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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설지공/경제경영

[경제인]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앨런 그린스펀 약력


1926년 뉴욕출생
1948년 뉴욕대 경제학과 졸업
1977년 콜럼비아대학 경제학 박사
1954년 타운젠트 그린스펀사 설립
1968년 닉슨 경제자문관
1974~77년 대통령 경제자문위 의장
1981~83년 사회보장개혁위 의장
1987년 FRB의장 취임, 이후 3연임
1997년 NBC기자 앤드리어 미첼과 결혼
하버드.예일.펜실베니아대 등 명예박사
토머스 제퍼슨 상 등 수상
2000년 FRB의장 4연임




2000년 1월 4일, 미 백악관 오벌오피스 기자회견장.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검고 굵은 안경테를 쓴 73세의 노인과 함께 회견장에 들어섰다. 이윽고 그 노인을 한번 바라보고 연설문을 읽었다.
"미국 경제를 성장궤도에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앞으로 할 일이 더 있다. 그의 지혜와 꾸 준한 리더십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확신을 안겨줬다 사실상 그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후보 반열에 오르지 않았다"

검고 굵은 테의 안경을 쓴, 그리고 회견내내 무표정의 이 늙은 노인은 이 기자회견의 주인공이자 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 Federal Reserve Board)의장인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 날 앨런 그린스펀을 위 말과 함께 FRB의 의장으로 유임시켰다. 이로써 앨런 그린스펀은 1988년 레이건대통령으로부터 FRB의장으로 지명된 이후 부시와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4년임기의 의장직을 4번이나 유임하게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이로써 그는 2005년 6월까지 미국경제를 다시한번 이끌게 됐다.
그린스펀의 유임이 발표되자 각계에서 이에 대한 논평이 잇따랐다.




"만약 그린스펀이 죽기라도 한다면 검은 안경을 씌워 사람들이 그의 사망을 모르게 한뒤 가능한 한 오래 의장직에 있도록 하겠다" - 존 메케인 상원의원(공화당)


"그린스펀의장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경제확장기의 설계사며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다른 선택이란 있 을 수 없었을 것"

- 프루덴셜증권의 이코노미스트 래리 워첼

이론따로 현실따로라는 복잡하고도 난해한 경제분야에서, 그것도 세계경제의 중심지인 미국경제의 최고책임자로 4번째로 지명되면서도 여야(민주/공화)와 경제전문가들로부터 이렇게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행복한 사나이 그린스펀.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린스펀은 1926년 뉴욕에서 주식중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집안분위기와는 달리 그가 애초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재즈 클라리넷. 그린스펀은 재즈 클라리넷 연주가가 되기위해 줄리아드 음대에 진학하여 클라리넷을 전공했으나 도중에 중퇴했다. 이후부터 그는 그의 일생을 바꾸어놓을 분야로 진출한다.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내친김에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대학졸업후 컨설팅회사로 사회생활을 시작, 1968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본부 경제자문을 맡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경제고문, 사회보장제개혁 전국위원장, 재무부 관리, FRB 고문을 거쳤다.



그린스펀의 업적


현재 미국의 경제지표를 통한 경제상황을 들여다보면 왜 이 칠순의 노인에게 엄청난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우선 경제성장률을 보면 99년 4/4분기 경제성장률이 5.8%를 기록하면서 99년 전체 경제성장률이4%선으로 기록되어 97년이후 3년연속 4%대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일자리가 200만을 넘어섰고, 실업률의 경우는 4.0%로 거의 완전고용상태인데다가 70년 1월의 3.9%이후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낮은 실업률과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의 척도라 볼 수 있는 GDP 디플레이터의 경우, 지난 4/4분기가 2%증가에 머물렀다. 경제성장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인플레이션 압력이 없어 경제학자들을 당황시켰다. 미 컨퍼런스 보드의 소비자 신뢰지수도 1월 줄 144.7까지 치솟아 68년 10월의 142.3을 넘어섰다. 미국민의 실질소득은 사상 최고수준에 이르고 주택건설과 소비도 기록적인 붐을 이루고 있다.주식시장도 기록적인 성장을 거듭, 나스닥지수와 다우지수가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소식은 연일 계속된다.


더구나 1998년 연방예산장부에는 700억달러(약 84조원)나 남아돌았다. 이러한 고성장, 저실업, 저물가의 호황이 1백7개월째에 들어서면서 지난 60년대의 황금기(61년 2월∼69년 12월)를 경신했다.


그러나 그린스펀이 처음 등장했을때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가 처음으로 FRB의장을 맡았을때인 1987년 주가가 하루 22%나 빠진 블랙 먼데이 사태가 벌어졌다. 거의 대공황의 분위기마저 나돌던 때였다. 풋내기 그린스펀도 엄청나게 당황했겠지만 이내 그는 안정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도록 함으로써 상황의 악화를 막았다.1996년 12월에는 주식 시장이 지나치게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고 사전경고함으로써 미국이 침체에 대한 우려 없이 경기과열에서 벗어나


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말 태국, 한국,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사태는 이어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번지며 세계경제 전체를 위협했다. 철옹성같은 일본경제의 악화는 급기야 세계공황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게 했다. 이러한 사태가 미국에까지 미쳐 주식시장은 하락추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7, 8월 두 달 사이에 주가는 20% 폭락했고 7월에 9200이던 다우지수가 9월에는 7400으로 곤두박질쳤다.


러시아에 집중투자했던 헤지펀드사인 롱텀캐피털은 파산위기에 몰렸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그린스펀의 FRB가 긴급구조에 나섰다. 우선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롱텀캐피털을 회생시켰고, 미국민을 최우선으로 하는 금융 정책을 추구해 왔으면서도 “미국만이 번영의 오아시스로 남을 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7주 동안 무려 세 번에 걸쳐 전격적으로(깜짝놀랄만큼) 단기금리를 낮췄다.

연방 채권 이율을 당초 5.5%에서 5.25%로, 다시 5%로, 또다시 4.75%로 떨어뜨린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곧바로 주식시장으로 이어져 주가가 바닥을치고 반전하기 시작했고 월가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세계경제가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벗어나는 결정적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말이 되자 다우지수는 여름에 잃었던 고지들을 모두 탈환하며 월가 역사상 가장 웅장한 대반격작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린스펀의 고집과 소신

1992년 대선전

- 부시 행정부는 선거를 의식, 그린스펀에게 통화량을 늘릴 것을 요구 - 거절



1993년

클린턴 금리를 낮춰 달라는 요구 : 거부.



1996년 대선전

클린턴 대통령이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통화량을 늘려 달라는 부탁 - 거절
("경기 과열 상태에서 그런 행동 을 할 수 없다")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추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을 무렵, 클린턴은 이 문제를 피해가고자 국정연설을 통해 선심성 공약을 내놓았다. 재정흑자분에서 대규모 사회보장 기금을 확보, 2조8,000억 달러를 향후 15년간 증시에 투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발표 후 클린턴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지도가 급등했다. 더구나 사회보장기금 정책에 대한 지지도는 80%에 이르렀다. 반면 미국의‘경제 대통령'인 그린스펀 FRB 의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린스펀은 미 하원 청문회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밝힌 사회보장기금의 주식투자 계획은 민간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정치적 개입의 여지가 있어 기업의 효율성과 경제적 번영을 침해할 수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정치 논리가 경제 위에 군림할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재정에 여유가 있다고 다 써버리면 향후 경제가 어려워질 때 정부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주장이다. 우선 사회복지에 쓰고 남은 돈으로 정부 빚을 갚아 나중에 대비해야 한다는 원칙론이라 할 수 있다.


인간 그린스펀


그린스펀은 98년에 세계적인 경제 일간지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세계적 금융위기의 불길을 적절한 금리인하로 잡는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96년에는 미 경제전문잡지 포천이 미국의 대표적 기업체 사장(CEO)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그린스펀의 지지율은 무려 96%에 달했다.


그린스펀은 자신에게 보고되는 보고서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자료를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린스펀과 그의 참모들은 무려 1만4000여곳에서 나오는 경제관련 자료들을 수집, 분석한다. 그중에서 그린스펀이 경제지표 관련 자료로 가장 애용하는 것은 주택건설업협회에서 발간하는 주택건설동향 자료. 전국 12개 지역의 준비은행으로부터 올라오는 지역경제동향 보고서도 꼼꼼히 탐독한다. 최근 소개된 한 방송에서 그는 매일 아침 두시간씩 목욕탕에 앉아 국내총생산(GDP)서부터 세탁물통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자료들을 분석한다고 한다. 이제 올해로 73세가 된 노인으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이렇게 뛰어난 자기관리와 인품으로 그는 유례없는 미국의 호황과 함께 미국경제대통령이라 불리우는 FRB의 의장을 4번씩이나 압도적인 지지로 맡게 한 것이다. 딱딱한 경제를 좋아하는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그린스펀도 환상적인 연애를 해서 세상을 따들석하게 만들었다. 1997년 70세인 그린스펀은 미 3대 방송국중 하나인 NBC 기자 안드레이아 미첼(52)과 12년 열애끝애 재혼, 화제를 모았다.

지난 1996년 12월, 활황을 타고 있던 미국증시에 대한 논평에서 그린스펀은 '비이성적인(irrational)활황’이란 짤막한 한마디를 했다. 미국증시는 하루아침에 폭락했고 이후 그린스펀의 발언에 따라 움직이는 증시를 두고 '그린스펀 효과'라고 부르게 됐다. 미국인들의 그린스펀의 4번째 연임은 그의 말대로 '비이성적인 선택'인가 아니면 '이성적인 선택'이었느냐는 그의 임기말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참조사이트
http://bmlee7.hihome.com/ (유쾌한 경제학)