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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정직신고조건과 국민연금

케이크를 두 아이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게 하는 게임(제도)을 입안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제, 한 아이에게 먼저 케이크를 둘로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 원하는 조각을 선택하게 한다고 하자. 게임 이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가능한 모든 게임(제도)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게임(제도)의 규칙을 찾아내려는 이론을 메카니즘 이론(mechanism theory)라고 한다. 정직신고조건(truth-telling condition)은 메카니즘 이론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게임의 참가자들이 정직하게 신고함으로써 손해를 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게임 규칙의 조건을 말한다. 위의 케이크 분배의 예는 정직신고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첫째 아이가 케이크를 불공평하게 자름으로써 이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현학적인 내용을 먼저 소개하는 것은, 필자로서는 현행의 국민연금 또는 인턴제 등의 현안 문제들의 본질에 대하여, 달리 설명할 마땅한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문제의 핵심은 자영업자소득의 과소신고이다. 정책당국도 과소신고를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평균소득신고액은 원래 예상액 127만원에 크게 못 미치는 84만원으로 집계되었다. 그것도 총대상자 1천여만명 중 소득 없음을 신고한 53%를 제외한 평균값이다. 이에 따라, 무소득 신고자를 제외하고 직장인 평균 148만원과 평균을 계산하여도 전체평균소득이 26%만큼 떨어지고, 그 1/2만을 반영하여도 내년부터 연금지급액의 13% 감소가 불가피하게 된다고 한다. 정치적 일정에 쫓겨서 무소득신고도 좋다, 과소소득신고도 좋다고 신고율을 높히기 위하여 협박성 전화와 회유, 동사무소 직원에 건당 얼마씩의 포상까지 동원하며 신고율 제고에 애쓰던 당국으로서도 난감한 수치인지, 정직하게 신고하지 않은 자영업자들의 양식을 탓하고 있다.
한편, 인턴제는 정부가 실업대책의 일환으로 어려운 재정을 쪼개어 대졸생의 취업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인턴 사원을 채용하면 정부가 6개월간 월 5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기업으로서는 월 70만원짜리의 봉급자를 안심하고(임시직으로) 20만원에 고용할 수 있으니, 전경련이 9조원으로 예산증액을 요청하고, 또 정부가 고용증대효과를 선전하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게다가 정부는 인턴제의 확대를 꾀하기 위하여, 기업(특히 공기업, 대기업)들에게 인턴제 채용을 적극 권고하고 실적을 보고 받고 있다. 문제는 기업이 정규직 채용을 보류하고, 또는 기왕의 정규직 사원을 정리하고, 인턴제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기업으로서는 인건비도 줄이고, 또 정부의 권고에 따라 실적을 올려주기도 하니, 그 유혹을 피하기 어렵다. 정책당국이 이를 모르고 있지는 않지만, 기업의 양식 문제라고 변명하고 있다.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노동부 산하 국책연구원인 한국노동연구원까지도 예외가 아닌데도 말이다.
과연 국민과 기업의 양식의 문제인가? 메카니즘이론은 정직신고조건의 파괴가 문제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국민이나 기업의 양식이 문제가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보상받도록, 적어도 피해 받지 않도록 제도를 입안하고 준비하지 못한 정부의 양식이 오히려 문제가 아닌가! 정직이 피해를 받고 거짓이 포상을 받도록 되어 있는 제도 아래서 국민 개개인이나, 개별기업이 항거하기는 매우 어렵다. 남들이 모두 거짓 신고할 것을 알면서, 개인이 정직신고를 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이단이 되기보다 시류에 휩쓸리는 것이 우선은 두루 좋은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국민들은 정직이 보상받을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를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막대한 재원을 낭비한다 하더라도 인턴제는 그래도 한시적 조치이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국민연금에 천형(天刑)처럼 지워진 정직신고조건의 파괴는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힐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메카니즘이론에 의하면, 해결책은 국민연금을 직장연금과 지역연금으로 구분하여 방화벽을 구축하고, 지역연금을 다시 재정지원을 통한 기초부분과 기여에 의한 소득비례부분으로 구분하는 것뿐이다. 교원 공무원이 동요되고, 국민의 80%가 불신하고, 시민단체와 전문가 그룹이 본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여도, 마이동풍으로 밀어붙이는 국민연금의 독선은 도무지 어디서 멈출 것인가? 10년 뒤에는 내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의 비용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