할 것인가?
돌이켜 보면, 문화적 폐쇄성은 이미 나라 안에서 편가르기의 형태로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이는 집성촌의 형태로 뭉쳐서 양반의 권위를 유지하려던 조선 후기의 역사적 전통과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연고주의와 지역주의로 나타났고, 외국문화에 대한 배타성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 거꾸로 생각하면, 외국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국내의 연고주의와 지역주의를 타파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화적 폐쇄성의 꼴찌는 일시 참을 수는 있지만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결국, 민족문화에 대한 진정한 긍지는 인위적인 폐쇄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의 교류 가운데 문화적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 세계문화에 기여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