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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외환보유고 국력 상징 아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정부는 미래 환란을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열심히 높여왔다. 99년말
현재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740억달러나 됐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 7대 외환보유국이 됐고, 절대액 기준으로는 미국과 프랑스를 앞질렀다. 이 정도의 외환보유액이면 쌓을 만큼
쌓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가 하면 아직도 부족하다는 주장도 있다.

앞으로 얼마나 외환을 더 비축해야 대다수 사람들이 충분하다고 할까. 지금 740억달러 외환보유도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앞으로 1000억달러를 더 쌓아도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국제투기 자본 규모가 무려 2조달러가 넘으니까 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외환비축에 대한 기존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한다. 외환보유만으로는 ‘제2 환란’을 해결할 수 없다.

미래 환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97년 환란 원인 중 두 가지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우리 정부가 외환비축과 환율운용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정부 수뇌부가 사안의 심각성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해 IMF와의 사전조율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살인적인 초고금리와 긴축재정을 내용으로 하는 IMF 관리체제를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여건이 악화돼 예상수익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한다. 특히 국내 주식에 투자했거나 단기대출을 제공한 금융투자자들은 경제사정이 나빠지면 자금을 즉각적으로 회수해 국내시장을 떠나려 한다. 이것을 감안했더라면 그 당시 1년 미만 단기외채규모가 계속 늘어나도록 놔두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와 단기외채 상환액을 고려해 외환보유액을 적절히 상향조정 했어야 했다. 당시 외환보유액은 고작 300억달러 정도밖에 안됐지만 단기외채는 무려 1000억달러가 넘었다. 경제 펀더멘털이 좋다고 낙관하고 있던 우리 정부 태도는 외국인 투자자들이나 환투기꾼들 에게는 환투기의 빌미만 제공한 셈이다.

우리나라는 국내 주요 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세계적 기준인 글로벌 스탠더드가 도입돼 있지 않다. 정부내 고위정책 결정과정과 재벌기업의 정책결정 과정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이상 외국 투자자들은 앞으로도 한국에 환란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본다. 환투기는 악덕 외국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수출기업, 그리고 일반 국민들은 수출증대를 위해 ‘저원화 정책’을 은근히 바란다. 그래서 원화가 조금 높은 수준에 있어도 균형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국내외 투기꾼은 바로 이 점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정치불안으로 인한 경제정책의 혼선은 환란을 초래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환율유동정책과 함께 단기외채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정도의 외환보유액을 유지함이 바람직하다.

비상시에는 외환관리체제를 바꿔야 한다. 외환당국은 단기투기 자금 유입을 규제하고 단기외채 비중을 줄이며 외환의 비상조달 채널을 구축해놓는 등 외환 비상 관리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외환보유액은 국부나 국력의 상징이 아니다. 때문에 외환을 무조건 쌓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높은 이자비용을 물어야 하는 외환보유액의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외환보유액이 미국보다 많다고 자랑할 것이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