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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경제성장과 환경문제의 함수관계

경제성장과 환경문제의 함수관계



1994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문제와 경제성장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에서, 개발도상국 대표들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프리카나 인도에서 태어난 아이보다 일생동안

20배나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고 성토했다. 지구 환경문제라는

시각에서 볼 때 선진국의 과잉소비가 문제지 개도국의 인구과잉이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케냐 대표는 산업화된 국가들의 과도한 소비행태 때문에

『개도국의 자원이 지나치게 착취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티구아 대표는 세계인구 중 부유한 20%가 지구자원으로부터

생산된 상품과 서비스의 80%를 소비한다고 성토했다.



우리는 과소비를 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에게 그 대답은 분명하다.

이 세상에 식량과 목재, 석유, 그리고 여타 자원이 두루 나눠 써야 할

만큼만 있다면, 한쪽에서 소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다른 쪽에서는

쓸 자원이 없어진다. 자원이 한정된 이 행성에서 지구경제가 무한정

성장하지는 못한다.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확대되면 자연자원은

고갈돼 가격이 오를 것이며, 이에 따라 인류는 ─ 특히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빈부를 불문하고 앞으로 태어날 세대들은 ─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경제성장과 환경,역관계 아니다



우리가 과소비를 한다고 믿게 만드는 다른 근거도 많다. 그중

단순명료하면서도 우리 가슴에 가장 와닿는 것은, 우리

부모에게서나 구약 이래 문학작품 속에서 늘 보고 들어온 교훈이다.

즉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는 충족시켜야 하겠지만 바람직한

인생살이는 재물 축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소유하게 돼 가족 친구 혹은 신념 등과 같은

인생에서 의미있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게 만든다눼는 것이다.



우리 삶은 자연을 향유함으로써 풍부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를 많이 할수록 자연세계는 변형될 위험이 높아지고,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자연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종 종교적 혹은 도덕적 색채를

띠기도 한다.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이 지적했듯이, 많은 미국인들은

인간의 복리보다는 「그 자체로서 소중한」 생물의 종(種)을

보호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신분이나 나이, 인종을 불문하고 대다수의 미국인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를 남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19세기의 자연보호주의자들은 자연세계를 보호해야 하는 윤리적

종교적 근거를 직설적으로 제시했다. 존 무와(John Muir: 미국의

자연주의자. 1892년 환경보호단체인 「The Sierra Club」을

창립했다. - 역주)는 『사원 파괴자와, 눈을 들어 산의 정령을

향하지 않고 전지전능한 달러에 눈을 앗긴

중상주의자(重商主義者)』를 경멸했다. 무와는 자연을 일용품이

아니라 인류의 동반자라고 본다. 무와는 자원이 희귀하든 아니든

자연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다는 사상을 가졌다.



에머슨이나 소로 같은 철학자들은 자연을 신성(神性)이 가득한

존재로 인식했다. 월트 휘트먼은 한 장의 풀잎을 대중 스타들의

일상사에 못지 않은 것으로 찬양한다. 시집 『박제된 나날(Specimen

Days)』에서 휘트먼은 『비즈니스와 정치, 주흥(酒興)과 사랑놀음

따위에 지쳤을 때, 이중 어느 것도 만족을 주지 못하거나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연이리라』라고

썼다. 이 부류의 철학자들은 자연을 경제활동을 위한 자원의

공급원이 아니라 경제활동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겼던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보호론자들은 자기 주장을 펴기 위해 윤리적 혹은

종교적인 근거를 들먹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가 와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이 신성하다거나 탐욕은 나쁘다는 식의 주장이 속세에서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리는데 반해 자원고갈에 대한 이런 경고들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비친다. 나아가 경제논리에 바탕을 둔

신중한 갑론을박은 도덕과 종교를 들먹이는 것보다는 공공정책

결정에 더 잘 먹혀 들어간다.



하지만 경제논리에 바탕을 둔 이런 갑론을박은 이제 설 땅을

잃어가는 듯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이 경제성장, 즉 번영과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과 소비에 물리적인 제한을 가한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소비가 증가하면 자원 고갈과 결핍이 불가피하게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는 이론은

물론 현실에 있어서도 잘못된 네 가지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잘못된 생각① 천연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70년대에 스탠퍼드대학의 생물학자인 폴 얼리히는 세계적인

자원부족현상 때문에 식량과 신선한 물, 에너지, 금속, 종이 및 다른

자원들의 가격이 급등하리라고 예측했다. 폴 얼리히와 앤 얼리히는

74년의 공저 『풍요의 종점(The End of Affluence)』에서

『에너지부족 현상이 금세기 남은 기간 내내 계속될 것이 분명하며

인류는 1985년 이전에 에너지를 비롯한 여러 자원의 공급 부족을

겪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얼리히는 또 『인류의 기아(飢餓)와

함께 산업도 필요한 자원을 얻지 못하는 기아를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세상은 얼리히가 예측한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90년대 초에

식량 가격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오늘날 에너지원을 포함한

천연자원은 20년 전보다도 더 풍족하며 가격도 더 싸다. 얼리히가

그 책을 쓸 당시 경제성이 있는 원유의 총매장량은 6천4백억

배럴이었다. 그 후 이 원유매장량은 50%가 증가해 1989년에는 1조

배럴에 달했다. 90년대 들어 휘발유의 세전(稅前) 가격은 1947년

이후 어느 때보다도 낮았다. 1992년 세계에너지협회는 『금명간

자원이 고갈되리라는 20년 전의 일반론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선언했다.



세계자원학회는 「과다한 소비가 자원고갈을 야기해 물질의

결핍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성장과 발전에 제한을 줄 수 있다는

흔히 제기되는 우려」에 대해 1994~95년 보고서를 냈다. 결론은

『대부분의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아직 고갈되지 않았으며 최소한

앞으로 몇십년 간은 그럴 위험이 없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천연자원의 값이 싸질수록 더 빨리 고갈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오판이다. 예를 들어 80년부터 90년까지

천연자원을 원료로 하는 상품의 가격이 떨어졌는 데도 ─ 고무와

시멘트는 각각 40%, 석탄은 거의 절반 가까이 가격이 떨어졌다 ─

대부분 천연자원의 매장량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 기현상을 경제학자들은 다음 세가지로 설명한다.



첫째,지하자원의 경우 새로운 매장지 발견과 기존 매장지 채굴에

한결 능수능란해졌다. 석유탐사를 예로 들면 과거에는 노다지를

캐느냐 아니면 헛수고를 하느냐 하는 투기식이어서 여기저기

쓸데없이 구멍을 뚫어놓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석유회사들은 지잔파를 이용해서 지구 속의정교한

컴퓨터 이미지를 그려낸다. 또 금속성분 함량이 떨어지는

원광석에서 금속을 우려내기 위해 박테리아를 사용하는 등의

새로운 원료정제법은 자원채득을 크게 증대시켰다.



『자원 매장량은 기술이 하기 나름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땅속에

묻혀 있는 자원을 더 잘 찾고 채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도 있다.



둘째, 줄어드는 자원 대신에 대체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바야흐로

대체가능성의 시대가 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탄소로 구성된

나노튜브라는 물질은 강철의 6분의 1 무게로 강철보다 1백배 강한

섬유질을 형성한다. 흔한 자원을 원료로 하는 기술이 희소한 자원을

사용하는 기술을 대체함에 따라 ─ 예를 들어 세라믹이 텅스텐을

대체하고, 광섬유가 구리선을 대체하고, 알루미늄 깡통이 주석

깡통을 대체하여 ─ 희소 자원 수요가 줄어들 것이고 가격도 떨어질

것이다.



이전에도 대용품을 찾아낸 예가 얼마든지 있다. 19세기 초

고래기름은 집안을 밝히는 데 널리 쓰이던 연료였다. 이 고래기름의

공급이 줄어들자 조명산업이 혁신을 맞았고, 가스등과 석유등

그리고 에디슨의 탄소 필라멘트 전구가 발명됐다. 고래기름에는

전기나 석유 조명기구 같은 대체품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래는

재활용할 수도 없다.



셋째, 자원에 대한 지식이 쌓임에 따라 우리는 그것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양초에서 탄소 필라멘트, 텅스텐

백열전구로 진보한 것은 필요한 에너지의 절대량과 각 가구가

집안을 밝히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훨씬 줄여주었다. 소형

형광등은 백열전구보다 효율 4배, 수명은 10배 길다. 이런 예는 다른

가전용품에세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93년산 냉장고는 효율이

1990년산보다 23%나 뛰어나고 1980년산 냉장고보다는 65%나

뛰어나 소비자들이 수십억 달러의 전기료를 아낄 수 있게 해준다.



로키 마운틴 연구소의 애모리 로빈스소장은 『아틀랜틱』지

1995년 1월호에서 현재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안전성과 힘을 그대로

갖추고도 연비가 훨씬 뛰어난 신세대 초경량 자동차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자동차는 기존 모델보다 4배, 특수 모델 자동차에

비해서는 10배의 연비를 자랑한다. 현재의 자동차는 연료 에너지의

단 15~20%만이 바퀴에 전달되고 나머지는 엔진이나 변속기에서

사라져버린다. 더 가벼우면서도 더 강한 강철이 등장했거나

개발중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로빈스소장이 묘사한 높은 연비의

차량이 등장하리라는 데 의심을 품는 자동차 전문가는 없다.



꾸준히 떨어지는 자원집약도



컴퓨터와 사진기야말로 경량화, 소형화로 개량돼가는 소비재의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전자오락기 제작회사인 세가는

「새턴」이라는 어린이용 게임기를 판매중인데, 어린이 손에 쏙

들어가는 이 게임기는 1976년산 「크레이」 슈퍼 컴퓨터보다도

연산능력이 뛰어나다. 당시 미국은 이 컴퓨터가 소련의 손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했었다.



물건의 사용 연한을 늘리는 개량화 또한 자원 절약을 가능케 한다.

오늘날 자동차에 장착되는 플라티늄 소재 점화플러그는

10만마일의 수명을 유지하며 변속기 오일 또한 출고시 한 번만

넣어주면 폐차 때까지 손볼 필요가 없다. 1993년산 자동차는

1970년산 자동차보다 평균 40% 이상 유효 수명이 길다.



가벼운 자재가 무거운 자재를 대체하면서 미국 경제는 계속

몸무게를 줄여나가고 있다. 미국인 1인당 천연자원 ─ 임산물이나

금속과 같은 ─ 사용량은 무게로 따져보았을 때 지난 20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 최근 세계자원연구소는 미국 경제의

「자원집약도」, 즉 1달러 상당의 경제 생산에 필요한 「자원의

총투입량과 (인위적인 자연환경 변환을 포함하는) 간접적인 자원의

이동」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 자원집약도가 뚜렷이 떨어지고 있으며, 이는

자연자원의 사용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미국의 경제활동이

성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보여준다』고 이 연구소의 보고서는

밝힌다. 물론 개선 여지는 있다. 산업화된 국가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들이 각자 자원집약도를

떨어뜨리는 장기 전략을 세워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통신기술 또한 경량화, 소형화 그리고 더 낮은 자원집약도를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신 케이블이 대서양을 오가는

연락선을 대신해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전했듯이 유리섬유와

마이크로파가 케이블을 대체했다. 여기서도 보이듯 신기술은 더

적은 자원으로 훨씬 큰 용량의 정보 주고받기를 실현해냈다.



옛 소련처럼 아직 전화선이 제대로 깔리지 않은 지역에서는 한 단계

건너뛰어 바로 휴대통신시대로 넘어가리라고 생각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솔로우는 이러한 혁신이 계속된다면

『실질 단위 생산당 천연자원의 필요량은 꾸준히 그리고 괄목할

만큼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노도동생산성이 꾸준히

향상되는데 천연자원의 생산성이라고 그리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잘못된 생각② 식량과 목재가 고갈되고 있다



현재 57억에 달하는 세계인구는 다음 세기에 1백억명으로 절정에

달한 뒤 안정화 혹은 감소할 것이라고 유엔은 예측하고 있다.

지구가 과연 이렇게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식량생산이

충분히 늘어난다 해도, 수산자원이나 임산자원 따위의 다른 자원은

이미 압박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어류는 멸종하고 숲은 사라질

것인가?



세계 인구가 채소만 먹는다고 가정한다면 1백억의 인구가 먹을

충분한 양의 곡물과 유지종자(油脂種子)는 이미 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1백억 인구가 고기를 먹는다면 가축을 키워야 하고, 이 경우

현재 생산량의 3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아마 가능할 것이다. 1961~94년 사이에 세계의 식량생산은 갑절이

되었다. 곡물 산출은 주로 수확의 증대에 힘입어 1950년

6억3천만t에서 1992년 18억t으로 증가했다. 개도국에서는

1974년부터 1994년까지 1에이커당 밀 생산량이 1백% 증가했으며

옥수수는 72%, 쌀은 52% 늘어났다. 월드워치 연구소는 『50년대의

농부들은 사상 처음으로 식량을 갑절로 증산한 세대』라고

보고했다. 『1984년에 농부들은 1인당 곡물수확을 전례없이 40%나

증산해 인구성장을 앞질렀다. 1992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1981~92년에 세계곡물시장에서 기초식량의 실질가격은 38%

하락했다. 식료품 가격은 토머스 맬서스가 급속한 인구성장이

지구의 수용능력을 넘어서 집단기아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던 18세기 말엽부터 꾸준히 떨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농부들은 경작면적을 갑절로 확대할 수 있지만 이럴

필요조차 없다. 현재 선진국의 절반에 그치고 있는 개도국의 수확은

개량된 종자와 관개시설, 복합작물 재배, 그리고 비료의 추가시비를

통해 크게 늘릴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쌀수확은 현재 개도국

평균수확량의 약 4배에 달하는 1에이커당 7t까지 증산할 수 있다.

수백만의 아프리카인들이 먹는 감자 같이 생긴 구근작물인

카사바의 슈퍼개량종은 수확을 10배까지 늘릴 수 있다.



건조한 지역에서는 물이 귀해 농업에 큰 지장을 받는다. 하지만 이

문제는 특정 지역에 한정된 것이며 세계적 현상은 아니다. 다행히도

월드워치 연구소의 레스터 브라운이 말하듯이 건조지역에서 물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높다. 관개시설을 개선하거나

가뭄에 강한 작물을 재배하면 되는 것이다. 브라운은 『과학자들은

가뭄에 강하고, 염분에 잘 견디고, 속성 재배되는 종자를 개발할 수

있다. 특히 가뭄과 소금기에 강한 작물종자 개발은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때맞춰 노바르티스 종자회사는 유전공학으로 생산된 다양한 밀

종자를 포함해 물 효율이 높고 염분에도 잘 견디는 작물개발계획을

발표했다. 멕시코의 과학자들은 3분의 1 정도 증산이 가능하며

가뭄에 강한 옥수수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생명공학자들은

일년생 작물을 매년 심을 필요가 없도록 다년생 작물을 개발하려고

애쓰고 있다. 생명공학자들은 또한 콩이 질소를 고정하듯이 질소를

고정할 수 있는 일반 작물도 개발중인데 , 이것이 가능해지면 비료

시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공학이 빈곤, 무역장벽, 부패, 비효율적 관리, 인종분쟁,

무정부 상태, 전쟁, 남성우위의 사회체제 등 기아의 주된 원인을

해결할 수는 없다.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경작지의 고갈 ─ 이 또한

빈곤과 제도적인 실패의 결과이지만 ─ 또한 원인의 하나다.



올바른 경작 관행을 따르기에는 너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자원을 과도하게 착취하게 마련이다. 경제학자 파타

다스굽타가 말하듯이 인구증가, 빈곤 그리고 지역자원의 황폐화는

서로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세계에서 교역되는 식량 총량은 식량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부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제한받고 있는

것이다.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기아가 정치·경제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 아마타 센이 지적하듯이 맬서스의 주장을 따르는

관리들은 식량의 절대 생산량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만 있으면

기아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 때문에 기아의 실제

원인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다. 기아는 식량의 수확이 인구성장과

발맞추어 늘어나더라도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서 식품을 살 수 없을

때 발생한다.



경제는 자연을 착취하지 않는다



인류가 전적으로 수렵과 채취에 의지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식품은

바닥을 드러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가 자연발생되눼는

자원에만 의지한다면 세계의 자원은 고갈되고 말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수산어류도 다른 농작물처럼 양식하는 기술을 익혀가고

있다. 유전공학자들은 맛도 좋고 성장이 빠르고 질병에 저항력이

크다는 등 장점을 가진 물고기들을 「개발」해내고 있다.

양식어종인 붕어와 초어는 이미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10가지 어종에 속한다.



수산양식업은 1993년의 경우 1천6백만t 이상의 어류를 생산했다.

지난 80년대 10년 동안 수산양식업은 양으로는 연간 약 10%, 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14%씩 성장해왔다. 1993년에 수산 양식농장은

전세계 식용어류의 22%와 굴의 90%를 생산했다. 세계은행은 향후

15년 안에 수산양식업이 전체 어류소비의 40%를 공급하리라는

보고서를 냈다.



자연산 어류의 고갈을 한탄하는 이들에게는 수산양식업의 성장이

아무 위안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미국 북서쪽

태평양연안 지역은 남획과 댐건설, 서식지 파괴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자연산 연어의 개체수가 80% 가량 감소했다.

유전공학으로 탄생해 양식된 사촌이 아닌 자연산 연어야말로 이

지역의 문화적 동질성과 지역적 특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자연산

연어가 사라지면 이 지역의 역사와 특이성, 그리고 자랑거리 등

몇몇도 사라질 것이다.



연어뿐만 아니라 고래나 돌고래를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의 경우도

이들이 경제적 중요성을 상실함에 따라 그들의 미적도덕적 가치는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고려와 도덕적 고려는

별개의 사항이 돼야 하지 않을까.



수렵 및 채취에서 양식으로의 이전은 임업분야에서는 서서히

진행됐다. 아직 목재기근의 조짐은 없다. 현재 미국에서 삼림은

사상 최대의 수확을 낳고 있으며 20년대보다 더 넓은 지역이 숲으로

덮여 있다. 95년 4월호 『아틀랜틱』지에서 빌 멕기번은

벌목꾼들과 농부들이 18, 19세기에 걸쳐 벌거숭이로 만들어 놓은

미국동부 지방이 금세기 들어와 다시 녹화됐다고 쓰고 있다. 이는

농장터가 다시 숲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며, 기계가 동물을 대신하게

돼 목초지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됐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이 임목지대를 좀더 생산성있게 바꾸어감에 따라

재녹화가 꾸준히 계속될 것이다. 저명한 임업 전문가 로저 세조에

따르면, 대규모 나무농장이 진보함에 따라 2억 에이커 정도의

농장으로 전세계 산업용목재 수요를 모두 충당할 수 있다고 한다.

2억 에이커란 현재 전세계 임목지대의 5%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더 넓은 천연림이 보호될 것이다.



흔히 천연자원은 풍부하고 값이 싸서 대체품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미국정부가 천연림을 상업적 남벌로부터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목재산업계는 수확을 배가시키고 유전공학의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는 대규모 나무농장에 투자할 동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생명공학을 응용한 나무 재배는 머지 않은 장래에

자연림에서 벌채한 나무 가격을 밑돌게 될 것이다. 90년대 10년간

중국은 1억5천만에이커에 나무를 심을 계획이며, 인도는

상업용으로 벌채하는 삼림 규모의 4배에 달하는 지역에 나무를

심고 있다.



양식농장과 나무농장의 확대는 우리 경제가 자연을 착취하는

것보다는 기술 진보에 더 의지하고 있다는 피터 드러커 등

경영전문가들의 믿음을 뒷받침해준다. 천연자원은 앞으로도 항상

필요하겠지만 지식이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 것이다. 드러커는 『효과적인 경영이 있는 곳, 즉 지식을

응용하는 곳에서는 항상 다른 자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드러커를 비롯해서 앞에서 거론한 사람들의 말처럼, 자원의

희소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쉽게 극복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경제학 논리들이 모두 자원 고갈에 우려를 표하고 환경을

중시하도록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까닭이 없다. 자연 보존의

당위성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윤리적 이유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 ③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다



자원의 희소성을 걱정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에너지일 것이다. 한 에너지전문가 그룹은 1986년에 『연료 등

천연자원의 공급이 경제성장에 한계를 긋는 요소가 돼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 국내산 유류와 가스가 2020년에는

고갈될 것이며, 앞으로 몇십년 안에 『세계는 식량난은 물론 심각한

에너지난을 겪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런 예측과는 반대로 연료난은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하버드대학의 환경정책 교수인 존 홀든은 『세계적으로 에너지가

「고갈」되리라는 긴박한 위험은 없다』고 말한다. 홀든교수에

따르면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은 1990년 수준으로 채굴한다면

향후 70년이나 1백년 정도 사용할 수 있다. 그는 『범세계적으로

보아 에너지원 고갈이 에너지문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세계의 에너지문제는 자원고갈보다는 공해물질 통제 쪽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탄수화물 연료가 연소할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가스는

쌓여서 태양빛을 차단, 대기를 덥힌다. 그런데 우리가 방출하는

이산화탄소를 일정 부분을 식물이 흡수한다. 1995년 과학자들이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1992~93년에 북반구의

식물은 35억t에 달하는 탄소를 흡수했다고 한다. 35억t이면 우리가

범세계적으로 탄수화물 연료를 태울 때 배출되는 탄소량의 절반이

넘는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저러한 피드백 메커니즘이 잘 작동한다고 해도,

이산화탄소 방출과 온실효과는 억제돼야 한다는 광범위한

컨센서스가 형성됐고, 이는 1992년의 국제협약에도 반영됐다.



미국과 기타 선진국들에 지구온난화 문제는 기술적으로 해결

가능한 과제다. 애모리 로빈스는 「현재의 세계 경제활동을 유지

혹은 대폭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기후를 안정화시키는, 그리고

비용도 아낄 수 있는」 상업화된 기술을 소개한다. 그는 『인구와

산업활동이 매우 큰 규모로 팽창해도 에너지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로빈스 등 환경보호론자들은 우리의 수요를 채우고도 남아도는

엄청난 양의 공해없는 에너지가 아직 미개발인 채로 있다고

주장한다. 지열 에너지는 이론상으로 미국의 굴착기술로 채취가

가능한데, 미국내 석탄매장량의 수천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는 조류 에너지 또한 유망하다.

태양에너지를 연구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태양에너지에 바탕한

세계적인 에너지체계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갖춰져

있다』는 월드워치연구소 레스터 브라운의 견해에 동의한다.

앞으로는 「재생가능한」 새로운 에너지원들로 국가의 전기체계

시설을 사용하게 될 지도 모른다.



애모리 로빈스처럼 경제성장을 하면서도 온실가스 방출을 줄일 수

있다고 믿는 환경보호주의자들은 우리가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을

이용하는 쪽으로 옮겨가야 하며 화석연료도 훨씬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미 개선 조짐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선진국에서 제품생산에 투입되는 에너지 집약도 ─ 1달러의

경제 산출을 위해 사용되는 연료의 총량 ─ 는 해마다 2%씩

감소하고 있다.



1973년부터 1986년까지를 예로 보면, 미국의 에너지소비는 경제가

거의 40% 성장했음에도 실질 증가가 미미했다. 그러나 독일이나

일본과 견주어보면 이 성과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연료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일본은 단위 경제생산당 소요되는 에너지

양이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미국은 아직도 연간 수천억 달러를

비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으로 날리고 있는 셈이다. 일본 수준으로

에너지효율을 높인다면, 미국의 국제경쟁력은 한층 더 강력해질

것이다.



에너지를 절약하고 공해물질을 감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시행하지 않는가. 화석연료의 값이 싸서 연료 효율을

높이거나 다른 에너지원으로 옮겨가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한 이유다. 다른 이유로 정부 보조금이 있다.

화석연료와 핵에너지에 대한 정부보조금은 80년대에 연간 수십억

달러에 달한 데 반해, 재생가능한 연료원에 대한 지원은 1989년에

1억1천4백만 달러에 그쳤으며 그나마 그 이후로는 거의 지급이

중단된 상태다. 에너지문제 상담가인 마이클 부라우어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경제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법률이나, 규제, 인센티브, 여론의 향방, 그리고

에너지시장을 구성하는 다른 요인들』이라고 지적한다.



에너지 관련 기술이전은 범세계적으로 건전한 경제개발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환경보호론자들은 자연이 설정하는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는 경제가 팽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확장되는 풍요가 환경파괴의 직접적 원인이라

간주하고, 경제의 축소를 요구한다. 작은 지구에 걸맞은 작은

경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도국에서 경제가 성장을 멈추면 『전인구가 한결 나은

생활환경에 접근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고, 더 심한 삼림황폐화와

경작지 파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브라질의 골뎀버그 전

환경부장관은 경고한다. 에너지정책이 빈곤, 불편함, 자기희생,

그리고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나아가 선진국 시민들은 이

정책에 저항하게 될 것응甄? 이렇게 본다면 기술에 대한 회의주의는

환경보호주의자에게 바람직한 선택대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잘못된 생각 ④ 북(선진경제)이 남(후진경제)을 착취한다



윌리엄 라일리는 부시행정부에서 환경장관을 맡았을 때 환경관련

국제회의 석상에서 번번이 비판을 받곤 했다. 개도국의 어느 대표는

『세계의 환경문제는 당신네들의 소비 때문이지 우리의 인구

때문이 아니다』라고 그에게 말했다. 이들 대표단 중 몇몇은 나중에

라일리장관을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서는 『북이 남의 물건을 거의

사주지 않는다』고 몰아 세웠다.



북이 남의 생산품을 거의 사주지 않는다고 몰아세운 대표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세계자원연구소는 『몇몇 예외적인 상품(특히

석유)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천연자원의 대부분은 미국

내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80년대를 통틀어 미국과

캐나다는 천연자원 수출에서 세계 수위 자리를 지켰다. 미국은

지금도 세계 농산물 수출에서 수위를 차지하며, 농업부문에서

대규모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북이 남으로부터 사들이는

천연자원은 지난 30년 동안 최저 수준이었으며 이나마 계속

떨어지고 있다. 산업화된 국가들은 대개 자신들끼리 교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미국은 식물성 기름의 40%를 개도국에서

수입했다. 하지만 전후 미국은 국내 유지종자 작물시장을 보호,

예를 들어 콩에 대한 가격유지 정책을 폈다. 아직 야자기름과

코코넛기름을 비누·샴푸·세제원료로 수입하고 있지만, 오늘날

미국은 세계에서 으뜸같가는 유지와 유지종자식품 수출국 중 하나다.



약 10만의 케냐인들은 조그만 땅뙈기에서 파이레스럼 꽃을

재배해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파이레스럼은 비교적 안전한

살충제 원료로 쓰이며 미국이 최대수입국이다. 하지만 미국

상무부는 생물공학회사들이 이 작물을 유전공학으로 개발해내도록

1백20만 달러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산업화된 나라들은 곧 이

파이레스럼을 합성해낼 것이고, 케냐의 농부들은 이 작물을 팔 곳을

잃어버릴 것이다.



1995년 12월호 『포린 폴리시』지는 생명공학이 『바닐라에서부?
코코아, 커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체작물을 개발해내

제3세계 농업노동자 수백만명의 생계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구실에서 배양된 바닐라는 천연 바닐라에서 추출한

바닐라 가격의 5분의 1이며, 이는 수만에 달하는 마다가스카르

바닐라 재배농의 생계를 위협한다. 과거에는 농장이 농산물을

재배하고 공장이 이것을 가공했지만, 앞으로는 공장이 가공뿐

아니라 「재배」까지 겸하거나 이 두 가지를 한 공정으로 처리해낼

것이다.



북의 선진 경제는 개도국으로부터의 농산물 구입을 중단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잉여농산물을 개도국에 덤핑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뉴딜정책의 유산인 가격유지정책 덕에

남아돌게 된 방대한 양의 밀을 유럽과 제3세계로 헐값에 수출했다.

후진경제로의 이러한 막대한 곡물이양은 50, 60년대에는 미국의

식량원조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됐고, 70년대와 80년대 들어서는

미국과 유럽공동체가 시장경쟁을 벌여 농산물 수출에 대해

경쟁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계속됐다.



사회학자 해리엇 프리드만은 미국의 곡물수출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식량을 자급하던 나라들이 20년도 안돼

식량자급을 못하는 나라로 전락했다』고 했다. 열대지역 국가들은

북의 곡물 공세에 대항해 코코아, 커피, 차, 바나나등의 수출작물을

시장에 쏟아부었고, 이에 따라 이들의 값은 70년대에 이미

폭락했다. 마치 양날을 가진 가위가 개도국의 목을 죄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프리드만은 『한쪽 날은 식량수입

의존이요, 다른 한쪽 날은 열대작물 수출을 통해 얻는 재원이

감소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선진국들이 밀 등 자신의 생태계에 잘 어울리는 작물을 개도국에서

쉽게 생산되는 커피, 코코아, 야자유, 그리고 차 등의 작물과

교환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이들 열대성 수출작물은

곡물이나 구근류 같은 전통적인 주식작물보다 토양에 피해를 덜

준다.



열대작물이 더 나은 판로를 찾았다면 개도국들이 농촌인구를

고용하고 자신의 천연자원들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계자원연구소의 앨런 해먼드는 『가난한 나라들은 수출할 것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비참함을 마약이나 질병, 테러, 이민, 그리고

환경파괴 등의 형태로 수출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뒤진 나라들의 농부들은 종종 구제불능성 빈곤의 벽, 세습되는

토지소유권, 열악한 인프라에 맞닥뜨린다. 이들에겐 시장에의

접근이나 교육 혹은 고용의 기회가 없다. 환경문제 상담가인 노먼

마이어스에 따르면, 농촌지역의 빈곤층은 살아납남기 위해

환경자원을 남획하는 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생산성이 높지도 않은 열대림 지역을 점점 더 잠식해들어가는

것이다. 빈곤층 중에서도 최빈곤층은 개도국에 사는 다른 30억

인구를 합한 것보다도 천연자원을 더 고갈시킨다.



마이어스는 생태계를 심하게 파괴하지 않으면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것이 열대림 지역 농부들의 전형적인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열대림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은 납내란과 빈곤을 피해 오지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는 난민들이다. 마이어스에 따르면 도로

건설이나 벌목, 상업적 영농 등의 활동은 80년대 초 이래 열대림

지역에서 거의 늘어나지 않고 있다. 반면에 화전은 전체 열대림

훼손의 5분의 3을 차지한다. 이 훼손의 충격파는 급속히 번지고

있다. 열대림에서 벌목된 나무 대부분은 그 지역에서 연료로



사용된다. 따라서 열대우림을 보호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안은

농부들이 농사에 더 적합한 경작지에서 효율적으로 농사를 짓도록

길을 열어주는 경제개발이다.



많은 이들은 경제적 풍요와 경제성장이 자동적으로 자원고갈,

환경악화, 그리고 생태계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제는 더 나은 생산성과 번영이 도시 공해를 억제하고 열대우림

같은 민감한 생태계를 보호하는 전제 조건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식품과 연료를 얻을 길이 없는 절박한 사람들이 공해를 유발하고

삼림을 파괴할 것이다. 경제성장 없이는 ─ 경제성장은 또한

인구증가의 억제와도 관련된다 ─ 환경과 인구문제 같은 남(南)의

문제들은 악화일로를 걸을 것이다. 환경재앙에 직면한 가난한

나라엔 경제성장만이 살 길이다.



소비,무엇이 문제인가



60~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 대다수는 우리가 가진 것이

없음에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가진 짐을 모두 꾸려봐야 폴크스바겐

승용차 뒷좌석을 겨우 채울 정도였다. 그러나 ?십년이 지난 지금

우리 대다수는 중산층이 됐고, 끔찍이도 많은 물건들을 사들였다.

가스 그릴, 잔디깎는 기계, 넘쳉쳐나는 가구, 자전거, 애들 장난감,

정원관리용 기기, 사다리, 지난 번 이사하면서 상자 속에 처넣고는

아직 풀어놓지도 않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집안 곳곳에 널려 있다.

우리가 소비하는 자원, 특히 에너지의 양과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의

양을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자원이 고갈되고 생태계가 붕괴되리라는 예측이

오판이란 것을 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저지른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그런 고갈과 붕괴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볼 때, 공동체와 가족·친지간의

연대에 금이 갈 때, 자연세계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이 빛을 잃을

때 우리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연민의 정 때문에 다른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다. 세상에는

도와야 할 비참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상황도 개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60년에는 세계인구의 거의 70%가 최소 생계수준

이하의 생활을 영위했다. 오늘날 이 수치는 3분의 1로 줄었으며

만족할 만한 삶을 즐기는 인구층은 60년의 25%에서 1992년 60%로

증가했다. 1992년을 기준으로 그전 4반세기 동안에 개도국의 1인당

평균 소비는 75% 증가했다.



개선 속도 또한 가속도가 붙었다. 같은 기간 개도국에서 1인당

전기발전량과 전화회선의 수는 갑절이 되었으며 상수도 시설을

갖춘 가구수도 절반 정도 증가했다.



하지만 부유층과 빈곤층의 소득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세계인구의 총소득은 2차대전 이래 7백% 실질 증가했지만, 이

증가분의 대부분을 최부유층이 챙겼다. 1960년 이래 세계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부유층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은 70%에서

85%로 늘어났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이 나머지 5분의 4가 소유한

부보다도 훨씬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세계인구의

20%를 점하는 빈곤층의 소득점유율은 2.3%에서 1.4%로 감소했다.



벤자민 바버는 시장의 강자들이 『M-TV와 매킨토시 컴퓨터,

그리고 맥도널드 햄버거를 통해 판에 박은 듯한 상업문화를 지구촌

곳곳에 퍼뜨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같은 단일의

상업문화는 기술과 생태계, 통신망, 그리고 상업활동으로 서로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태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그밖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들의 부유한 시민들은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 그리고 다른 선진국 시민들과 함께 도회화되고

코스모폴리턴적인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계적 네트워크의 일원이 된 사람들은 서로의 관습과 전통에서

점점 더 영향을 받는다. 반면에 이 세계에 편입되지 않은 인종이나

종족, 그리고 다른 문화집단에 속한 이들은 그들의 반대자를

자처하며 자신의 인종이나 종교, 그리고 지역적 정체성을 내세운다.



전통문화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를 강요하면 토착민들은

지역공동사회 등 자신이 기대 살던 것들이 와해된다는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이 경우 토착민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한 개발계획이

자칫 무력감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력감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품화할 수 있고 신성한 것이란 없다, 즉 모든 가치는

주관적이라는 생각은 전통사회의 도덕적·문화적 신조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도덕적·문화적 신조에도 어긋난다. 상업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악영향을 철학자 소로는 자신의 저서

『월든(Walden)』에서 훌륭하게 비판했다. 소로에 따르면 어떤

물건의 가격은 시장이 거기에 매기는 값어치가 아니라, 한 개인이

그것에 부여하는 값어치다.



많은 이들은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소비하면 삶을 즐길

기회가 줄어드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우리는 늘 무엇엔가 쫓기듯

살고 있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친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1950년대보다 줄었다. 하버드의 경제학자인

줄리엣 숄은 『미국인은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일한다』고

말한다. 멋진 자동차와 비디오기기 혹은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램

등을 운용하고 때맞춰 신형으로 갈아주고, 수리하는데 고통스러울

만큼 많은 비용이 든다.



원초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그 이후로는 금전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주장은 널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뉴욕시립대학에서 사회심리학을 강의하는 폴 와첼은 소득이

늘어난다 피해서 이 늘어난 소득이 『빈곤을 벗어났거나 최저생계선

이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만족감을 주지는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이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카지노에서 큰 돈을 딴 사람 중에는 그 돈 덕에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는 사람이 많다. 결국 행복이란 자신의 건강과

지역공동사회에의 소속감, 그리고 금전으로는 살 수 없는 도덕률에

달린 것이다. 예일대학의 정치학자 로버트 레인은 경제학 개념을

응용해 『만약 효용이 행복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빈곤선

이상의 생활을 하는 경우 돈의 장기적인 한계효용은 거의

0』이라고 했다.



초기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안락하다고 느끼는 생활수준에

도달하면 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8세기

영국의 자유시장 옹호론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생활수준은

달라도 신체의 안락과 마음의 평화에 있어서는 거의 공평하다』고

주장했다. 30년대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즈도 어느 수준까지 오른

이후의 부의 축적은 개인을 더 이상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 후 경제학자들은 케인즈가 충분하다고 설정한 수준까지

부를 얻은 선진국에서도 사람들은 계속 더 많은 부를 탐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욕구는 만족을 모른다고 추론했다.



아마도 이 추론은 참일 것이다. 하지만 욕구와 욕망이 만족을

모른다는 이 추론은, 인간의 유일한 목표는 부를 증대시키고

최대화하는 것이라는 정통 경제학 이론을 난관으로 몰아넣는다.

만약 소득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속도로 욕구가 커진다면 부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통경제학 이론을 비판하는 이들은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없다』는 근거를 내세운다. 자원이 고갈되고 있고 생태계에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성장이 지속될 수 있건 없건

인간이 일단 어느 정도 품위 있는 삶의 수준에 도달했는데도 계속

성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경제학자인 로버트

넬슨은 최근  「생태경제학」지에 쓴 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경제성장이 인류의 정신적인 문제는 물론 물질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고 썼다. 지속가능성 여부에

대한 논란을 도덕론을 배제하고 성장의 물리적 한계에만 한정지을

경우 주류 경제학 이론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그 논란을 도덕론

혹은 사회적 조건에 한정지을 경우 결과는 반대가 될 것이다.



자연에 자리를 마련해 주자



소로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

돼야 한다』. 소로와 존 무와를 추종하는 환경보호론자들에게

「자연의 보호자」란 관계는 「동반자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자연은 활용해야 할 대상이지만 경제적인 눈만으로 자연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연세계를 통하여 느낌을 얻는다.

시간감각을 느끼고, 계절을 알고, 경치나 그 곳에 사는 특정

동식물을 보고, 특정 장소에 대한 감각을 가진다.



오래된 숲과 습지, 혹은 생물의 종을 보호하려 할 때에는 미학적

혹은 도덕적 관점을 내세워야 주장이 잘 먹혀 들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문화적 신념을 내세우기보다는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경제적 이유를 더 자주 들먹인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실제보다도 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멸종 위기에 처한

어떤 생물종이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약재로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생물이 시장에서 갖는 가치보다 훨씬 더 큰 경제적

가격을 매기는 것이다.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생물이 생태계가 작동하게 하는

데에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터무니없다(예를 들어 고래가

멸종한다고 해서 전세계의 바다가 크릴 새우로 가득 차지는 않을

것이다). 러트거스 대학의 생물학자 데이빗 에런펠트는 멸종위기에

빠지는 종이 대부분 생태계로부터 이미 버림받은 종이라고

지적한다. 『이 멸종들의 대다수는 흔히 발견되지도 않던 것이었고,

생태계에 대한 영향력도 미미한 것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아준다

해도 이들 멸종들이 생태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맡고 있었다고

보아줄 수 없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어떤 종은 문화적·정신적 이유로 아주 중요할 수도 있다. 다시

앞에서 예로 든 자연산 연어의 경우를 보자. 콜럼비아강에

수력발전용 댐들을 건설하면서 이들의 서식지가 파괴됐다. 이

연어를 잃는 것이 전체 경제에 주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대대로 이

지역에서 연어와 함께 살아온 그지역 사람들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지역의 식물상(相)이나

동물상(相)을 신성한 유산으로 간주함으로써 ─ 즉 그들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연어를 보호한다는 도덕적·문화적인 이유를 내세워 우리

사회는 엄청난 경제적 희생을 ─ 예를 들어 수력발전용 댐을

없애버리는 등의 ─ 정당화하기도 한다. 연어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수십만 달러의 돈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인간과의 관계가 미미한 식물이나 동물들조차도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보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들 생명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용도로 쓰일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역사나 그들 자체의 경이로움인

것이다.



생물학자 E. O. 윌슨은 『모든 유기체는 살아남기 위해 묘책도 쓰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듯한 상황에서도 종족을 퍼뜨리며, 마치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해나가듯이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한 것이다』고

말한다. 식물이나 동물에 대해 알고 나면 그들 모두가 존경받을만한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92년에 쓴 『균형속의 지구』에서 당시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는

『우리는 자연을 통제하는 데 계속 성공을 거두어왔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자연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고어는 또

『지구는 단지 이 순간의 필요에 유용할 뿐 그 이상의 고유한

가치는 없는 「자원의 집합체」로 간주하기가 아주 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이전의 세대에게 문제는 자원이 고갈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문제는 환경정책을 경제학 논리로

좌지우지해도 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공리주의 철학 태두 중 한 사람인 존 스튜어트 밀조차도 자연은

자원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엄청난 고유를 지니고 있다고

인식했다. 1백여년도 더 전에 영국에 더 이상 진정한 황무지를

찾아볼 수 없게 되자 밀은 다음과 같이 세상을 경멸했다.



『자연의 즉흥성이 아무런 작동도 할 수 없는 곳, 땅이란 땅은

모조리 경작돼 인간을 위한 식량이 재배되는 곳, 모든 황무지와

자연 목초지가 갈아 엎어진 곳, 모든 야생 네발짐승과 조류가

음식물을 얻는 데 있어 인간의 경쟁자란 이유로 멸종되는 곳,

보잘것 없다는 이유로 조그만 나무나 필요없는 나무가 뿌리뽑힌 곳,

야생 관목이나 꽃이 개량 농업이란 미명하에 잡초라는 누명을 쓰고

뿌리뽑히는 곳』



이 세상에는 모든 이에게 품위있는 삶의 기회를 제공할 부와 자원이

있다. 시장기능이 공동사회의 연대와 문화적 연대를 와해시키면

우리는 과소비로 치닫게 된다. 소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경외감을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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