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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잉여의 정치경제에서 자치경세(自治經世)로

1. 걸어 온 길, 거쳐야 할 관문

유례없는 정치경제 위기 속에서 지난 세기와 '세기 말'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시도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에서 영화로 표현한 '세기말'은 특히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눈을 뜨고 바로 보기(直視)가 쉽지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애비 뻘 되는 사람에게 몸을 파는 여대생, 대학교수가 되려는 강사에게 수천만원 기부금을 요구하는 대학당국, 이런 부조리 앞에서 '먹물'을 욕하면서 타락하기도 하는 대학강사의 모습은 부분적이나마 우리 시대 '경제'와 사회의 한 단면이요, 이미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대학의 한 단면이다.

어찌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가? 도대체 '진보'와 '발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근대 이후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왔는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를 해명하는 단초로 먼저 이런 글을 보자.

구하라. 그러면 구할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장 7-8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길도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길도 좁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복음 7장 13-14절) 곧고 바른 것을 길(道)이라 하고 두려움 없는 곳을 목적지라 한다. 고요하고 한가한 수레를 타고 진실의 가르침을 덮게로 삼고 부끄러움을 고삐로 삼으며 바른 생각을 재갈로 하여 지혜를 휼륭한 말몰이 삼고 바른 소견을 안내자로 삼는다. 이 세상 어느 사람이라도 이것을 타면 생사의 험한 숲 속을 지나 편안하고 즐거운 열반에 도달하리라.(잡아함경 제22:587경2-156상. 별역잡아함경 제9:171경:2-437)

위 글은 필자가 찾아서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연말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만행(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에 있는 것을 옮긴 것이다. 하버드와 예일 등 세계적 일류 대학을 수학한 '미국의 386세대, 운동권 출신'으로서 '진리'를 찾아 오랫동안 세계 도처를 철학, 사상적으로 전전(萬行)하다가 '코리아'의 숭산스님 제자가 된 폴 뮌젠, 현각스님이 자신의 책 머리에 올려 놓은 것이다.

동양문화에 대해 오만한 기독교와 과학의 서양세계에 동양의 불교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997년,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장 프랑스와 르벨가 스님이 된 그 아들 마티유 리카르의 대화록 [승려와 철학자](창작시대, 1999)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도 그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껍데기는 동양인이면서도 속속들이 서양의 철학과 사회사상적 물이 든 사람으로서는 당혹스럽기도 한 이런 새로운 흐름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 왔던 '단계적 발전론'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지적.문화적 흐름이 근대 과학주의에서 중세 종교로 회귀, 역류하는 양상으로 보인다. 사회적 과학주의의 극치를 보인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면서 자본주의로 역류한 그 폐허 위에 종교의 꽃이 무성하게 피는 양상은 기존 역사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역사의 토보'로 기존의 자본주의 과학물질문명에서도 유사한 흐름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 신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 인간 중심의 철학과 과학의 세계관에 기반하여 근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 온 인간사회는 이제 다시 '암흑 같은 중세 기독교'의 관문을 거쳐야 하며, 인류사 이래 처음으로 동서양의 모든 문물이 전면적으로 섞인 시대에 동서양 사람들이 동서양의 전근대 종교와 학문이라는 '좁고 좁은 문'을 관문(關門)으로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성경과 불경을 나란히 인용한 위 글은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모두 취하는 동서양 문화의 좁은 문 외줄타기의 지난한 시도로 본인다. 사회과학, 사회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근대의 철학정신, 사회과학의 '정신'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종교'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참다운 '중도'(中道) 외줄타기를 벌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서구의 '제3의 길'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길이 아닐 수 없다.

이 생사를 가르는 관문 앞에서 서양사람들이 드디어 동양의 종교, 철학과 학문을 받아들이고 배우기 시작했다고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그 정권창출 과정에서 학계를 동원하여 '서양사상의 기본 틀이 바뀌고 있다'느니, '동방의 등불, 새 문명의 주역'이라느니(김영삼, [2000 신한국:신한국창조를 위한 개혁청사진], 동광출판사), 온 천하에 내놓고 천박한 호들갑을 뜬 최종 결과가 국가부도 위기와 IMF신탁통치임을 다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 IMF가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라 한국을 잡아먹는 음모를 꾸미고,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까지도 이 나라의 강경식 부총리는 '경제펀드멘탈은 튼튼하다'는 데서 나아가 '윈-윈 철학'이니 '한민족의 대웅비'니 하며 혹세무민하고 다녔으며, 대학도 이를 막을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것도 뼈아프게 기억해야 한다(재정경제원, 강경식, '열린 시장경제로 가기 위한 국가과제', 19997. 11).

이제 어두운 미로 속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첫 출발을 어디에서 했으며, 이후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오늘날 이 나라 정치경제나, 정치를 새롭게 하여 온 나라 사회경제를 새롭게 하자는 시민.사회운동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에 대해, 거칠고 다소 무모하지만 시론적으로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국민'없는 정치경제의 '잉여'와 시민.사회운동의 '잉여'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 나라 정치경제에 '나라 주인'으로서의 '국민'이 있었는가? 달리 말해서 이 나라에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가 있었는가, 이 나라 정치와 정부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어른들은 물론 대학생들도 다 안다고 여기고 볼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고등학교의 [정치경제] 교과서를 보자. '정치와 경제'란 제목으로 이 나라 최고의 대학교수들이 저술한 것을 압축해 놓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1993:13).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자유민주사회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가지 기본 원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인 면에서의 민주주의와 경제적인 면에서의 시장경제는 '자유민주사회'라는 수레의 두 바퀴에 해당된다.
민주주의가 인간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개인주의라면, 시장경제는 사유재산과 영리추구를 인정하는 개인주의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라면, 시장경제는 자유경쟁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이다. 또 민주주의가 정치적 의사결정에
공정성(公正性)을 추구하는 합리주의라면, 시장경제는 경제적 의사결정에 효율성(效率性)을 추구하는 합리주의이다.

요즘 국회의원 선거철을 맞이하여 도처의 '시민'이 '자유롭게' 국회의원에 입후보하고, 자유롭게 여기 저기서 정당을 만들기도 한다. 나라 경제는 죽어가는데 정치는 대호황이다. 그런 점에서 이 나라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건국 이후 국민이나 정치권이 '민주정부'라 공인하는 그런 정부, '민주정당'이라 인정하는 그런 정당이 있었는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자유당', '민주공화당'은 야당과 국민적 투쟁에 직면하여 '독재당'과 '독재정권'으로서 비극적 종말을 고했다. 그렇다면 이 '독재'에 대항하여 투쟁한 정치세력은 어떤가? 3당합당한 김영삼의 '민주자유당'과 '문민정부'는 김대중의 야당에 의해 '문민독재'라 규정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건국 후 처음으로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로 집권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는 거꾸로 구여당이자 야당인 한라라당에 의해 독재정권으로 규정되었다. 종합하면 이 나라 역대 정부는 야당에
의해 '군사독재'와 '문민독재'라 규정된 정부와 정권, 정당 밖에 없다. 야당의 주장만 모아도 한국의 역대 정권과 정치체제는 '부르주아 독재'라는 것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된 노릇인가? 그러면 위 교과서는 모두 거짓말인가? 역대 야당들의 주장이 맞으면 전국 고등학교의 교과서는 거짓말이고, 교과서가 맞으면 반대로 교과서를 만든 정부가 거짓말쟁이다. 이 문제는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온갖 이분법적 형식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즉 '민주주의는 동시에 독재'라는 것이다.

'산산수수(山山水水)이되, 산수가 하나'이며, '중생과 부처가 다르되, 또한 하나'라는 불가(佛家)의 '불이론(不二論)을 사회과학으로 응용하면 '독재와 민주주의가 둘이 아니고 하나', 즉 기존 한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적 독재체제'혹은 '독재적 민주체제'라는 것이다.

이런 정치에는 당연히 주권자 '국민'은 '민주주의 공화국' 헌법 조항에나 있으며 현실에는 없다. 그간의 자유경쟁 정당정치를 보면, 계급정당을 부정하며 보수세력의 '민주당', '신민주당', '국민당', '민주공화당', '국민회의' 등 '국민이 주인'이라는 '국민 정당'의 간판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 모두가 자산가 출신의 직업정치인들 중심으로 국민을 지배대상, 선전과 동원 대상, 정치마켓팅 대상으로 하는 정당 뿐이었으며, 다수 국민은 주인이 아니라 그 노예, 머슴이거나 손님에 불과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전 이만섭 국민신당 총재가 '모든 정당 간판을 내리고 큰 틀의 정개개편을 하자, 진짜 국민정당하여 통일하자'고 주장하고서, 이를 최근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으로서 다시 반복한 것(월간조선1999.8)은 '국민의 정당'이 없었음을, '민주 국민정당론'이 거대한 허구였음을 역설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이런 '보수 정치'를 '부르주아 독재정치'라고 비판하는 '진보정당'에는 '국민'이 있는가? '진보정당'은 '국민정당'이 아니라, 처음부터 국민의 일부인 '부르주아'를 배제하는 '계급정당'이다. 현재의 민주노동당을 포함하는 이 나라 모든 기존 정당, 현재 새로 만들고 있고, 앞으로 생길 '제4당', '제5당', 모든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에는 조직 대상화된 '당원'과 '유권자'만 있을 뿐 국민은 없다. 자신만은 진정으로 민주적이요, 국민적이라는 '참말과 뒤섞인 거짓말'이 있을 뿐이다. 개인주의를 찬양하지만, 여기에는 살아 있는 '개인'도 없으며 오직 조직에 복종해야 하는 '조직원'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50여년간 누적된 이 나라 정치의 거대한 '거품' 혹은 '잉여'와 그 결과이다('잉여'에 대한 사회과학적, 사회철학적 논의와 그 기원은 지난 2월호 [세상만들기]에 필자가 소개한 바 있다). 재테크를 하면서, 자신이 재물의 주인이 되어 투자하지 않고 증권회사나 투자신탁회사에 맡겨 망하는 투자자들 처럼,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 되어 나라를 경영하지 않고, 증권사, 투신사보다 더 믿을 수 없는 부패정당과 정치인들에게 나라살림을 맡겨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제 할 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맡기는 '위임'이라는 '정치적 잉여', 대의민주주의제의 '제도적 잉여', 그 기초의 정치제도적 불로소득심리는 거꾸로 '민주적 독재'와 '정치적 지배', 심지어 '통치'라는 오랜 정치역사적 잉여가 다른 형태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40년 전의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맞선 마산 3.15의거와 4월혁명을 되돌아 보며,
'박정희의 5월혁명'에 의한 그 실패 혹은 미완성도 결정적으로는 2.28의거의 대구, 3.15, 4.11의거의 마산, 부산, 4.19의거의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처의 '4월혁명'의 주체들이 미성숙하여 혁명적 국민주권을 야당-바로 김영상, 김대중이 속한 -에 맡겨버린 정치적 위임과 그 동전의 양면인 주권자의 무절제한 욕구와 분출에 기인한다.

국민과 정당정치의 이러한 사회적 존재방식은 정당과 정치가 지배하는 '자유시장'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자본주의의 정치와 국가는 '시장'에 대하여 방임과 개입, 계획을 반복해 왔다. 해방 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화한 이 나라 '국가주도 시장경제'는 성장과정의 과잉중복투자와 이에 따른 연쇄적 과잉중복 생산과 과잉 고용, 과잉부실대출 등 투자와 생산, 고용, 금융 등 영역에서 갖가지 불합리한 경제적 잉여를 만들었고, 그 반면에는 과소투자, 과소생산, 과소고용, 과소 대출 등의 네가티브 경제잉여로 인한 고통이 누적되어 왔다. 상호간 소통이 없는 사활적 자유경쟁이 필연적으로 초래한 갖가지 포지티브 잉여는 그 자체로서 한계에 이르러 수익율 저하와 불황을 초래하였다. 국가주도 정치경제, 관치경제가 이완된 김영삼 정부하의 경제 자유화, 민주화는 미국주도의 세계화와 맞물려서 더욱 큰 경제적 잉여를 만들어 마침내 국가부도 위기와 대공황의 상황을 맞았다.

이런 '시장'은 그 근간이 되는 재산 소유의 부조리도 재생산해 왔다. 불합리하게 과다 소유한 사람은 과소 소유한 사람을 만들고, 사유재산을 부당하게 '공권력'으로 박탈하여 국가소유로 만드는가 하면, 공유해야할 재산을 부당하게 사유재산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온갖 형태의 소유의 잉여가 재생산되어 온 것이다. 이 나라 정치인 소유의 토지재산, 재벌가의 세습재산, 농촌, 도시의 무산 빈민 등이 그 표현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자유시장경제'란 관념도 실제 현실에 비추어 거대한 일면적 허상이란 것을 드러내고 있다. 창업과 직업선택의 자유 등이 넘치는 듯하지만, 자유방임시장도 실패하고, 오랜 정부 개입도 공황을 막지 못했으니, 공황과 실업은 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하다거나, '자유와 평등'이 형식적일 뿐이라는 맑스주의 경제학도 적어도 이 점에서는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대기업 앞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중소기업인이나, 심지어 은행, 언론사, 학교의 은행원, 기자, 교원 등 피고용인이나, 강대국 대기업의 하청기업이 되다시피한 국내 대기업들이나 '자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정치문제와 경제문제의 양면성을 지니는 것은 매우 많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들면 하나는 '나라살림'의 근간인 국가재정문제이다. 과세 대상과 세율을 정하여 거두어 들이고, 이를 지출하는 것은 온 국민적 정치경제문제이다. 세법에 의한 과세 대상 결정에서부터 세율, 세액 결정, 세법 집행 과정에서의 조세 징수 여부, 세액 결정 등에서의 부조리와 '정치적 착취'와 탈루(脫漏)는 심각할 대로 심각하다. 예를 들면 재벌에 대한 상속세 '봐 주기'나 자영업자 특례과세, '월급쟁이' 노동에 대한 악착같은 근로소득세 과세, 불로소득인 금융소득 종합과세제의 부실 등에서의 조세 잉여 문제이다. 최근에 도입된 국민연금은 연금이 아니라 강제적 조세화되어 국민적, 전계급적 수탈의 성격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재정 지출과정에서도 '국민'은 나라 돈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한줌의 위정자들이 국고를 사금고화하여 마음대로 돈을 쓰고, 국민복지는 형편없는 것도 다 아는
바의 조세 지출의 잉여이다.

정치자금, 선거자금, 뇌물 등은 또 다른 정치경제적 문제이다. 이 문제는 군사독재가 이완되고 문민독재로 접어들며 더욱 심각해져서 2년마다 번갈아 닥치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거는 불법과 무질서의 극치로 온 나라 경제와 사회를 점점 더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번 16대 총선은 선거 시작 전, 공천과정에서부터 전부터 역대 어느 총선보다 더욱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법처리하면 대한민국 국회는 이미 문을 닫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국회의원에 대한 '표적 사정론'이나 정조성관 기자가 쓴 [한국 엘리트들은 왜 교도소 담장 위를 걷나?](조선일보사, 2000)는 책 제목이 암시하는 바다). '유전무죄'의 법치주의 자기 부정은 무너진 사회주의에서 이미 드러난 것과 다르지 않은 것대한 사법적 잉여를 보여 준다.

이 나라 정치경제체제의 모든 문제들은 오늘날 이 나라 '시민운동'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정치적으로 낙천, 낙선운동은 국민적 정치주권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자신감을 안겨주는 등의 성과도 적지 않지만, 시민운동 그 자체가 또 다른 거품 혹은 잉여를 만들고 있다. 필자도 속한 이 나라 자칭 진보, 민주교수단체들까지 모두 자문단으로 '참여'하여 이루어진 낙천, 낙선 대상적격자 선정과 공표는 '공천' 주체와 대상을 혼동하였으며, 자의적 기준으로 공천 주체로서는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만을 지목하고, 민주당의 김대중 총재,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 등은 패거리 정치, 금권정치의 '몸통'임에도 면죄부를 부여하여 그 스스로가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음모론' 역공을 자초하였다(지난 대선의 불법 선거자금문제에 대해서는 양기대 외, [도둑공화국:권력과 재벌의 한판 잔치], 동아일보사:동아일보 특별취재팀, [잃어버린 5년-칼국수에서 IMF까지] 등 도처에 나와 이미 천하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다). 그리고 정당법에도 어긋나는 비민주적, 부패정당을 하나도 퇴출하지 못하고, 낙천자들 중심으로 또 다른 낡은 패거리 정당이 만들어진 것은 총선연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자업자득이다. 이미 '발가벗은 임금님'인 집권당 총재부터 각당총재, 각 정당에 대해 비리를 폭로하면서 동시에 옷을 입혀 주고 있는 불철저성과 이중성의 결과인 것이다.

이 정치와 연관된 경제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민운동의 재벌에 대한 소액주주운동은 재벌 대주주의 전횡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나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 자체는 면죄부를 주어 유지시키고 있다. 갖가지 이미 드러나 있는 거대한 경제적 잉여의 문제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부분에 집착해 있는 것도 유사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보인다.

이러한 '시민운동'에는 '국민'이 있는가? 널리 알려진 대로, 그리고 시민운동하는 사람 자신이 아는대로 '시민(市民)'이란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계급, 계층적으로 근대 초기 '재산과 교양이 있는 신흥부르주아'를 의미하는 것이며, 낙천, 낙선운동을 계기로 요란한 '시민혁명'도 바로 이런 '부르주아 혁명'을 의미한다. 여기에다가 지역적으로도 '시민'이란 농어민에 대한 도시민이라는 협소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국민없는 기성정당정치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시민운동에는 처음부터 계층과 지역을 포괄하는 '국민'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시민운동의 정치경제관, 세계관이 앞서 [정치경제] 교과서에서 인용한 '민주주의론'과 '시장경제론'의 틀 내에 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시민운동은 이미 국민 앞에서 사회적 생명력을 스스로 잃어 버린 이 나라 정계의 덜미를 잡았고, 앞으로 '제4의 언론권부'에 이어 '제5의 권부'로서 기성정당 수뇌부와 최고의 권력 중 하나인 공천 인사권을 공유하기에 이르렀지만, 바로 이로 인하여 시민운동이 국민적 정치경제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시민운동의 거품이 드러나면서 정치경제문제에 대한 책임도 국민 앞에서 정계화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온전하게 책임질 능력이 없으며, 그 몫은 결국 시민운동에 환호하는 일반 국민의 몫으로 점점 더 선명하게 돌아 올 것이다.

3. 정치경제위기와 교육문화 위기

앞서 논의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 대로 이 나라 정치경제의 위기는 그 정치경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길을 제시하는 정치경제 교육의 위기 상황과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오래된 교육부실의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정치경제 위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요즈음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 시대에 대학을 다닌 '475세대'와 전두환, 노태우 시대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이다. 이들은 대학에 들어와 세상을 알게 되면서 고교 시절에 배운 것이 거짓 투성이임을 알았고, 대학에 들어 와 배우는 것조차도 그 기본적인 세계관은 고교시절과 다르지 않아 체제 유지 이데올로기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대부분 학생운동, 노동운동권에 뛰어 들면서 맑스주의에 심취했다. 고교만 졸업한 노동운동 세력도 마찬가지다( '475세대'의 예로는 서울대 경제학도 출신의 유시민과 노동자 출신의 박노해 등이다). 그러나 자신의 투쟁 결과, 형식적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믿었던 맑스주의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을 전후한 사회주의 붕괴는 결정적으로 운동권 맑스주의에 '정신적 공황' 혹은 아노미 상황을 초래했다. 이후 거의 모두 '부르주아 독재론'을 버리고 '민주주의론'으로 사상적 개종하여 기성 정치인들이 국민을 배신하고 야당에서 여당으로 가듯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전향해 갔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 이래 더러는 아예 여당으로, 더러는 야당으로, 더러는 시민운동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내분을 겪는 거대한 핵분열이 일어났다. 한국자본주의의 근본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고, IMF체제 속에서 그 문제는 더욱 선명해졌음에도, 그리고 그 근본문제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근로대중들도 더욱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근본문제를 진단하는 사람도 치유의 길을 찾는 사람들도 없어진 것이다.

'인간사회'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네 부문으로 나누는 기이한 근대적 사분법에 의하면 '문화'에는 교육, 학문이 그 중추를 차지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대로 오늘날 정치경제 위기는 부실교육과 그 교육을 뒷받침하는 학문의 위기를 포함하여 문화 위기, 지식위기가 그 뿌리가 되는 것이다. 미래의 정치인, 공무원, 법조인, 기업인, 언론인, 종교인, 사회운동가를 길러내는 교육문화의 위기, 학술문화의 위기, 운동권 문화의 위기가 그 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서, 경제와 재벌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비난하지만, 그 뿌리인 정치경제교육, 나아가 정치학, 경제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정치학의 위기, 경제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는 일반 대중이나 운동권은 물론 학계에서조차 극소수에 한정된 논의거리이다(위기의 시대에 대체로 그랬지만, 새로운 이론적, 사상적 모색은 그나마 고통을 겪으며 이론적 기득권에서 자유로운 학계 밖에서 더 활발한 편으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의 근대적 학교 공교육은 그 기본 '컨텐츠'(contents)가 철저히 서구적이다. 그나마 오랜동안 중등학교의 국어, 국사, 정치경제 등은 이른바 '국책과목'으로 정하여 국가권력이 국정 교과서를 만들어 교육을 강제해 왔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와 '지식중심사회'를 맞아 창의적 지식이 경제를 살리는 국부의 원천이라는 소리가 높다(경남 마산에서는 '정보화 사회와 창조적 지식은 국부의 원천'이라는 커다란 구호를 시 당국과 경남대학이 함께 육교에 써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유신시대에 도입된 국정교과서 교육독재체제는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하에서도, 21세기에 들어서도 이 지방에까지 여전히 남아 있다. 관청이나 대학 자신의 지식창조도 드물다.

'선진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전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이런 교육체제, 이 나라 고대와 중세에서조차 찾아 볼 수 없었던 체제유지 도구적 교육체제는 대부분 당연하게 받아들여 학부모들은 물론 그 가해자이자 희생자인 교육계나 시민, 사회운동에서도 전면적 관심사로 등장한적이 없다. 역대로 대학총장이 회장을 맡아 온 교총이나 전교조도 교사 정년단축 등을 두고 교육부에 대해 '교육공황'의 책임을 지라며 눈앞의 자기 이해와 관련해서는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학생들을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듯 하는 비인간적 교육 내용과 방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이제 도덕적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그나마 극소수의 일선교사들이 주체적으로 교재를 만드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최근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국정 [국사] 교과서의 위헌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 등이 드문 문제제기이다. 경제학계의 경우, 최근 한국경제학회 회장이 된 서울대
김세원 교수가 '국적없는 한국의 경제학과 경제 교육'에 대해 자기 비판을 한 것(매일경제, 2000. 2. 12)은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전세계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이 나라의 교육계, 학계 밖에서 [대학을 없애야 우리가 산다](이항규, 한겨레신문사, 1995)는 주장을 하는 것은 시민사회에서 대학에 대한 거대한 환상적 거품, 즉 '인식의 잉여'를 깨달아 가는 증거이다. 그리고 대학 내부에서도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김동훈, 바다출판사, 1999)는 파격적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글 머리에서 언급한 영화 '세기 말'의 부패한 대학 정치, 대학경제, 대학문화의 모습을 고백하는 한 형식이 될 것이다.

오늘날 '역사의 종말', '노동의 종말' 등 온갖 '종말론'이 무성하지만, 서양에서도 '교육의 종말'(N. Postman, The End Of Education, 차동춘역, 문예출판사, 1999)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의 종말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로 남아 있으며, 이것은 종말이 어떤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가, 어떤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시작인가라는 근원적, 사활적 물음을 남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하버드 출신의 현각 스님이 플라톤의 '동굴론'에 빗대어 개신교에서 출발한 하버드 대학이 또 다른 '동굴'이라는 것은, 이 나라가 하버드보다 더 캄캄한 '서울대의 동굴'을 벗어나기 위해 선진 서양 학문을 뒤쫓는 것은 또 다른 동굴로 들어가는 것임을 분명하게 일러주는 것이다. 아울러 '불교'나 '유교'도 교조화, 조직화하고, 기복신앙화할 경우, 종교문화적 잉여를 만드는 또 다른 동굴이 되고 종교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과 소외와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도 역사적, 사회적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바다.

4. '자치경세(自治經世)'의 '새 세상만들기'

근대의 사회과학에도 그렇지만, 근대 이전이나 이후 동서양 종교에도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있었다. 기독교의 '천년왕국(千年王國)' 사상이 그렇고, 불교의 '불국정토(佛國淨土)' 사상이 그렇다. 근대철학과 사회과학에 의해 '공산주의'라는 '과학적 유토피아'를 만드는 꿈이 참담하게 무너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기득권층이나 시민사회운동 모두 '개혁'에 매몰되어 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유토피아에 대한 소박한 꿈이 깊고 넓게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대표적으로는 '세상만들기'라는 담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TV오락 프로의 '좋은 세상만들기'에서부터 하이텔 동호회 '세상만들기'(go pchope), 이 책 이름인 '세상만들기'가 있으며, 이 책의 광고면을 보면, '세상만들기'(나우누리 go bangha)란 것도 있다. 기득권층이 이런 이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2월 18일 한나라당 공천자 명단이 발표되던 날, 경남 마산 합포구(필자가 사는 지역구이다)의 김호일 의원이 낙천에 제 정신을 잃고 하순봉 사무총장을 두들겨 패는 사진이 크게 실린 일간지는 이회창 총재와 웃으며 손잡고 있는 사진이 실린 김의원의 의정 보고서와 함께 배달되었는데, 그 제목은 '신명나는 정치, 살맛나는 세상만들기'였다.

자유의지와 법칙은 오랜 철학적 주제이지만, 우리 인간은 원하는 인간세상을 만들 수 있지만, 새처럼 자유롭게 만들 수는 없다. 자연적 절대조건에 순응하며, 사회역사적 조건을 인정하면서 만들 수밖에 없다. 자연적으로는 많은 자연자원이 고갈되어 가며, 경제가 침체되어야 환경이 살아나며, 이미 생태계가 위험한 정도를 넘어서 지구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에 의해 태평양의 투발루라는 나라가 통째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위기에 처한(동아일보, 2000. 2. 13) 믿기지 않는, 그러나 올 것이 오고 있는 기막힌 인류사적, 지질학적 위기의 시절을 살고 있다. 사회역사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살고 있으며, 분단된 종속국이라는 조건을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한에서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세상만들기는 '참선'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도'를 닦든지 누구나 자본주의를 심층적으로 해부하고, 실패한 혁명의 경험이 있는 맑스-레닌주의(-주체사상)를 피해 갈 수는 없다. 그 관문을 지나며 맑스의 자연관, 인간관, 혁명관 모두에 대해 점검하여 대안을 찾아야 이 야만적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넘어 진정으로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그런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잘 먹고 잘 살기에는 틀렸다. 단지 더불어서 생존이라도 영위하는 관문을 지나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은 앞서 논의에 비추어 인간과 사회의 모든 비리, 무리, 부조리를 포함한 불합리, 즉 잉여가 없는 사회이다. 그리고 개별 인간과 전체 사회 간에 어떤 차별적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과 사회가 등가적(等價的)인 '각립대동'(各立大同)의 세상이다(중국 근대화 초기, 강유위의 [大同書]의 근간이 되기도 한 '대동사상'의 고전적 내용은 유가(儒家)의 예기(禮記) 제9편 예운(禮運) 첫 머리에 있다).

이런 세상은 어떻게 만들 수 있으며, 어떻게 만드는 것이 마땅한가? 맑스-레닌이 혁명의 동력을 '신'의 심판과 구원이나 위정자의 도덕성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 자신, 대중에서 찾은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혁명의 주체와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조직화와 정치투쟁에 의지한 것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부르주아 혁명의 야만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혁명과정 자체의 불합리를 넘어서 새로운 혁명은 혁명의 주체와 대상을 통일하여 혁명 주체를 혁명 대상으로 삼는다. 정치제도의 혁명 이전에 그 주체인 '인간혁명'을 과제로 삼는 것이다. 동시에 혁명 대상이 혁명주체가 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따라서 '세상만들기' 혁명은 낡은 체제 속의 낡은 인간에 대한 교육과 자기교육, 교육과 상호교육을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만들기'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닌 인간존재가 스스로의 실제를 자각하여 '신성(神性)' 혹은 '불성(佛性)'이라는 인간존재의 자연성과 사회성이라는 존재성을 자각하고 회복하여, 욕망을 넘어서 객관적 이치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참되고 바른 사람의 길(人道)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에서 모든 강제와 대상에서 스스로 해방되기 위한 '자치(自治)'를 기본 강령으로 삼는다.

사회적으로는 교육적 가치가 없는 모든 것은 해체하며, 일차적으로 '자치'에 반하여 권력을 추구하며 국민을 지배대상화하는 중앙정부의 직업적인 '정치'와 '통치'는 없애야 한다. 심대한 인류사적 변화의 계기인 사이버 시대를 맞아 시도되는 '사이버 정치', '사이버 정당'이란 것도 실은 새 부대에 담는 낡은 술일 뿐이다. 대신에 국가적으로 행정과 사법기능과 조직만 남긴다. 이것은 맑스의 국가론에 대한 비판을 내표하는 것으로서, 국가가 억압기구화한 성격을 인정하지만 국각는 소멸될 수도 없고 소멸시켜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경제적 기득권 체제와 국가 주권은 구별해야 하며, 전자는 해체하되 이를 통해서 후자는 오히려 온전하게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국내적인 국민주권 실현만이 아니라, 인류사의 오랜 유산인 국가간 패권주의에 맞서 대외적으로 식민지.종속관계를 청산함을 의미한다.

개인 차원의 '자치'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회경제적 통치술로서 자본주의 역사 이래 반복되어 온 시장의 자유방임과 국가 규제(/특혜)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극복하되, 맑스주의의 국가적 계획을 부정하며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정부 주체의 방임과 규제, 계획 등의 관념에 매몰되어 있는 권위주의적 근대 서구경제학에서 '자치'란 개념은 교과서에서도, [경제학 대사전]에서도 아직도 없는 개념이다. 강수돌, [작은 풍요:삶의 자율성 회복을 통한 기업과 사회의 재구성], 이후, 1998은 '삶'과 '자율성'개념을 경제경영학 영역에서 전면에 부각시킨 국내의 선구적 예이다). 이는 시장경제, 상품화폐관계를 인정하되, 생산과정은 물론 유통, 소비, 금융, 소유 등 모든 영역의 잉여를 추구하는 시장경제가 아니라, 잉여없는 시장경제, 삶을 위한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이는 사이버 시대를 맞아서도 허영과 허욕에 따라 풍요로운 삶을 위한 잉여를 추구하고 이것이 오히려 생존 자체마저도 위협하는 거대한 자기모순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회경제적 자치는 어디에서 실현할 것인가? 맑스주의적 공장중심 현장관과 국가중심 사고방식을 넘어서 생존기반인 지역적 공간의 삶의 현장 도처에서 '지역자치'를 이루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나 농촌 모두 이웃간 조차 아무런 연관을 맺지 못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익명의 '세계시장'을 상대로 거래하는 분절적 소외의 양상을 인식하고 극복해야 한다. 생존과 거래 기반을 국내로 일대전환하며, 도시, 농촌 모두 마을 주민간 실명의 직거래 연관관계를 맺고 전통적인 넉넉한 공동체적 마을문화, 자주적 마을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경제적 지역자치는 지역 차원의 교육자치, 치안사법 자치, 행정자치 등을 확보해야 실질적, 종합적 '지역주민자치'가 가능할 것이다. 이런 지역자치는 지역 속에 있는 각종 직장, 사업 단위에서의 잉여없는 공동체적 자치 실현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사업장 자치는 지식집약적 정보통신(IT) 벤처 기업에서 흔히 보이는 바와 같이, 노동자와 자본가,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이분법적 일터 문화를 넘어서 생산수단 소유자이건 비소유자이건 상이한 직분에 따라 일하는 존재이며,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공동으로 투자한 '동업자 사원'으로서 '분업적 협업하는 존재'라는 실제 현실에 합당한 객관적 상호 인식의 기반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최근 널리 알려진 대로 다시 국가부도 위기가 닥쳐도 살아 남을 한국의 대표적 기업으로 평가받는 '미래산업'은 이런 길로 가는 도정의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정문술, [왜 벌써 절망하십니까], 1998). 이와 같이 형성된 전국 도처의 지역자치 사회가 연대하여 여러 단위 지역사회에 걸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이것은 자치기반 위에서 특정 지역주민이기도 하고 동시에 국민이기도 한 사회적 존재에 의한 국가 경영, 즉 경국(經國), 흑은 경세(經世)가 될 것이다. 한강, 낙동강 등 큰 강의 치수(治水)와 국도, 고속도로 등 사회기반시설 관리, 국가기간산업 경영 등은 당연히 그 주요한 의제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숙제로서, 생산수단의 소유문제도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해결해야 한다. 그 대강은 생산수단의 무차별적 국유화, 사회화가 아니라 노동생산물이 아니라 자연물인 '토지'에 대해서는 '공개념'을 전면적으로 심화, 확대하여 국민적 공동소유, 개별적 이용으로 하고, 제조업 등의 생산수단에 대해서는 당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되 과세를 통해서 부의 세습제를 자연스럽게 폐지하는 등의 합리적 정책이 남북통일에 대비해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새 세상만들기론' 혹은 '새로운 사회구성론'은 지난 '80년대에 요란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 각종의 '경제주의적 사회구성체'(economic social formation) 이론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앞서의 논의에서 자명한 것처럼 새로운 교육운동과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 가는 국민 대중적 '우리학문운동'을 내장한 차원 높은 문화 중심적 '새로운 사회운동'에 의해서만 실현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